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25)
7장
***
며칠 전 리하트는 평소처럼 귀족 모임에 다녀왔다. 등장과 함께 이목이 집중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리하트의 주위를 둘러싸고 아부했다.
리하트는 자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모임을 즐겼다. 한창 웃고 떠들던 중 거슬리는 말이 귀에 들려왔다.
-타블로이드지 봤어?
-봤지. 파혼한다던데.
-테르시안 영식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거 아냐? 블로든 영애는 착하잖아.
리하트는 저를 놓고 수군거리는 이들이 신경 쓰였다. 그러다 은근히 찔러보는 사람도 있었다.
-블로든 영애께서는 요즘 안 보이시는데…….
무슨 일 있냐고 걱정하는 척하면서 소문이 과연 사실인지 캐물으려 했다. 리하트는 표정을 수습한 후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곧 있을 결혼식 준비에 시간을 쏟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렇군요. 소문 때문에 걱정했습니다.
-타블로이드지는 저도 봤습니다. 어차피 거기는 엉터리 기사와 추문을 다루지 않습니까.
고소할 생각이라며, 리하트는 변명과 허세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오늘 리하트는 만찬회에 참석했다. 고위 귀족들이 친목을 다지기 위해 비정기적으로 여는 행사였다. 만찬장에 들어가기 전, 에반테온 공작부인이 그를 불렀다.
-블로든 영애와 파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대놓고 물어오는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상대는 공작부인이었지만, 리하트는 불쾌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헛소문입니다. 고매하신 공작부인께서 그런 소문을 믿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가요? 본인에게 들었는데 말이죠.
순간 리하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바람처럼 속삭였다.
-모쪼록 빨리 매듭지어졌으면 좋겠군요.
은근한 파혼 압박에 리하트는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일리아가 에반테온 공작부인마저 포섭했을 줄은 몰랐다.
만찬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리하트는 외투를 벗어던졌다. 아버지만 믿고 기다리기엔 인내심의 한계가 왔다.
여전히 일리아 쪽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보내는 서신은 전부 무시당했고, 만나보려 해도 번번이 실패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시간 끌기밖에 되지 않았다.
카르한 에반테온의 약점이라도 알아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정보상에 돈도 제법 지불했으나, 워낙 베일에 싸여 있어서 그런지 시원치 않았다.
초조해진 리하트는 방을 왔다 갔다 했다. 한참을 서성이던 그가 멈춰 섰다.
“스텔라 델로타…….”
불현듯 떠오른 이름이었다. 딱히 엮일 일이 없었으나, 소식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고 있었다.
스텔라는 카르한 에반테온과 혼담이 오가는 중이라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공작부인의 태도를 보아, 약혼 이야기는 이미 깨졌을 가능성이 컸다.
“그쪽도 분명 가만히 있을 성격은 아닌데.”
연회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어서 어떤 성격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야망이 대단한 여자였다. 스텔라가 벌써부터 공작부인 행세 한다며 험담하던 이들이 떠올랐다.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리하트가 씩 웃었다. 적당히 그럴 듯한 제안을 하면서 그녀를 통해 카르한의 약점을 캐내야겠다고 리하트는 생각했다.
***
고용인들은 벽에 등을 붙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발치에는 깨진 유리가 굴러다녔지만, 아무도 나설 수 없었다. 스텔라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레나마저 멀찍이 떨어진 채였다.
방을 엉망으로 만든 스텔라는 숨을 몰아쉬었다. 무엇을 해도 울분이 가시질 않았다. 오늘 아침, 에반테온 공작부인이 델로타 저택에 찾아왔다. 공작부인이 먼저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기에 스텔라는 무척 들떴다.
드디어 약혼 날짜를 잡으려는 건가 싶어, 기대를 품고 공작부인을 만났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약혼은 없던 일로 했으면 좋겠어요.
-그, 그게 무슨……?
스텔라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다. 공작부인은 무척 태연하게 쐐기를 박았다.
-우리 가문에 어울리는 사람을 찾았거든요.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스텔라는 일리아를 떠올렸다.
-설마…… 일리아 블로든인가요?
공작부인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스텔라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울고불고 매달렸다. 그러나 공작부인은 차가운 눈으로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저를 다정하게 맞아주던 공작부인은 온데간데없었다.
-델로타 백작께는 따로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그럼 이만.
공작부인은 자기 할 말만 끝낸 후 매정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방적인 통보에 스텔라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약혼 이야기가 오간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다들 자신이 에반테온 소공자의 약혼녀가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것이다. 그것도 저를 예뻐하고 귀애하던 공작부인이 말이다.
그녀가 돌아간 후로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있던 스텔라는 분노를 터뜨렸다.
“어떻게 내게……!!”
카랑카랑하게 올라가는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물건을 집어던지고 소리를 질렀지만, 억울한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당장 공작저를 찾아가 카르한에게 따지고 싶었다. 왜 하필 일리아 블로든이냐고. 그 계집애가 나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냐고. 하지만 가느다랗게 남아있는 이성의 끈이 스텔라를 붙잡아주었다.
지금 감정적으로 나서봤자, 망신만 당할 뿐이었다. 약혼식을 치른 것도 아니었으니, 파혼이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 저쪽보다 신분이 낮은 탓에 제대로 항의하기도 어려웠다.
“이제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라고…….”
다들 저를 비웃거나 동정할 터였다. 시기 질투하던 이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떠들어댈 것이 분명했다. 스텔라는 씩씩거리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또다시 일리아 블로든에게 밀려났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끔찍했다. 그녀를 꺾고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리하트 테르시안 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익숙한 이름에 스텔라가 멈칫했다.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바닥을 천천히 내렸다. 분노로 가득 차 있던 머리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리하트 테르시안이 왜……?”
리하트는 일리아의 약혼자였고, 지금까지 어떠한 교류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를 찾아온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스텔라는 리하트를 돌려보내라고 말하려 했다. 그때 고용인이 한마디 덧붙였다.
“약혼과 관련한 문제로 독대를 요청하고 싶다고 전하셨습니다.”
스텔라가 잠시 멈칫했다.
“약혼 문제라니…….”
혹시 뭔가 알고 온 것인가? 초조해진 스텔라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러 왔는지 정도는 들어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들여보내.”
스텔라는 곧바로 방을 빠져나와 화장을 고쳤다. 옷매무새까지 확인한 스텔라는 응접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자리에 앉아 있는 리하트가 보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리하트가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그 말과 달리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스텔라는 불편한 기색을 띤 채 그를 쳐다보았다. 저를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긴 하지만, 달갑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텔라는 리하트를 가볍게 훑으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은 거죠?”
“일단 앉아서 이야기를 하지요.”
마치 제집 같은 태도에 스텔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냥 돌려보낼까 고민하는데, 리하트가 다시 말했다.
“에반테온 소공자와 약혼이 무산되지 않았습니까?”
스텔라는 눈을 부릅뜬 채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 공작부인에게 통보 받았는데 어떻게…….
리하트가 앉으라는 의미로 빈 의자를 눈짓했다. 마지못해서 자리에 앉자, 그가 말을 이었다.
“저도 일방적으로 파혼을 통보 받은 처지라, 영애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파혼 이야기에 스텔라가 관심을 가졌다. 저번에 블로든 저택을 찾아갔을 때 일리아가 직접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둘 사이를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스텔라가 눈을 부릅떴다. 리하트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일리아와 에반테온 소공자는 교제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파고들 틈은 많습니다.”
“그 두 사람을 헤어지게 만들자는 말이에요?”
“맞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겁니다. 영애는 소공자와 무사히 약혼할 수 있겠지요.”
“……뭘 원하는데요?”
말이 잘 통해서 좋다는 듯 리하트가 씩 웃었다.
“조금만 협력해주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스텔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연 리하트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편이 나았다. 일이 잘 풀린다면 일리아에게 복수하는 동시에 에반테온 가문과 다시 연을 맺게 될 것이다. 만일의 경우에는 아무것도 모른 척 리하트를 끊어내면 그만이었다.
결정을 내린 스텔라가 턱을 치켜들고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죠?”
***
마침내 그날이 왔다. 아침 일찍 일어난 카르한은 단정한 차림을 한 후에 공작저를 빠져나왔다.
카르한은 마차 창문을 통해 목적지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옷매무새를 다시 확인했다. 천천히 숨을 가다듬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테시온이 격려했다.
“잘하실 수 있습니다. 어제 예습까지 했으니까요.”
“대강 외우기는 했지만…….”
카르한이 자신 없이 중얼거리자, 테시온은 열심히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누가 보면 결전이라도 치르러 가는 줄 알 법한 모양새였다.
마침내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리자, 흰 대리석으로 지어진 거대한 건물이 보였다. 판판한 지붕에 여덟 개의 원형 기둥을 가진 건물은 웅장하다 못해서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미술관 건물을 살피던 테시온이 눈을 빛냈다.
“몇 번 방문하긴 했는데, 블로든 백작님께서 관장으로 계시는 줄 몰랐습니다.”
지금 닥친 상황과는 별개로 테시온은 마음이 들떴다. 평소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만큼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 미술관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 서 있던 직원은 비장해 보이는 두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내 침착하게 초대장을 확인한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카르한은 요즘 들어 예전과 달라진 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처럼 타인이 무턱대고 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려워하는 사람은 있어도 먼저 겁을 먹고 잘못을 빌거나 도망가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직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부산히 움직이고 있던 클리프가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소공자.”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제외하고 일리아와 닮은 구석이 없는 클리프 블로든이 카르한을 맞이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침 해야 할 일을 다 끝냈으니, 가시지요.”
직접 안내해주겠다며 클리프가 걸음을 뗐다. 카르한은 살짝 긴장한 채로 그를 뒤따랐다.
오늘을 위해 카르한은 미술 대백과사전을 몇 번이나 정독했다. 원본을 따라 그리는 것에 한계가 있어 그림 없이 작품 이름과 설명만 적힌 게 수두룩했으나, 어느 정도 도움은 될 터였다.
그리고 저번에는 테시온의 도움을 받아 상황을 모면했다. 그때와 같은 편법이 계속 통할 수는 없을 테니 긴장되었다.
카르한과 클리프는 1층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한적한 시간대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신경 많이 썼습니다. 부디 소공자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시면 좋겠군요.”
“훌륭한 작품이 많이 보입니다.”
카르한이 주위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칭찬을 들은 클리프는 뿌듯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이 그림은 이번에 외국에서 들여온 것인데, 혹시 아시는지요?”
클리프가 작품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카르한은 빠르게 하단에 적힌 작품명과 작가 이름을 확인했다. 다행히 책에서 본 적 있는 그림이었다.
“예,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지만 책으로 접한 적이 있습니다.”
순간 클리프의 눈이 반짝였다. 클리프는 그림에 대해 질문을 던졌고, 카르한은 자신이 아는 지식을 조심스레 내뱉었다. 화가에 대한 것부터 시작해서 작품을 그리게 된 동기까지 읊었을 때, 클리프는 감탄했다.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역시 미술에 조예가 깊으신 것 같습니다.”
카르한은 가슴이 뜨끔해졌다. 벼락치기로 공부했다는 것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어떻게든 넘어간 것 같았다.
클리프의 시선은 아까와 비교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저를 향한 호의를 확인한 카르한은 속으로 안도했다. 밤을 새워 공부한 보람이 있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림을 감상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전부 머릿속에 있는 것들이었다.
척척 대답하는 카르한의 모습에 클리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옆에서 똑같이 흐뭇한 얼굴을 하는 테시온을 보고 멈칫했다. 그때 카르한이 어느 그림을 앞두고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백작님께 이 그림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매정하고 사나워 보이는 인상과 달리 무척 정중한 물음이었다. 기껍게 여긴 클리프는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 말해주었다.
그는 제국에서 예술에 관해서는 가장 권위 있는 사람이었기에, 어디에서도 듣기 어려운 지식이 쏟아졌다.
한참 떠들어대던 클리프는 뒤늦게 아차 싶어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카르한은 지루한 기색 없이 유심히 듣고 있었다. 가족들조차 따분하다고 잘 들어주지 않는데, 끝까지 경청하는 모습에 클리프는 속으로 감동했다.
“제가 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지루하셨지요?”
“아닙니다. 전부 알지 못한 것들이라 흥미로웠습니다.”
카르한은 진심이라는 듯 그림에 시선을 두었다.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클리프는 가산점을 두둑이 주었다.
“오랜만에 취미가 맞는 사람을 만나 흥분했습니다.”
가족들은 예술에 크게 관심이 없다며 클리프가 울상을 지었다.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어흠흠.”
거기까지 말한 클리프는 뒤늦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비올레와 헤인리가 지금 제 모습을 보면 배신자라며 타박할 것이 분명했다. 클리프는 뒤늦게 근엄한 척 표정을 수습했다.
“2층으로 가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