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18)
만찬장에 도착한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뒤에 대기해 있던 고용인들이 차례대로 음식을 내어왔다.
수십 가지의 그릇들이 테이블 위를 채워나갔다. 차린 것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먼저 먹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카르한은 포크만 들고 머뭇거렸다. 그것을 본 클리프가 물었다.
“혹시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닙니다.”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오해를 사기 전에 아무거나 빨리 먹어야 할 것 같았다.
“…….”
일리아는 힐끔거리며 카르한 쪽을 보았다. 그의 앞에는 고기가 담긴 그릇만 가득했다. 생김새만 보고 육류를 좋아할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접시를 나르는 고용인을 불러 부탁했다.
“소공자 앞에는 야채가 들어간 음식 위주로 다시 배치해줄래?”
“예? 하지만…….”
고용인이 카르한을 힐끔 보았다. 풀만 줬다가 화내면 어쩌나 눈치 보자,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도 괜찮습니다.”
“이왕이면 먹고 싶은 걸 먹는 게 좋잖아요.”
결국 고용인이 다시 음식을 내어왔다. 메뉴를 확인한 카르한은 만족스러운 듯 눈썹 앞머리가 조금 풀어졌다.
카르한이 식기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깔끔하고 교과서적인 식사법이었다. 헤인리처럼 우아한 예법은 아니었으나, 군더더기 없었다.
푸릇푸릇한 야채를 한 입 먹자, 다들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생긴 건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육식동물인데, 초식을 하고 있으니 기묘하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그러다가 카르한을 힐끔대던 고용인이 뜨거운 수프가 담긴 그릇을 놓치고 말았다.
“앗!!”
비명과 동시에 카르한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프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원래라면 일리아의 어깨에 쏟아졌어야 할 수프는 카르한의 팔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카르한, 괜찮아요?”
일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젖어버린 옷에서 뜨거운 김이 폴폴 올라왔다. 그러나 카르한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용인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죄송하다며 연신 사과하는 고용인을 달랠 틈도 없이, 일리아는 카르한의 다른 팔을 붙들었다.
“혹시 모르니까 차가운 물로 적셔야겠어요.”
일리아와 카르한은 곧바로 만찬장을 빠져나갔다.
“…….”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일리아의 가족들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로 큰일 날 뻔한 상황이었다. 만약 카르한이 대신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어깨가 드러난 옷을 입고 있던 일리아는 큰 화상을 입었을 터였다.
찰나를 놓치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일리아를 대신해 수프를 뒤집어쓰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조용한 만찬장에 앉아 있던 그들은 생각에 잠겼다.
“……영락없이 악당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클리프가 먼저 중얼거렸다.
“돌아오면 고맙다는 인사부터 해야겠어요.”
클리프의 말에 비올레와 헤인리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세간에 도는 소문과 조금 다른 느낌이네요.”
“……물론 바로 좋은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요.”
헤인리의 말에 다들 침묵했다. 그들에게는 둘째와 연애하는 놈들은 전부 나쁘다는 기본 전제가 있었다. 그래도 카르한 에반테온은 적어도 일리아한테는 잘하는 것 같았다.
“흠, 소문보다는 훨씬 괜찮은 사람 같긴 한데…….”
고민하던 그들은 한참 만에 결정 내렸다. 일단 좀 더 지켜보는 쪽으로 말이다.
***
일리아는 만찬장과 가장 가까운 주방으로 들어갔다. 분주히 움직이던 요리사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차가운 물 좀 준비해줘.”
일리아의 말에 요리사가 물동이를 가져왔다.
“윗옷 벗고, 팔 담가요.”
카르한이 차가운 물로 팔을 식히는 사이, 일리아는 눈이 마주친 고용인에게 부탁했다.
“의원 좀 불러줄래?”
“네, 아가씨.”
적당히 열기를 식힌 후, 일리아와 카르한은 주방을 빠져나와 자리를 옮겼다. 비어있던 방에 들어간 일리아는 카르한을 의자에 앉혔다. 젖은 소매를 바라보던 일리아가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고용인의 실수를 책임지는 것은 그녀 몫이었다. 심지어 저를 보호하기 위해 다친 것이니 마음이 무거웠다.
“저는 아프지 않습니다.”
카르한이 작게 속삭이며 일리아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당신이 더 아파 보입니다.”
일리아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입술만 달싹이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왕진 가방을 든 의원이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어디를 다치셨습니까! 언제부터 아프신 것인지, 증상은……!”
의원이 다다다 말을 내뱉었다.
“다친 건 이쪽인데.”
“헉.”
의원이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가 숨을 멈추었다. 마른 가지처럼 앙상한 의원보다 세 배쯤 큰 카르한이 있었다.
“아무래도 화상을 입은 것 같아.”
“그……, 일단 옷을 전부 벗어주십시오.”
의원은 차마 카르한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말했다. 일리아가 뒤돌아서자, 팔만 걷어붙였던 카르한이 주섬주섬 옷을 마저 벗기 시작했다.
껴입고 있던 옷이 하나씩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얇은 셔츠 한 장까지 바닥에 떨어졌을 때, 그의 몸이 완전히 드러났다. 근육으로 꽉 차 있는 몸은 조각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망치질한 듯 생동감이 넘쳤다. 흠 잡을 곳 없이 훌륭한 몸이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옷을 벗고 나니 더욱 야성적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의원은 달달 떨면서 붉어진 살갗을 살폈다. 잠시 후 그가 진단 내렸다.
“가벼운 화상으로 보입니다. 다행히 흉은 남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의원은 카르한의 몸을 힐끗댔다. 만약 흉이 진다고 해도, 이미 심각한 상처가 많아서 티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약 발라드리겠습니다.”
의원은 가방에서 연고 통 하나를 꺼냈다. 그러나 없던 수전증이 생긴 것인지 연고 뚜껑을 여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달달 떠는 의원을 보던 카르한이 말했다.
“제가 직접 바르겠습니다.”
그 말에 뒤돌아서 있던 일리아가 빠르게 외쳤다.
“아니에요. 제가 해줄게요.”
혼자서 약을 꼼꼼하게 바르긴 힘들 터였다. 저 때문에 다쳤으니 자신이 책임지고 싶었다. 무작정 소리치고 본 일리아는 뒤늦게 그가 옷을 벗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울 수는 없었다.
“……그래도 될까요?”
일리아의 물음에 카르한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 만에 작은 목소리로 ‘괜찮으시다면…….’ 하고 대답이 돌아왔다. 뒤돌아선 일리아는 의원에게서 약을 받았다.
“수고했어요. 나머지는 제가 할 테니, 이만 돌아가 보세요.”
“예, 아가씨!”
연고를 내어준 의원은 후다닥 방을 나가버렸다. 순식간에 방 안이 조용해지고, 일리아는 카르한의 벗은 몸을 보았다.
‘상처가…….’
군살 하나 없는 몸에 새겨진 흉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수많은 상흔들이 별자리처럼 이어져있었다. 멀쩡한 구석이 하나 없어, 몸이 아니라 흠집 많은 석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따끔할지도 몰라요.”
일리아가 연고 뚜껑을 열자, 그는 등을 돌려 앉았다. 쌉싸름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일리아는 그의 손목을 붙잡고, 상처 부위에 약을 살살 발라주었다.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팔 근육이 꿈틀거렸다.
“아파요? 이제 다 끝났어요.”
떡 벌어진 어깨가 자꾸만 움찔거렸다. 꼼꼼하게 다 발렸는지 확인한 일리아가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카르한이 고개를 돌렸다.
순식간에 거리가 무척이나 가까워졌다.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깨끗한 눈동자에 서로의 얼굴이 거울을 마주 세운 듯 끝없이 이어져 비쳤다. 꽉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카르한이었다.
“감사합니다.”
그가 짤막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짧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귓불이 붉었다.
카르한은 붙잡혀 있던 손목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셔츠를 집어 들었다. 그가 다시 옷을 입으려 하자, 일리아가 만류했다.
“새 옷을 가져오라고 해야겠어요. 그리고 다시 만찬장으로 돌아가기는 그렇고…… 여기서 간단히 식사하는 것은 어때요?”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미 긴장이 다 풀린 탓에, 만찬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일리아는 고용인을 불러, 이런저런 요구사항을 늘어놓았다. 고용인이 옷과 음식을 가져오길 기다리는 사이, 카르한이 물었다.
“……오늘 저, 괜찮았습니까?”
일리아가 고개를 들어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왠지 초조해 보이기도,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혹시 실수했다거나. 영애의 가족들에게 미움을 샀을까 봐…….”
아무래도 계속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그런 카르한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저희 가족이 과하게 굴었죠? 정말 미안해요.”
리하트 때문에 예민하게 굴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그래도 심했다.
“괜찮습니다.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부 영애를 걱정해서 그런 것 같았습니다.”
천사인가……? 그의 대답을 들은 일리아는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가족들에게 단단히 일러두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당신이 잘 해줘서 덕분에 의심 사지 않고 넘어간 것 같아요.”
다행히 가족들은 계약 연애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일리아의 칭찬에 카르한의 좁아진 미간이 스르륵 풀렸다. 매섭게 치켜 올라간 눈매가 평평해졌다.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지니, 맹수에서 덩치만 큰 순한 강아지가 된 것 같았다.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토닥이려다가 멈칫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할 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용인들이 옷과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카르한이 옷을 갈아입는 사이, 일리아는 고용인들이 두고 간 그릇을 재배치했다.
고기는 제 앞으로, 야채는 카르한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식사와 곁들일 와인도 따랐다. 카르한은 술을 마시지 않았기에, 달달한 과일 음료를 앞에 놓았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아까 하다 만 식사를 다시 시작했다. 일리아는 샐러드를 먹는 카르한을 보다가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았다.
“야채만 먹으면 몸이 유지가 돼요?”
“평소에는 주는 대로 먹기 때문에…….”
도리어 고기만 줘서 야채 먹을 일이 많지 않다고 카르한이 대답해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샐러드를 먹는 카르한은 왠지 행복해 보였다. 사소한 것에 기뻐하는 그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했다.
‘리하트는 집 한 채 정도 준다고 해야 좋아하던데…….’
소박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말로 에반테온 소공자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만족스러운 식사가 끝났을 때, 가족들이 감사 인사를 하러 오겠다고 전해왔다. 카르한이 부담스러워하자, 일리아는 괜찮으니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고용인을 돌려보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저택을 산책하기로 했다. 복도를 걷는데 저 멀리서 테시온이 황급히 걸어왔다. 그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두 사람은 잠깐 멈춰 섰다. 테시온이 울상을 지으며 다가왔다.
“저택이 너무 넓어서 묻고 물어서 겨우 찾았습니다.”
“미안해요.”
아까는 너무 당황해서 그를 챙길 겨를이 없었다.
“후원에 나갈 생각이었는데, 지금 딱 만나서 다행이에요.”
후원이라는 말에 테시온이 움찔했다. 낮에 어마어마하게 큰 정원을 봤기 때문이었다.
“저택이 이렇게나 넓은데, 다들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신기합니다.”
“음……. 그건 아니에요.”
일리아는 다들 비상용 신호탄을 들고 다닌다고 설명해주었다. 저택 안에서 길을 잃으면 아무나 붙잡고 물으면 되지만, 만약 건물 밖에서 길을 잃으면 답도 없었다. 그래서 신호탄은 혹시 정원에서 길을 잃거나, 마차가 고장 나서 조난당할 때 사용했다.
“길을 잃은 고용인을 수거하는 고용인도 있거든요.”
테시온은 놀라기도 지쳤는지 멍한 표정만 지어보였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테시온은 둘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거리를 둔 채 따라왔다.
건물을 빠져나오니, 벌써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어스름한 저녁 하늘이 어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침묵이 솜이불처럼 부드럽게 그들을 감쌌을 때,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뜻밖에도 카르한이었다.
“……며칠 전에 델로타 영애가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래요? 무슨 핑계를 대던가요?”
“저희 사이를 물었습니다.”
일리아는 잠깐 멈칫했다. 생각해보면 스텔라 델로타 정도면 정보통도 있을 테니, 슬슬 소문을 들었을 법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요?”
카르한의 성격을 생각하면 델로타가 일방적으로 쏘아붙였을 것 같다. 기세에 눌려서 아무 말도 못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추측하고 있는데, 카르한이 대답했다.
“약혼 이야기는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일리아는 놀라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스텔라가 무서워서 도망 다니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줄이야.
“물론 델로타 영애는 받아들이진 않았지만요.”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 중요하죠!”
일리아는 잘했다며 칭찬해주었다. 솔직히 스텔라가 알겠다고 납득했으면, 더 이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는 아직 말을 못 했습니다.”
“대충 언급만 해둬요. 제가 인사드리러 갈 테니까.”
이제 일리아의 차례였다. 카르한의 가족들을 만나고, 제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그의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나면 리하트를 처리하기가 더욱 수월해질 터였다. 일리아가 혼자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카르한이 중얼거렸다.
“영애의 가족들은 사이가 좋은 것 같습니다.”
카르한은 아까 있었던 일을 더듬듯 눈을 내리깔았다.
“서로를 무척 신뢰하는 것 같아서…… 단란해 보였습니다.”
오늘 카르한은 낯선 세계에 발을 들였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화목한 가정.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존중하는 가족들. 그들 사이에 있으니, 마치 따뜻한 모닥불 속으로 들어간 듯했다. 자신은 차갑고 모난 얼음인데, 몹시 따뜻해서 금방 녹아버릴 것 같았다.
카르한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곳은 그가 있던 곳과 다른 세계였고, 절대 익숙해져서도 안 될 풍경이었다. 한 발짝 물러나 뒤돌아서면 다시 얼어붙을 것 같은 설풍이 불어올 테니 말이다.
“…….”
일리아는 말없이 그를 찬찬히 살폈다. 어둠 속에서 언뜻 비친 그의 모습이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일리아는 카르한이 가족과 무슨 일이 있구나 하고 짐작했다.
사실 일리아 또한 가족들과 계속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일리아는 리하트와 연애하면서 모두를 실망시켰다.
그때는 도리어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가족들을 원망했다. 지금 와서야 후회하고 반성하면서 많이 가까워진 것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걸었다. 별관 뒤편으로 향하자, 수련이 핀 연못이 펼쳐졌다. 이지러진 어스름한 달빛과 램프 불빛이 수면에 비쳤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에 카르한과 테시온이 감탄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예요.”
일리아가 연못 가까이 다가섰다. 활짝 핀 수련과 어우러져서, 명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카르한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절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경이 아름다운 것인지, 일리아가 아름다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연못을 내려다보던 일리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괜찮지만…… 물만 봐도 무서워했을 때가 있었어요.”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카르한과 눈을 마주하며 속삭였다.
“옛날에 연못에 빠져서 죽을 뻔했거든요.”
뒤늦게 정신 차린 카르한이 일리아를 마주 바라보았다. 낮보다는 시원해진 바람이 불어왔다.
일리아는 눈을 내리깔아, 물결이 이는 연못을 내려다보았다. 옛날에 자신이 빠졌던 연못도 이렇게 연꽃이 잔뜩 피어있었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데, 연꽃의 뿌리가 발에 얽혔던 것이 생생했다.
“……리하트 테르시안이 물에 빠진 저를 구해줬어요.”
리하트에게 딱 하나 고마운 점이 있다면 제 목숨을 구해준 것이었다. 만약 그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 사람이 제 운명인 줄 알았어요.”
그것을 계기로 리하트와 지독하게 얽혔다. 지난 몇 년은 리하트 없이는 설명이 되지 않는 생활을 보냈다. 진심을 다해 좋아했고, 그랬기에 그의 부정에 크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런데 아니었죠.”
고저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리아는 리하트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좋아한 것은 일리아가 아닌, 일리아가 소유한 돈이었다.
서로가 원하는 것이 다르니, 결국은 어긋날 운명이었다. 처음부터 모래 위에 지은 성처럼 위태로운 관계였던 것이다.
애초에 목적이 돈이었다면, 차라리 대놓고 사례금을 더 달라고 요구하지. 왜 내 마음을 가지고 놀았던 것인지……. 그에게 바쳤던 연정과 시간이 너무나 아까워서 스스로에게 화가 날 지경이었다.
“만약에 나를 구해준 사람이 리하트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을까요?”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의미 없는 물음과 같았다. 이제 와서 가정해봤자 부질없었다. 일리아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쨌든 그 자식은 이제는 원수나 다름없어요.”
조금 무거워진 분위기를 덜어내기 위해 과격하게 말해보았으나, 카르한은 묵묵히 일리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물었다.
“……아직도 좋아하십니까?”
카르한은 스스로 질문을 던져놓고 놀랐는지 뒤늦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뇨!”
일리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의 실체를 알게 된 후로 완전히 마음을 정리했다. 남은 것은 애증도 아닌 증오뿐이었다. 만약에 리하트가 물에 빠져서 살려달라고 손을 뻗으면 걷어차 줄 것이다.
일리아는 걸음을 돌려, 한쪽에 놓인 간이 계단으로 향했다. 연못 아래로 이어진 계단 끝에는 물이 차 있었다.
일리아는 층계참에 앉아서 신발을 벗고 드레스 끝을 살짝 묶어서 물에 젖지 않도록 했다. 귀족 영애답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어차피 개인적인 공간이니 눈치 볼 필요는 없었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 미끄러지듯 물에 들어갔다. 발만 담갔을 뿐인데, 머리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