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20)
“몰상식하기도 하지.”
일리아는 시오나를 뒤로한 채 거리를 완전히 빠져나왔다. 동생이 파혼한 줄도 모르고 있는 그녀를 보니 한편으로 우스웠다.
‘결국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가족들한테도 말 안 했다 이거지…….’
그렇다면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테르시안 가문 사람들 모두가 파혼을 알게 되도록 말이다.
***
카르한을 만나기로 한 날이 왔다.
일리아는 카르한 쪽에서 정해준 장소로 향했다. 번화가에서 조금 벗어난 한적한 가게였다. 낮에는 차를 팔고 밤에는 술을 파는 곳인 듯했다.
일리아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도착해 있었던 카르한과 테시온이 반겨주었다.
“오랜만이죠, 그때 잘 들어갔어요?”
“예, 덕분에…….”
가벼운 인사를 나눈 후, 맞은편 자리에 앉으려던 일리아의 눈에 두꺼운 책 한 권이 들어왔다.
[미술 대백과사전]‘웬 미술 책……?’
일리아의 시선이 닿자, 카르한이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요즘 관심이 생겨서…….”
“뭐, 알아둬서 나쁠 건 없죠.”
수많은 노귀족들은 예술을 모르면 무식한 사람 취급했다. 그들이 젊었을 때는 예술의 부흥기라고 불렸다. 실력 있는 조각가와 미술가들이 넘쳐났고, 수준 높은 연극들이 줄지어 개봉했다. 모두들 예술에 심취했으며, 그것에 대해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작금의 예술은 예전만 못했다. 전처럼 걸출한 예술가들이 나오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쇠퇴했고 관심도 떨어졌다. 과거의 영광을 간직하는 노귀족들은 지금 젊은이들이 이전과 달리 예술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다만 일리아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그림과 조각상, 음악, 연극 등 모든 예술 분야에 관여하고 있었기에 곁에서 자연스럽게 배웠다. 그 덕분에 처음 보는 노귀족들에게도 예쁨 받곤 했다.
“아버지께서 조만간 전시회를 연다던데, 한번 놀러오세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과 테시온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왜 그러지? 전시회까지는 부담스럽나?’
일리아는 혼자 의아해하다가 말았다. 음료까지 시킨 후, 프란체와 말렉 그리고 테시온은 옆으로 빠졌다. 둘만 남게 되자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은 거절하는 법을 연습할까요?”
카르한이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몰입하기 위해서 상황을 설정해야겠어요. 제가 부탁하면 당신이 거절하는 거예요.”
일리아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저 멀리까지 나갔다가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무척 사정 있어 보이는 얼굴에 카르한의 손이 움찔 떨렸다.
“카르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일리아가 연기를 시작했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너무 급해서 그러는데 돈 좀 빌려줄 수 있어요?”
일리아가 고개를 들고 카르한과 눈을 마주했다. 맑은 보랏빛 눈동자를 본 순간 카르한이 대답했다.
“얼마를…… 드려야 하는지.”
그가 당장 지갑을 꺼낼 것처럼 굴자, 일리아가 테이블을 탁 내려쳤다. 놀란 카르한이 몸을 뒤로 물리는 동시에 일리아는 곧바로 한 소리 했다.
“그 상황에서는 거절해야죠!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돈을 왜 빌리겠어요?”
일리아가 돈을 빌려야 할 일이 온다면 그때는 제국이 파산했을지도 몰랐다.
일리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정말이지 큰일 날 사람이었다. 누가 보증 서 달라고 하면 그것만으로 되겠냐면서 알아서 더 얹어줄 것 같았다.
“불쌍한 척하면 다 빌려줄 생각이에요?”
일리아의 물음에 카르한이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당신의 부탁은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
“무리하더라도 들어주고 싶습니다.”
일리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다. 뭔가 기특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 착한 사람을 어떻게 해야 바꿔놓을 수 있을지 막막했다. 아무래도 시범을 보여줘야겠다고 일리아는 생각했다.
“그래도 보증은 가족끼리도 서는 거 아니에요.”
일리아는 단단히 교육해놓은 후 몸을 좀 더 당겨 앉았다.
“그럼 제가 거절해볼 테니까. 당신이 부탁해 봐요.”
머뭇거리던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를 도와주실 수 있는지…….”
“바빠서 힘들 것 같은데요.”
일리아가 단칼에 거절하자, 카르한의 어깨가 시무룩하게 처졌다. 이렇게 빠르게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연습인데 왜 상처받고 그래요……?”
카르한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순간 마음이 약해졌지만, 다시 엄격함을 유지했다. 지금 제대로 해둬야 이후에도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 터였다. 일리아는 그가 저 없이도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몇 번 더 연습을 했다. 나중에 카르한은 일리아가 급한 얼굴로 부탁해도, 정중하게 거절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누가 부탁하면 이 정도는 무리 없이 해줄 수 있겠다 싶을 때는 들어줘요.”
“네.”
“하지만 조금이라도 걸리는 구석이 있으면 거절하도록 해요.”
“명심하겠습니다.”
카르한은 말 잘 듣는 학생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부탁만 늘어놓는 사람은 피하는 게 좋아요. 이용당하기 싫으면.”
“알겠습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충고를 가슴에 새겼다. 일단 열심히 배우긴 했는데,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남의 부탁을 꾸역꾸역 들어준 까닭은 그들이 제게 실망하고 인상 찌푸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착한 아이로 남고 싶었기에……. 카르한은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가 곧바로 지웠다.
“자, 이번에는 아무리 거절해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만 찾아오라고 말해야 하나요……?”
“아뇨, 그냥 인상 쓰고 가만히 노려보세요.”
그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줄행랑 칠 터였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미친놈도 많은 법이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잊고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놈도 존재했다.
다행이라면 카르한은 황족을 제외하고 눈치 볼 필요가 없는 막대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만 이용해도 어느 정도 쳐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물러나지 않으면, 한마디 해주세요.”
일리아는 인상을 찌푸린 채 차갑게 말했다.
“꺼져.”
카르한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런 욕설은 입에도 담아본 적 없다는 듯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카르한은 상대가 무서워하지 않을지 걱정하고 있었다. 순간 일리아는 그가 연회장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도록 오해를 풀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랬다간 진짜 성격을 들켜서 만만하게 보일 터였다.
일리아는 이참에 그를 설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카르한. 호구가 뭔지 알아요?”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일리아는 몸을 좀 더 테이블 쪽으로 당겨 앉았다.
“쉽게 말하자면 이용당하기 딱 좋은 사람을 말하는 거죠.”
카르한은 이제 이해했다는 얼굴이었다.
“확실하게 내 사람한테만 잘해주면 돼요. 다 잘해주면 호구 취급 당해요.”
일리아는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지금까지 리하트 때문에 착한 사람으로 살아 왔더니, 제게 쏟아졌던 불합리한 일들. 다들 자신을 만만하게 보고, 당연하다는 듯 부탁을 늘어놓았던 것들도…….
“모두에게 친절해질 필요는 없어요.”
카르한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그래도 당신이 원한다면, 사람들이 겁먹지 않게 해줄 수는 있어요.”
기운을 누그러뜨리고, 인상만 살짝 바꾸면 무서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감정이 좀 더 얼굴에 드러나면 좋겠지만, 그건 천천히 노력하면 될 터였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분명히 상처 받을 일이 생길 거예요.”
이 세상에는 카르한의 상냥함을 이용해먹을 놈들이 바글바글했다. 처음부터 일리아의 목표는 세 가지였다.
사람들이 카르한을 보고 겁먹거나 기피하지 않게 만드는 것. 카르한 스스로 의견을 내게 하는 것. 그가 타인 때문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것. 진정한 나쁜 남자는 못 되더라도, 그것과 비슷하게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나쁜 남자가 되어주세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지금 일리아의 제안은 카르한의 근원을 흔들어놓는 것이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카르한은 싫다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마냥 좋아서 받아들였다면 상처는 남지 않았겠지만, 싫어도 억지로 참고 체념하니 혼자 곪아갔다.
카르한 스스로도 자신의 성격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바꿔야 할지 막막해서 손을 대지 못했다.
“…….”
카르한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잠시 충격 받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일리아의 제안을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가 아닌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을까.’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저 자신이 바뀌었음을, 카르한은 느끼고 있었다.
“……폐를 많이 끼치겠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아요.”
조심스럽지만, 확실한 대답에 일리아가 씩 웃었다.
“일단 자리를 옮겨볼까요.”
일리아와 카르한이 일어나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세 사람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가게를 나온 일리아는 어디서 거절 연습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역시 무난하게 물건이라도 사면서 배워야 하나…….’
그때 저 멀리서 걸어오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곧바로 일리아를 향해 걸어왔다.
“저기, 길을 물으려고 하는데…….”
남자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물어오자, 일리아는 곧바로 촉이 왔다.
‘분명히 이상한 종교를 권유하는 사람이거나, 차비를 잃어버렸으니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겠지.’
지금까지 만만해 보이는 얼굴 때문에 온갖 일에 얽혔기에 눈치만 빨라졌다.
“저쪽으로 가세요.”
일리아가 짤막하게 대답해주자, 남자는 이때다 싶어서 말을 붙였다.
“그런데 인상이 정말 좋으…….”
일리아는 곧바로 카르한을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남자의 시야에 카르한이 들어왔다.
“인상이…….”
카르한의 얼굴을 본 남자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을 상대한 경험이 많은지 제법 만만치 않았다.
“하여튼 제가 좋은 말씀을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전자였군.’
일리아는 빠르게 판단을 내린 후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당황한 카르한이 마주 바라보았다. 일리아는 눈빛으로 말했다. 실전이에요.
어어 하는 사이, 카르한과 이단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마주 섰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벌써 줄행랑을 쳤을 텐데, 경력자는 역시 달랐다.
“잠깐 시간을 내어 주신다면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좋은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남자가 열심히 입을 나불거렸다. 카르한은 난감해하다가 일리아의 눈치를 보았다. 일리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로 실전을 치르게 된 카르한은 천천히 숨을 고른 후 입을 열었다.
“……관심 없습니다.”
카르한은 아까 배운 대로 부드럽게 거절했다. 그러나 카르한의 정중한 태도에 남자는 더욱 활개를 폈다.
“아니, 저는 아무나 붙잡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상한 사람으로 보시면 섭섭합니다.”
남자가 카르한을 질책했다. 카르한은 순간 움찔했지만, 조금 더 완강하게 거절했다.
“저희는 바빠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남자는 아예 카르한을 무시하고 일리아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생김새를 봐서는 일리아 쪽이 훨씬 공략하기 쉽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가 일리아를 향해 걸음을 떼자, 카르한이 막아섰다.
사람 좋게 웃고 있던 남자가 반사적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미간을 찌푸린 카르한과 눈이 마주쳤다. 흉흉한 기세에 남자는 순간 주춤했다. 이내 남자는 언제 겁먹었냐는 듯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아니, 왜 길을 가로막고 그럽니까?”
역시 비범한 남자였다. 카르한이 노려보는데도 줄행랑치지 않은 이는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카르한이 처음에 정중하게 나와서 더 그런 모양이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온갖 사람을 상대해본 만큼 호구인 것을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생각보다 강적인데.’
일리아는 카르한이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실력은 햇병아리인데, 처음부터 최종 난도를 받게 될 줄이야. 가만히 노려보는 것까지 통하지 않자, 카르한이 머뭇거리던 때였다.
“아가씨, 저랑 이야기 좀…….”
남자가 일리아 쪽으로 바짝 다가왔다. 놀란 일리아가 뒤로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카르한이 그의 팔목을 붙들었다. 엄청난 악력에 남자가 비명을 삼켰다. 잘 벼린 시선이 도륙 낼 것처럼 그를 향했다.
“꺼지십시오.”
고저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르한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남자의 손을 놓아주었다. 겁에 질린 남자는 뒷걸음질 치더니 곧바로 등을 돌려 도망쳤다. 그리고는 얼마 가지 못해서 다리가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일리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알던 카르한이 아닌 것 같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르한을 바라보자, 긴장이 풀렸는지 그의 어깨가 낮아졌다.
“똑바로 했습니까……?”
눈치를 보는 것이, 평소에 많이 보았던 카르한이었다. 일리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카르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잔잔한 수면처럼 일리아를 가득 담았다. 칭찬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강아지 같은 모습에 일리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잘했어요. 실전에 강하시네요.”
일리아는 듬뿍 칭찬을 해주었다. 그는 하얀 솜처럼 일리아가 알려준 모든 것들을 금방 흡수했다. 이렇게 훌륭한 학생이라니,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무척 뿌듯했다.
칭찬을 퍼부어준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남자가 도망친 방향을 바라보았다.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설마 경비대를 부르러 간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일리아는 고개를 바로 했다.
“…….”
순간 일리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잊어버렸다. 아니, 모든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카르한이 웃고 있었기에.
뾰족하던 눈꼬리가 둥글게 휘어지고 딱딱하던 입매는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미소를 머금었다. 사납던 인상도, 감정을 담아내지 못하던 무표정한 얼굴도 온데간데없었다.
거친 북풍한설이 멎고 마지막 눈송이가 봄꽃에 내려앉은 것처럼 그를 이루던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저를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에 일리아는 손끝이 가려웠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첫 봄에 피어난 꽃잎이 제 가슴으로 불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 보는 카르한의 미소는 그만큼 대단했다.
“카르한, 당신…….”
일리아는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웃고 있어요.”
그 말을 듣자 카르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원래대로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오자, 일리아는 괜히 아쉬워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기에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던 걸까.
‘웃는 연습을 했을 때도 어색하기만 했는데…….’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면 누구도 카르한을 무서워하지 않을 터였다.
“무슨 생각 한 거예요?”
일리아의 물음에 카르한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오롯이 저를 향한 칭찬이 좋아서, 일리아의 웃는 얼굴이 예뻐서 자신도 모르게 나온 표정이었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처음으로 거짓말을 해버렸다.
“어릴 때 키운…… 강아지가 생각나서…….”
“아!”
일리아는 손뼉을 쳤다. 자연스럽게 그의 표정을 이끌어낼 절호의 기회였다. 일리아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구체적인 상황을 설정해주었다.
“어릴 때 키운 강아지랑 들판에서 뛰어노는 상상을 해봐요.”
카르한은 고민하다가 강아지가 아닌, 방금 일리아가 해준 칭찬을 떠올렸다. 딱딱하던 미간이 사르르 풀리더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방금 보았던 옅은 미소를 확인한 일리아가 속으로 소리쳤다.
‘완벽해.’
항상 무표정한 얼굴이 가장 고민이었는데, 한 번에 해결되었다. 다음에 미소 지을 일이 필요할 때 쉽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제가 강아지라고 말하면 방금 했던 상상을 하는 거예요. 알겠죠?”
“……예.”
카르한은 오해를 풀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일리아가 좋아하니, 아무래도 좋아졌다.
“오늘 성과가 좋은데요.”
일리아는 무척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만 하면 무척 좋을 듯했다. 환불까지 해낸 후에도 어딘가 불안한 면이 있었는데, 이제는 제법 그럴 듯했다.
일리아는 조금 전, 카르한이 욕설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생각보다 효과가 굉장해서, 몇 개 정도 더 배워두었으면 했다.
“앞으로 계속 바른말만 할 수는 없으니…… 욕하는 법도 좀 배워놓으면 좋을 것 같은데.”
일리아는 프란체를 힐끔 바라보았다. 프란체는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음을 깨닫고 앞으로 나섰다. 일리아가 알기론 프란체보다 욕을 잘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선을 받은 프란체가 시범을 보였다. 곱상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온갖 욕설이 비처럼 쏟아졌다. 욕으로 얻어맞으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였다. 일리아는 충격 받은 카르한과 테시온을 보고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처음부터 너무 강했나요?”
“다른 욕설도 있습니다!”
프란체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말렉이 그의 어깨를 잡고 뒤로 끌어당겼다. 정신 차리지 못하는 카르한과 테시온을 보며 일리아가 말했다.
“방금 그건 잊어주세요. 제가 천천히 알려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