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24)
그런가……? 카르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테시온의 손에 붙잡혀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
에반테온 공작저에 다녀온 지 며칠이 지났다. 계속 저택에서 시간을 보내던 일리아는 오랜만에 외출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리아는 간단하게 치장하고 프란체, 말렉과 함께 저택을 나왔다.
먼저 은행에 들러 볼일을 본 후에 오르골 가게를 방문했다. 이전처럼 줄을 설 정도는 아니었으나, 가게 안은 여전히 북적북적했다. 일리아가 들어오자, 새로 뽑은 점원이 밝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랜만이네요. 요즘은 할 만해요?”
“지난달보다는 확실히 덜 바쁜 것 같아요.”
점원은 이번 달에는 특별한 기념일이 없어서 그런 모양이라며, 쾌활하게 대답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네, 사장님. 저는 다시 재고 정리하러 가볼게요.”
일리아는 흐뭇하게 웃었다. 조만간 휴가와 함께 포상금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손님들과 섞여서 물건을 구경하던 일리아는 오르골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자연스럽게 카르한이 떠올랐다.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모르잖아.”
그러고 보니 카르한의 취향에 대해서 아는 게 많지 않았다. 고기보다 야채를 좋아하고, 달달한 음료를 선호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래도 다음에 함께 와서 고르는 것이 좋을 듯했다.
일리아는 가게를 나와 상점가를 돌았다. 쇼핑 목적은 아니었고, 요즘 어떤 것이 유행하는지 알아볼 목적이었다.
가업을 잇고 싶다는 생각을 한 뒤로, 일리아는 조금씩 공부하고 있었다. 경영 수업을 듣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으나, 이렇게 직접 보고 듣는 것 또한 공부라고 생각했다.
‘저기는 매일 줄 서 있네.’
음식점 앞에는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줄 지어 있었다. 몇 번이나 가게를 확장했으나, 아직도 한참 동안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었다.
‘요리법을 전수해준 후에 분점을 내면 좋을 텐데.’
의상실이나 물건을 판매하는 가게는 종종 분점을 내나, 음식점의 경우에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자본의 문제도 그렇지만, 레시피 유출을 꺼리는 탓이었다.
열심히 거리를 돌아다니던 일리아는 잠시 멈춰 섰다. 가게 유리창 너머에 진열된 커프스단추가 눈에 띄었다.
새파란 사파이어는 카르한의 눈동자 색과 흡사했다. 잠시 커프스단추를 착용한 카르한을 상상해보았다. 무척 세련된 느낌이었다.
‘눈에 띄었으면 사야지.’
일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주인의 인사를 들으며 일리아는 커프스단추를 가리켰다.
“저 커프스단추 포장해주겠어요?”
물건을 포장하는 동안 일리아는 가게를 둘러보았다. 무슨 가게인지도 모르고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장인이 만든 물건을 위탁해서 판매하는 고급 잡화점인 듯했다. 가격대가 제법 있지만, 품질이 좋아 보였다.
일리아는 요즘 바빠 보이는 헤인리에게도 선물을 주고 싶어서 가게를 둘러보았다. 실용성 있는 것으로 고르던 중, 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날렵하게 빠진 데다가 세련되어 보였다.
“알아주는 장인이 제작한 것인데, 오늘 중으로 각인도 가능합니다.”
일리아가 펜을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주인이 슬쩍 말했다. 거기까지 들으니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것도 주세요.”
“감사합니다. 각인은 시간이 조금 걸리니, 나중에 찾으러 오십시오.”
만족스러운 쇼핑을 마치고 일리아는 가게를 나섰다. 각인이 끝날 때까지 적당히 시간을 때울 생각이었다.
“둘 다 필요한 거 없어?”
일리아가 프란체와 말렉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 웬만한 물건은 백작저 내에서 구할 수 있었다. 프란체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연습용 목검이 필요합니다.”
“목검?”
“네, 저번에 제작해둔 것들은 조금 불편해져서요.”
키가 자라면서 손도 커졌다며 프란체가 말했다. 성년식도 치렀는데 아직도 성장기인지, 확실히 작년보다 더 커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연무장에 자주 가는 것 같던데.”
“곧 호위기사 선발전이 있으니 열심히 해야죠.”
프란체가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하자, 일리아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엊그제 치른 것 같았는데, 벌써 그렇게 되었나?’
일 년에 한 번, 블로든 백작저에서는 선발전이 열렸다. 일리아의 호위기사를 뽑는 대회로, 단 한 명만 차지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우승자는 일 년 동안 일리아의 전속 호위기사가 될 수 있었기에, 블로든 가문 기사들은 전부 선발전에 참가했다.
경쟁이 치열한 만큼 이맘때가 되면 다들 투지로 불타올랐다. 그리고 프란체는 항상 우승을 거둬, 일리아의 호위기사 자리를 지켜왔다.
“그럼 목검도 제작하러 가야겠네.”
명쾌한 결론이었다. 세 사람은 곧바로 무기 제작소로 향했다. 연습용 목검을 여러 자루 맡긴 일리아는 프란체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힐끗 보고 물었다.
“그 검도 바꿔야 하지 않아?”
“아직 더 쓸 수 있습니다!”
프란체는 빼앗길세라 검을 움켜쥐었다. 그가 항상 품에서 놓지 않는 검은 일리아가 처음으로 선물해준 것이었다. 너무 많이 갈아서 칼날은 얄팍해졌고, 손잡이는 칠이 벗겨졌다. 뛰어난 명검이었지만 그의 연습량을 이길 수 없었다.
“누가 보면 내가 봉급도 안 주는 줄 알겠다.”
일리아가 농담 삼아 핀잔을 놓았다. 그러자 프란체의 남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민하던 프란체가 슬그머니 말렉에게 물었다.
“형님, 제 검이 그렇게 낡아 보이나요?”
“많이.”
말렉은 아주 솔직했다. 결국 고민 끝에 프란체는 새로운 검을 맞추기로 결정 내렸다.
“지금 검은 퇴임식을 치러줄 겁니다.”
프란체가 가지고 있던 검을 끌어안았다. 유난 떤다고 할지 모르지만, 프란체가 그 검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비웃지 않았다.
“말렉은 필요 없어?”
“저는 맞춘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괜찮습니다.”
“어차피 형님께서는 선발전에 참여하실 필요 없잖아요.”
프란체가 작게 투덜거렸다. 그 말처럼 말렉은 선발전에 나가지 않아도 일리아의 호위기사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일리아가 꼬꼬마였을 시절부터 모셔왔던 공로를 인정받은 탓이었다.
“저는 정정당당하게 따낼 겁니다.”
프란체는 열의에 가득 차 있었다. 일리아와 말렉은 열심히 하라고 응원해주었다.
볼일을 전부 끝낸 후, 세 사람은 강을 끼고 있는 대로를 산책로 삼아 걸었다.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았기에 발길 가는 대로 걸었다.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는 것도 몰랐다.
번듯한 도로와 주택들이 조금씩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허름한 건물들이 보였다. 빈민가 초입이었다.
“아가씨.”
말렉이 조용히 일리아를 불렀다. 더 들어가면 안 된다는 가벼운 경고였다. 빈민가는 치안이 좋지 않아서,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해야 했다.
입구에 멈춰 선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프란체를 바라보았다. 프란체는 말없이 빈민가 안쪽을 응시했다. 햇빛도 들지 않는 음지, 온갖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거리,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은 집들.
이곳은 오래전, 프란체가 태어나고 살던 곳이었다. 지금은 이 거리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말끔해졌지만, 처음 만났던 프란체는 꼬질꼬질한 꼬마였다.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도 저곳에 살고 있었겠지요?”
프란체는 괜히 허리춤에 찬 칼집을 매만지며 혼잣말했다. 과거를 떠올렸는지, 그의 눈동자가 조금 가라앉았다. 어두워졌던 눈동자는 어느새 다시 밝아졌다.
“아가씨, 이만 가시지요.”
회상을 끝낸 프란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세 사람이 발걸음을 돌리는데, 빈민가 안쪽에서 어린아이들이 뛰어나왔다. 남매로 보이는 꼬마들은 무척 신이 나 보였다.
“빵 많이 살 거야!”
아이의 외침에 일리아는 그쪽을 보았다. 그때, 신나게 뛰어가던 여자아이가 발이 꼬여서 엎어졌다. 일리아는 여자아이의 손바닥에서 동전 한 닢이 데구루루 굴러가는 것을 보았다. 동전은 순식간에 하수도로 들어가 버렸다.
“누나! 괜찮아?”
깜짝 놀란 남자아이가 황급히 다가왔다. 여자아이는 무릎이 까진 것도 보지 못하고 텅 빈 손바닥부터 확인했다.
“내 동전!”
하수도로 들어간 것을 보지 못했는지, 두 아이는 바닥에 엎드려 동전을 찾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보이지 않자,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프란체가 주먹을 쥐었다. 그는 빈민가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잃어버린 동전은 식량을 살 귀중한 돈이었을 것이다. 그때 일리아가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너희들이 찾는 게 이거니?”
일리아의 손에는 반짝이는 금화가 들려 있었다. 금화를 처음 본 아이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방금 그 동전 내가 주웠거든. 동전이 필요해서 그런데, 이거랑 바꾸면 안 될까?”
“우리 빵 사려고 했는데…….”
남자아이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금화로 더 많은 빵을 살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그럼 빵이랑 동전이랑 바꾸자.”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목적이 일치했기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빵집으로 향했다. 빈민가와 가까운 빵집이라 그런지 번화가처럼 번듯하진 않았다. 그래도 호밀 빵부터 시럽을 바른 조각 케이크까지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쭈뼛거리던 아이들이 진열대에 놓인 빵을 살폈다. 남매는 흰 밀 빵을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고른 것은 가장 값싼 귀리 빵이었다. 밀 빵 하나 살 돈으로 귀리 빵은 네 개나 살 수 있었다.
“자, 먹고 싶은 거 전부 담으렴.”
지켜보던 일리아가 쟁반을 내밀었다. 그리고 시범으로 흰 밀 빵을 팍팍 담았다. 깜짝 놀란 여자아이가 중얼거렸다.
“흰 빵은 비싼데…….”
“괜찮아.”
일리아는 가게에서 가장 비싼 조각 케이크를 집으며 말했다.
“언니 돈 많단다.”
아이들이 동시에 입을 크게 벌렸다. 일리아는 방금 했던 말을 증명하듯 빵으로 탑을 세우기 시작했다. 홀린 듯이 지켜보던 여자아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소리쳤다.
“식빵 사야 해요!”
“식빵?”
“우리 언니 거예요.”
일리아가 왜 굳이 식빵이냐는 표정을 짓자, 우물쭈물하던 남자아이가 대답해주었다.
“큰누나는…… 그림을 그려요.”
“그래?”
일리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식빵을 하나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석탄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모양이었다. 빈민가에서 그림을 그리려면 적잖게 고생할 듯싶지만, 거기까지 신경 쓰기엔 오지랖이었다.
쟁반 세 개를 가득 채운 후 계산을 마쳤다. 가게 안에 마련된 테이블에 아이들을 앉히고 빵과 케이크를 쥐여 주었다. 체하지 말라고 음료도 주문했다.
남매는 많이 배고팠는지 숨도 쉬지 않고 빵을 밀어 넣었다. 그러다가 맛있다고 감탄하기를 반복했다.
“결대로 찢어서 먹으면 더 맛있어.”
프란체가 빵 먹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말렉은 일리아의 부탁대로 조용히 가게를 나가, 약을 사들고 왔다. 상처에 바르는 연고였다.
일리아는 여자아이의 까진 무릎에 약을 발라주었다. 쓰라린지 움찔거렸지만, 먹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얌전했다.
한참 후 쟁반이 텅텅 비고, 남매의 배는 빵빵해졌다. 일리아는 남은 빵을 아이들의 손에 들려주며 말했다.
“앞으로 배가 고프면 이 가게를 찾아와.”
“감사합니다!”
감사의 인사를 건넨 아이들이 종종 뛰어갔다. 빵을 얻게 된 남매는 세상을 가진 듯 행복해 보였다.
뒷모습을 지켜보던 일리아는 옅게 미소 지었다. 돈을 주지 않길 잘한 것 같았다. 남매의 보호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돈으로 무슨 화를 부를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일리아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이들이 배를 곯지 않게 하는 것뿐이었다.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뭣도 몰랐던 옛날에는 우리 집으로 가자며 하나씩 데리고 갔다. 프란체도 그렇게 저택으로 데려왔다. 하지만 지금의 일리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는 끝도 없다는 것을.
일리아는 모든 빈민가 사람들을 거두어줄 수 없었다. 좋은 뜻으로 시작하면 항상 나쁘게 끝나기 때문이었다. 왜 우리는 도와주지 않느냐며 일리아를 원망하거나, 아이들을 내세워 더 큰 돈을 바랐다.
아무리 기부하고 도와도 가난은 사라지지 않았다. 블로든 가문이 직접 나서서 빈민가를 근절시킨다 해도 또 다른 곳에서 가난이 태어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듯 가난과 부는 떼려야 뗄 수 없다.
방금 그 아이들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갑자기 복권이 당첨된 사람처럼 말이다.
일리아는 빵집 주인에게 넉넉히 돈을 맡겨둔 후, 가게를 나섰다.
“이제 슬슬 펜을 찾으러 가볼까?”
지금 가면 시간이 얼추 맞을 듯했다.
빈민가를 빠져나온 일리아는 가게를 방문해, 펜을 찾았다. 각인까지 하니 세상에 하나뿐인 것처럼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만 집으로 돌아가자.”
일리아는 곧장 마차에 올라타고 집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외출이 길어져서, 벌써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하늘을 태우는 붉은 석양을 바라보던 일리아는 리하트를 떠올렸다. 원하지 않아도 자주 리하트 생각이 났는데, 요즘은 훨씬 덜했다. 자신의 일상에서 리하트가 많이 씻겨 나간 모양이었다.
‘너무 조용하지 않나?’
아직까지 파혼 동의를 해주지 않는 것으로 보아, 뭔가 꿍꿍이가 있을 듯했다. 그동안 일리아는 리하트가 파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약점을 찾고 있었다. 몇 개 떠오르긴 했지만 전부 약했다. 그를 궁지에 몰아붙일 한 방이 필요했다.
무사히 파혼을 하게 되면…… 다시는 제 인생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상념에 잠긴 일리아는 공작부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약혼식 날짜부터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일리아는 리하트와 무사히 파혼하기 위해 에반테온을 끌어들였다. 그가 보복할 때를 대비해 방패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계약 연애를 제안할 때만 해도 카르한이 자기주장이 없어서 스텔라와 약혼을 앞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감을 심어주고 의견을 내세울 줄 알게 된다면, 계약 기간이 끝난 후 관계를 깔끔하게 매듭지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카르한은 후계자임에도 공작가에서 힘이 너무 없었다. 이번에 공작부인이 꺼낸 약혼 이야기도 제안이 아니라 강제처럼 느껴졌다. 성격만 고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일 년 후에 무사히 헤어질 수 있을까.’
리하트를 피하려다가 정말로 카르한과 약혼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사실 카르한 자체는 훌륭한 남편감이었다. 호구 같은 성격이 조금 걸렸지만, 착한 성품에 미래에 공작이 될 사람이었다.
그가 싫은 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호감에 가까웠다. 하지만 일리아는 더 이상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할 자신이 없었다.
괜찮은 척, 전부 잊은 척 하고 있지만 리하트에게 배신당한 상처는 생각보다 깊고 짙었다. 다시 들여다보는 것조차 무서워서 외면하게 될 정도로 말이다.
만약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고 해도 리하트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주저할 것이다. 끝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결국엔 두려워서 스스로 끊어낼지도 몰랐다.
‘그 전에 카르한은 나를 좋아하지도 않잖아.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보내줘야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비가 오는 것처럼 기분이 축 가라앉았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 결말을 정해두고 시작하지 않았던가.
“아쉬워서 그런가.”
일 년짜리 시한부 연애가 끝나면 더 이상 카르한을 만나지 못할 터였다. 공식적으로 헤어진 사이가 될 텐데 괜히 추문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아무래도 카르한과 정이 든 모양이라고, 일리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드넓은 정원을 가로지르던 마차가 저택 현관 앞에서 멈추었다. 마차에서 내리니, 익숙한 마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헤인리의 마차였다. 고개를 돌리니, 막 현관 안으로 들어가려는 헤인리의 뒷모습이 보였다.
“오라버니!”
일리아는 반가운 나머지 목소리를 높여 그를 불렀다. 그 소리를 들은 헤인리는 멈칫하더니 몸을 틀었다. 일리아가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이제 바쁜 것은 괜찮으세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헤인리가 마차를 힐끗 보며 물었다.
“소공자를 만나고 오는 길인가 보지?”
“아뇨, 볼일만 보고 들어왔어요.”
미묘한 얼굴이었다. 헛기침을 내뱉은 헤인리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산책이라도 하는 것은 어떠냐.”
헤인리가 먼저 제안해온 것은 오랜만이었다. 안 그래도 언제 선물을 줄지 고민했는데, 산책하면서 기회를 엿보면 될 것 같았다.
“좋아요.”
일리아와 헤인리는 정원으로 들어섰다. 석양의 머리가 헤엄치듯 가라앉고, 푸르스름한 빛이 꼬리처럼 차올랐다. 어둠을 머금은 꽃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부작거리는 소리는 정원에 가득 찬 고요함을 간간이 부숴놓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헤인리였다.
“……요즘 식사는?”
“꼬박꼬박 하고 있어요.”
헤인리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리아는 마음고생 때문에 살이 많이 빠져버렸다. 계속 규칙적인 식사를 하고 있음에도 빠진 살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라버니께서도 식사 잘 챙기고 계시죠?”
“그래.”
짤막한 대답이 돌아오고,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둘만 남으면 어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얼굴도 보지 않는 사이였다. 몇 년간 멀어진 거리가 단번에 좁혀질 리 없었다. 헤인리는 여전히 무뚝뚝했고, 일리아 또한 살갑게 행동하지 못했다.
“에반테온 소공자는 요즘 잘 만나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종종 만나고 있어요.”
헤인리는 카르한에게 은근히 관심이 많았다. 카르한을 저택에 초대했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진 것도 헤인리였다.
이해는 됐다. 일리아가 처음으로 연애했던 리하트는 쓰레기였으니까. 카르한 또한 소문이 좋지 않으니 그로서는 탐탁지 않을 터였다.
“아직은 뭐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헤인리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인정하기 싫은 것을 인정해야 할 때 그는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소문만큼 나쁜 사람 같진 않았지.”
그의 중얼거림이 바람을 타고 귀에 들어왔다. 일리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헤인리를 올려다보았다. 그 또한 걸음을 멈추었다.
“소공자에게 무례하게 군 점은 반성하고 있어.”
잘못을 인정하는 헤인리는 무척 신선했다. 헤인리는 사과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사과할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헤인리는 완벽주의였고, 꼿꼿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소공자를 완전히 인정한 것은 아니다.”
좀 더 지켜볼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이윽고 헤인리는 복잡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
“그래도 네가 좋다면…… 어쩔 수 없지.”
그 정도만 해도 엄청나게 양보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리하트와 연애할 때는 무조건 헤어지라고 강요했었다. 그 때문에 비련의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더 타올랐는지도 몰랐다.
“고마워요.”
일리아의 대답에 헤인리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처음으로 눈이 마주치자 일리아는 눈매를 조금 접어 보였다.
“리하트 때도 그렇고,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
헤인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부정하거나 침묵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순순히 대답했다.
“항상 그렇지.”
무뚝뚝하던 얼굴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는데, 문득 어릴 적에 저를 돌봐주던 헤인리가 떠올랐다.
일리아와 헤인리는 나이 차이가 제법 났다. 말렉만큼은 아니었지만, 업어 키우기엔 충분했다.
유년기의 기억은 온통 헤인리로 가득했다. 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해서 헤인리는 일리아의 부모이자 친구가 되어주었다. 헤인리는 자상한 오라버니였고, 일리아는 그를 무척이나 잘 따랐다.
늘 함께였지만 헤인리는 결국 아카데미로 떠나고 말았다. 혼자 남은 일리아는 그의 빈자리를 절실히 느꼈다. 부모님은 여전히 바쁘셨고, 고용인들은 헤인리를 대신해줄 수 없었다. 아마도 그때의 자신은 외로웠던 것 같다.
“저도 그래요.”
일리아는 오랫동안 묻어온 진심을 꺼냈다.
“항상 걱정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고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요즘 계속 늦게 들어와서 걱정하고 있다며, 일리아가 중얼거렸다. 헤인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왠지 그의 눈동자가 조금 흐려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참, 선물이에요.”
일리아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뭐지?”
“직접 확인해 보세요.”
종이 가방을 받아든 헤인리가 상자 하나를 꺼내들었다. 리본을 풀고 뚜껑을 열어보니, 은색 막대에 남색 깃털을 단 펜이 놓여 있었다.
“지나가다가 오라버니 생각이 나서 샀어요. 물론 이것보다 더 비싸고 좋은 것을 쓰시고 계시겠지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말하다 보니 설명이 점점 길어졌다. 헤인리는 상자 뚜껑을 덮으며 말했다.
“비싸다고 해서 훌륭한 것은 아니지.”
제 말투가 퉁명스럽다고 느꼈는지, 헤인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윽고 헛기침을 내뱉은 그가 상자 뚜껑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안 그래도 새로 사야 했는데…… 잘 쓰마.”
일리아는 그가 깃펜을 조심스레 넣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리본까지 완벽하게 묶은 헤인리는 좀 더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다면 함께 먹자꾸나.”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멀게만 느껴졌던 오라버니가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