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29)
8장
***
리하트 테르시안은 그 좋아하는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고 서재에 틀어박혔다. 오랜만에 책상 앞에 앉은 그는 깃펜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이전에 리하트는 스텔라의 협력을 얻어냈다. 그리고 스텔라가 소개해준 사람을 만났다. 에반테온 공작가에서 일하는 하녀로 스텔라가 돈으로 매수한 여자였다. 지금껏 스텔라는 하녀를 통해 카르한의 일정을 미리 알아내곤 했던 모양이었다.
리하트 또한 블로든 백작가 하인을 매수해본 전적이 있었기에 일은 쉽게 풀렸다. 그는 에반테온 공작가 하녀를 만나며 필요한 정보를 얻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약점을 찾지 못해서 안달 난 상태였다.
하녀는 분명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공작가에서 입단속을 당했는지 쉬이 말해주지 않았다.
리하트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작업을 걸었다. 여자를 유혹하는 것에 능숙한 그는 돈으로 넘어오지 않던 하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국 하녀는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며 신신당부한 후에 입을 열었다.
-공작부인 곁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건데……, 실은 둘째 도련님은 임시 후계자에 불과해요.
-그게 무슨 말이지?
-에반테온 공작가에 장남이 있다는 거, 아시죠?
그 비밀은 리하트가 그토록 찾던 카르한의 약점이었다. 카르한 에반테온은 장남을 몰아내고 후계자 자리를 차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달랐다.
장남은 사고를 치고 외국으로 나간 상태였다. 잠시 후계자 자리를 내려놓긴 했지만,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제국으로 돌아와 공작이 될 것이었다. 심지어 카르한은 가문 내에서도 미운털이 박혀 딱히 힘이 없다는 말까지 전해주었다.
“그렇단 말이지.”
리하트는 입매를 비죽 끌어올렸다. 일리아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했을 때 리하트는 믿지 않았다. 마침 딱 자신보다 신분 높은 카르한 에반테온을 데려온 것이 무척 수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리하트는 일리아가 저를 견제하기 위해 카르한과 모종의 거래를 맺었다고 추측했다.
만약 카르한 에반테온이 빈껍데기라는 것을 알면 어떻게 될까. 적어도 둘 사이의 신뢰는 무너질 것이다.
비집고 들어갈 틈은 충분했다. 리하트는 조만간 일리아를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계획을 매듭지었다.
***
일리아는 옷장에 걸어둔 외투 두 벌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품이 넉넉해 보이는 외투는 옷장 속에서 유독 튀었다.
며칠 전, 일리아는 카르한과 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나 저녁까지 먹고 들어왔다. 그때 카르한이 추위를 타는 저를 위해 건네 준 옷이었다.
일리아는 외투를 꺼내 들었다. 세탁 전이라 그런지 향기가 아직 빠지지 않았다. 어떤 향수를 쓰는지 모르지만 숲에 들어선 것처럼 청량한 향이었다. 묵직하고 독한 향이 아닌, 은은한 시트러스의 잔향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카르한과 묘하게 어울렸다.
향기를 맡으니 그때의 풍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불빛이 점점이 펼쳐져 있던 어둑한 강가. 빨려 들어갈 것 같던 새파란 눈동자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시선이 닿은 곳에 피어오른 열기가 아직도 뿌리를 내리고 있는 듯했다.
‘……술을 마셔서 그런 거지.’
그때 무언가에 홀린 듯했던 기분은 전부 술 때문일 것이다. 일리아는 옷이 구겨질까 싶어, 다시 걸어둔 후에 뒤돌아섰다. 드레스룸에서 나오자, 누군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한 시간 후에 석찬이 있습니다.”
일리아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가족들이 모두 모여 함께 식사하는 날이었다.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일리아는 잠옷을 벗고 간단하게 치장했다.
만찬장에 도착하자, 벌써 자리에 앉아 있는 가족들이 보였다. 일리아는 빠르게 빈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제가 늦었나요?”
“아니다. 딱 맞춰 왔구나.”
클리프가 고개를 내저었다. 일리아는 맞은편에 앉은 헤인리를 보았다.
“오라버니도 일찍 오셨네요.”
“그러게 말이다. 요즘 바쁜 것 같더니.”
클리프가 한마디 거들자, 헤인리는 안경을 추어올리며 대답했다.
“일이 많긴 했는데, 더 빠르게 처리하는 법을 터득했을 뿐입니다.”
“지독한 놈.”
클리프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일리아는 잠시 예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과거에 헤인리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가정교습을 받은 적이 있었다. 가정교사는 무척 깐깐한 사람이었는데 똑같은 성격을 가진 헤인리와 자주 부딪쳤다.
헤인리의 기를 꺾어 놓기 위해 그는 무지막지한 과제를 내주었고, 헤인리는 보란 듯이 하루 만에 끝내놓곤 했다. 심지어 일리아와 놀아주기 위해 일주일 치 숙제를 세 시간 만에 끝낸 적도 있었다. 나중에 그걸 알게 된 부모님은 독종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이제 모두 왔으니 식사할까요?”
비올레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 서 있던 고용인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화려한 접시들이 테이블을 수놓았다. 귀족이라 한들 특별한 날에나 먹을 수 있을 법한 호화로운 음식들이 가득했다. 다들 애피타이저를 먹으며 오늘 있었던 일들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란한 분위기를 지켜보던 일리아는 잠시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가족들은 옅은 미소를 띤 채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은 모두가 함께 식사할 일이 손에 꼽았다. 웃는 얼굴보다 화를 내거나 걱정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더욱 익숙했다. 저 때문에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풍경이라 생각하니, 아쉽고 미안했다. 일리아는 속으로 다시 반성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시 클리프가 애지중지 키우는 순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 후 메인 요리가 올라왔다. 비올레가 헤인리를 힐끗 보며 입을 열었다.
“네게 혼담이 들어왔는데…….”
“거절해주세요.”
“아직 내 말 안 끝났단다. 뭐가 그렇게 급하니?”
비올레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헤인리는 비올레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듣는 시간이 아까우니까요.”
“……정말이지. 누구 고집을 닮았는지.”
그러자 클리프가 조용히 비올레를 바라보았다. 비올레가 가지런히 놓여있던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클리프가 움찔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비올레는 나이프로 우아하게 고기를 썰며 한탄했다.
“결혼도 싫다, 사업도 물려받기 싫다. 정말이지 맞춰주기 어렵구나.”
“역시 셋째를 생각해봐야 할까요?”
클리프가 슬그머니 묻자, 나이프가 고기를 한 번에 갈랐다. 쩍 소리와 함께 그릇이 반쪽으로 갈라지는 것을 눈으로 목격한 클리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기는 누가 낳지요?”
“미안해요. 부인.”
클리프가 곧바로 사과했다. 비올레는 두 동강 난 접시를 치우게 한 후 헤인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긴, 네 성격을 맞춰줄 사람이 없을 테니.”
비올레는 혼자 납득하고 말았다. 헤인리는 어찌나 철저한지, 푼돈을 빌려줄 때도 부모에게 계약서를 쓰게 할 성격이었다.
벌써 서른이 다 되어 가는데도 결혼을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않은 이유도 전부 헤인리의 성격 탓이 컸다. 헤인리의 부인이 될 사람이 사기 결혼이라며 소송을 걸지도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일리아에게 데릴사위를 데려오라 하고 싶지만…….”
비올레가 말을 흐렸다. 일리아와 교제하고 있는 카르한은 에반테온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미래의 공작이 될 사람을 데릴사위로 들어앉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저나 요즘 소공자는 만나고 있니?”
“며칠 전에 만났어요.”
일리아의 대답에 모두가 시선을 보내왔다. 다들 카르한에게 무척 관심이 많았다.
“저번에 배웅하지 못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상처는 어떻고?”
“물어보니, 흉터 없이 잘 아물었대요.”
“다행이구나.”
일리아는 고개를 살짝 들어 비올레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처럼 평온했다.
이전에 카르한을 저택에 초대한 후로 가족들은 그를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판단 내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아직까진 카르한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이 분명했다.
비올레가 일리아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후계자 수업으로 많이 바쁠 텐데 만날 시간이 있니?”
“성실해 보이던데 어련히 잘 하겠지요.”
일리아가 아닌 클리프가 빠르게 대답했다. 조용히 식사하던 헤인리가 비올레의 말을 받았다.
“고작 한 번 만났으니, 성실한 척 연기하는 걸지도 모르죠.”
“딱히 그런 것 같진 않던데.”
다들 가만히 클리프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이러냐는 시선에 클리프가 흠칫했다. 아무래도 너무 대놓고 카르한을 두둔한 모양이었다. 클리프는 재빨리 변명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니까…….”
“소공자와 만났어요?”
비올레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클리프는 테이블을 탁, 내리치며 소리쳤다.
“내가 소공자와 사적으로 만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우리 딸을 데리고 갈 놈인데! 만나 달라고 부탁해도 안 만나 줄 겁니다.”
괘씸하다며 클리프는 과하게 흥분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 모습을 본 비올레와 헤인리는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뭐……, 그래요.”
클리프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아무래도 다음에 카르한과 오케스트라를 관람할 때는 변장이라도 해야 할 듯싶었다. 이렇게 취미가 잘 맞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운데, 하필이면 딸의 남자친구라니.
클리프는 대화 주제를 바꾸려고 애썼고, 어느덧 이야기는 헤인리에게 넘어갔다. 반듯하고 매끄럽게 고기를 썰던 헤인리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승진할 것 같습니다.”
“뭐, 벌써?”
“상사가 내어주는 일을 전부 처리했더니, 실적이 많이 쌓여서요.”
“축하해요, 오라버니.”
일리아는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나이에 비해 이례적인 승진이었기에 가문의 경사였다.
“축하한다.”
“고생했구나.”
축하 인사를 건넨 비올레와 클리프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사업은 누가 물려받을지…….”
“지금부터 전문 경영인을 찾아봐야 할까요.”
한탄 섞인 말투에 일리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부모님은 제게 사업을 물려줄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일리아가 지금껏 욕심을 낸 적도 없었고, 리하트와 결혼한 후에는 후작부인으로서 본분에 충실할 거라 못 박아두었기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입술만 달싹였다. 이제 와서 경영에 참가하고 싶다고 말하기엔 너무 늦은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계속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비난 받더라도, 의견은 내고 싶었다. 카르한에게 의견을 표출하라 말해놓고 정작 자신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면 우습지 않은가.
일리아는 식기를 내려놓았다. 언뜻 비장해 보이는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일리아에게 향했다. 일리아는 가족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사업을 잇고 싶어요.”
일리아의 발언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사업을 잇고 싶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클리프가 물었다. 비올레 또한 클리프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가족들의 반응에 일리아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긴장해서 그런지 손바닥이 조금 축축해졌다.
‘역시 너무 성급하게 말한 것일까.’
아직 가족들의 신뢰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사업을 잇겠다고 하니 반길 리 없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생각보다 속이 따끔거렸다.
조용해진 만찬장 속에서 일리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냥 장난이라고, 잠시 헛소리를 해본 거라고 말할까 고민되었다.
하지만 역시 그러고 싶진 않았다. 절대 가벼운 마음으로 내뱉은 것이 아니었다. 고심 끝에 내뱉은 진심이었기에 철회하고 싶지 않았다. 일리아는 다시금 각오를 다지며 고개를 들었다.
“많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저는 오라버니처럼 뛰어나지도 않고…… 배운 것도, 해둔 것도 없으니까요.”
리하트와 연애하던 시절에는 좋은 부인이 되고 싶어 신부 수업을 받았다. 부모님은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반대하진 않았다. 그것이 일리아가 선택한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해보고 싶어요.”
일리아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잠시 아무 말 없던 비올레와 클리프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헤인리 또한 식기를 내려놓고 일리아만 쳐다보았다. 비올레가 세 사람을 대표하여 일리아에게 물었다.
“아니……, 언제부터 사업에 관심이 있었니?”
“이전부터 관심을 두었는데, 사업을 물려받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최근이에요.”
“결혼은 어쩌려고?”
“결혼은…….”
일리아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리하트 이후로 일리아는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카르한과는 계약 연애일 뿐, 일 년 후 목적을 이룬 후 헤어지기로 했다. 연애는 하되, 결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대답하려 했다.
그때 불쑥 카르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를 바라보던 눈빛이 생각나서 일리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말했다.
“……아직은 생각 없어요.”
비올레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 혼기가 찼다고 꼭 결혼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
클리프가 들떠서 한마디 덧붙였다. 잠자코 있던 헤인리 또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공작부인이 되면 골치 아픈 일이 많을 거다. 사교계에 여우가 몇 마리나 들어앉아 있는지…….”
다들 이때만을 기다린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사업 이야기에서 결혼으로 주제가 넘어간 것 같아서, 일리아는 화제를 다시 돌렸다.
“그래서 사업을 제가 잇고 싶은데…….”
“그렇게 하렴.”
비올레가 흔쾌히 승낙했다. 일리아는 자신이 사업을 잇는 게 아니라, 간식을 먹고 싶다고 말했던가 하고 잠시 고민했다.
“……정말 괜찮아요?”
“하기 싫다는 놈을 억지로 앉혀놓을 수는 없지 않니.”
비올레가 헤인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헤인리는 못 들은 척 다시 식기를 들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고집은…….”
“이쯤 되면 설득을 포기하실 때가 된 것 같은데요.”
헤인리가 받아치자, 비올레의 손등에 힘줄이 솟았다.
“일리아가 사업을 물려받는다고 하니, 이제 네게 물어볼 일은 없단다.”
얼떨떨해진 일리아는 눈만 깜빡였다. 나름 많은 고민 끝에 내뱉은 의견이었다. 아무리 부모님이 저를 오냐오냐 한다 해도, 이렇게 바로 허락받을 줄은 몰랐다. 비올레가 고개를 돌려 다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네가 뭔가 하고 싶다 말하는 건 오랜만이구나.”
“…….”
“하지만 단순한 각오만으로는 안 돼.”
비올레의 연녹색 눈동자가 일리아를 가득 담았다.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도망치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겠니?”
제국 곳곳에 손을 뻗친 블로든은 이렇다 할 경쟁 상대가 없을 정도로 커진 상태였다. 그 말인즉 블로든 가문 하나에 수많은 이들의 사활이 걸려 있다는 것이었다. 벌써부터 어깨가 무거웠다.
막중한 책임감이 일리아를 짓눌러왔다. 지금이 발언을 철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잠시 말이 없던 일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맹세할게요.”
비올레는 일리아의 눈을 통해 다짐을 확인했다.
“일단은 그걸로 됐다. 사업가로서의 자질도 따져봐야 할 테고. 천천히 생각해보자꾸나.”
비올레의 말에 일리아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우리 딸이 이렇게나 커버렸다니…….”
지켜보던 클리프가 손수건 대신 냅킨으로 눈물을 콕콕 찍었다. 아장아장 걷던 것이 어제 같다며 그가 냅킨을 쥐어짤 기세로 움켜쥐었다. 유독 조용히 있던 헤인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힘들면 말해라. 도와줄 테니.”
일리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리하트를 만난 후로 항상 반대하던 모습만 봐서 그런지, 자신의 말에 긍정해주는 헤인리가 낯설었다.
일리아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한참 망설인 이유는 헤인리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그가 물려받을 자리인데, 자신이 빼앗게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오라버니는 괜찮아요?”
“네가 내린 결정이니, 잘 하겠지.”
“……아니, 그거 말고요.”
“그것 말고 뭐가 있지?”
헤인리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말로 사업에 개미 눈물만큼의 미련도 없는 듯했다. 도리어 짊어진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해 보였다. 그제야 일리아는 마음이 편해졌다. 밝아진 일리아의 얼굴을 본 헤인리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내 눈치를 볼 필요는 없어. 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지.”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고마워요.”
가족들의 응원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
일리아는 간만에 외출을 했다. 아버지의 부탁으로 그림을 구입할 계획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시켜도 되지만, 일리아와 클리프는 안목이 비슷했다. 덕분에 클리프가 다른 일로 급할 때 일리아가 직접 가서 그림을 고르곤 했다.
마차에 올라탄 일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요 근래에는 카르한을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이제 자기주장도 제법 하고, 주변 사람들도 그를 무섭다고 느끼지 않으니 이전처럼 꼬박꼬박 만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왠지 카르한이 바쁠 것 같아서 일부러 약속을 잡지 않았다.
계속 만나다가 일주일 넘게 만나지 않으니, 왠지 허전했다. 문득 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일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나중에 헤어져야 할 사람인데 벌써부터 정 들어버리면 어쩌려고.’
아무래도 적당히 거리를 두어야 할 듯싶었다.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예약해둔 갤러리로 향했다. 그때 옥신각신 싸우는 두 남녀가 보였다. 갤러리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꾀죄죄한 옷을 입은 여자였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제 그림을 봐주세요.”
“아, 됐고 당장 나가요. 우리는 무슨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아나.”
주인이 여자를 거칠게 밀어냈다. 그러나 여자는 두 다리로 버틴 채 애원했다.
“여기가 마지막이에요.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작품이 별로라면 자신도 포기하겠다며, 여자가 품에 안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싸구려 신문지로 감싼 얄팍하고 네모난 물건이었다. 아무래도 나무판을 신문지로 돌돌 감싼 모양이었다. 갤러리 주인은 여자가 내민 물건을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
“안 봐도 형편없을 게 분명할 텐데, 시간 아깝게! 썩 꺼지지 않으면 경비대를 부르겠소!”
재수 없다는 듯 그가 침을 뱉었다. 매몰차게 문이 닫히고, 여자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다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나무판을 주웠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한참 그러고 있다가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본 일리아는 무척 불편해졌다. 갤러리 주인의 입장은 이해되었다. 그는 장사하는 사람이니 상품성 있는 작품을 판매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저렇게까지 사정하는데 잠깐 정도 시간을 내어 작품을 봐줄 수는 있지 않나. 심지어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작품일 텐데, 바닥에 내팽개치고 침을 뱉다니. 작품 하나하나를 존중하는 아버지가 보시면 노발대발할 일이었다.
유리 문 앞에 서서 여자가 갔는지 살피던 갤러리 주인이 일리아를 보고 뛰쳐나왔다. 방금 그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두 손을 싹싹 비비며 그가 환히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블로든 님.”
일리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약 취소할게요.”
“예……?”
“구입하고 싶은 작품이 없을 것 같아서요.”
작품을 오직 돈으로만 취급하는 갤러리는 안 봐도 뻔했다.
“그, 이번에 좋은 작품을 많이 들여왔는데…….”
당황한 주인은 혹시 자신이 일리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나 싶어 절절맸다.
일리아는 이런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해지는 사람. 순간 리하트를 떠올린 일리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부드럽고 상냥하기만 하던 얼굴이 싸늘해지자, 주인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러다가 귀한 손님을 아주 놓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 다음에 꼭 찾아와주십시오!”
그가 굽실거리며 일리아를 배웅해주었다. 그러나 다시는 블로든 가문 사람이 저 갤러리를 방문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일리아는 곧바로 걸음을 돌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아까 봤던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분명 저 여자는 문전박대 당하는 것이 처음은 아닐 터였다. 남루한 옷차림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번번이 퇴짜를 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꾸준히 문을 두드리는 그녀의 끈기가 싫지 않았다. 저런 사람은 과연 어떤 작품을 그릴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한 번이라도 기회를 주고 싶었다.
일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의 행동이 적선하는 것처럼 보이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일리아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말렉이 조용히 말했다.
“아가씨의 결정이 저 사람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일지도 모르지요.”
“……고마워.”
결국 일리아는 여자를 쫓아갔다.
“잠시만요.”
일리아의 부름에 여자가 멈춰 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얼굴을 본 일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장료 때문에 미술관 앞에서 머뭇거렸던 그 여자였다.
“……누구세요?”
여자가 눈을 깜빡이며 묻자 일리아는 아차 싶었다. 생각해보니 저만 일방적으로 아는 사이였다. 잠시 망설이던 일리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아까 갤러리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그 장면을 보게 되었어요. 혹시 그림을 그리시나요?”
그녀는 기운 없이 대답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