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30)
“네……. 하지만 작품 발표도 해본 적 없어요. 위탁하고 싶어도 번번이 쫓겨나기만 하고.”
“…….”
“아무래도 그림 그리는 걸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그만둔다니…….”
일리아가 무척 안타까워하자, 여자는 머뭇거리다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얼마 전에 운 좋게 전시회에 다녀왔는데, 거기서 신인들의 그림을 봤어요. 세상에 잘 그리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고요.”
아무래도 전시회에 갔다가 화려한 작품들을 보고 기가 많이 죽은 모양이었다.
“저는 그런 물감을 살 형편도 안 되고, 단조롭고…….”
이런 사소한 이야기까지 하는 게 부끄러웠는지 그녀의 뺨이 붉어졌다.
일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묻지 않아도 형편이 뻔히 보였다. 누군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갈 처지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망설임 끝에 결정을 내렸다. 만약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다면 클리프가 운영하는 아틀리에를 추천해줄 생각이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림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제 그림을요?”
“네. 안 될까요?”
“그게 아니라, 이런 게 처음이어서…….”
목탄화인데 괜찮으냐고 여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한 명의 관객을 위해 조심스레 신문지를 벗겼다. 그러자 나무판 위에 검은색 목탄으로 그림을 그린 종이가 드러났다.
“!”
그림을 본 순간, 일리아는 숨이 턱 막혔다. 무척 거칠고 파격적이었다. 마구잡이로 뻗어나간 굵직한 선들은 늑대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그림 속 늑대가 금방이라도 힘 있게 달려 나갈 것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릿해지더니 솜털이 오스스 솟았다. 길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일리아는 한참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일리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가 멋쩍어하며 말했다.
“역시 많이 미숙하죠? 사실 유화가 전공이었는데, 물감은 너무 비싸서…….”
일리아가 고개를 홱 들어올렸다. 깜짝 놀란 여자가 상체를 젖혔다.
“유화가 전공이라고요?”
“네? 네. 지금은 목탄으로 그리는 게 전부지만…….”
“맙소사.”
대박이었다. 지금도 훌륭하지만, 여기서 전공을 살리면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화가가 될 터였다. 일리아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랑 계약해요!”
***
바네사는 평민이지만 유복한 가정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가족들은 바네사의 재능을 알아보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바네사는 가족들의 응원과 지원을 날개 삼아, 꿈을 향해 비상했다.
그러나 열다섯이 되기도 전, 그녀의 집안은 쫄딱 망해버렸다. 부모님이 연대보증을 잘못 선 탓이었다. 근방에서 가장 번듯했던 집은 경매로 넘어가고, 빚쟁이에게서 도망쳐 정착한 곳은 빈민가였다.
부모님은 빚을 갚기 위해 먼 타지로 떠났다. 바네사는 어린 두 동생을 돌보며 하루하루 끼니를 때워야 했다.
그럼에도 바네사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낮에는 근처 식당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그림을 그렸다. 번듯한 재료 하나 없었지만, 숯과 목탄을 구해 그림 연습을 계속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바네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형편은 더더욱 나빠지기만 하는데, 그림으로 먹고살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놓아야 했다.
그때 바네사는 수도에서 큰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전시회를 관람해보기로 결심했다.
막상 미술관 앞에 도착하고 보니 입장료가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얼마 되지 않는 돈이었지만, 바네사에게는 선뜻 쓸 수 없는 금액이었다. 망설임 끝에 뒤돌아섰을 때, 전시회 직원이 외쳤다.
-천 번째 손님은 무료입장입니다.
집안이 망한 후로 악운만 가득하던 바네사에게 천운이 떨어진 것이었다. 무료로 미술관에 입장하게 된 바네사는 신인들의 작품을 보았다. 비싼 물감을 아낌없이 쏟아 부은 작품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칙칙하고 낡은 옷을 입고 있는 저 자신이 초라해졌다. 전시회를 다녀온 바네사는 전부 포기해버릴까 고민하다가, 정말 마지막 도전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날 후로 바네사는 무턱대고 갤러리를 순회하기 시작했다. 운이 좋으면 정중하게 거절당했고, 나쁘면 욕설을 듣고 경비병에게 끌려 나갔다. 공통점은 그 어디도 바네사를 환영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갤러리를 도는 동안 반복된 거절과 멸시는 그녀의 자존감을 문드러지게 하였다. 남은 것은 혹시나 하는 희망의 씨앗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갤러리에 도착했을 때 바네사는 생각했다.
‘이곳에서도 거절당하면 작품은 전부 태우고, 생업에 매달리자.’
바네사는 갤러리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비난과 욕설만이 돌아왔다. 품고 있던 씨앗마저 도려내졌을 때, 바네사는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바네사는 집으로 돌아가 작품을 태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누군가가 바네사를 불렀다.
“잠시만요.”
고개를 돌리자 부드러운 금발에 맑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아가씨가 보였다. 훤칠한 남자 두 명을 대동한 데다가 귀티가 흐르는 것이 척 봐도 귀족 영애로 보였다. 사랑스러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바네사가 뒤늦게 물었다.
“……누구세요?”
그러자 그녀는 아까 갤러리 앞에서 있었던 일을 보았다고 대답했다. 그림을 그리느냐는 물음에 바네사는 답답한 나머지 처음 보는 여자에게 자신의 사정을 줄줄 말해버렸다.
가만히 듣기만 하던 그녀가 작품을 보여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은 부끄러운 작품이었기에 망설여졌다.
‘어차피 집에 가서 태울 건데, 한 명이라도 보여주는 게 낫지.’
그렇게 생각하니 못 보여줄 것도 없어졌다. 바네사는 자신이 그린 목탄화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한참 말이 없다가 바네사의 손을 덥석 잡고 소리쳤다.
“나랑 계약해요!”
바네사는 잠시 잘못 들은 것 같아서 눈을 깜빡였다.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어디 좀 앉아서 이야기해요.”
바네사는 그대로 끌려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근방의 고급 찻집에 앉아있었다. 메뉴판을 확인한 바네사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차 한 잔 값이 두 끼 식비보다 비쌌다.
“제가 살게요. 부담 가지지 말아요.”
“……감사합니다.”
바네사는 내세울 자존심도 없었다. 감사 인사 한 마디에 돈을 아낄 수 있다면 싸게 치는 것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바, 바네사예요.”
“예쁜 이름이네요.”
그녀가 싱긋 웃었다. 자신을 일리아라고 소개한 그녀가 제안을 줄줄 내뱉었다.
“괜찮다면 저와 계약을 맺지 않겠어요?”
“계약이요……?”
“그림 재료나 화방 같은 지원은 원하는 만큼 해줄 수 있어요. 계약금은 선금으로 지불하는 쪽으로 하고요.”
엄청난 제안에 바네사는 입만 벌렸다. 무명인 제게 그런 제안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째서 저를 선택하신 건가요?”
“작품이 무척 마음에 들었거든요.”
명쾌한 대답이었다. 바네사는 떨리는 눈으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천사처럼 상냥한 외모에 순간 혹할 뻔했다.
……혹시 사기꾼은 아닐까. 세상은 넓고 험하니 이렇게 사랑스러운 얼굴을 한 사기꾼도 분명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바네사는 사기 당한다고 해서 더 잃을 것도 없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면…….”
“며칠 후에 다시 만날까요?”
“아, 아니에요. 잠깐이면…….”
일리아가 이대로 떠나 버릴까 봐 바네사는 다급히 외쳤다. 일리아는 그렇게 하라며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고작 차를 마시는 것일 뿐인데도 우아했다.
그 모습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바네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앞으로 제게 이런 기회가 오기는 할까. 모두가 무시하던 제 작품을 좋다고 해준 사람은 가족들을 제외하고 일리아가 유일했다.
“그……, 제가 돈이 없는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당연하죠.”
일리아가 생긋 웃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바네사는 처음으로 일리아와 눈을 마주했다.
“계약 하고 싶어요.”
목소리 끝이 형편없이 떨린 것 같았다.
“프란체.”
일리아가 손바닥을 내밀며 누군가를 불렀다. 곧바로 푸른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펜과 종이를 건네주었다.
그것을 건네받은 일리아는 좀 더 나이 있어 보이는 감색 머리카락의 남자를 불렀다. 귓속말로 뭐라고 전달하자, 그가 바로 자리를 떴다. 프란체라 불린 남자만이 정자세를 한 채 호위를 섰다.
“임시 계약서예요. 선금은 얼마 정도를 원해요?”
바네사는 고민했다. 자신도 염치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림에 매진하게 되면 식당 일을 하지 못할 것이었다.
동생들이 빵집 사장과 안면을 터서 운 좋게 배를 곯지는 않지만, 다달이 나가는 생활비가 있었다. 한창 클 동생들 때문에 돈 나갈 구석이 많았다. 바네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1500크로엘이요.”
“1500……?”
말도 안 된다는 일리아의 반응에 바네사가 눈치 보았다. 역시 식당에서 일하는 두 달 치 월급을 한 번에 받는 것은 너무 염치없었나 보다. 바네사가 서둘러 정정하려 할 때, 일리아가 말했다.
“너무 적잖아요.”
“……네?”
너무 적다니. 나름 큰마음을 먹고 지른 금액이었다.
일리아는 내가 그렇게 쫌생이로 보였나,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테이블을 탁 내리치며 말했다.
“150,000크로엘로 하죠.”
엄청난 금액에 바네사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정확히 자신이 부른 금액의 100배였다. 상상을 뛰어넘는 금액에 바네사가 얼어붙었다. 그러자 일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제안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럼 300,000크로엘?”
“……헉!”
바네사는 놀란 나머지 숨을 크게 들이켰다. 평생 접시를 닦아도 벌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액수였다. 바네사의 반응을 본 일리아가 품에서 백지 수표를 꺼냈다. 금액을 적고 유려한 필체로 서명한 후 수표를 내밀었다.
“은행에 가면 신원 확인 후에 돈을 내어줄 거예요. 계약금은 작품 판매 수익에서 제하지 않을게요.”
그냥 주는 돈이란 말이었다. 백지 수표를 받은 바네사는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는 나머지 뻥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펜을 다시 쥔 일리아는 조건을 하나씩 내세웠다.
“작품은 찍어내는 게 아니니까 제작 기간은 따로 정해두지 않을 거예요. 대신 계약 기간은 3년으로, 사전에 합의 없이 다른 의뢰는 받을 수 없어요.”
바네사는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일리아는 작품으로 얻을 수익의 배분과 전시회까지 설명해주었다. 당장 생각나는 것들을 전부 말했는지 일리아가 무척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전부 조율할 수 있으니 언제든 말해요.”
“제가…… 계약 기간 동안 그림을 안 그리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바네사가 울상을 지었다. 거금을 받았는데, 일리아를 만족시킬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괜찮아요. 그땐 이 그림을 받아 가면 되니까.”
일리아는 바네사의 목탄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임시 계약서긴 한데, 결정을 내렸다면 하단에 서명하세요.”
일리아가 이름 적는 부분을 손끝으로 짚어주었다. 바네사는 심호흡만 계속 내뱉었다. 너무나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이게 모두 꿈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바네사는 눈을 질끈 감고 이름을 적었다.
계약서를 집어 든 일리아는 사냥감을 포획한 사냥꾼처럼 무척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계약서 쓰는 동안 급하게 아틀리에를 준비 시켰어요. 마침 다 되었다고 하니, 함께 가볼래요?”
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네사도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바네사는 일리아를 뒤따라 걸었다.
번잡한 번화가를 지나 말끔한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를 지났다. 평소에 다니던 거리와 비교하자니 행인들의 행색부터 달랐다. 말쑥한 차림새에 열심히 꾸민 티가 났다. 하지만 일리아만큼 귀티 나는 사람은 없었다.
일리아는 화방과 아틀리에가 가득한 거리로 들어섰다. 그 중 가장 크고 세련된 건물로 들어갔다. 1층은 화구를 파는 화방이었고, 2층으로 올라가니 뛰어다녀도 될 정도로 넓은 아틀리에가 나타났다.
바네사는 처음 도시에 와본 시골 쥐처럼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제 자리는 어디인가요? 구석에서 그리면 되나요?”
“원하는 자리에서 그리면 돼요. 혼자 사용할 방이니까요.”
“저 혼자요……?”
이렇게 넓고 좋은 아틀리에를?! 바네사가 입만 떡 벌리자,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아래층 화방에서 가져오도록 해요. 위층은 휴식 공간이에요. 전부 당신을 위한 거니까 마음대로 쓰도록 해요.”
엄청난 발언에 바네사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바네사는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이 모든 것을 고작 한두 시간 만에 제게 안겨줄 재력이라니…….
바네사는 조금 두려운 눈으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사기꾼은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결국 바네사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건물주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건물이 열 개쯤 있다 해도 말이다. 그리고 일리아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대답해주었다.
“아직 딱히 하는 일은 없고…….”
무직이란 말인가……?
“제 가문이 블로든이에요.”
바네사는 놀란 나머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
카르한은 오랜만에 외출할 채비를 시작했다. 간만에 일리아와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항상 일리아가 약속을 정해주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만나자는 연락이 없었다. 어찌나 감감무소식인지 테시온이 서신을 보내보자고 채근할 정도였다.
카르한 또한 용기를 내어 먼저 만나자고 말해볼까 고민하던 차에 일리아에게서 서신이 왔다.
[내일 시간 되나요?]카르한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된다고 답신을 보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씻은 후 옷장을 열었다. 평소에는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었으나, 오늘따라 신중해졌다.
뒤에 서 있던 테시온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옷걸이가 완벽해서 무엇을 입어도 태가 살았다. 특히 흉흉한 기운이 누그러져서 그런지, 잘생긴 얼굴이 더욱 빛을 보는 듯했다. 몇 년 동안 함께해온 테시온마저 카르한이 새삼 이런 얼굴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이런 옷은 어떻습니까.”
위쪽에 단추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쇄골까지 드러나는 형태의 셔츠였다. 거기다가 체구에 비해 조금 작아서 몸에 딱 맞을 것 같았다. 평소에 품이 넉넉한 셔츠를 즐겨 입던 카르한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노출이…….”
“이 정도는 노출도 아닙니다.”
가지고 있는 장점을 부각시켜야 한다고 테시온이 주장했다. 카르한은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옷을 입고 나니 근육으로 채워진 몸매가 드러났다. 어색한 나머지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까 고민하는데, 테시온이 박수를 보냈다.
“블로든 영애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그 말에 카르한은 이대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마차에 올라타는 순간까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은 스스로도 낯설 정도로 들떠 보였다. 사실 어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일리아를 만났던 날. 카르한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취했다. 분명 일리아보다 적게 마신 것 같은데 머리는 점점 몽롱해지고, 말은 자꾸 느려지기만 했다. 그러다가 지금까지 털어놓지 않은 속내까지 모두 내놓게 되었다.
지겨울 게 분명할 텐데, 일리아는 조용히 들어주었다. 그것이 좋아서 카르한은 열심히 제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일리아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혹시 자신이 뭔가 실수했나 며칠 동안 고민했다.
카르한은 창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쳐지나가는 풍경이 뭉그러지고, 일리아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날 헤어지기 전, 카르한은 일리아에게 외투를 벗어주었다. 추워하는 일리아를 보니 몸이 절로 움직였다.
체구가 많이 차이 나다 보니 일리아는 커다란 외투에 폭 감싸인 채 저를 올려다보았다. 취한 와중에 자신의 외투를 입은 일리아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금 그 장면을 회상하자, 심장 뛰는 소리가 빨라졌다. 카르한은 품에서 약통을 꺼내 알약 두 개를 삼켰다.
“아니, 또 심장이 안 좋으십니까?”
맞은편에 앉은 테시온이 걱정스레 물었다. 카르한의 붉어진 뺨을 확인한 테시온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검사를 다시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카르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약을 먹었더니, 조금 진정된 것 같았다.
천천히 심호흡을 내뱉은 카르한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다시 상념에 잠긴 카르한은 저번에 하지 못한 말이 떠올랐다.
술기운을 빌려서 일리아에게 후계자 문제에 대해 진실을 밝히려 했다. 하지만 끝내 말하지 못했다.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조만간 일리아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속였냐며 화를 낼까. 상냥하던 눈빛이 싸늘하게 바뀌면 어쩌나.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우울해졌다.
약속 장소 근방에 도착한 카르한은 찻집으로 향했다. 어차피 할 일이 없어서 일찍 나왔으니, 책이라도 읽으며 시간을 때울 생각이었다.
햇볕이 따스했기에, 찻집 테라스에 앉아 독서를 시작했다. 그러자 길을 지나가던 남자가 멈춰 섰다. 노골적인 시선을 느낀 카르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 에반테온 소공자 아니십니까!”
남자가 무척 반가운 얼굴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카르한은 그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남자는 자신을 자작의 장남이라 소개한 후, 친근한 척 굴기 시작했다. 열심히 떠들어대는 모습이 신기했다. 제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사람은 정말 흔치 않았다. 테시온이 권유한 옷을 입은 보람이 있었다.
“소공자께서는 독서가 취미신 모양입니다. 무척 진지하게 읽고 계셔서 말을 걸까 말까 고민했거든요.”
카르한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한번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남자가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기회를 잡았다.
“어떤 병법서를 읽으시는지…….”
카르한은 말없이 책표지를 보여주었다.
[연애 왕초보, 고수가 되다!]뻔뻔하게 웃던 남자의 얼굴이 순간 당혹으로 물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참 동안 겉표지를 쳐다보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르한을 보았다.
“그……, 훌륭한 책이지요. 저도 서점에서 본 것 같습니다.”
남자는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해버렸다. 그러자 카르한의 표정이 좀 더 부드러워졌다.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자는 기회다 싶었는지, 아예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저번에 연회에서 뵈었을 때, 잠깐이라도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노골적으로 친분을 쌓고 싶다고 표현하는 자작 영식을 보며, 테시온은 어쩔까 고민했다. 이전이었으면 이렇게 목적이 뻔히 보이는 남자는 제 선에서 쳐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카르한은 예전과 달라졌기에, 자신이 너무 참견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
카르한은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게 무척 호의적인 태도였다. 이 사람이라면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친구가 생겼다고 말하면 일리아가 칭찬해주지 않을까.
카르한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고정시킨 채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일단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중인데, 어떤 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가야 할지 고민이었다.
-저는 가끔씩 상대의 말을 되묻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가긴 해요. 만약 상대가 ‘나 어제 친구하고 만났어.’라고 말하면 ‘친구랑?’ 하고 되물어요.
문득 일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카르한은 일리아에게 배웠던 대화법을 사용할 때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카르한에게 사교계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며칠 전에 랭스턴 후작가에서 열린 연회에 다녀왔습니다.”
카르한은 일리아에게 배운 대로 대꾸해 보았다.
“다녀왔는데?”
“……그, 연회에서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백작 영애께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드러냈는데?”
“영애께서 소문과 달리…….”
“소문?”
카르한이 묵직한 목소리로 되묻자, 남자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윽고 그가 울먹거리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남자는 독서하는데 방해해서 미안했다고 사과한 후 곧바로 자리를 떴다. 바람같이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카르한은 눈으로 깜빡였다.
“이게 아닌가…….”
처음으로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기회였는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카르한은 알 수 없었다.
***
일리아는 얼마 전에 계약을 맺은 바네사를 떠올렸다.
자신을 바네사라고 소개한 그녀는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목탄화를 보고 전율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만약 전공인 유화를 그리게 되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을 그려올지 무척 기대가 되었다.
일리아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에게 대형 신인이 나타났다고 말해주었다. 관심을 내비치는 아버지에게 작품이 완성되면 보여주겠노라 큰소리 쳤다.
“아가씨, 어떠세요?”
고용인의 부름에 상념에서 벗어난 일리아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늦은 오후의 햇살 끝자락처럼 환한 금발은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화장은 너무 짙지 않은 선에서 눈만 강조했다.
“입술 색은 좀 더 분홍빛이 돌았으면 좋겠어.”
일리아는 자잘한 요구 사항을 늘어놓았다. 평소처럼 하고 가면 될 텐데,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라 그런지 괜히 신경 쓰였다.
시간을 확인한 일리아는 침실을 나섰다. 현관으로 내려가자 미리 대기해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일리아를 반겨주었다.
“아가씨, 오늘은 한층 더 빛이 나십니다.”
프란체가 칭찬을 쏟아냈다. 일리아는 싱긋 웃어준 후에 마차에 올라탔다.
“외투랑 물건은 다 실었어?”
“예, 전부 깔끔하게 옮겨두었습니다.”
말렉의 대답을 들은 일리아는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오늘은 간만에 카르한을 만나는 날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보름도 넘었으니, 계약 연애를 시작한 후로 이렇게 오랫동안 만나지 않은 것은 기록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를 멀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조금 복잡했을 뿐이었다.
일상생활을 보내다가도 때때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카르한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술기운이 올라 약간 붉어진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그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지금까지 일리아는 카르한을 순진하지만 제법 괜찮은 거래 상대라고 생각했다. 연인 행세를 하고 있으나, 그와 진짜 연애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