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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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테온 마차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으로 내려가자, 마차에서 막 내리는 카르한과 테시온이 보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벌써부터 지쳐 보였다.
“어서 와요.”
일리아의 인사에 테시온이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끝이 없었습니다.”
“뭐가 끝이 없어요?”
“바다를 풀로 메우면 블로든 저택 정원이 되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일리아는 어느 정도 동감했다. 가끔씩 저택 대문까지 가는 데 한참 걸려서 답답할 때가 있었다.
“그래도 저택이 정원 중앙에 있어서 다행이죠. 끄트머리에 지었으면 두 배로 걸렸을 테니까요.”
일리아의 대답에 테시온은 질렸다는 듯 진저리쳤다. 그리고 카르한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르한이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일리아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꽃다발을 받았다.
“고마워요. 너무 갑작스러웠죠?”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는데…….”
일리아는 가족들을 뜯어말렸으나,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두 눈으로 직접 카르한이 괜찮은 사람인지 확인하길 바랐다.
이전에 리하트를 소개해줬을 때가 떠올랐다. 거의 취조에 가까운 만남이었다. 언변이 뛰어난 리하트마저도 잔뜩 질린 얼굴로 돌아갔었다. 그 후로 리하트는 블로든 저택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들어오세요.”
일리아가 먼저 걸음을 떼자, 테시온이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그 두 사람은…….”
벌써 정이 들었는지, 테시온은 자연스럽게 프란체와 말렉을 찾고 있었다.
“아마 연무장에서 검술 연습을 하고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부를까요?”
“아닙니다. 제가 연습을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테시온은 괜찮다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일리아와 카르한 테시온은 저택 현관문을 통과했다. 어마어마한 현관 크기에 카르한의 어깨가 살짝 굳어졌다.
“아참, 부모님과 오라버니는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는데, 그동안 집 구경이라도 할래요?”
일리아의 제안에 카르한과 테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는 천천히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테시온은 벽에 쭉 걸린 명화를 보고 감탄했다. 미술에 관심이 많은 그로서는 웬만한 미술관보다 블로든 저택이 더 대단하게 보였다.
“아, 이 그림 유명하지요.”
테시온이 어느 그림을 보고 잠깐 멈춰 섰다.
“저희 집에도 있습니다.”
웃는 여인의 초상화였다. 몇백 년 전 천재 화가라고 불리는 지그리스가 그린 그림으로, 워낙 유명한 탓에 모조품이 판을 쳤다. 그중에서 이 그림은 유독 정교한 모조품으로 보였다.
“그래요? 지그리스가 똑같은 그림을 두 장이나 그린 줄은 몰랐네요.”
“……진품이란 말입니까?!”
충격 받은 테시온이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께서 미술 쪽에 관심이 많으셔서요.”
“세상에…….”
저 그림 한 장에 수백만 크로엘은 족히 할 거라며, 테시온이 떠들어댔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카르한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뒤늦게 정신 차린 테시온이 제 입을 때렸다. 안 그래도 어마어마한 정원을 보고 기가 죽었는데, 더 죽일 수 없었다.
“에반테온 공작가에도 훌륭한 미술품이 많지요.”
카르한의 기를 세워주기 위해서 테시온은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블로든 가문 앞에서 재력을 자랑하는 것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테시온은 입을 다물었다.
집 구경을 하던 카르한과 테시온은 블로든 저택의 화려함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원석을 깎아 만든 석상, 온실 정원, 황금으로 도배된 방, 국립도서관처럼 큰 서재. 분명 저택 안인데, 여행이라도 온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구경시켜주던 일리아는 그제야 카르한을 약속 시간보다 일찍 부른 이유를 꺼냈다.
“가족들을 소개해주기 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지금 이 상태로 카르한과 가족들이 만나면…… 조금 곤란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던 일리아가 입을 뗐다.
“저희 가족은 조금…… 성격이 특이해요.”
벌써부터 긴장하는 카르한의 모습에 일리아는 미안해졌다.
“어머니는 철혈의 여인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엄격하고……, 아버지는 그나마 상대하기 편할 거예요. 예술 이야기 하면 좋아하세요.”
일리아는 간단하게 가족들에 대해 설명했다.
“오라버니는 저랑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라 특히 주의해야 할 것 같아요. 예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 말투가 조금 뾰족한 편이라서…….”
“……명심하겠습니다.”
“질문이 들어오면 될 수 있는 한 제가 대답할게요.”
카르한은 약간이나마 안도했다.
“아가씨!”
저 멀리서 고용인이 달려왔다.
“모두 기다리고 계셔요.”
부모님과 헤인리가 돌아온 것이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힐끔 쳐다보았다. 눈동자가 방향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긴장하지 말라고 하면 더 긴장하겠지.’
일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세 사람은 고용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어느 방 앞에 도착했을 때, 일리아는 멈칫했다.
“정말 여기에 계신다고……?”
일리아는 보기 드물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카르한과 테시온은 일리아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했다.
“너무 놀라지 말아요.”
가벼운 경고와 함께 문이 열렸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방 내부가 드러났다.
“…….”
카르한과 테시온은 왜 일리아가 멈칫했는지 알 수 있었다. 사방에 검이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벽에 열을 맞춰서 걸려 있는 것이,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장검 아래에 두 손을 깍지 채 앉아 있던 비올레가 입을 열었다.
“오셨군요.”
순간 카르한은 자신이 적장의 막사에 들어온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나올 줄이야…….’
일리아는 잔뜩 굳어진 카르한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비올레가 수집한 칼을 전시해둔 방이었다. 비올레의 친정은 무로 유명한 가문이었는데, 그녀 또한 오랫동안 검술을 연마했다. 재능과 뜻이 있어서 한길만 열심히 팠건만, 안타깝게도 여검사는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있었다.
그녀는 지독히 현실주의자였다. 미래가 뻔히 보이는 일을 계속 붙들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비올레는 마을 축제에서 첫눈에 반한 블로든 백작과 결혼해 사업을 이어받았다.
다행히 비올레는 사업에 재능이 있었다. 덕분에 곰처럼 귀여운 남편과 토끼 같은 자식들을 키우며 검술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다만 이 방은 이루지 못한 꿈을 재현한 곳이었다. 가끔씩 비올레는 이곳에서 검을 골라, 떨어지는 낙엽을 조각내곤 했다.
“반갑군요. 클리프 블로든입니다. 제가 일리아의 아버집니다.”
일리아와 전혀 닮지 않은 백작이 아버지라는 것을 강조했다. 닮은 것이라곤 금발과 보라색 눈동자가 전부였다. 그는 카르한만큼 덩치가 컸으나, 근육보다는 살집에 가까웠다. 마치 솜을 많이 쑤셔 넣은 곰인형 같았다.
“처음 뵙겠어요, 소공자. 저는 비올레 블로든이에요.”
일리아와 판박이인 비올레가 인사를 건넸다. 짙은 금갈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그녀가 연녹색 눈동자를 깜빡였다. 부드러운 인상을 보면 일리아가 누구를 닮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올레를 똑 닮은 헤인리가 은테 안경을 추어올리며 짤막하게 인사했다.
“헤인리 블로든입니다.”
그들의 인사가 끝났을 때 카르한은 잠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일리아는 얼어붙은 카르한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뒤늦게 정신 차린 카르한이 꾹 다물린 입매를 열었다.
“……카르한 에반테온입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떨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리아의 가족들은 그가 긴장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도리어 눈빛을 교환하며 첫인상에 대해 토론했다.
소문만큼 흉흉한 인상인데요?
내가 지금까지 칼을 맞댄 이들 중에서 가장 위험해 보이네요.
제가 뭐랬습니까, 위험한 남자입니다.
눈으로 의견을 나눈 그들은 다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앉으세요.”
일리아는 빈자리를 확인했다. 두 개의 의자는 각각 떨어져 있었다. 분명 연인을 소개해주는 자리였는데, 두 사람을 떼어놓는 배치였다. 일부러 그랬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리아는 모른 척하며 고용인에게 말했다.
“의자를 붙여주겠어?”
고용인이 다른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의자를 옮겼다. 일리아와 카르한이 나란히 자리에 앉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카르한은 늘 그렇듯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일리아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나 당황한 카르한은 처음이라는 것을.
그나마 당황하면 미간을 찌푸리는 버릇을 고쳐서 다행이었다.
“……선물이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 고민하던 카르한이 입을 뗐다. 뒤에 서 있던 테시온이 앞으로 나서서 테이블 위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고급 술과 호불호가 없는 건강식품이었다. 썩 나쁘지 않은 선물이었으나, 그들의 심보는 단단히 뒤틀려 있었다.
“건강을 잃고 다시 챙기라는 의미군요.”
독설가로 유명한 헤인리의 말에 카르한의 눈썹이 흔들렸다.
“흠흠, 어제부터 술을 끊어서.”
클리프가 말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비올레가 입을 열자, 일리아가 재빨리 말을 낚아챘다.
“제가 다 먹을 거예요.”
어머니까지 말하면 카르한은 만신창이가 될 터였다. 이렇게까지 치졸하게 굴 줄은 몰랐다.
“전부 제가 좋아하는 걸로 사온 거라서요.”
일리아의 발언에 세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새로 주문해주마.”
일리아는 됐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결국 세 사람은 마지못해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잠깐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고용인이 차를 내어왔다. 다들 찻잔을 앞에 두게 되었을 때, 비올레가 물었다.
“연회장에서 첫눈에 반했다고 들었어요.”
“예.”
“우리 아이의 어떤 점이 좋았는지 궁금하군요.”
벌써부터 어려운 질문이 들어왔다. 일리아는 조금 초조해진 눈으로 카르한을 힐끔거렸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깔았다.
모두가 카르한의 대답을 기다렸다. 일리아의 가족들은 어떤 대답이든 꼬투리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카르한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클리프와 비올레, 헤인리가 눈을 깜빡이는데,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미소가…… 예뻤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일리아를 제외한 이들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고 늘어질 구석 없이 깔끔한 대답이었다. 다행히 1차 시험은 합격이었다.
일리아는 속으로 땀을 흘렸다. 가짜 연인을 소개하는 자리가 이렇게까지 긴장될 줄이야. 기습적인 어머니의 함정에 카르한이 정답을 말해서 다행이었다. 연애 서적을 잔뜩 사다 안겨준 보람이 있었다.
카르한의 대답을 들은 백작부부는 아주 조금 누그러진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방심하기는 아직 일렀다.
“…….”
클리프와 비올레, 헤인리는 서로 눈짓했다. 저번에 일리아가 말하기를, 카르한의 다정한 점이 좋았다고 했다. 심지어 착하고 예의 바르단다.
리하트를 처음 데리고 왔을 때도 일리아는 ‘상냥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초대형 콩깍지가 씌었구나 싶었다. 그들은 이 자리에서 일리아의 콩깍지를 벗겨주고 싶었다.
리하트 때처럼 일부러 까칠한 질문을 던져서 카르한의 본성이 드러나게 하고 일리아와 헤어지게 만들 계획이었다. 시선 교환을 끝내고, 헤인리가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전장에 오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카르한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의 시간이었다. 만나자마자 무슨 그런 주제를 꺼내느냐고 일리아가 눈총을 주었다.
“별 뜻은 없습니다. 불편하시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사적인 감정이 아주 꽉꽉 들어가 있음에도 헤인리는 뻔뻔히 거짓말했다.
이 질문을 던지는 까닭은 단순했다. 수많은 무인들은 자신의 무용담을 떠들어대길 좋아했다. 아무리 겸손한 척하는 사람들도 판이 깔리면 허세를 부렸다. 일리아가 그걸 직접 듣고 환상이 깨졌으면 하고 바랐다.
“전쟁은……, 자원한 것이었습니다.”
카르한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오래전, 카르한의 가족들은 그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우길 원했다. 특히 장남이자 카르한의 친형인 블레어드는 어릴 적부터 그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했다. 숨 막히는 집안은 카르한에게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결국 그는 반쯤은 떠밀려서 전장에 자원입대 했다. 그때 카르한은 성년식도 치르지도 못한 소년이었다.
“제가 있었던 곳은 제국 변방의 분쟁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도로 돌아온 후로 잊고 있던 기억들이 다시 살아났다.
살아 있음에 안도했던 날들. 어제 제게 말을 걸어주었던 이를 다음 날 제 손으로 땅에 묻은 일.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곳에서, 서툴게나마 표현하던 감정은 더욱 사라졌다.
“별로 재밌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전쟁터니까요.”
헤인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허풍을 떨어댈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조사해본 결과 카르한은 전쟁터에서 오래 있었고, 제법 공을 세웠다고 들었다.
자랑스럽게 무용담을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말을 아끼는 건가? 표정이 워낙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헤인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침착하게 말을 골랐다.
“사실 저희는 소공자의 소문이 신경 쓰입니다.”
헤인리는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세간에서 카르한의 평판은 무척 나빴다. 특히 전장의 살인귀라는 소문이 가장 유명했다.
하나뿐인 여동생의 새로운 남자친구가 살인귀라니! 두 사람의 교제를 인정하기 전,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카르한이 입을 열기도 전에 뒤에 서 있던 테시온이 대답했다.
“외람되나,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테시온에게 향했다. 바짝 긴장한 테시온은 이 상황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카르한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차단하기 위해, 일부러 소문을 막지 않았다. 거의 기정사실이 되었으니, 일리아의 가족들이 소문을 언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떠도는 소문은 사실이 아닙니다. 전장에서 공을 여러 번 세우신 일이 와전되었을 뿐입니다. 소공자께서는 제 목숨도 구해주셨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수백 명을 구했다고 테시온이 주장했다. 그 말에 헤인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사실인지 아닌지 증명할 수 없었지만, 얼굴만 봐서는 거짓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렇군요. 그런 공로가 있으니, 장군이나 기사단장까지 오르셨겠습니다.”
“아닙니다. 장교로 전역했습니다.”
카르한의 대답에 모두가 당황했다. 수백 명을 살렸다면서……?
심지어 수많은 전장에서 활약해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러나 장교는 하급 귀족도 손쉽게 올라갈 수 있는 직급이었다. 그의 유명세에 비해 무척 보잘것없는 보상이었다.
무슨 목적이 있었나 의심스럽긴 했지만 더 캐묻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호구가 아닌 이상, 알아서 다른 보상을 챙겼을 터였다.
헤인리의 질문이 끝나고, 비올레 차례가 왔다.
“소공자께서도 아시겠지만, 우리 딸은 이제 결혼을 생각해야 할 나이지요.”
부모로서 이런 부분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며, 비올레가 양해를 구한 후에 질문했다.
“소공자는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교제한 지 얼마 되었다고 그런 질문을 하느냐며 일리아가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혼 적령기인 만큼 혼사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결혼을 전제로 연애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생각은 있습니다.”
카르한의 느릿한 대답에 가족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리고 비올레가 다시 질문하려고 했다.
그때 일리아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가볍게 째려보는 시선에 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묻고 싶은 말은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나, 더 물었다간 일리아가 화를 낼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음을 확인한 클리프가 먼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만찬을 준비하라 일러두었습니다. 이만 자리를 옮길까요?”
모두가 방을 빠져나와, 만찬장으로 향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나란히 서서 먼저 걸어갔다. 뒤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클리프와 비올레, 헤인리는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첫인상은 무서웠지만……, 그래도 리하트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요. 말투도 정중하고.”
“우리가 쓰레기만 봐서 기준이 너무 낮아졌는지도 모르죠.”
“아버지, 방심하기는 이릅니다.”
카르한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헤인리가 가볍게 핀잔주었다. 그래도 입을 때려주고 싶은 뺀질이보다 진중하고 과묵한 놈이 낫다는 평을 내렸다.
“저희 가족…… 좀 극성이죠? 괜찮았어요?”
가족들보다 먼저 앞서가던 일리아가 카르한에게 조용히 물었다.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카르한은 솔직하게 말했다.
“……무서웠습니다.”
일리아는 정말 미안해졌다. 이제 겨우 환불할 줄 아는 남자인데……. 가족들의 행동에 익숙해진 일리아조차 감당하기 힘들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래도 식사할 때는 아까처럼 질문 공격이 들어오지 않겠지.’
만찬장에 도착하자, 카르한이 멈칫했다. 어마어마한 만찬장이었다. 크기 자체는 에반테온 공작저와 비슷했지만, 만찬장을 채우고 있는 가구와 집기, 장식들은 블로든 저택이 월등했다. 눈 둘 곳 없이 화려한 만찬장에서 카르한은 좀 더 기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