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16)
일리아는 무릎을 세우고 두 팔로 끌어안았다. 몸이 노곤해지고, 수증기가 낀 듯 머리가 둔해졌다.
가만히 있으니 자연스럽게 오늘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함께 우산을 쓰고 오며 맞닿은 어깨가 아직도 뜨거운 듯했다. 일리아는 괜히 손을 들어 어깨를 문질러보았다.
다 씻고 나오자, 고용인들이 재빨리 머리를 말려주었다. 얌전히 시중 받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고용인이 곧바로 일리아를 찾았다.
“아가씨, 저녁 식사에 꼭 참석하시라는 마님의 전언입니다.”
“어머니께서?”
함께 식사하는 것은 간만이었다. 다들 바쁘다 보니 따로 먹을 때가 잦았고, 특히 헤인리와 사이가 틀어진 후로 일리아는 함께 식사하는 것을 피했다.
“알겠다고 말씀드려줘.”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한 옷으로 갈아입고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고 나니, 저녁 식사 시간이 왔다. 일리아는 침실을 나와 중앙에 위치한 만찬장까지 걸어갔다.
저택 본관은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중앙, 서관, 동관으로 나눈 이유는 단지 저택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동관 끝에서 서관 끝까지는 30분은 걸어야 했다. 그것도 길을 잘 안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다행히 일리아의 침실은 중앙에 있었기에 만찬장까지 그리 멀지 않았다.
만찬장에 도착하자, 고용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금테와 가죽을 덧씌운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샹들리에 아래에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기다란 테이블이 자리해 있었다.
비단이 깔린 테이블에는 은촛대와 싱싱한 과일, 생화로 장식한 그릇이 놓였다. 만찬장 벽에는 수백 년 된 명화가 빼곡했다. 일리아는 화려한 만찬장을 둘러보지도 않고, 곧바로 한곳으로 걸어갔다. 테이블 끄트머리에 가족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왔구나.”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상석에 앉아 있는 블로든 백작이었다.
“제가 늦었나요?”
“아니다. 딱 맞춰 왔구나.”
백작이 헤인리의 맞은편 빈자리를 가리켰다. 일리아가 자리에 앉는 것과 동시에 만찬이 시작되었다.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들이 순서대로 그릇을 내려놓았다. 가벼운 애피타이저만 해도 다섯 가지가 넘어갔다. 거기다가 개인의 입맛에 맞춰 간을 전부 다르게 한 것들이었다.
오늘 온종일 돌아다녀서 그런 걸까, 배가 고팠다. 일리아가 음식을 먹는 동안, 백작과 비올레, 헤인리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누가 먼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낼지 눈짓한 끝에,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요즘 신선한 작품이 없어서 고민이에요. 하나가 뜨면 우르르 따라하니.”
백작이 한숨과 함께 화제를 꺼냈다. 블로든 백작은 유명 미술관의 관장이었다. 사업은 체질이 아닌지라 부인인 비올레에게 모두 맡기고, 대형 갤러리와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주로 하는 일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전시회를 열며 작품을 파는 것이었다. 예술은 웬만한 사업보다 돈이 되었다. 하지만 백작은 정말로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돈을 벌기보단 인재 양성에 힘을 썼다.
“기막힌 신인이 나오면 좋을 텐데. 지금은 고이다 못해서 썩었으니.”
그가 푸념하자, 비올레가 말을 거들었다.
“저도 요즘 사업체가 많이 늘어나서 힘드네요.”
비올레는 우아하게 고기를 자르고 있는 헤인리에게 물었다.
“헤인리, 언제쯤 이 엄마를 도와줄 거니?”
“그래, 돈도 못 버는 공직은 때려치우고 빨리 가업을 물려받거라.”
백작이 부추기자, 헤인리가 소리 나게 식기를 내려놓았다.
“싫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는 지금 일이 마음에 듭니다.”
“그럼 누가 사업을 물려받는단 말이냐.”
정작 사업이 맞지 않아 부인에게 떠넘긴 백작이 우는 소리를 했다.
가만히 대화를 듣던 일리아는 포크만 만지작거렸다. 사업에 관심이 있지만, 해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씩 부모님을 도울 일이 있었으나 그것으론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 단순히 하고 싶다는 이유로 가업을 덜컥 맡을 수는 없었다.
‘파혼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진지하게 의논해볼까.’
“그리고 일리아 너는…….”
대화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일리아 쪽으로 넘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꽂히자,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요즘 그…… 에반테온 소공자는 잘 만나고 있니?”
백작의 질문에 일리아가 입가를 닦고 대답했다.
“오늘도 만나고 왔어요.”
“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데, 어쩌다가 만나게 된 것이지?”
“연회에서 서로 첫눈에 반해버렸어요.”
일리아는 냉큼 카르한과 미리 입 맞춰둔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나도 네 엄마에게 첫눈에 반했으니 이해한다. 어디가 좋았는지 들어보고 싶구나.”
그 흉악한 카르한 에반테온에게 좋은 점이 하나라도 있냐는 뜻이 담긴 물음이었다.
일리아는 고민했다. 당장 생각나는 장점은 제법 많았다. 착하고 성실하고 뻐기지 않고……. 그중에서 굳이 꼽자면…….
“다정한 점이요?”
쨍그랑, 하고 그릇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모두의 시선이 헤인리 쪽으로 향했다. 헤인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그릇에 떨어진 스푼을 집어서 옆에 내려놓았다. 비올레가 다시 일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리고 또?”
“착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에요.”
진심이 담긴 대답에 세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큰일 난 것 같았다. 일리아가 소공자에게 세뇌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소문이 좀…… 그렇지만, 사실은 좋은 사람이에요.”
좀이 아니라 많이 나쁘긴 한데, 실상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다. 답답한 면이 있긴 하나, 귀족 사회에서 그만큼 훌륭한 성품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공작가의 후계자인가 싶을 정도였다.
남들은 다 오해해도, 제 가족들만큼은 진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일리아는 생각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안심시켜주려고 한 말이었으나, 도리어 그들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졌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막막한 수준이었다.
리하트가 너무 개차반이라 상대적으로 좋아 보이는 게 아니냐고, 백작이 비올레와 헤인리에게 눈짓했다. 리하트 이야기를 꺼낼지 말지 고민하던 중, 비올레가 먼저 나섰다.
“그럼 이제 리하트와 헤어진 이유를 이야기해주겠니.”
그 말에 일리아가 멈칫했다. 헤인리까지 모두 모였으니 이제 이야기해줄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는 에반테온이라는 든든한 방패도 얻었다. 더 이상 숨기기도 어려우니, 일리아는 가족들이 최대한 흥분하지 않도록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도 화를 낼 것 같았다.
한참 입술을 달싹이던 일리아가 사실대로 말했다.
“리하트가 바람을 피워서요.”
순간 만찬장이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세 사람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 내 칼 가져와라!!”
“당장 마차를 대기시켜! 테르시안 후작가로 가자!”
비올레와 백작이 연달아 소리쳤다. 헤인리는 아무 말 없이 이미 나이프를 손에 쥐고 있었다. 예상했던 반응에 일리아가 말했다.
“다들 진정하세요.”
“일리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말 안 했니!”
비올레가 울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일리아는 지그시 입술을 다물었다. 말한다고 해서 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으면, 이미 말했을 것이다.
아무리 블로든 백작가가 대단한 재력을 거머쥐고 있다 해도, 상대는 더 큰 권력을 쥔 후작가였다. 금전적으로 보복하면 황실과의 연줄을 이용해 앙갚음할 것이 분명했다. 특히 테르시안 후작이 오라버니의 상사이니,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앞뒤 생각하지 않고 저를 위해 나설 터였다. 무슨 손해를 보든지 말이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말하기 껄끄러웠던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 그리고 오라버니께 상처를 줄까 봐요.”
조용히 흘러나온 말에 다들 씩씩거리던 것을 멈추었다.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반대하긴 했지만, 가족들은 일리아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대가 바람을 피웠으니 일리아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상처였다.
“다들 약혼식 전부터 말렸는데, 제가 결혼하고 싶다고 우긴 것이기도 하니까요.”
일리아는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었다. 가족들에게 더 이상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도움을 받더라도,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제가 해결하고 싶어요. 죄송해요.”
일리아가 고개를 숙이자 다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어서있던 그들이 스르륵 자리에 앉았다.
“네 잘못이 아니지 않니.”
“그래, 네가 잘못한 것은 없으니 사과하지 말거라. 우린 언제나 네 편이니까.”
복잡한 표정을 짓던 비올레와 백작이 연달아 말했다. 마지막으로 헤인리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리하트 그놈은 파혼해주지 않으려고 하지만, 에반테온 소공자가 도와준다고 했어요.”
“……도와준다고?”
“네. 리하트도 에반테온 공작가 눈치를 보느라 함부로 저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거고요.”
계약 연애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지만, 이 정도는 괜찮을 터였다.
가족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지금까지 리하트와 카르한을 저울에 두었을 때, 비등비등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카르한 쪽으로 우세하게 기울어졌다. 세 사람은 갑자기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렸다.
“또 일리아가 좋다고 하니까…….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뭐, 우리가 나섭시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군요.”
의논을 끝냈는지, 그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헤인리가 일리아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리하트 문제는 네게 맡기마. 대신 정식으로 파혼한 이후에는 우리도 적극적으로 나설 테니, 말리지 마라.”
“알겠어요.”
파혼까지 하고 나면 그때는 복수뿐이었다. 일리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헤인리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가 직접 봐야겠다.”
뭘……?
일리아가 헤인리를 올려다보자, 은테 안경 너머로 그의 눈이 차갑게 타올랐다.
“에반테온 소공자를 집으로 초대하거라.”
***
형체를 알 수 없게 된 물건이 카펫 위에 널브러지고, 술병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리하트는 폐허나 다름없어진 방에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을 힘껏 깨부순 탓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끓어오르는 화를 잠재우기 위해 술도 마시고 분이 풀릴 때까지 기운을 쏟아봤지만, 기분이 전혀 나아지질 않았다.
리하트는 그나마 멀쩡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만히 있으니 자연스럽게 잊고 싶은 기억들이 쏟아졌다.
어제 리하트는 일리아를 만났다. 하나부터 열까지 확연히 달라진 일리아의 태도가 너무나 낯설었다. 마치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리하트는 최후의 방법까지 사용했다.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것이었다. 자존심 상했지만, 이 방법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일리아도 저를 받아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태도를 바꾸지 않은 일리아는 파혼을 요구했다.
리하트는 파혼해줄 수 없다고 우기며 끝까지 버텼다. 결국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미쳤다고 파혼해주겠냐고.”
리하트는 제 발치까지 굴러온 술병을 걷어찼다. 벽에 부딪힌 술병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다. 리하트는 씨근덕거리다가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어떤 노력을 했는데…….”
일리아가 저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었다. 그가 만들어낸 결과였고,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부단히 공을 들였다. 마음을 다 잡아 놓은 줄 알았는데, 겨우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수천 번도 더 후회했다. 그 여자를 집까지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결혼식을 치를 때까지는 얌전히 있을걸.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자꾸만 곱씹었다. 그리고 항상 후회의 결말은 스스로를 두둔하는 것이었다.
“바람 정도는 다들 피우잖아. 고작 그 정도로…….”
사교계가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는지 아느냐며, 리하트는 다시 씩씩거렸다.
그저 억울했다. 남들 다 하는 것을 일리아가 예민하게 받아들인 탓이었다. 이렇게까지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 번 정도는 넘어가줄 법도 한데, 매정하기 그지없었다.
리하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입고 있는 값비싼 옷과 장신구, 신발……. 전부 일리아가 준 것들이었다. 이미 그는 이 달콤한 생활에 중독된 후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빼앗길 수 없었다.
“빌어먹을.”
가족들이 파혼에 대해 알기 전까지 다시 일리아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얼마 남지 않은 결혼식을 무사히 치를 수만 있다면…….
리하트는 신경질적으로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역시 카르한 에반테온이 거슬렸다.
-정말 운명이란 게 있나 봐요. 이번 연회에서 서로 첫눈에 반해버렸거든요.
그런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리하트는 일리아의 말을 믿지 않았다. 수상쩍은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할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낯선 이들을 경계하고 의심했다.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 때문에 그렇다고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분명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다. 그걸 알아내면 일리아와 카르한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에반테온 소공자 쪽을 조사해봐야겠어…….”
약점이라도 잡으면 더 좋고. 리하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외출할 테니, 마차 대기시켜!”
고용인들이 부산스레 움직이는 사이, 리하트는 빠르게 나갈 채비를 마쳤다. 기분 전환을 위해 쇼핑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마차를 타고 나온 그는 자주 들르던 옷가게로 향했다. 일리아의 소유였기에, 돈 한 푼 없이도 쇼핑이 가능했다.
가게 앞에 도착하자, 점원이 먼저 문을 열고 나왔다. 저를 반겨주는 거라고 생각했으나, 뜻밖에도 점원은 리하트를 막아섰다.
“비키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앞으로 테르시안 가문 사람들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뭐?!”
리하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들어갈 수 없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한참 실랑이가 이어졌다. 급기야 경비대를 부르겠다는 점원의 말에 리하트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욕설을 내뱉은 리하트가 뒤돌아섰다. 분명 일리아가 손을 쓴 것이었다.
“가게가 하나뿐인 줄 알아?”
더 좋은 가게를 찾아가면 그만이라며 그가 씩씩댔다. 그러나 한 곳, 두 곳…… 문전박대 당하는 가게가 점점 늘어났다. 이 근방의 괜찮은 가게들은 전부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거리를 전전하던 리하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까지는 제 얼굴만 보면 다들 발 벗고 나와 굽실거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돈을 쓰겠다는데도, 아무도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다.
목이 탄 리하트는 음료라도 마시려고 가게를 찾았다. 단골이니 여기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재료가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리하트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개소리 하지 말라고 멱살을 붙잡아도 가게 주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경비대를 부르겠다고 뻔뻔히 나왔다.
“젠장맞을!!”
리하트는 결국 뒤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씨근덕거리며 거리를 걷다가 거리 한복판에 멈춰 섰다. 수많은 가게들을 바라보던 그는 깨달았다. 이 많은 가게들 중에서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가게는 하나도 없다는 걸.
***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던 카르한은 서신 하나를 받았다. 카르한은 서신을 읽다가 그대로 굳어졌다. 뒤에서 다른 일을 하던 테시온이 그에게 다가섰다.
“무슨 서신인데 그러십니까?”
카르한이 말없이 테시온을 바라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무척 심각해 보였다.
“제가 읽어 봐도 되겠습니까?”
테시온은 서신을 건네받았다. 잠시 후 서신을 읽은 테시온도 그와 마찬가지로 굳어졌다. 서신은 일리아가 보낸 것이었다.
[가족들을 소개해주고 싶은데, 블로든 저택에 와주실 수 있을까요? 초대하고 싶어요.]테시온은 심각한 얼굴로 서신을 내려놓았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너무 빨랐다.
환불이라는 산을 넘었더니, 더 큰 산이 남아 있을 줄이야……. 테시온은 벌써부터 근심걱정으로 가득한 카르한을 힐끔 보았다.
“어차피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혼기가 꽉 찬 두 사람이 만났으니, 가족 소개는 당연히 따라오는 일이었다.
“제가 답신을 보낼 테니, 일단 선물을 사러 가는 게 좋겠습니다.”
첫인상으로 점수 따기는 어려우니, 선물 공세라도 해야 할 듯했다.
그 길로 두 사람은 번화가로 나왔다.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살지 눈여겨보았다. 하지만 마땅히 눈에 차는 것이 없었다.
“……다 가지고 있을 텐데.”
“성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래도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 않느냐고, 테시온이 말했다.
열심히 가게를 들락날락하던 중, 카르한은 제법 마음에 드는 상품을 발견했다. 그리고 물건을 들자마자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귀퉁이에 블로든 가문 인장이 찍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역수입은 좀 곤란했다.
그 다음으로 괜찮아 보이는 물건을 집었는데, 델로타 가문 인장이 박혀 있었다. 경쟁사 물건을 선물로 주는 것도 눈치 없어 보였기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한참 물건을 고르는데, 새삼 블로든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게 되었다. 손 뻗치지 않은 사업이 없어 보였다.
마음에 드는 것을 찾지 못한 카르한과 테시온은 작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게로 들어갔다. 술을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였다.
“술도 괜찮은 선물이지요.”
정작 카르한은 술을 마시지 않지만, 연회에서 일리아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보았다. 고민 끝에 카르한은 술을 선물해야겠다고 결정 내렸다.
가게 주인이 카르한의 주위를 맴돌았다. 차마 말은 걸지 못하고 눈치만 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이 상황이 불편해서 빠르게 용건을 처리했을 테지만, 이왕 선물하는 것이니 좋은 것으로 주고 싶었다. 카르한은 환불 경험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었다.
“……제가 술은 잘 모르는데, 추천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가게 주인이 반색하더니, 곧바로 설명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카르한은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한참 후 가게를 나왔을 때, 카르한의 손에 술병이 네 개나 들려 있었다.
어쩌다 보니 좀 많이 사긴 했는데……. 사려고 마음먹은 걸 샀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그래도 다음엔 거절하는 법을 배워두면 좋겠다고, 카르한은 생각했다.
가족들을 위해 건강식품도 사고, 꽃다발도 구입했다. 카르한이 쇼핑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테시온은 감격했다. 똑 부러진 구매는 아니었으나, 이 정도면 정말 많은 발전을 이룬 것이었다. 테시온은 속으로 일리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성공적이었던 쇼핑이 끝나고, 다음 날. 마침내 블로든 저택을 방문하는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조언대로 밝은 색 계열의 옷을 입었다. 분홍빛이 도는 셔츠가 검은 머리카락과 대조되었다.
평소에는 사람들이 카르한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놀란다면, 지금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놀랄 정도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기운을 조금 낮추시면 좋겠지만…….”
테시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흉흉한 기운을 완전히 걷어낼 수가 없었다. 전장을 오랫동안 누빈 만큼 본능적인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선물을 싣고 마차에 올라탔다. 긴장한 것인지, 카르한은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마차는 어느새 블로든 저택 부지로 들어섰다. 창문을 통해 바깥을 구경하던 테시온이 감탄했다.
“역시 블로든 가문이군요. 정원이 이렇게나 넓다니.”
수도에 위치해서 땅값도 비쌀 텐데,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그 대단한 에반테온 공작저조차 한 수 접고 갈 정도였다.
“곧 있으면 저택이 보일 것 같습니다.”
테시온이 흥분에 가득 차서 떠들어댔다. 그때, 바깥에서 마부가 소리쳤다.
“이제 정원 입구 통과하겠습니다!!”
……?
테시온과 카르한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평선을 바라보듯 끝없는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블로든 저택 정원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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