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35)
“오랜만입니다. 에반테온 소공자.”
“간만에 뵙습니다. 부인.”
카르한이 살짝 긴장한 어투로 대답했다. 카르한의 정체를 들은 기사들이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가씨의 남자친구!”
“무척 강해 보이는데…….”
“저런 몸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지.”
기사들은 카르한의 몸을 힐끗 보더니, 엄청난 실력자일 것이 분명하다고 수군거렸다. 관심이 단번에 카르한에게 쏠리자, 일리아가 손을 내저었다.
“따로 검술 수업을 받은 적 없는 초보자야.”
그제야 웅성거림이 조금 멎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도 있었지만, 일리아의 말에 누구도 부정하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딱 한 명, 비올레만 미묘한 눈빛을 보냈다. 카르한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굉장한 시합을 볼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고마워요. 다들 이맘때만 되면 실력이 엄청 늘거든요.”
일리아의 호위기사 선발전이 있어서 그렇다며 비올레가 대답해주었다. 비올레의 시선이 카르한의 손에 머물렀다. 굳은살이 가득한 손을 보던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실력을 가늠하는 얼굴이었다.
“소공자.”
“예.”
차분하게 대답하는 카르한을 보며 비올레가 싱긋 웃었다.
“괜찮다면 나와 한번 겨뤄보지 않겠어요?”
비올레의 제안에 주위가 단번에 시끄러워졌다. 기사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작게 숙덕거렸다.
“마님께서 아가씨의 남자친구가 마음에 안 드셨나 봐.”
“그래도 초보자라는데…….”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거 아니야?”
누군가의 마지막 말에 다들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소공자는 검술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는데, 갑자기 검술 시합이라니 무리예요.”
“맞습니다. 너무 가혹한 제안입니다.”
프란체와 다른 기사들도 비올레를 만류했다. 비올레가 카르한보다 한참 체구가 작았지만, 다들 그녀가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올레는 무로 유명한 가문의 장녀로 태어나, 검술로 최고의 경지에 올랐던 사람이었다. 시합이라는 핑계로 카르한이 두드려 맞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내가 뭐 잡아먹는다니?”
비올레가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물었다. 그러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비올레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지만, 한마디 덧붙였다가 눈총을 받고 싶진 않았다.
“너무 갑작스럽긴 하죠. 부담된다면 거절해도 좋아요.”
비올레의 말에 카르한이 망설였다. 아까 비올레와 프란체가 겨루던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자신은 비올레의 상대도 되지 않을 터였다.
“제 실력이 많이 부족해서 시합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거절의 서두에 비올레가 단념하려 했다. 그러나 카르한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비올레가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럼 잠깐 휴식을 취한 후에 시작하도록 하죠.”
비올레가 뒤돌아섰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시 반듯하게 묶고 검을 재정비했다. 그사이 일리아가 카르한의 팔을 붙잡고 뒤쪽으로 이끌었다.
“진짜 괜찮겠어요?”
일리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비올레를 힐끗 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 실력은 저게 전부가 아니에요. 가을이 되면 떨어지는 낙엽을 베는 게 취미거든요.”
거기다 프란체를 가르친 사람이 비올레였다. 덕분에 프란체는 손꼽히는 실력자가 되었지만, 아직도 비올레를 이긴 적이 없었다. 일리아는 프란체를 최고의 검사라 생각하나, 그건 비올레가 은퇴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올레가 카르한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걱정되었다. 교제하는 것까지는 인정해주었으나, 가끔 카르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탐탁지 않아 했다.
“물론 저는 상대도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카르한은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비올레가 먼저 제안해준 것이기도 하고, 저런 강자와 붙어볼 일이 언제 또 있을지 몰랐다.
“……사실 당신이 부담되지 않는다면 한번 보고 싶긴 해요.”
일리아는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검술을 가르칠 생각이었기에 카르한의 실력을 가늠해보고 싶었다. 검술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는 무려 8년을 전장에서 굴렀다. 제법 많은 공도 세웠다고 하니 그동안 쌓인 경험치가 상당할 터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카르한이 설핏 눈매를 접으며 속삭인 후, 걸음을 뗐다. 대기하고 있던 프란체가 다가왔다. 카르한이 셔츠 소매를 팔목까지 걷어붙이자 무척 부럽다는 시선을 보냈다. 프란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카르한에게 조용히 물었다.
“도대체 무슨 운동을 하십니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제게만 살짝 말씀해주시죠.”
“딱히 없는데…….”
“그럼 태생부터 있던 근육이란 말씀이십니까? 진짜 부럽다…….”
프란체가 근육으로 꽉 찬 팔뚝을 보며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카르한은 그가 부러워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남들보다 눈에 띄는 체격 때문에 오해 받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프란체가 연습용 진검을 내밀었다. 날이 뭉툭해서 다칠 위험은 그리 크지 않았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항복이라고 외치십시오.”
프란체는 괜히 측은한 시선으로 카르한을 보았다. 처음 비올레와 시합을 치른 날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때 된통 깨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
카르한은 프란체에게서 검을 받았다. 매끈하게 뻗은 검을 쥐자 금방 익숙해졌다. 전쟁터에 있을 때는 매일 거르지 않고 쥐었기에 손에 익은 탓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검으로 수많은 적을 베었고, 그만큼 동료를 잃었다. 수도로 돌아온 후로는 지긋지긋한 나머지 칼집째로 처박아두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까 비올레와 프란체의 승부를 지켜보았을 때, 손끝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사실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검을 휘두르는 것 자체는 즐거웠다. 상념을 떨쳐내고 온전히 검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검을 멀리했지만 그리웠던 걸지도 몰랐다.
“준비되었습니다.”
카르한의 말에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비올레가 몸을 틀었다. 가죽 바지를 입었기에 평소 드레스로 감추고 있던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오랜 훈련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기사들이 원형으로 쪼르륵 앉았다. 일리아는 프란체가 마련해준 자리에 편하게 앉아서 구경했다.
연무장 한복판에 비올레와 카르한이 마주 섰다. 서로 정중히 경례를 나눈 후 검을 치켜들었다. 시합이 시작되고, 비올레가 선공했다. 카르한은 반 박자 늦게 비올레의 검을 막았다.
둔탁한 날붙이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올레의 눈이 가늘어졌다. 단 한 합에 카르한의 실력을 파악한 비올레가 재빠르게 검을 거두었다가 공격을 가했다.
카르한은 날아드는 검을 막기 급급했다. 태산 같던 카르한의 몸이 점점 뒤로 밀려나갔다. 분명 비올레의 검은 가벼운데 끝이 묵직했다. 카르한은 비올레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몇 번이나 검을 받아내다 보니 동선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검을 막아낸 카르한이 처음으로 반격했다. 채앵,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비올레의 검이 떨렸다. 바위를 치기라도 한 듯 손목이 시큰거렸다.
여유롭기만 하던 비올레의 표정이 돌변했다. 무척 재미있다는 듯 비올레가 처음으로 미소 지었다.
“헉…….”
입을 떡 벌린 채 지켜보던 기사들이 숨을 들이켰다. 시합 중에 비올레가 미소 짓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본격적으로 실력을 낼 때였다.
두 자루의 검이 맞물렸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물러서기만 하던 카르한이 점차 앞으로 나아갔다. 비올레가 밀리기 시작하자, 다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올레의 패배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힘이 대단하군요.”
칼을 맞대고 있던 비올레가 속삭였다. 카르한의 검이 단숨에 비올레를 향해 밀어붙여졌다. 칼날 끝이 그녀의 목에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패배가 확정되기 직전, 비올레가 생긋 미소 지었다.
“하지만 제대로 재련되지 않은 검은 부러질 뿐이에요.”
때를 기다리던 노련한 사냥꾼처럼 그녀가 움직였다. 비올레는 검을 비틀어, 쏟아지는 폭포를 걷어내듯 거대한 힘을 흘려보냈다. 순간 반듯하게 뻗은 검이 마치 곡도처럼 휘어져 보였다.
유려한 선을 그리던 검은 바늘구멍을 겨누듯 한 점으로 향했다. 째앵! 파열음과 함께 날에 반사된 햇빛이 눈동자로 쏟아졌다. 카르한의 동공에 두 동강 난 칼날이 비쳤다. 이윽고 허공을 가르던 칼날 반쪽이 툭, 하고 잔디 위에 떨어졌다.
사방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카르한은 부러진 검을 내려다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졌습니다.”
“왼손을 사용한 건 오랜만이에요.”
깔끔한 패배 선언에 비올레가 검을 허리춤 칼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녀는 무척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넋을 놓고 지켜보던 이들이 둑이 터진 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가씨, 초보자라고 하셨잖습니까.”
“정말로 검술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일리아는 입술을 벙긋거렸다. 저 또한 카르한의 검술을 처음 보았다. 분명 카르한은 어디서 검술을 배운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검을 겨뤄서 저만큼 버틴 사람은 처음이었다.
카르한은 시선이 제게 쏟아지는 줄도 모른 채 부러진 검만 만지작거렸다.
“검이 부러졌는데…… 배상하겠습니다.”
“괜찮아요. 부러뜨린 건 나니까요.”
비올레는 신경 쓸 필요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카르한을 가볍게 살피던 비올레가 조언해주었다.
“소공자, 검을 맞붙일 때 오른손에 의지하는 버릇이 있어요. 검을 쓸 때는 둔탁하고 거칠고요.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비올레가 속삭였다.
“시합용이 아닌 실전용 검술이더군요.”
카르한이 멈칫했다. 비올레의 말은 정확했다. 카르한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검술은 몰랐다.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몸으로 직접 익힌 검이었다.
“…….”
비올레는 가만히 카르한을 응시했다. 그는 오랫동안 야생을 누빈 들짐승 같았다. 자세나 검을 쥐는 방법 등이 교본서와 많이 다르나, 본능적으로 감을 깨우친 상태였다. 게다가 머리도 비상한지 금방 비올레의 버릇을 파악하고 대처했다.
비올레는 아직도 저릿저릿한 손목을 움켜쥐었다. 바위를 몇 번이고 두드린 것 같았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자칫 잘못했으면 비올레의 검이 먼저 부러졌을 터였다.
비올레는 가늘어진 눈으로 카르한을 살폈다. 이런 사람은 괴물이 되거나, 영웅이 되기 마련이었다. 이왕이면 영웅으로 키워보고 싶었다.
“소공자께서는 검술에 관심이 있나요?”
“저는…….”
카르한이 멀찍이 서 있던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일리아가 손을 흔들었다. 카르한은 자연스럽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본 비올레가 눈을 깜빡였다. 다시 고개를 똑바로 한 카르한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살생은 좋아하지 않지만…… 검을 쓰는 것 자체는 관심 있습니다.”
“특이하군요.”
전쟁터에서 익힌 검술이나, 살생은 좋아하지 않는다니. 무척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내던 비올레가 일리아에게 손짓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일리아가 다가왔다. 일리아는 조금 불안한 얼굴로 비올레를 살폈다. 저런 음흉한 미소를 지을 때는 분명 뭔가 일을 저지르기 전이었다.
“요즘 별관에 교수들이 오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일리아는 어떻게 알았지, 하는 얼굴로 비올레를 올려다보았다. 나름 입단속을 철저하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 손바닥 안이었다.
‘카르한의 사정을 솔직하게 밝힐 수 없어서 아직 말하지 못했는데…… 혼내시려나.’
어떤 변명을 할지 고민하는데, 비올레가 말을 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그렇다면 검술 스승도 필요하지 않겠니?”
“네, ……네?”
일리아가 눈만 깜빡이자, 비올레가 쐐기를 박았다.
“내가 소공자를 가르치고 싶구나.”
***
따스한 햇살이 물결처럼 테이블에 밀려왔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일리아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비올레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녀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고 있었다. 식사가 아닌, 둘이서 차를 마시는 것은 무척 간만이었다. 침묵 속에서 일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공자는 요즘 어때요?”
일리아의 질문에 비올레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도자기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비올레가 입을 열었다.
“성실하고 근성 있지.”
짤막한 대답을 내놓은 비올레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분명 비올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르한의 이야기를 꺼내면 미간을 살짝 좁히곤 했다. 그건 탐탁지 않다는 태도였다. 요 며칠 사이에 달라진 그녀의 태도가 사뭇 낯설게 느껴졌다.
일리아는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카르한에게 소개해줄 겸 연무장에 데리고 갔다가 비올레를 만났다. 비올레가 먼저 시합을 제안했고, 두 사람은 검을 겨루게 되었다. 시합에서 승리를 거둔 비올레가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내가 소공자를 가르치고 싶구나.
그 제안에 모두가 기겁했다. 일리아 또한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되물었을 정도였다.
-진심이세요?
-그래. 흥미가 생겼어.
비올레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일리아는 곧바로 카르한의 등을 떠밀었다. 어머니가 직접 가르친다면 검술 공부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비올레는 일주일에 두 번, 카르한을 가르쳤다. 자세 잡는 법, 기본기, 예법, 검 종류에 따른 공격기 등등. 카르한은 아침 일찍 연무장에 들러 검술을 연마하고, 오후에는 교습을 받는 등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체력은 대단하니 섬세함과 기술만 갖추면 최고가 될 테지.”
비올레는 무척 흡족한 얼굴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얼굴은 오랜만이라 일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괴물이 될지 영웅이 될지, 무척 궁금하단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비올레는 다시 찻잔을 들어올렸다. 카르한을 지켜보고 있으면 마치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즐거웠다. 거침없이 성장하는 그의 끝이 어디일지 궁금했다.
사실 처음에는 약간의 사심을 담아 카르한을 열심히 굴렸다. 지옥 훈련이라 불릴 만큼 무척 힘든 일정이어서 웬만한 사람들은 다 떨어져 나갈 터였지만, 카르한은 묵묵히 따라왔다. 도리어 시킨 것보다 곱절로 해와 비올레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거기다 힘은 어찌나 좋은지. 목검으로 연습용 통나무를 쓰러뜨리고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이 정도는 누구나 다 하는 거니까요.
카르한은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도리어 부족하다며 채찍질하듯 훈련에 매진하곤 했다.
그러다 이틀 전, 가벼운 시합을 치른 후 카르한이 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부인께서는 엄청나게 노력하셨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굳은살 위에 또 다른 굳은살이 박인 손이었다. 평소에는 얇은 장갑을 끼고 있어서 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궤적이 무척 깔끔해서 수만 번은 연습하지 않으셨을까 하고 어림짐작해 보았습니다.
비올레는 무척 묘한 기분이 들었다. 뛰어난 기사를 배출하기로 이름 난 가문에서 태어난 비올레는 그중에서도 천재라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사람들은 비올레가 노력하지 않고도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재능이 있으니까 이만큼 오를 수 있었던 거지.
-연습? 남들도 그 정도 연습은 하잖아. 그냥 네가 천재인 거야.
끝없는 연습과 피나는 노력은 전부 천재라는 이름 아래에 가려졌다. 수많은 시기와 질투 속에서 비올레는 길을 잃게 되었다. 여검사로서 경지에 오른 비올레는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길을 택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자신의 노력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천재라는 것을 모르는 남자였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나쁘지 않지.”
일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은근히 카르한을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별관에서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니?”
일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대륙 각지에서 모셔온 교수들과 카르한이 공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꺼내면 카르한의 가정사도 언급할 수밖에 없는데, 자신이 직접 말하기는 껄끄러웠다.
“말하기 곤란하다면 됐다.”
비올레는 깔끔하게 물러섰다.
“네가 어련히 잘 하겠지.”
저를 믿어주는 것 같아서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걱정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 뭐…… 소공자가 저택에 들락날락한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은 헤인리밖에 없으니까.”
일리아가 슬쩍 고개를 들어 비올레를 살폈다. 혹시 아버지와 카르한의 사이가 생각보다 좋다는 걸 눈치채신 건가. 아버지는 그것도 모르고 숨기려고 애쓰시던데…….
비올레가 찻잔을 내려놓고 일리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다음에 거래 문제로 협상할 자리가 있는데, 따라 오겠니?”
“제가 가도 되나요?”
“사업에 관심 있다고 했으니, 공부할 겸 천천히 배워가는 거지. 그리고 친분을 쌓아두면 좋으니까.”
“알겠어요. 다음에 가실 때 불러주세요.”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올레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두 사람은 차를 좀 더 마신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로 돌아온 일리아는 오늘 아침에 하지 못한 일과를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서신을 가득 채운 상자를 책상에 올려놓고 하나씩 분류하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초대장을 쓰레기통에 넣으려던 일리아가 멈칫했다. 문득 비올레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친분을 쌓아두면 좋으니까.
지금까지 일리아는 사람들과 담을 쌓아왔다. 낯선 이들과 엮이는 것이 거북하기도 했고, 리하트와 시간을 보내느라 바빴다. 그때만 해도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업을 이끌겠다고 다짐한 이상, 이전처럼 지낼 수는 없었다. 사업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일리아는 초대장을 하나씩 살폈다. 연회는 부담스러웠고, 소규모 모임 정도면 적당할 듯싶었다. 초대장을 확인하던 일리아의 손이 멈칫했다. 유독 화려한 초대장이었다. 페이퍼 나이프로 봉투를 뜯어서 내용물을 꺼냈다.
[젊은 부자들의 모임에 초대합니다.]대충 읽어보니, 사업을 이끌거나 투자에 관심이 있는 귀족 영애들의 모임인 듯했다. 관심사도 비슷하고, 친분을 쌓아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일리아는 편지 끄트머리에 적힌 장소를 확인했다. 델로타 저택이었다.
“흐음…….”
일리아는 손끝으로 책상만 톡톡 쳤다. 스텔라를 중심으로 젊은 부호들이 모인다는 소문은 대충 들었다. 그 모임에서 나오는 정보들이 제법 쓸모 있다는 것도 말이다.
평소 같았으면 스텔라 델로타의 집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엮일 텐데 피할 수만은 없을 터였다. 일리아는 픽 웃으며 편지지를 내려놓았다.
“귀한 고객님이 꽃은 잘 심었는지 한번 보러 갈까.”
***
스텔라는 모임에 참석하겠다는 일리아의 답신을 받고 눈을 깜빡였다.
“……정말 온다고?”
당연히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보낸 초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