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34)
예전에는 잠을 잘 못 자는지 눈가가 거뭇해서 인상이 더욱 날카로워 보였는데, 요즘은 많이 좋아 보였다. 피부도 더 이상 푸석하지 않고 말이다.
‘역시 나도 채식을 해야 하나…….’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푸른 불꽃을 닮은 눈동자가 일리아를 가득 담았다. 시선을 마주한 카르한이 속삭였다.
“열심히 해서 성과를 이루면……, 저를 칭찬해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교수의 칭찬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마치 그 모습이 임무를 완수하고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아서 일리아는 속으로 푸스스 웃었다.
“오늘 첫 수업인데도 정말 잘했어요.”
카르한의 눈꼬리가 뒤집힌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포근한 시선이 닿자 가슴이 몽글해졌다. 심장이 밀가루 반죽이라도 된 것처럼 늘어졌다가 뭉쳐지는 느낌이었다. 쿵쿵, 요리사가 반죽을 치대듯 심장 소리가 조금 크게 들려왔다.
“더 열심히 할 테니 계속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하죠. 나중에 공작이 되면 나 모른 척하지 말아요.”
카르한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만 주억거렸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뭔데요?”
“저번에 계약을 파기하자고 말씀하셨는데…….”
카르한이 말을 흐렸다. 망설이던 그가 조용히 물었다.
“연인인 척하는 것도…… 그만두는 건가요?”
이제 일리아와 카르한은 계약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닌 협력하는 사이가 되었다. 연인인 척했던 이유는 리하트를 견제하기 위함이었으나, 더 이상 통하지 않을 터였다. 일리아는 조금 긴장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카르한을 마주 보았다.
“아뇨. 그건 계속 유지해야 할 것 같아요.”
일리아는 이유를 말해주었다.
“이미 부모님께 교제하고 있다고 밝혔고, 헤어지면 저희 집에 들락날락할 명분이 없어지잖아요. 그리고…….”
일리아는 카르한의 어머니인 에반테온 공작부인을 떠올렸다. 자신과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바로 스텔라 델로타를 불러들일 것이다. 카르한이 예전과 달라졌다 한들 스텔라와 에반테온 공작부인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여러 문제가 있으니, 당분간은 이대로 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때 카르한의 어깨에 힘이 빠졌다. 조금 낮아진 어깨는 안도했다는 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를 살피던 일리아가 그래도 혹시 싶어서 물었다.
“혹시 싫어요?”
“아니요.”
카르한이 곧장 부정했다. 눈매를 반쯤 접은 그가 속삭였다.
“……저는 이대로가 좋아서.”
뚜렷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일리아는 부드러워진 그의 얼굴을 한참 보다가 조금 떨리는 입술을 뗐다.
“첫날이니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그 말을 남겨놓고 일리아는 곧바로 방을 나와 버렸다. 탁, 문 닫히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내 복도에는 적막감만 맴돌았다.
그럼에도 가슴 아래에서 쿵쿵대는 소리는 전혀 줄어들지 않고, 귓바퀴를 타고 맴돌았다. 일리아는 문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가 고개를 내저은 후 걸음을 뗐다.
***
다음 날, 일리아는 바네사를 만날 약속을 잡았다. 혹시 찾아가면 불편할까 싶어서 방문은 일부러 자제하고 있었는데 먼저 연락이 왔다. 작품 완성을 앞두고 있는데, 와서 한번 봐줄 수 있냐는 부탁이었다.
저택을 나온 일리아는 간식을 산 후, 아틀리에가 있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계단을 오르는데, 위에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일리아는 잠시 멈춰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2층 계단 위에 있던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어! 부자 언니다!”
여자아이가 일리아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묘하게 익숙한 얼굴에 일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세히 보니 이전에 빈민가에서 만났던 그 아이였다.
여자아이가 냉큼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일리아는 깔끔해진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이전에는 낡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제는 새 옷에 머리까지 손질해 말끔했다.
“일리아 님?”
소란을 들었는지, 바네사가 문을 열고 나왔다. 계단 아래에 서 있던 일리아가 고개를 들어 바네사를 바라보았다.
“라나!”
바네사가 기겁한 얼굴로 여자아이를 불렀다. 라나라고 불린 아이는 일리아의 치맛자락만 꼭 붙들고 헤실헤실 웃었다. 일리아는 라나의 어깨를 감싼 채 함께 계단을 올라갔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바네사가 일리아에게 물었다.
“어쩜 좋아. 혹시 제 동생이 실례되는 행동을 했나요?”
“전혀요. 동생이에요?”
“네……. 허락 없이 아틀리에에 데려와서 죄송해요.”
“죄송할 필요 뭐 있어요. 여기는 당신을 위한 공간인걸요.”
고맙다고 인사한 바네사가 라나의 귀를 살짝 잡고 흔들었다.
“언니가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거란 말이야!”
라나가 빽 소리치자, 바네사가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소개해준 적도 없는데 일리아를 어찌 알고 있나 하는 얼굴이었다.
“전에 빵 왕창 줬던 천사 언니야.”
“……아!”
라나의 설명에 바네사가 고개를 들어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일리아 또한 이전에 아이들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식빵 사야 해요! 우리 언니 거예요.
-큰누나는…… 그림을 그려요.
그게 바네사였다니. 무슨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싶었다. 심지어 바네사도 자신이 전시회에 무료로 들여보내줬다가 이후에 길에서 만나 인연을 트게 되었는데 말이다.
일리아는 여전히 제 치맛자락을 붙들고 있는 라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중얼거렸다.
“신기하네요. 근처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만났는데, 바네사의 동생들일 줄이야.”
그때 참 즐거웠다고 일리아가 나직하게 웃었다. 바네사는 한참 입술만 달싹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동생들이 무척 좋아했어요.”
동생들이 빵을 한 아름 들고 돌아왔을 때, 바네사는 웬 빵이냐며 닦달했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빵을 훔쳤나 오해했다. 바네사는 우는 동생들을 데리고 빵집에 찾아가 사장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웬 부잣집 아가씨가 정말 빵만 사주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쪽이 계산해두었으니, 언제든 빵을 먹으러 오라는 사장의 말에 바네사는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 후로 바네사는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식사 문제가 해결되니 쥐구멍에 볕이 들어오듯 숨통이 트였다. 그리고 퍽퍽한 호밀이나 보리 빵이 아닌 질 좋은 흰 밀 빵을 먹는 동생들을 보고 있으면 절로 행복해졌다.
언젠가 이름도 모르는 은인을 만나면 꼭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다. 바네사는 제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꼭 뵙고 싶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바네사의 목소리에 진심이 우러나왔다. 사실 일리아가 그때 아이들을 도와준 것은 그저 동정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바네사는 동정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마음 깊이 고마워하고 있었다.
“뭘요.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지금도 충분한걸요. 저번에 주신 계약금으로 이사도 했어요.”
수줍게 웃던 바네사가 뒤늦게 목적을 상기했다는 듯 몸을 틀었다.
“아참, 그림 보시겠어요?”
일리아는 바네사와 함께 안쪽으로 향했다. 이젤 위에 흰 천으로 가려둔 작품이 하나 있었다.
“완성을 앞두고 있긴 한데……, 마음에 드실지 몰라서요.”
“나는 신경 쓰지 말아요. 당신이 그리고 싶은 걸 그리면 돼요.”
계약까지 했으니 최대한 일리아의 취향에 맞추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일리아는 바네사의 실력을 믿었다. 분명 그녀가 데뷔하자마자 제국이 뒤집힐 것이다.
“빈민가 풍경을 그려봤어요.”
일리아는 지금까지 봐온 빈민가 그림을 떠올렸다. 대부분 어둡고 처참한 분위기였다. 죽음을 업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비쩍 마른 아이들이 주로 그려졌다. 관람객의 동정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바네사가 흰 천을 걷어냈다. 유리창 너머를 엿보듯 다른 세계의 풍경이 드러났다. 옅은 노란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새벽하늘. 일찍부터 집을 나서는 사람들, 구불구불한 길을 뛰는 강아지, 불 냄새가 날 것 같은 굴뚝.
낡은 지붕에는 아침 햇살과 미처 떠나지 못한 새벽의 끝자락이 공존하고 있었다. 생동감 넘치는 빈민가 풍경은 이곳 또한 매일 아침이 태어나는 곳임을 말해주었다.
바네사는 긴장한 얼굴로 일리아의 평가를 기다렸다. 한참 말이 없던 일리아가 고개를 홱 돌렸다.
“내 생각이 짧았어요.”
“……네?”
바네사가 울상을 지었다. 역시 다시 그리겠다고 말해야 하나 싶어, 바네사가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일리아는 물감으로 얼룩진 바네사의 손을 덥석 잡았다.
“당신은 제국이 아니라 대륙을 뒤집어 놓을 사람이에요.”
***
스텔라는 정원에 앉아 홀로 차를 마셨다. 테이블에는 그 흔한 다과조차 없었다. 찻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주홍색 찻물에 홀쭉한 뺨을 가진 얼굴이 비쳤다.
스텔라는 잠시 눈을 감고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통통한 편이었고, 식탐이 강해서 금방 살이 붙었다. 하지만 스텔라는 뚱뚱한 자신도 매력적이라 느꼈기에, 살을 빼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 작년에 로맨스 소설에 푹 빠지게 되었다. 심하게 몰입한 스텔라는 여자 주인공처럼 되고 싶었고,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독하다는 말을 제법 들어온 스텔라는 단기간에 살을 빼는 것에 성공했다.
스텔라는 살을 빼고 나자 주위의 시선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한동안 제 이야기로 사교계가 들썩거리자, 진짜 여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았다. 거기다 스텔라는 다이어트 하는 동안 마신 차를 상품으로 출시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유행에 민감한 어린 영애들은 스텔라를 따라 하기 바빴다. 콧대 높은 귀부인들도 스텔라의 행보를 주시했다. 그러다 카르한과 약혼 이야기까지 오가게 되었을 때, 스텔라는 인생의 황금기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부 물거품이 되었다. 일리아 블로든 때문에. 다시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스텔라는 입술을 짓씹었다.
“어쩜 항상 방해만 하는 거지……?”
일리아는 스텔라의 인생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가문끼리 숙적이었기에, 사람들은 항상 일리아와 저를 비교했다. 심지어 취향도 비슷해서 물건 하나를 두고 다툴 때도 잦았다. 그러다가 리하트를 만난 후로 착한 척하는 것이 무척 가증스러웠다.
문득 리하트가 저를 찾아왔던 것이 떠올랐다. 그 후로 계획이 잘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연락을 취하진 않았다. 아쉬운 티를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텔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탐스러운 장미가 뭉게구름처럼 피어 있었다. 그토록 아꼈던 장미 정원이었지만, 예전만 못하게 느껴졌다. 블로든 저택에서 그 꽃을 본 후로 마음을 빼앗긴 탓이었다. 그러나 수도를 다 뒤져도 블로든 저택에서 본 꽃을 찾을 수 없었다.
“하늘에서 똑 떨어지기라도 했단 말이야?”
스텔라가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였다. 누군가가 정원 입구에서부터 달려오고 있었다. 그 꽃을 찾기 위해 파견 보낸 이였다.
“아가씨! 찾았습니다!!”
그의 말에 스텔라가 반색했다. 어느새 스텔라의 앞에 멈춰 선 남자가 숨을 고른 후에 입을 열었다.
“한 업자가 꽃을 팔겠다고 직접 찾아왔습니다. 제 눈으로 확인도 끝냈습니다.”
“바로 사들였겠지?”
“그것이…….”
남자가 우물쭈물하자 스텔라가 타박했다.
“얼마가 되었든 구입하라고 했잖아.”
그러자 그가 조용히 가격을 말해주었다.
“뭐……!”
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돈 쓰는 것에 이골이 난 자신조차 깜짝 놀랄 만한 금액이었다.
“아주 희귀한 품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블로든 저택에만 있었던 건가. 제국 제일의 부자니 그 돈을 주고서라도 살 법했다. 잠시 망설이던 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걔도 샀는데 내가 못 살 게 뭐 있어.”
사야겠다고 마음을 굳히는데, 그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씨앗이랑 모종 가격이 다른데…….”
만개한 모종이 씨앗보다 두 배 비싸며, 씨앗을 심을 경우에는 봉오리를 틔우기까지 무려 6개월이 걸린다고 말해주었다. 설명을 들은 스텔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6개월이나 기다릴 수는 없어.”
이미 인내심이 바닥 난 지 오래였다.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전부 모종으로 사들여!”
이번에 꽃차 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거의 다 투자해야겠지만, 아깝지는 않았다. 블로든 가문에서 본 것보다 더 많이, 화려하게 심을 생각이었다.
스텔라는 다음에 일리아를 델로타 저택에 꼭 초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그러질 일리아의 얼굴을 상상한 스텔라는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
카르한이 블로든 저택에서 수업을 받기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났다. 그는 매일 블로든 저택에 방문해, 시간표대로 수업을 받았다.
긴장한 얼굴로 공부방에 들어서던 교수들은 수업이 끝난 후 하나같이 칭찬을 쏟아냈다. 그렇게 후계자 수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카르한은 단기간 동안 기나긴 공백을 성큼성큼 메웠다.
무섭도록 발전하는 카르한을 보며 일리아는 뿌듯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만약 카르한이 차별 없이 자랐다면 이미 제국에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집안 사정 때문에 지금까지 능력을 썩히고 있었다는 것이 아쉬웠다.
“슬슬 검술도 연습해야 할 것 같은데…….”
일리아는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제국은 1년에 한 번 황궁에서 검술 대회가 열렸다. 귀족 자제들이 출전하는 대회로, 규모가 대단했다. 만약 이 시합에서 우승을 거둔다면 후계자의 자질을 한층 높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마땅히 눈에 차는 인물이 없어서, 카르한의 검술 스승을 고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를 떠올려도 프란체보다 뒤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빈민가 출신으로 자신의 호위기사 자리를 꿰찬 것도 전부 실력이었다.
“프란체에게 부탁해볼까.”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아는 침실을 나왔다. 복도를 걷던 일리아는 말렉을 발견했다.
“말렉, 프란체는?”
“연무장에서 연습 중입니다. 곧 있으면 호위기사 선발전이 있으니까요.”
“그래? 고마워.”
정보를 입수한 일리아는 고민하다가 일단 별관으로 향했다. 슬슬 카르한의 오전 수업이 끝날 시간이었다.
‘어쩌지. 프란체는 많이 바쁠 것 같고…….’
프란체는 매년 이 시기에 무척이나 바빠졌다. 검술 연습량을 평소의 세 배로 늘렸기 때문이었다. 프란체의 실력이라면 연습 없이도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으나, 항상 누구보다 진지하게 임했다. 그래서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 하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일리아는 우뚝 멈춰 섰다. 막 방에서 나오던 카르한과 눈이 마주쳤다.
“일리아.”
카르한이 무척 반가운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평소보다 편안한 차림이었다. 가벼운 셔츠 한 장만 걸친 데다가 살짝 길어진 머리카락이 눈썹을 가릴 듯 말 듯 했다.
“수업은 다 끝났어요?”
“예. 오전 수업은 방금 끝났습니다.”
“마침 딱 좋네요. 연무장 구경 갈래요?”
카르한이 눈만 깜빡이자, 일리아가 말을 이었다.
“오후 수업까지 시간이 있으니까요. 한번 소개해주고 싶었어요.”
“저는 좋습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곧장 별관을 빠져나와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은 정원의 서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지형도 세분화되어 있었으며, 차양과 의자를 설치해둬서 쉬거나 훈련을 지켜볼 수도 있었다.
연무장에 도착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전부 블로든 가문 기사였는데, 하던 일도 멈추고 뭔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데리고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덩치 큰 기사들 때문에 까치발을 들어도 잘 보이지 않았다. 일리아가 폴짝폴짝 뛰자, 카르한이 근처에 있던 연습용 통나무를 가지고 왔다.
“고마워요.”
통나무 위에 올라서자 카르한과 키가 엇비슷해졌다. 순식간에 시야가 쑥 올라갔다. 카르한이 사는 세상이 이럴 거라 생각하니 새삼 신기했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넘어질까 싶어서 팔을 잡아주었다. 고개를 돌리자, 검을 겨루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비올레와 프란체였다.
칼날이 맞부딪혔다가 떨어졌다.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합이 늘어났다. 카르한은 넋을 놓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락부락한 기사들 사이에 있으니 비올레와 프란체는 상대적으로 가냘파 보였다. 그러나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는 어마어마한 기백이 그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째앵, 쇠붙이의 날카로운 소리가 깨질 듯이 울려 퍼졌다. 먼저 물러난 것은 비올레였다. 프란체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검이 나뭇가지처럼 가볍게 허공을 갈라 벼락처럼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지켜보던 이들이 숨을 멈추었다. 승부가 났다고 생각했을 때, 비올레의 검이 프란체를 막아 세웠다. 키이잉, 날이 긁히는 소리가 나더니 자세가 역전되었다. 앞으로 쭉 밀어붙이던 검은 프란체의 목덜미 앞에서 멈추었다.
“……제가 졌습니다.”
프란체가 검을 쥔 팔을 늘어뜨리며 패배를 선언했다.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비올레가 검을 거두며 말했다.
“이번에는 나도 위험할 뻔했어.”
“하지만 마님께서는 결국 왼손을 사용하지 않으셨지요.”
프란체는 어딘가 분해 보였다. 그러자 지켜보던 기사들이 위로했다.
“마님과 붙어서 그만큼 버티는 사람은 너뿐이다.”
“그래, 아직 어리면서 욕심이 과하구나.”
기사들이 웃으며 애정 어린 타박을 내뱉었다. 작게 투덜대던 프란체가 칼집에 검을 넣으려다가 멈칫했다.
“어! 아가씨!!”
프란체가 소리 지르자, 그곳에 있던 이들이 전부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프란체와 기사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아가씨!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연무장 구경할 겸 와 봤어.”
일리아의 대답과 함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기사들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기사들을 비집고 나타난 것은 비올레였다.
“일리아, 점심은 먹었니?”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비올레가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시선이 카르한에게 향했다. 둘이 왜 같이 있느냐는 표정을 지은 비올레가 먼저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