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32)
한때는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제 모든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교제하던 초반의 다정함이 사라지고,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던 그가 언젠가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도…….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전부 덮고 넘어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배신이었다. 일리아는 서늘한 눈으로 리하트를 살폈다. 그의 얼굴에 미련과 탐욕이 뒤덮여 있었다.
“그때는 미안했어.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앞으로 정말 잘할 테니까…….”
“돈 다 떨어졌어요?”
일리아의 노골적인 물음에 리하트가 말을 멈추었다.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게 아니라, 잃어버린 물주를 되찾고 싶은 거겠죠. 안 그래요?”
“……무슨 말이 그래?”
“내 앞에서 후회한다는 말 하지 마요. 후회는 내가 하고 있으니까.”
이런 개자식을 좋아했다니,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를 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리하트가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면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어장 속에 헤엄치던 황금 물고기를 놓쳤다는 것.
“당신은 내 돈이 좋았을 뿐이잖아요.”
“그럴 리가 없잖아.”
리하트가 곧바로 부정했다. 좀 더 가까이 다가온 그가 거북할 정도로 절절함을 담아 속삭였다.
“난 네가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리하트는 평소에 자주 언급하던 운명을 꺼냈다. 분명 낭만적인 단어인데, 그가 말하는 운명은 닳아빠진 단어처럼 들려왔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하트는 좀 더 애달프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분노로 들끓었던 가슴이 단번에 얼어붙었다. 조금이나마 아물었다고 생각한 상처가 잔뜩 헤집어졌다. 여기까지 와서도 거짓말을 일삼는 그의 모습에 남아 있던 실망도 사라졌다.
‘얼마나 나를 비참하게 만들 생각인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쉽게 내뱉은 사랑은 길가의 돌멩이보다 못했다. 일리아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숨이 아니라 얼음 파편이 빠져나오는 것처럼 목이 따끔거렸다.
“그동안 겨우 생각한 게 개소리뿐이에요? 그딴 같잖은 사랑은 필요 없으니 내 인생에서 좀 꺼져요.”
모욕적인 언사에 리하트는 표정을 싹 바꾸었다.
“소공자는 뭐 다를 것 같아?”
평생 너만 사랑해줄 것 같으냐고 리하트가 빈정거리듯 물었다.
“소공자만 믿고 제멋대로 구는 모양인데, 분명 후회할걸?”
마치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한 말투였다.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어 일리아는 걸음을 뗐다.
“내 이야기 안 끝났어!”
리하트는 일리아를 붙잡기 위해 성큼 다가섰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리하트의 팔목을 붙들었다. 팔이 떨어질 것 같은 억센 힘에 리하트가 악, 하고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겁니까.”
밑바닥을 두드리는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리하트가 고개를 돌렸다. 카르한이 매서운 눈으로 리하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블로든 저택 앞에 도착한 카르한은 일리아와 리하트를 지켜보았다. 그쪽으로 다가가려다가 멈추었다. 두 사람은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신이 끼어들 상황이 맞는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얼굴을 보았다. 늘 짓던 부드러운 표정은 어디로 가고, 무표정하다 못해 싸늘한 얼굴이었다. 처음 보는 일리아의 표정에 심장이 덜컥거렸다.
카르한은 조심스레 두 사람 쪽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일리아와 리하트의 대화가 들려왔다.
“그리고 지금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리하트의 말에 카르한은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방금까지 차갑게 쏘아붙이던 일리아가 상처 받은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뚝 하고 떨어진 것 같았다. 온몸에 피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제 몸을 마구 두드리는 것처럼 어디 한 곳 빼놓지 않고 욱신거렸다. 전쟁터에서 화살을 맞았을 때도 이렇게까지 아프지 않았던 것 같았다.
카르한은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겨우 말아 쥐었다.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든 리하트가 무척 원망스러웠다.
만약 자신이 일리아의 진짜 약혼자였다면 그녀를 정말 소중히 여겼을 텐데. 아껴주고 보듬어주고…… 좋은 것만 줬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하자 답답하던 가슴이 꽉 조여 왔다. 울컥 하고 안쪽에서 감정이 역류했다.
“그동안 겨우 생각한 게 개소리뿐이에요? 그렇게 하찮은 사랑은 필요 없으니 좀 꺼져요.”
뒤늦게 정신 차린 일리아가 표정을 갈무리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방금까지 절절하게 굴던 것을 그만두기로 했는지 리하트가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소공자만 믿고 제멋대로 구는 모양인데, 분명 후회할걸?”
일리아가 무시하고 등을 돌리자, 리하트는 강제로 붙잡으려 들었다. 그때 이성이 뚝 끊어지고, 몸이 먼저 움직였다.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리하트의 팔목을 붙잡고 있었다.
“뭐 하는 겁니까.”
짤막한 비명을 지른 리하트는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졌다. 사납게 일렁이는 눈동자에 리하트의 놀란 얼굴이 가득 담겼다.
“윽……!”
팔목이 비틀어질 것 같은 고통에 리하트가 신음을 삼켰다. 하지만 카르한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리하트는 비명을 겨우 참고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리하트보다 반 뼘 정도 더 큰 카르한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치켜 올라간 눈썹과 좁혀진 미간이 인상을 험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얼굴을 세세하게 살필 겨를도 없었다.
리하트를 억누른 것은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운이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라 리하트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얼얼한 통증에 정신이 조금 들었다. 손목이 부러질 것처럼 아팠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소공자의 비밀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언제까지 속일 셈입니까?”
리하트의 말에 지그시 눌러오던 힘이 멈추었다. 리하트는 일리아에게도 들리도록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진짜 후계자도 아니면서.”
심장이 덜컥, 제자리를 잃어버렸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카르한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손아귀 힘이 약해지자, 리하트는 붙잡혀 있던 팔목을 빼냈다. 그리고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언제까지 거짓말을 일삼을 겁니까?”
“…….”
“순진한 제 약혼녀가 소공자에게 속고 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리하트가 일리아를 힐끔 보았다. 일리아는 미간을 좁힌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는 일리아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공자께서 진짜 후계자가 아니라는 걸 일리아도 알고 있습니까?”
“무슨 말 하는 거예요? 헛소리 그만해요.”
일리아가 곧장 끼어들었다.
“하다하다 미친 소리까지 할 줄은 몰랐네요.”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리하트가 되물었다. 일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카르한을 응시했다. 고장 난 것처럼 서 있던 카르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카르한.”
일리아가 조용히 카르한을 불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리하트는 웃음을 겨우 삼킨 채 일리아에게 속삭였다.
“그거 봐, 일리아. 넌 소공자에게 속은 거라고.”
한껏 의기양양해진 리하트는 카르한이 지금까지 말하지 못한 비밀을 폭로했다.
“공작부인이 되는 걸 상상했겠지만, 소공자는 허수아비일 뿐이야. 임시 후계자라고.”
모욕적인 말을 들었음에도 카르한은 여전히 반박하지 못했다. 일리아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가끔씩 카르한이 이상한 반응을 보였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후계자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할 말이 있다는 듯 망설이던 얼굴. 공작저에 초대 받았을 때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굴던 그의 모습……. 리하트의 말을 듣고 나니 전부 이해가 되었다.
“공작의 눈 밖에 난 차남이 작위를 계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장남이 돌아오면 가문에서 쫓겨날 텐데.”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리하트는 카르한의 가정사까지 나불댔다. 듣다 못한 일리아가 고개를 홱 돌려 리하트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요?”
“뭐?”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는지 리하트가 당황해했다.
“그걸 듣고 나면 아, 그렇구나, 하고 당신한테 매달릴 거라 생각했어요?”
“아니, 난…….”
일리아는 틈을 주지 않고 매섭게 쏘아붙였다.
“쓰레기인 줄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뒷조사까지 할 줄은 몰랐네요.”
일리아는 치밀어 오른 화를 누르기 위해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리하트가 왜 자신만만하게 찾아왔나 했더니, 카르한의 약점을 폭로하면 제 마음을 돌릴 수 있을 줄 알았나 보다. 없던 정까지 싹싹 긁어 가주다니, 그것도 재주였다.
“카르한.”
일리아가 한 번 더 카르한을 불렀다. 그제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돌멩이가 던져진 수면처럼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가 애처로웠다. 죄를 짓기라도 한 듯 카르한은 끝내 일리아와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일리아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가 놓으며 말했다.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마차에 타세요.”
카르한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일리아의 말대로 마차에 올라탔다. 뒤이어 일리아 또한 마차에 올라타려 하자, 리하트가 소리쳤다.
“일리아! 내 말 좀 들어봐!”
일리아는 프란체와 말렉에게 손짓했다. 그들이 곧바로 리하트의 어깨를 붙들었다. 리하트는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온 힘을 다해 버둥댔지만 두 사람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이거 놓지 못해!!”
일리아는 마치 과녁을 응시하듯 리하트를 바라보았다. 만약에 제게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화살이 세 대 있다면, 망설임 없이 리하트에게 세 발 다 쏠 것이다.
“앞으로 당신이 날 찾아올 이유는 하나뿐이에요.”
일리아는 마지막 여지를 완전히 잘라버렸다.
“파혼 동의서를 가져올 때.”
그 말을 남기고 일리아가 마차에 올라탔다. 등 뒤에서 리하트가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이 들려왔다. 후회할 거라는 둥, 이제는 매달리지 않을 거라는 둥……. 일리아는 싹 무시하고 마부에게 말했다.
“출발해.”
마차 문을 닫아버렸다. 창문 너머로 발광하고 있는 리하트가 보였다. 저러다가 얼마 있지 않아, 제풀에 꺾여서 돌아갈 모습이 훤했다.
굳게 닫힌 대문이 열리고 마차가 정원을 향해 달렸다.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만이 마차 안을 채웠다. 일리아는 커튼을 친 후 맞은편 구석에 앉아있는 카르한을 보았다.
시선이 닿자,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검은 속눈썹이 비에 젖은 나비처럼 파르르 떨렸다. 일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카르한이 조금 밭은 숨을 내뱉었다. 이윽고 꽉 잠겨버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숨겨서 죄송합니다.”
카르한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죄책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일리아는 진작 카르한이 제게 할 말이 있어 보였다는 것은 눈치챘다. 몇 번이고 망설이는 그의 모습을 봤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냥 넘겼을 뿐이었다.
“당신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요.”
카르한은 손바닥으로 무릎만 쥐었다가 놓았다. 마치 버려질 것을 각오한 사람처럼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는…… 가문의 눈 밖에 난 존재입니다.”
카르한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직접 말하지 않은 이야기를 꺼냈다.
공작 가문에서 마치 없는 사람처럼 지내오다가 반쯤 떠밀리듯 전쟁에 출전했다는 것. 작년에 가문의 명으로 장남을 대신하여 잠시 후계자 자리를 잇게 되었다는 것까지.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듯 감정 하나 싣지 않고 사실만을 내뱉었다.
“형님께서 돌아오시면 저는 아마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겁니다. 임시직에 불과하니까요. 그래서 후계자 수업도 듣지 않고 있습니다.”
형식상의 후계자임을 모두 털어놓은 카르한이 조용히 물었다.
“……제게 실망하셨지요?”
“솔직히 말해서 놀랐어요.”
처음으로 일리아와 눈을 마주한 카르한은 움찔 떨었다. 일리아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당신 잘못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제게 사실을 숨기긴 했지만,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만약 자신이 캐물었으면 그는 솔직하게 대답해주었을 터였다.
‘그나저나 하필이면 리하트가 후계자가 아니란 사실을 알아버렸네.’
계획이 크게 틀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후계자인 카르한에게 어느 정도 권력이 있을 거라 믿고 계획을 추진해 왔으니 더욱 그러했다.
냉정하게 판단하면 여기서 카르한과 계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것이 옳았다. 리하트를 감당하기도 힘든데, 카르한까지 책임지기는 버거웠다. 일리아는 제 결정만을 조용히 기다리는 카르한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아.’
자신마저 떠나가면 카르한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터였다. 진짜 후계자가 돌아올 때까지 부질없는 시간을 보내다 쫓겨날 것이 분명했다.
일리아는 이전에 공작저를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제게는 살갑게 굴면서 정작 아들인 카르한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던 공작부인. 카르한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무시하던 고용인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만, 그때는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카르한은 단지 거래 상대일 뿐이었다.
가족 이야기는 민감한 문제니 먼저 묻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실은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금도 그가 내게 거래 상대일 뿐일까.’
그동안 카르한을 향한 일리아의 마음은 서서히 변해왔다. 이 사람이라면 좀 더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더 가까워지고 싶다고 계속 생각했다.
아직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카르한은 더 이상 일리아에게 거래 상대가 아니었다. 일리아는 거래가 아니더라도 그와 관계를 이어가고 싶었다.
“우리 계약은 파기해요.”
한참 만에 일리아가 말했다. 카르한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알고 있었던 결말을 맞이한 것처럼 그가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대신 거래 관계가 아니라, 협력 관계로 고치죠.”
카르한이 퍼뜩 고개를 들어올렸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후계자 문제 말인데…….”
일리아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카르한. 당신이 진짜가 되는 건 어때요?”
“……!”
카르한은 숨을 멈추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결국 백작의 딸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달라요. 어찌 되었든 공작가의 핏줄이잖아요. 그냥 당신이 진짜가 되어버려요.”
“하지만 저는…….”
카르한의 입술이 떨렸다.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죄스럽다는 듯 억눌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해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척 부끄러운 고백이었다. 공작가문의 적자로 태어났지만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 아무것도 없었다. 후계자로 자라난 장남과 비교하면 자질도 한참 뒤떨어졌다. 카르한이 진짜 후계자가 되는 것은 불모지에 숲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도 저를 지지해주지 않을 겁니다.”
“카르한, 과거의 당신을 생각해봐요. 나랑 거래할 때만 해도 안 된다고 그랬잖아요.”
“…….”
“이만큼 바뀌었어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할 수 없다고,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해냈다. 이제는 뭘 해도 안 된다는 생각보다,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
하지만 가문의 억압은 평생 차온 족쇄 같은 것이었다. 일리아의 말처럼 자신이 진정한 후계자가 되려면 가족들과 대적해야 했다. 한평생 넘지 못했던 태산과 맞서는 것과 같았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두렵다는 생각이 점점 흩어져갔다.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예.”
한참 만에 말문을 연 카르한은 좀 더 힘주어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카르한의 대답을 들은 일리아는 옅게 미소 지었다. 카르한은 분명히 훌륭한 공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일리아는 최선을 다해 그를 도와주기로 결심했다.
제게 넘쳐나는 것은 돈뿐이니……. 지금부터 돈으로 카르한을 키워볼 생각이었다.
마차는 정원에서 멈추었다. 구비해둔 램프에 불을 붙이자 마차 안이 환해졌다. 일리아는 맞은편에 앉아있던 카르한을 응시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은 잠시 망설였다.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 가문은…… 저를 빼면 완벽한 집안이었습니다.”
카르한은 차분하게 가정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공작인 아버지는 항상 바빠서 집안에 관심이 없었다.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공작부인인 레베타는 제 배로 낳은 카르한을 미워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주 어릴 적에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잠들었을 때도 있었으니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의 따뜻하던 눈빛은 실망으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러다 어느 날을 기점으로 그녀는 완전히 카르한을 적대시했다.
“……제가 많이 부족하니 어머니께서 실망하신 거라 생각했습니다.”
예전처럼 어머니께 예쁨 받고 싶어서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자꾸 어긋나기만 했다.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데 마음은 점점 멀어졌다.
어린 날의 카르한은 서러웠던 나머지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썼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고치겠다고, 더 노력할 테니 예전처럼 사랑해 달라고.
카르한은 어머니의 반응을 기다렸다. 건방지다고 혼을 내도 좋으니, 저를 멀리하는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그리고 답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카르한은 편지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나 싶어 어머니의 방에 들어갔다가, 쓰레기통에서 자신의 편지를 발견했다. 충격 받은 카르한은 하염없이 쓰레기통을 바라보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그날 카르한은 억지로 붙들고 있던 관계의 끈을 놓았다.
“형님께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르한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장남인 블레어드는 언제부턴가 카르한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비난은 카르한의 자존감을 무너뜨렸다. 그는 어머니의 기대를 온전히 독차지한 채, 동생을 차별하는 어머니에게 동조했다.
그때부터 카르한은 공작가의 유령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카르한을 배척하니 고용인들도 자연스레 무시했다.
“그래서 저는 반쯤 자원해서 전쟁터로 출전했습니다.”
카르한은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고 도망치듯 전쟁터로 떠났다. 버려진 자식이나 다름없었기에 에반테온이라는 이름을 직접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카르한이 평민일 거라 생각했다. 나중에 공을 세우고 테시온을 만나면서 에반테온 공작의 차남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
카르한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일리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아무래도 너무 어릴 적부터 당해온 것이라, 카르한은 그것이 학대인 줄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구석까지 내몰려서 결국 전쟁터를 택했을 어린 날의 카르한을 상상하면 가슴이 아팠다.
일리아는 처음 만났던 카르한을 떠올렸다. 점원에게 휘둘리다가 강매 당하던 그를 보며 호구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공작가문 후계자인 카르한의 평판이 엉망인 이유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나쁜 소문에 불을 붙여놓고, 그것으로 꼬투리 잡아서 수월하게 쫓아낼 심산인 게 분명했다.
일리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제게 상냥하게 웃어주던 공작부인을 떠올리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저를 지나치게 환대해 주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장남을 위해 카르한을 비싼 값에 팔아치울 생각이어서 그런 것이었다.
“일리아?”
일리아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카르한이 조심스레 불렀다. 그가 눈치를 보자 일리아가 구석에 두었던 쿠션을 집어 들고 마구 쥐어뜯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해소할 방도가 없었다. 당장 공작가로 뛰어가서 엎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리아는 쿠션 하나를 완전히 뭉개놓은 후에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당황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카르한에게 말했다.
“화가 나서 그래요. 그렇다고 당신 가족들을 이렇게 만들 수는 없잖아요.”
일리아는 망가진 쿠션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화나는 것과는 별개로 상황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나빴다.
“가문으로부터 지원도, 교육도 받지 못했다는 거죠?”
“……예.”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온 거예요?”
수도에서 생활하려면 금전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설마…… 저 모르는 사이에 접시라도 닦으러 다녔나.
“가문에서 품위 유지비를 조금 받고 있고, 전장에서 모은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모아둔 돈이 있어요?”
오랫동안 전쟁터를 떠돌아다닌 카르한은 생각보다 많은 돈을 모았다. 처음에는 상관에게 공로를 많이 빼앗겼지만, 테시온을 만난 후로 그가 살뜰히 챙겨주었다.
돈을 쓸 일이 별로 없어, 은행에 전부 넣어두고 잊었더니 쌓인 이자가 상당했다. 덕분에 어디서도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만큼 돈이 모였다. 카르한은 나름 자신 있게 말했다.
“백만 크로엘 정도는 있을 겁니다.”
“아껴 써야겠네요.”
“…….”
카르한이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보지 못한 일리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백만 크로엘이면 번화가에 건물 한 채도 못 사는 돈이었다. 그 돈으로 지금까지 버텼다니, 무척 검소하게 지내온 모양이었다.
“일단 간단하게라도 계획을 짜봐야 할 것 같은데, 특기 같은 거 있어요?”
카르한이 머뭇거렸다. 특기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 듯 한참 만에 그가 대답했다.
“……30초 안에 돌로 불을 피우거나, 별자리로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전부 기각이었다.
“검술은요?”
“제가 따로 검술을 배우진 못해서…….”
카르한이 단정한 손톱으로 애꿎은 무릎만 긁었다. 그가 익힌 것은 살기 위해 본능으로 배운 검술이었다. 전쟁터가 아닌, 수도에서 보여주기 식으로는 마땅치 않았다.
“좀 막막하긴 하네요.”
갑자기 하늘의 별을 마주하는 것처럼 후계자 자리가 까마득하게 멀어 보였다. 이렇게까지 해둔 것이 없을 줄은 몰랐다. 뒤늦게 자신이 얼마나 허황된 제안을 했는지 깨달았지만,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에반테온 공작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공작부부의 지지를 받지 못하더라도 그가 후계자로서 입지를 다져놓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은 무척 험난하고 힘들 테지만 말이다.
“……카르한, 당신 그래도 체력은 좋죠?”
“예.”
그것만큼은 자신 있다는 듯 카르한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나름 근성 있고……. 암기력도 괜찮은 것 같았고.’
대충 가닥을 잡은 일리아가 깍지 낀 두 손을 무릎에 올리며 말했다.
“특별 훈련에 들어가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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