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27)
“아니, 왜…….”
속상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노귀족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다들 어릴 적부터 봐 온 만큼 일리아에게 약했다. 일리아는 일부러 눈꼬리를 좀 더 아래로 내린 채 슬픈 기색을 내비쳤다.
“에반테온 소공자께서는 순수하게 예술을 좋아하실 뿐인데, 그런 오해를 받으니 속상해요.”
“……저자가?”
미심쩍다는 시선에 일리아가 내 말 못 믿느냐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다들 금방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초대한 것도 사실이고요.”
만약 아니더라도 나중에 아버지와 말을 맞춰두면 될 일이었다. 노귀족들은 잠시 웅성거렸다. 일리아가 그렇게까지 말해버리니 차마 더 이상 물고 늘어질 사람은 없었다. 일리아는 아예 쐐기를 박아버렸다.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잖아요. 그렇죠?”
“……그렇지요.”
노귀족들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다.’
그것은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이 결성된 뿌리였다. 그들은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카르한을 힐끗댔다. 아무리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일리아가 온 후로 표정이 많이 부드러워진 것이 느껴졌다.
일리아는 빠르게 노귀족들의 반응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소공자께서 낯가림이 있어서 그렇지 사실은 감수성이 풍부하신 분이세요.”
낯가림……? 그들은 무뚝뚝하게 서 있는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옆구리를 찌르며 작게 속삭였다.
“카르한, 강아지.”
긴장해서 뻣뻣하던 카르한이 정신 차렸다. 강아지는 둘만의 암호였다. 어릴 적에 키운 강아지와 뛰어노는 걸 상상해 보라는. 하지만 카르한은 강아지가 아닌, 저를 칭찬하며 웃어주는 일리아를 떠올렸다.
“……!”
옅은 미소를 띠는 순간, 사나워 보이던 인상이 완전히 걷혔다. 매섭게 치켜 올라간 눈매가 내려가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
홀린 듯이 카르한을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은 제법 볼만했다. 확실히 카르한의 웃는 얼굴은 효과가 굉장했다.
‘웃으면 무척 호감형이지…….’
지금까지 카르한의 웃는 얼굴을 아무도 몰라줘서 안타까웠다. 매서운 기운에 가려졌던 잘생긴 얼굴이 드디어 빛을 보았다. 뾰족하던 시선들이 거둬지자, 카르한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카르한이 먼저 숙이고 들어오자, 귀족들은 괜히 헛기침만 내뱉었다. 여전히 탐탁지 않게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전보다 한결 누그러진 눈빛이었다.
“저희도 조금 지나쳤습니다.”
노귀족들이 고집을 꺾는 일은 흔치 않았다. 한번 인식이 틀어박히면 그것에 사로잡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태도가 완전히 호의적으로 바뀐 건 아니었으나, 이만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그나저나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 같군요.”
“언제 한번 모임에 와주세요. 블로든 양.”
노귀족들은 이만 가보겠다며 인사를 건넸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말이 없던 에반테온 공작가의 원로와 카르한이 눈을 마주쳤다. 원로의 시선에 카르한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그들이 우르르 가버렸다.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테시온이 무척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잘됐습니다. 원로께 눈도장을 찍었으니까요.”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원로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다. 미약하나 분명 좋은 신호였다. 그러나 정작 카르한은 시무룩해 보였다. 새까만 눈썹이 아래로 처지자, 일리아는 가만히 그를 살폈다.
“……아직 저는 한참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일리아가 오기 전까지는 갈등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일리아의 도움을 받고 말았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늘이 드리웠던 시야에 일리아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평생 지녀온 성격을 바꾼다는 건 절대 쉽지 않거든요. 오해도 풀었으니,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사르르 녹을 것 같은 미소에 카르한은 입술을 달싹였다. 아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그림을 감상할 때처럼 가슴이 울렁였다.
“소공자! 오래 기다리셨지요?”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반갑게 카르한을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에 일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일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
클리프가 숨을 들이켜며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마치 숨겨왔던 비밀이 발각된 것처럼 클리프는 무척 당황한 모습이었다. 일리아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아까 아버지께 초대 받았다는 것이 사실이었구나.’
그나저나 언제부터 둘이서 나 몰래 만나는 사이가 됐지? 저번에 저택에 초대했을 때만 해도 아버지는 카르한을 탐탁지 않게 여겼는데……. 일리아가 클리프에게 물었다.
“언제 소공자께 초대장을 보내신 거예요?”
클리프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어났다. 물가에 숨 쉬러 나온 붕어처럼 클리프가 입술만 뻐끔거리자, 카르한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오고 싶다고 백작님께 부탁드렸습니다.”
“그, 그래……! 소공자께서 하도 부탁하셔서 초대장을 보낸 거다.”
이때다 싶어 클리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일리아를 통해 이 소식이 헤인리와 비올레의 귀에 들어가면 달달 볶일 것이 분명했다.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벌써 소공자한테 넘어갔냐며 실망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몰랐다. 클리프는 비올레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일리아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클리프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사실이에요?”
“……예.”
카르한은 일리아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대답했다. 거짓말하는 것이 다 보였지만 일리아는 굳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요. 초대장 정도는 보내줄 수 있는데.”
“저번에 저택에 초대 받았을 때 백작님과 따로 말씀 나눌 기회가 있어서 부탁드린 것입니다.”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서 있던 클리프의 가슴이 찡해졌다. 저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해준 것이었다. 클리프는 감동 받은 눈빛으로 카르한을 보다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하여튼 그렇게 된 거니 오해하지 말거라.”
“뭐, 그래요.”
일리아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언제 왔니.”
“좀 전에요. 1층은 다 돌고 올라왔어요. 좋은 작품이 많던데요?”
“네가 만족했다면 다행이구나. 물론 아쉽긴 하다만…….”
클리프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이었다. 그는 제법 오랫동안 전시회를 기획해 왔다. 하지만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 대부분은 이미 공개된 것이었다. 공개되지 않은 신인 작품을 전시회의 꽃으로 내세우려고 했으나, 결국 마음에 드는 작품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전시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일리아는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노귀족들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말했다.
“방금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 분들이 다녀갔어요.”
“인사드리러 가야겠구나.”
클리프는 고개를 돌려 따스한 눈빛으로 카르한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럼 천천히 구경하시다 돌아가십시오.”
“오늘 감사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두 사람 사이에 훈훈함마저 느껴졌다. 가만히 지켜보던 일리아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서 궁금해졌다. 클리프가 가버리고, 일리아가 물었다.
“혹시 저희 아버지가 무슨 짓이라도 한 건 아니죠?”
“아닙니다. 오히려 작품 설명을 해주셔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럼 다행이지만. 미심쩍긴 하나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돌아볼래요?”
카르한은 대답 대신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기쁨을 띤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났다. 눈동자에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자 일리아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혼자 구경하니 지루했나 보네.’
일리아와 카르한은 천천히 2층을 돌았다. 카르한은 이미 구경을 모두 끝낸 후였지만, 잠자코 일리아를 따랐다. 그리고 계속 눈여겨보았던 일리아를 닮은 그림을 함께 감상했다.
“색감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따스해 보이네요. 부드럽고 상냥한 느낌이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카르한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전시된 그림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요.”
일리아의 감상평에 카르한은 묘하게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카르한은 그림에서 시선을 떼고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일리아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렇게라도 함께 감상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2층을 전부 돌고 난 후, 두 사람은 1층으로 내려왔다. 따로 약속을 정해두고 만난 건 아니지만, 이대로 헤어지기는 조금 아쉬웠다. 카르한도 마찬가지였는지 눈동자만 굴렸다.
“조금 이르긴 한데, 간단하게 저녁 식사 하러 갈래요?”
일리아가 먼저 제안을 건넸다.
“과실주가 괜찮은 곳이 있거든요. 아참, 술 안 마시죠?”
“……아닙니다!”
카르한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오늘부터 마시기로 했습니다.”
오늘부터……? 말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승낙으로 받아들인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곧바로 미술관을 나왔다. 일리아가 데리고 간 곳은 골목 어귀에 있는 음식점이었다. 목재로 지은 가게는 벽면 절반이 열려 있어, 탁 트인 느낌을 주었다. 터를 잡은 지 제법 되었는지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그래도 꽤 운치 있고 적당히 조용했다.
카르한이 가게를 두리번거리는 사이, 일리아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 구석 자리긴 했지만 고개를 돌리면 야외가 보였다. 노을이 질 즈음 저 멀리 보이는 강변이 아름다워서 종종 찾곤 했다.
“가끔 오는 가게예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은 신기한 듯 눈을 깜빡였다. 일리아는 가게를 그 자리에서 매수하거나, 고급 의상실을 옷장으로 둘 만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엄청난 재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종종 소박한 가게를 소개해주었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음식점도 귀족 아가씨가 선호할 만한 가게는 아니었다.
“왜 그런 얼굴이에요?”
“그냥 좀 신기해서…….”
“제가 이런 가게를 알고 있는 것이요?”
속마음을 들킨 카르한은 놀랐는지 눈동자만 도르륵 굴렸다. 일리아는 조금 웃다가 대답해주었다.
“항상 좋은 것만 경험할 수는 없잖아요.”
일리아는 귀족 아가씨였지만,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해왔다. 가족들의 상반된 교육 탓이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일리아에게 최고만 안겨주었다. 대신 어머니는 일리아를 데리고 다니며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경험을 쌓게 도와주었다.
-비싼 것이 꼭 최고라는 법은 없단다.
-뭐든지 일단 경험해 보렴.
어머니의 말은 아직까지 일리아의 가슴에 깊이 남아 있었다. 그 덕분에 무언가를 시작할 때마다 주저하지 않았다. 모험이긴 하나, 가끔씩은 지금처럼 소박하지만 마음에 쏙 드는 가게를 찾곤 했다.
“혹시 좀 불편해요? 자리를 옮길까요?”
“아닙니다. 저도 이런 분위기를 좋아합니다.”
카르한은 편안한 듯 아주 옅게 미소 지었다.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몇 번 본 적도 없지만, 카르한이 미소 지을 때마다 왠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직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었다. 순간 직원과 카르한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직원은 겁을 먹거나 놀라기는커녕 뺨을 살짝 붉혔다.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
직원이 카르한을 보고 무서워하지 않으니 무척 잘된 일이었다. 마땅히 축배를 들어야 할 만한 일인데, 이 미묘한 기분은 무엇인지.
일리아는 생각을 떨쳐내고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사이, 직원이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추천해드릴게요. 여기 밑에 보시면…….”
직원은 은근슬쩍 비싼 메뉴를 시키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양이 너무 많기도 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르한이 고개를 들어 일리아를 힐끔 보았다. 일리아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직원의 말이 끝나자 카르한이 정중하게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메뉴판을 좀 더 보고 주문하겠습니다.”
직원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 고르시면 불러주세요.”
직원이 메뉴판을 내려놓고 가버리자, 카르한이 뿌듯한 얼굴로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은 모습에 일리아는 피식 웃었다.
‘거절을 못해서 강매 당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거절도 잘하는데요? 이제 제가 없어도 되겠어요.”
일리아의 칭찬에 카르한이 그대로 굳어졌다. 뿌듯해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그는 심각한 얼굴로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안 되는데…….”
희미한 중얼거림은 가게의 소음에 묻혀버렸다.
일리아는 메뉴판을 세로로 세워서 카르한과 함께 메뉴를 골랐다. 야채를 좋아하는 카르한을 위해 토마토 샐러드를 하나 고르고, 일리아는 소시지를 선택했다.
“세 사람도 먹고 싶은 걸로 골라요.”
일리아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은 프란체와 말렉, 테시온에게 말했다. 프란체와 말렉은 아직 일하는 중이었기에 술 대신 음식만 골랐다. 테시온이 그들을 대신하여 가벼운 밀주를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하나씩 나왔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술병 하나가 턱 하고 놓이자, 카르한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일리아를 보았다. 일리아는 자연스럽게 술병을 따며 물었다.
“그런데 원래 술 안 마시지 않았어요?”
“……아예 금주한 것은 아니고, 자제하던 중이었습니다.”
“왜요? 건강 때문에요?”
카르한은 술을 멀리하게 된 계기를 설명해주었다. 그가 전전했던 전쟁터에서는 군율상 술을 금기시했다. 오랜 기간 동안 술은 마시면 안 되는 것으로 인식해온 탓에, 전역 후에도 자연스럽게 자제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술을 마시는 것은 몇 년 만입니다.”
“이거 조금 독해요. 괜찮겠어요?”
“제가 술은 잘 모르지만, 아직까지 취해본 적은 없습니다.”
외모만 보면 술을 무척 잘 마실 것 같긴 했다. 일리아는 혹시 몰라, 유리잔에 술을 조금만 따라주었다. 달달한 과실주가 채워지고 일리아가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건배해요.”
두 개의 잔이 닿을 듯 말 듯 기울어졌다. 이윽고 카르한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생각보다 독했는지 카르한이 미간을 찌푸린 채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동공이 조금 커졌다.
카르한은 다시 한번 술을 홀짝였다. 아무래도 끝 맛이 달달한 과실주는 카르한의 취향인 듯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술을 곁들여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먼저 먹어보고 맛있으면 서로에게 권하기도 했다. 카르한은 여린 채소와 토마토를 맛있게 먹었다. 채식하는 흑곰 같아서 일리아는 속으로 웃었다.
그때 가게 문이 열리더니 남자 셋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이 맞은편 끝에 앉자, 일리아는 잠시 그쪽에 시선을 두었다가 옮겼다.
탁 트인 공간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하늘 색깔이 조금 더 짙어지는 것을 보며 일리아는 술을 홀짝였다.
무척 평온한 시간이었다. 카르한과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를 편안함마저 느껴졌다. 리하트를 만날 때는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기 때문에 더 그런 걸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친해질 생각이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