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22)
“남이라니, 우리는……!”
스텔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족끼리 혼담이 오가고 있지만, 아직 카르한과 스텔라 사이엔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그것이 불안해서 스텔라는 카르한에게 집착했다. 고용인을 매수해서 그의 일정을 꿰고, 우연을 가장해서 따라다니고…….
조금이라도 접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만남을 많이 만들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스텔라는 자신이 카르한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여자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질문에 딱 부러지게 답할 말을 찾지 못해 스텔라는 화제를 바꾸었다.
“당신, 약혼자도 있잖아요!”
“타블로이드지 못 봤나 봐요? 파혼할 거라고 기사도 났는데.”
파혼이라니. 스텔라는 잠시 당황했다. 일리아가 리하트에게 목맨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죽고 못 살 때는 언제고, 사랑이 참 보잘것없네요.”
스텔라가 비꼬자 일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리아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읽어내고 잔뜩 헤집고 할퀴었다.
“왜, 테르시안 영식이 바람이라도 피웠어요?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것마저도 품고 가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일리아의 얼굴에서 표정이 점점 사라졌다. 일리아가 조용히 되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소공자를 사랑하나요?”
스텔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스텔라는 카르한을 사랑하지 않았다. 도리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서 무서울 때는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스텔라는 그를 길들일 수 있다고 자신했다. 나쁜 남자를 바꾸는 것은 결국 여주인공이 아니던가.
“그게 뭐 중요한가요. 정략결혼에.”
스텔라는 사랑 대신 자신의 야망을 선택했다. 그것이 나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보다 더 완벽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뭐가 나쁘단 말인가.
거기다 이미 스텔라는 권력의 달콤함을 알아버렸다. 약혼 이야기가 오간다는 말을 할 때마다, 벌써부터 공작부인이 된 것 같은 우월감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카르한과 약혼하지 못하면 전부 물거품이 될 터였다.
스텔라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어깨를 폈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공작부인이 될 거예요.”
일리아가 있는 한 스텔라는 만년 2등이었다. 아무리 일리아가 가진 것을 강탈하고 짓밟아도, 격차는 줄어들지 않았다. 카르한 에반테온은 그녀가 일리아보다 확실하게 앞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그리고 에반테온 공작부인은 내 편이에요.”
카르한은 공작부인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했다. 정 안 된다면 공작부인을 내세워서 카르한을 통제할 생각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공작가에 정식으로 항의해서 소공자를 단속시키겠어요.”
스텔라의 말이 끝나자 일리아는 팔짱을 풀었다. 표정이 없던 얼굴 위로 싸늘함이 감돌았다.
일리아는 난감해하던 카르한을 떠올렸다. 스텔라를 피해 무척 다급하게 테라스로 뛰어 들어온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녀에게 얼마나 시달렸을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일리아는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당신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사람을 그리 못살게 굴었군요.”
정곡이 찔린 스텔라는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참을 수 없다는 듯 단숨에 현관으로 뛰어올라왔다.
“일리아 블로든!”
일리아에게 닿기도 전, 뒤에 서 있던 두 남자가 스텔라를 막아 세웠다.
“남의 남자를 빼앗으려 하다니, 이 도둑 같은……!”
스텔라가 마구 비난을 쏟아내자 일리아가 단칼에 잘라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남의 것을 탐한 것은 너였잖아.”
“무슨……!”
“마차 도안 생각 안 나?”
스텔라가 바짝 굳어졌다. 오래전 일을 지금 꺼낼 줄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당한 입장인 일리아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이전부터 스텔라는 항상 제 것을 탐냈다. 거금을 줘서라도 일리아가 관심을 보이는 것을 사들였고, 얻을 수 없을 때는 짓밟았다.
다른 건 다 참았지만, 마차 도안 사건은 용서할 수 없었다. 블로든 가문의 디자이너들이 밤새워 만든 도안이었다. 그것을 훔쳐다가 바로 제품을 출시해버린 것이었다. 물론 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증거가 어디에 있어!”
스텔라가 발뺌하자, 흩어져 있던 고용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시선이 화살촉처럼 뾰족하게 그녀를 향했다. 스텔라는 뒤늦게 이곳이 어디인지 깨닫고 말을 멈추었다.
더 이상 말을 섞어 봤자 시간만 아깝다고 느낀 일리아가 뒤돌아섰다.
“손님이 돌아가실 모양이구나. 모셔다 드리도록.”
어어 하는 사이, 스텔라와 시녀가 마차에 강제로 태워졌다. 일리아는 마차 문이 닫히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차에 올라탄 스텔라가 창문을 열고 외쳤다.
“다음에 만날 때는 나를 공작부인이라고 부르게 될 거야!!”
일리아는 태연히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모습에 열이 뻗쳤는지 창문이 부서지도록 거세게 닫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델로타 가문 마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일리아는 한숨을 내뱉었다. 대뜸 저를 찾아왔기에 무슨 이야기를 할지 들어나 보자 싶어서 만나주었다. 하지만 역시 생각했던 대로였다.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해도 스텔라 델로타는 좀 아니지.”
일리아는 살면서 스텔라만큼 집착과 탐욕이 심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스텔라에게 지금까지 시달렸을 카르한이 불쌍했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온 일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 스텔라를 상대하고 나니 더더욱 리하트와 파혼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직까지 마땅히 약점이 될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계약 기간 내에는 파혼해야 하는데…….’
머리가 아파진 일리아는 아까 읽다 말았던 책을 집어 들었다. 조용히 독서하고 있는 사이, 창가를 타고 흘러 들어오던 빛이 점점 물러났다.
다 읽고 나니, 벌써 주위가 어둑해져 있었다. 부모님은 밤늦게 돌아오신다 했고, 지금쯤 오라버니가 도착해야 할 시간이었다. 일리아는 창문으로 현관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안 오셨네. 일이 많이 바쁘신가?”
카르한을 집으로 초대했을 때 이후로 오라버니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한집에 살아도 워낙 넓기 때문에 일부러 만나려고 하지 않는 이상 부딪힐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종종 저녁을 함께 먹었는데, 요즘은 제안이 뚝 끊겼다.
일리아는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산책 삼아 헤인리의 거처로 향했다. 복도를 걷고 있으니 고용인들이 인사를 건네 왔다.
“혹시 오라버니는?”
일리아의 물음에 고용인들이 걱정이 담긴 말투로 대답했다.
“아직 오지 않으셨어요. 요즘 많이 바쁘신 모양이에요.”
“그래……?”
헤인리는 꼬박꼬박 칼같이 퇴근하는 편이었다. 일이 바쁘더라도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는 돌아왔었다. 왠지 모르게 찝찝했지만 일단 알겠다고 말한 후 침실로 되돌아왔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나니 부모님이 돌아오셨다. 일리아는 부모님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헤인리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내고 잠자리에 들려고 할 즈음, 헤인리의 마차가 현관 앞에 도착했다. 일리아는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일리아는 급하게 걸음을 옮겨 헤인리의 침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운 좋게도 막 침실로 들어가려는 헤인리를 만날 수 있었다.
“일리아?”
헤인리가 문고리를 잡은 채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빨리 걸어오느라 숨이 차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요즘 계속 늦게 오시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으세요?”
헤인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순간 그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이내 헤인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랫사람이 사고를 쳐서 수습하느라 바빴다.”
“그래요?”
일리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조만간 끝날 거다. 늦었으니 이만 자거라.”
“네, 오라버니도 안녕히 주무세요.”
일리아의 인사에 헤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돌아선 일리아의 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가만히 지켜보던 헤인리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
사무실 가장 끄트머리에 반듯하게 정리된 책상이 하나 있었다. 책상 앞에는 은테 안경을 쓴 금발의 사내가 앉아있었다. 황궁의 유명 인사인 헤인리 블로든이었다.
처음 공직에 올랐을 때, 헤인리는 제국 제일 부자인 블로든 가문 장남으로 이름을 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 처리는 완벽하지만 까칠한 성격으로 수많은 이들을 울리면서 더 유명해졌다.
헤인리 블로든은 무능력한 사람을 무척 싫어했다. 적당히 봉급을 타먹으려던 이들은 모두 그의 손에 갈려나갔다. 블로든 가문에 연줄을 대어보려던 사람들도, 상냥해 보이는 얼굴에 속아서 이용해먹으려고 접근했던 이들도 전부 울면서 뛰쳐나갔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헤인리가 정말 사람이 맞는지 의심했다. 냉철한 독설가를 떠나, 그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우스운 이야기를 해도 칼바람만 쌩쌩 불었다.
그래도 헤인리의 표정이 부드러워질 때가 가끔 있었다. 책상에 올려둔 작은 초상화를 바라볼 때였다. 그때만큼은 설풍이 멎고 봄바람이 불어오듯 따스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 초상화가 여동생인 일리아 블로든의 어릴 적 모습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제2행정부서는 나름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악명과 달리 헤인리는 부하들에게 꽤 괜찮은 상사였다. 유능하고 칼같이 퇴근하는 데다가 자기가 맡은 일만 잘 해오면 참견하지 않았다. 돈도 잘 썼고, 필요할 때는 적절히 조언해주었기에 은근히 인기 있었다.
특히 근래에는 오랫동안 사이가 틀어졌던 여동생과 화해했는지 무척 온화해졌다. 하지만 요 며칠 사이, 다시 겨울이 찾아온 것처럼 제2행정부서는 칼바람만 불었다.
“…….”
헤인리는 은테 안경을 몇 번이나 추어올리며, 믿기지 않는 속도로 업무를 처리해 나갔다. 쉬는 시간 없이 일에 매달렸으나, 서류탑은 점점 높아만 갔다.
공기는 점점 무겁고 날카로워졌다. 사무실에 소속된 이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저기…….”
하단에 사인하던 헤인리는 잠시 멈칫했다. 새로운 서류를 왕창 가져온 부하가 눈치를 보았다.
헤인리는 한숨을 삼킨 채 손을 내저었다. 두고 가라는 뜻이었다. 어차피 그는 상사의 명령을 수행했을 뿐, 이 유치한 일을 벌이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헤인리는 맞은편에 따로 분리된 방을 쳐다보았다. 상사인 테르시안 후작의 집무실이었다.
며칠 전, 테르시안 후작은 자신의 집무실로 헤인리를 불렀다.
-자네 여동생과 우리 아들이 싸웠다던데. 화해 시켜줘야 하지 않겠나.
헤인리는 차가운 얼굴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리하트가 자기 아버지에게 입을 턴 모양이었다. 그것도 자기가 잘못한 점은 쏙 빼놓고 말이다.
-당사자들이 해결할 문제입니다.
-그리 뻣뻣하게 굴지 말고.
헤인리가 단칼에 거절했음에도 후작은 몇 번이고 일리아와 리하트의 화해를 중재하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헤인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계속 꼿꼿하게 굴자, 후작은 괘씸했는지 방방 뛰었다.
-타블로이드지에 그딴 기사를 실은 것도 눈감아주었건만. 블로든은 우리 가문을 우습게 보는 건가?
권위와 위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테르시안 후작은 자존심이 무척 상한 듯했다. 그때부터 그는 태도를 달리했다. 대놓고 무시하며 과중한 업무를 얹어주기 시작했다. 절대 한 명이 볼 업무량이 아니었다.
항의도 해봤지만 테르시안 후작은 일리아와 리하트가 화해하면 줄여주겠다고 못을 박았다. 과로사하는 한이 있어도 일리아와 리하트가 이어지는 꼴은 볼 수 없었기에 업무를 받아들였다.
‘집안에 알릴 수는 없지…….’
가족들이 알게 된다고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황궁 내에서 테르시안 후작의 입김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부모님이라면 이참에 사업을 물려받으라고 밀어붙일 터였다. 무엇보다 일리아가 자책할까 걱정이었다.
헤인리는 숨기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냥 당하지만은 않을 생각이었다.
헤인리는 혼자서 차근차근 증거를 수집하고 있었다. 테르시안 후작이 자신을 부당하게 괴롭히는 것, 그리고 그가 저지르는 비리에 대해서. 인내하며 기다렸다가, 때가 되면 화려하게 터뜨려줄 것이었다.
“…….”
뚝, 하고 펜촉이 부러졌다. 그 소리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헤인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새 펜촉을 꺼내서 끼웠다. 점점 쌓여가는 부러진 펜촉을 보며 헤인리는 생각했다. 리하트의 얼굴을 다트판 삼아 던져주고 싶다고.
“후우…….”
서류를 너무 많이 봤더니 눈이 뻑뻑했다. 헤인리는 잠시 안경을 벗어놓고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일리아의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헤인리는 언제 얼굴을 찌푸렸냐는 듯 미간을 풀고 초상화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릴 적의 일리아가 환히 웃고 있었다. 헤인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초상화를 매만졌다.
이때는 사이가 좋았는데……. 부모님이 한창 바쁠 때였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예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헤인리는 아카데미 입학도 조금 늦추고 일리아와 시간을 보냈었다. 옛 추억을 곱씹던 헤인리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식사는 잘 하고 있겠지…….”
리하트 그놈 때문에 살이 많이 빠져서 잘 먹어야 하는데. 겨우 달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헤인리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일리아가 제게 준 오르골을 집어 들었다. 태엽이 닳는 게 아까워서 몇 번 돌려본 적도 없는 오르골이었다.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차차 평온이 찾아왔다. 오르골을 가져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헤인리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
일리아는 홍차와 빵, 과일 등으로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가벼운 슬립 원피스만 입은 채 책상 앞에 앉자, 고용인이 서신이 담긴 상자를 내려놓았다.
아침마다 서신을 확인하는 것은 일과 중 하나였다. 매일 엄청나게 쏟아졌기에 하루라도 거르면 감당이 되질 않았다. 안부 인사를 묻는 편지부터 청탁까지 다양했지만, 대부분은 생일파티나 연회, 모임 초대장이었다.
다들 조금이라도 일리아와 연을 맺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블로든과 친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상이 달라졌으니 말이다. 그래서 신분을 막론하고 서신을 보내왔지만, 대부분은 쓰레기통행이었다.
매정하다 할지 모르나, 일리아는 이제 사람과의 관계에서 환멸을 느꼈다. 제 이름만 들으면 돌변하는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쓰게 웃었다.
‘이제 와서 순수하게 우정을 나눌 친구가 있을까?’
과거에는 마음이 맞는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누구와 관계를 맺더라도 결말은 배신이었다. 리하트조차 돈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는 척했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일리아는 타인과 깊게 엮이는 것을 꺼렸다.
정말 순수하게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생긴다 해도, 끝내는 의심하게 될 터였다. 우리 사이에 있는 것이 진짜 우정인지, 아니면 우정을 돈으로 산 것인지.
차라리 주종관계는 단순해서 좋았다. 처음부터 돈과 충성으로 엮여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일리아는 내 사람과 내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 구분해서 대했다.
일리아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은 가족과 고용인들이었다. 그 외는 전부 바깥에 존재했다.
하지만 요즘은 규정짓기 곤란한 존재가 생겼다. 바로 카르한 에반테온이었다. 그는 일리아가 만든 울타리에 애매하게 걸쳐 있었다. 주종관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친구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거래로 이루어진 관계였지만, 그를 보고 있으면 순수하게 도와주고 싶었다. 과거의 자신을 투영하는 걸지도 몰랐고, 동정일 수도 있었다. 다만 거래가 끝나더라도 그를 멀리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지.”
가족, 친구, 고용인, 연인……. 일단 지금은 가짜 연인이긴 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는데, 의식하고 나니 연인이라는 단어가 괜히 묘하게 느껴졌다.
서신을 분류하던 일리아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봉투 하단에 익숙한 이름과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카르한이 보내온 것이었다. 일리아는 봉투를 뜯어 편지지를 확인했다.
[부모님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괜찮으시다면, 공작저에 초대하고 싶습니다.]일리아는 편지를 내려놓았다. 이제 자신의 차례였다.
***
에반테온 공작저를 방문하기로 한 날이 왔다.
일리아는 차분한 느낌으로 치장을 마쳤다. 대신 옷부터 장신구, 신발까지 하나하나 공을 들였다. 누구도 일리아의 차림새를 보고 무시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현관으로 내려오자, 익숙한 푸른색 머리카락과 감색 머리카락을 가진 이들이 보였다. 평소보다 말쑥한 차림을 한 프란체와 말렉이었다.
일리아가 올라탄 마차는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을 빠져나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말렉이 조용히 말해주었다.
“아가씨, 에반테온 공작저입니다.”
“벌써?”
일리아는 정신 차리고 창밖을 구경했다. 블로든 가문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훌륭한 정원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쓸쓸하고 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정원을 가로지르던 마차가 멈추었다. 말렉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서 깊은 에반테온 공작저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웅장한 저택은 세월의 힘을 받아 깊이를 더하고 있었다. 건물을 구경하던 일리아는 현관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발견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르한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일리아는 커다란 꽃다발을 내밀며 대답했다.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카르한은 얼떨결에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 그의 덩치에 맞춰서 만든 꽃다발이었기에 딱 들어맞았다. 카르한은 무척 생소한 눈으로 꽃다발을 살폈다. 낯선 듯하나, 싫지 않아 보였다.
“꽃은…… 처음 받아봅니다.”
“저도 남자에게 선물하는 건 처음이에요.”
처음이라는 말에 카르한이 조금 동요했다.
“저번에 저희 집에 왔을 때 꽃다발 줬잖아요. 답례예요.”
카르한은 꽃다발을 만지작거리다가 고맙다고 인사했다.
“제가 안내할 테니 들어오십시오.”
일리아는 카르한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 홀 계단을 올라, 복도를 걸었다. 복도에 난 창문은 작고 좁은 편이라 햇빛이 많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실내는 조금 어두웠고, 벽지나 장식품들도 차분한 색감을 이루고 있었다.
근엄하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에반테온 저택은 화사하고 눈 돌아갈 듯 화려한 블로든 저택과는 정반대였다. 무척 조용한 복도를 걸으며 일리아가 물었다.
“테시온은요?”
“……제 방에서 업무를 보고 있습니다.”
한 박자 늦게 대답한 카르한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급한 용무가 생겨 외출 중이십니다. 오늘은 어머니만 뵙게 될 듯합니다.”
미리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카르한이 사과했다. 혼자 공작부부를 동시에 상대하기엔 조금 벅찰 것 같았는데,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복도를 걷던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카르한이 문고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곳에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긴장한 듯 목소리가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오히려 블로든 저택에 왔을 때보다 굳어 있어서 의아하게 느껴졌다. 잠시 닫힌 문을 보던 일리아는 천천히 심호흡을 내뱉었다. 막상 공작부인을 만나려고 하니 긴장되었다.
사실 자신은 환영 받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성사되기 직전의 약혼을 깨부수러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착한 아들을 유혹했다며 뺨 맞는 건 아니겠지…….’
돈다발을 건네면서 헤어지라고 하면 어쩌지. 그럼 이미 충분히 많다고 거절해야 하나. 일리아는 머릿속으로 소설 한 권을 써내려갔다. 어찌 되었든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들어가겠습니다.”
카르한이 문고리를 돌리자, 응접실 내부가 드러났다. 깔끔하게 정돈된 응접실 중앙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진갈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우아한 여인이었다.
일리아는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녀가 에반테온 공작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잘 모르겠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카르한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빠르게 살피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어서 와요.”
무척 기다렸다는 듯 공작부인이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곧장 일리아에게로 다가왔다.
“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나요?”
사근사근하게 물어오는 것이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 뜻밖의 환대에 일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뺨이 아니라면 찻물 세례라도 받을 줄 알았는데…….’
카르한이 옆에 있어서 잘해주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제게 이렇게까지 잘해줄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의아했지만 일리아는 내색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덕분에 편안히 올 수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일리아 블로든입니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레베타 에반테온이에요.”
레베타는 빠르게 일리아를 훑었다. 화려하진 않으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고급만 두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일리아의 다이아 목걸이에서 잠깐 머물렀다. 이전에 경매에서 역대 최고 가격으로 낙찰된 목걸이였다. 일리아의 값어치를 확인한 그녀의 입꼬리에 미소가 가득 맺혔다.
“여기에 앉도록 해요.”
레베타가 자리를 권하자, 일리아가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나 모두가 자리에 앉았음에도 카르한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일리아가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너도 앉으렴.”
그녀의 말에 그제야 카르한이 자리에 앉았다.
‘긴장해서 그런 건가?’
그런 것치고는 평소와 조금 달라 보였다. 일리아는 카르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테이블을 응시했다. 테이블 위에는 고급 다과가 놓여 있었다. 찻잔이나 식기에도 신경 쓴 티가 났다.
일리아는 테이블에 길쭉한 상자를 내려놓았다. 결이 살아있는 나무 상자에 벨벳과 금실로 리본 장식이 달려 있었다.
“약소하지만 초대에 대한 답례입니다.”
레베타가 상자에 관심을 가지자,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희 가문에서 생산하는 와인인데, 올해로 딱 100년이 되었어요. 원래 황실에 납품할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더 중요한 분께 드리고 싶어서요.”
일리아의 말에 레베타의 미소가 짙어졌다. 값어치를 헤아릴 수 없는 선물이었다. 레베타는 고용인을 시켜 선물을 잘 보관해두라 일러둔 후, 차를 권했다.
“두 사람이 교제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찻잔을 든 레베타가 일리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쩌다 만난 건가요?”
“연회에서 첫눈에 반했습니다.”
이미 몇 번이나 우려먹은 대답을 내놓자, 레베타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위를 가늠하는 눈이었다. 그녀로서는 이 관계가 사실인지 파악할 필요성이 있었을 터였다. 일리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기껏 다 잡은 물고기인 스텔라를 놓아줘야 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적당히 속아 넘기기 어려울 듯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 카르한이 조심스럽게 일리아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일리아는 곧바로 그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조금씩 파고들어와 얽혀들었다. 맞잡은 손에서부터 맥박이 요동쳤다. 어찌나 시끄럽게 뛰는지 가슴까지 흘러 들어왔다.
‘따뜻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