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3)
“블로든 님!”
어찌나 급히 뛰어왔는지 얼굴이 벌겠다. 그러나 그는 숨도 돌리지 않고, 일리아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 매입 증명서입니다. 다른 필요한 서류는 저택으로 보내겠습니다. 제 서명은 마쳤으니, 블로든 님만 서명하시면 됩니다.”
일리아가 손바닥을 내보이자, 프란체가 휴대용 잉크펜과 종이를 덧댈 수 있는 나무판을 건네주었다.
일리아는 나무판에 종이를 대고 서명을 끝냈다. 그리고 품에서 백지 수표를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시세보다 두 배를 주시다니, 배포가 대단하십니다.”
남자는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점원이 당황한 얼굴로 남자를 불렀다.
“사, 사장님?”
“어허, 지금부터 나는 사장이 아니니 그렇게 부르지 마라.”
“……예?”
“사장님은 이쪽이니까.”
남자가 일리아를 가리켰다. 점원이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일리아는 프란체에게 나무판과 잉크펜을 건네며 점원에게 말했다.
“이제 내가 사장이니까, 가격은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겠죠?”
마치 과자 하나를 산 것처럼 덤덤한 말투였다.
점원의 입술이 점점 벌어지더니, 금방이라도 턱이 빠질 것 같았다. 일리아는 아까 150크로엘을 불렀던 물건을 손에 쥐었다.
“나는 60크로엘로 하고 싶은데, 불만 있나요?”
“그…….”
점원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상황을 따라잡지 못한 듯했다.
“왜 말이 없어요?”
“아, 아닙니다.”
정말로 일리아가 가게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점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일리아는 점원에게 손짓했다.
“뭐 해요? 일 안 하고. 가격표부터 새로 작성하세요.”
멍하니 서 있던 점원이 그제야 움직였다.
“먼지가 많으니 청소도 좀 하고요.”
일리아는 허둥대는 점원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차피 오늘 치 일급은 줘야 할 테니, 잡일은 다 시켜둔 뒤에 해고할까.’
일리아는 제 가게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어떤 사람은 생각 없이 헛돈을 쓴다며 나무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건 일리아를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일리아가 손을 댄 것은 결국 돈이 되었다. 한 컵을 퍼내면 양동이째 다시 채워졌다. 오늘 쓴 돈도 몇 배로 채워질 터였다. 오르골 가게가 갑자기 대박이 나거나, 막말로 여기서 금맥이 터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게를 살피던 일리아가 멈칫했다.
‘아참. 그 남자.’
분명 호구 잡힌 사내를 도와주려고 나섰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고개를 돌린 일리아가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한 걸음 물러나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마치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몸짓 같았다. 아무래도 평소에 외모 때문에 오해를 많이 사는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제 손님과 손님이 아니라, 사장과 손님 사이가 되어버렸다.
“음……. 어서 오세요……?”
일리아의 인사에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위협적인 표정이라고 판단했는지 프란체가 나서려 했다.
“프란체, 나가 있어.”
“……예.”
하지만 일리아의 말에 프란체는 바로 꼬리를 말고 터덜터덜 가게를 나갔다. 전면 유리창을 통해, 가게 밖에서 프란체와 말렉이 사내를 노려보는 것이 보였다.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일리아는 사내를 유심히 살폈다. 미간을 찌푸렸지만, 무섭진 않았다. 위협적이지도 않았고, 불쾌한 느낌도 없었다. 아무래도 당황하면 인상을 쓰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까 끼어들어서 미안했어요. 정신없었죠?”
“……아닙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정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정중한 말투였다. 일리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언했다.
“저런 사람은 한번 받아주면 계속 밀어붙이니까, 딱 잘라 거절하는 게 좋아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사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거절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의 어깨가 축 처졌다. 마치 시무룩한 흑곰 같았다.
얼굴만 봐서는 칼같이 거절 잘하게 생겼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일리아는 빠르게 반성했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었다. 자신만 봐도 다들 착하고 만만할 거라고 착각했다.
“오르골 사러 오셨으면 제가 추천해드릴까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척 예의 바른 태도에 일리아는 속으로 웃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흔치 않은 남자였다.
일리아는 음악 취향을 물어본 후에 이것저것 추천해주었다. 그때마다 그는 대단한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다.
“선물하는 거죠?”
일리아가 반쯤 확신을 담아서 묻자, 사내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것도 괜찮아요. 호불호가 덜한 편이거든요.”
사내는 일리아가 소개해준 오르골을 찬찬히 살폈다. 신중하게 고르던 그가 작은 오르골 하나를 집어 들었다.
태엽을 돌리니, 맑고 통통 튀는 음악이 들려왔다. 딱딱하기만 하던 사내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일리아는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줄 건가 보네.’
그리고 일리아는 자연스럽게 리하트를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일리아의 얼굴을 본 사내가 움찔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제가 시간을 많이 뺏은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오해한 모양이라, 일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사내는 눈치 보더니 사려고 했던 물건을 계산대에 올렸다.
일리아는 사장의 권한으로 원래 금액보다 좀 더 저렴하게 가격을 깎아주었다. 그런 후에 가족들에게 선물하려고 봐두었던 오르골을 집어 들었다.
계속 가게에 있을 수는 없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가게는 이전 사장에게 며칠간 맡기고, 조만간 따로 점원을 고용할 계획이었다. 일리아가 가게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사내가 불러 세웠다.
“저기.”
“네?”
“적은 금액이지만…….”
일리아는 제게 내밀어진 금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지……?
금화를 확인한 일리아가 고개를 들어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뭐예요?”
“사례금입니다.”
뜻밖의 말에 일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웬 사례금?
설명하라는 시선에 사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물건을 추천해주시기도 했고…….”
“사장이 손님한테 물건 추천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아까 직접 나선 이유는 그저 호의를 베풀기 위함이었다. 보답을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물건 값도 깎아줬더니, 왜 이래?’
선의가 빛바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한테 돈으로 사례하려고 한 사람, 당신이 처음이에요.”
일리아의 말에 그가 움찔했다.
“사양할게요.”
“그럼 다른 거라도…….”
사내가 물러서지 않자, 일리아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가게 문을 열며 일리아가 말했다.
“돈은 필요 없어요.”
문이 열리자, 가게 앞에 세워진 마차가 보였다. 마차를 확인한 사내의 눈동자가 커졌다.
질 좋은 가죽과 보석으로 치장된 마차는 황족이나 탈 법했다. 마차를 이끄는 네 마리의 말은 한눈에 봐도 명마였다. 깃발에는 코흘리개 꼬맹이도 안다는 블로든 가문의 인장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일리아가 마차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디며 그에게 속삭였다.
“나는 블로든이거든요.”
얼빠진 남자를 뒤로한 채 일리아는 가게를 완전히 벗어났다.
“집으로 돌아가자.”
일리아의 말에 프란체와 말렉이 빠르게 달라붙었다. 그들은 꼼짝하지 않는 사내를 노려본 후에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마차에 올라타자, 창문 너머로 사내가 보였다. 일리아는 멍하니 마차를 바라보는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고, 커튼을 쳐버렸다. 어차피 다시 볼 사람도 아니니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순식간에 피로가 몰려왔다. 생각해보니 하루 종일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돌아다녔다.
은행도 들르고 쇼핑도 하고…….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씩 떠올리던 중, 문득 점술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늘 서쪽으로 가보세요.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좋은 일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니 가게를 하나 사긴 했다.
‘아무래도 그 가게가 나중에 잘될 건가 보다.’
일리아는 대충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마차는 번화가를 가로질러 수도 남쪽에 위치한 블로든 백작가로 향했다. 부지가 워낙 커서, 거대한 대문을 통과하고 나서도 한참을 달렸다.
창밖으로 돈과 정성을 다해 꾸민 정원이 스쳐지나갔다. 길 양옆으로는 높이를 맞춘 관목들이 늘어서 있었다.
실타래처럼 이어진 관목이 끊기자, 분수대가 놓인 원형의 공터가 보였다. 아기천사 셋이 둥근 그릇을 받쳐 들고 있었고, 그곳에서 끊임없이 물이 차올랐다.
비산하는 물방울이 노을빛을 받아 붉게 빛났다. 리하트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도 꼭 저렇게 선명한 적색이었다. 특히 햇빛을 받으면 불에 타오르는 것처럼 강렬했다.
‘그만 생각하자.’
쓸데없는 생각에 일리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오랫동안 사귄 연인이었던 만큼, 리하트는 일리아에게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써도 끝끝내 비집고 들어왔다. 리하트를 완전히 잊으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모양이었다.
마차는 어느새 현관 앞에 도착했다. 프란체가 마차 문을 열고, 일리아는 말렉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 일리아는 현관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짙은 금발과 은테 안경 속에 가려진 연녹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
“오라버니……?”
그는 일리아의 오라버니인 헤인리 블로든이었다.
***
헤인리 블로든.
그는 블로든 가문의 장남으로, 아카데미에서 늘 수석을 차지하는 수재였다. 아카데미를 조기 졸업한 후에는 공직에 올라, 황궁에서 일하고 있었다.
상냥한 얼굴과 달리 매서운 독설을 날리기로 유명한 그였지만, 오직 여동생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오라버니였다.
어릴 적, 헤인리는 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해 어린 동생을 업어 키웠다. 나이 차이도 제법 나는 탓에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어찌나 아꼈는지, 동생이 걱정된 나머지 아카데미 입학도 늦출 정도였다.
그런데 헤인리의 여동생인 일리아에게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어디서도 듣도 보도 못할 특별한 운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일리아가 태어난 후로 부모님은 하는 사업마다 성공을 거뒀고,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유산까지 굴러 들어왔다.
일리아가 산책을 나가서 주워온 돌멩이가 엄청나게 비싼 보석이었다거나, 복권을 샀는데 1등 당첨이 되었다는 것은 무척 소소한 이야기였다. 수많은 일화 중 가장 전설적이라 할 만한 것은 역시 금맥이었다.
오래 전 여름 별장을 짓기 위해 가족들이 모두 땅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여기는 어떠니?
-구경할래요.
어머니의 물음에 일리아는 혼자 타박타박 걸어갔다. 한참 걷던 일리아는 다리가 아프다며 뒤돌아섰다.
일리아의 운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부모님은 일리아가 걸은 곳까지만 땅을 사들였다. 그리고 별장을 지으려고 터를 다지다가 금맥이 터졌다. 매장된 금이 얼마나 많은지, 지금도 캐는 중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옆 땅 주인도 열심히 파고 뒤집었지만, 아무것도 건질 수 없었다. 정확하게 블로든 백작가가 산 땅에만 금맥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블로든 백작가는 제국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신은 일리아에게 재물운을 준 대신에, 남자를 보는 눈은 주지 않았다. 리하트 테르시안을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리하트는 헤인리의 직속 상사인 테르시안 후작의 아들이었다. 일리아가 연인이라며 리하트를 소개하자마자, 헤인리는 결사반대했다. 집안만 믿고 노력도 하지 않을뿐더러, 방탕하게 논다고 소문이 난 놈이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테르시안 후작만 보아도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놈은 안 돼.
헤인리는 일리아에게 헤어지라고 열심히 설득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을까. 일리아는 마치 비련의 연인처럼 리하트에게 더욱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약혼까지 하겠다고 했을 때, 헤인리는 처음으로 화를 냈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상처받은 일리아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너무 심하게 말했나 싶었지만, 그때는 약혼을 막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일리아의 고집은 대단했다. 가족들 중 누구도 일리아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결국 일리아는 가족들의 반대에도 리하트와 약혼식을 치르고 말았다.
헤인리는 답답하고 야속한 마음에 이전처럼 일리아를 대할 수 없었다. 싸늘한 태도와 차가운 말이 자꾸 튀어나왔다.
일리아는 그런 그를 멀리했고, 둘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하지만 헤인리는 그 이후로도 일리아의 소식을 꾸준히 전해 들었다. 대부분 화병이 날 것 같은 소식이었으나, 화를 냈다간 사이가 더 틀어질까 싶어서 인내했다.
그리고 이번에 리하트와 크게 싸운 모양인지, 일리아가 울면서 저택으로 돌아왔다. 무려 한 달 가까이 침실에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았다.
사람을 시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았지만, 자세히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리하트와 연관된 일이라는 추측만 할 수 있었다.
사이가 틀어졌다 해도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리아 생각에 온통 사로잡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