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36)
“무슨 생각인 거지?”
스텔라는 일리아 블로든의 꿍꿍이가 궁금해졌다. 분명 아무것도 모르고 참석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얼마 전에 모종을 다 옮겨 심은 참이었다.
빨리 꽃을 틔울 수 있도록 비싼 영양제를 들이부은 덕에 스텔라의 장미정원은 새롭게 탈바꿈할 수 있었다. 매사에 저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굴던 일리아가 정원을 보고 놀라는 모습을 꼭 구경하고 싶었다.
스텔라는 모임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저택을 평소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꾸미고 장신구와 옷차림에도 신경을 썼다. 그리고 마침내 모임을 가지기로 한 날이 왔다.
스텔라는 약속 시간에 맞춰서 후원으로 나갔다. 저 멀리서부터 마차가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문객이 모두 부호들이라, 마차는 누가 보아도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금을 두르는 것은 기본이고, 비단 깃발을 달거나 바퀴에 보석을 박은 이들도 있었다. 마차만큼 힘을 잔뜩 준 영애들이 하나씩 내렸다.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오랜만에 뵈어요.”
다들 웃으면서 서로를 빠르게 훑어 내렸다. 누가 더 훌륭한 마차를 끌고 왔는지, 어떤 옷을 입고 무슨 장신구를 했는지 살폈다. 그러면서 자신이 좀 더 낫다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압도적인 우위에 서 있는 사람은 스텔라 델로타였다. 거상의 외동딸로 이름이 자자한 그녀는 이 모임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다들 기 싸움을 하면서도 스텔라에게는 잘 보이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었다.
한창 인사를 나누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착했을 즈음. 마지막 손님이 왔다. 저 멀리서부터 잘 빠진 흑마 네 마리가 이끄는 흰색 마차가 매끄럽게 후원 입구를 통과했다.
위풍당당하게 등장한 마차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마차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이국적인 디자인이었다.
생김새가 번듯한 사내 두 명이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뒤이어 푸른색 구두가 간이 계단을 밟았다. 사내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온 일리아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가장 앞에 있던 스텔라를 본 일리아가 싱긋 웃었다.
“마중 나와 주신 건가요, 스텔라 영애?”
일리아와 스텔라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짧은 순간 맞닿은 시선에서 불꽃이 튀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스텔라였다.
“모두 모인 것 같으니 이만 후원으로 갈까요?”
여기서 설전을 벌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스텔라가 걸음을 뗐고, 영애들이 뒤따라 걸어갔다. 일리아는 마차 앞에 서 있던 프란체와 말렉에게 말했다.
“언제 올지 모르니, 마차 안에서 대기해.”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말렉과 프란체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따라가진 못해도 이곳에서 긴장을 풀지 않고 대기하겠다는 태도였다. 일리아는 두 사람 다 고집이 세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말했다.
“최대한 일찍 돌아올게.”
그 말을 남겨두고 일리아는 영애들을 뒤따라갔다. 선두에서 걷던 스텔라는 연신 뒤쪽을 바라보았다. 마치 일리아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저를 챙겨줄 성격은 아니니, 뭔가 꼭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후원 안쪽으로 걸어가던 스텔라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리고 영애들의 감탄이 도미노처럼 이어졌다.
“와아…….”
“어쩜.”
다들 걸음을 멈춘 채 홀린 듯이 꽃밭을 바라보았다. 주홍색으로 물든 꽃밭은 팔레트에서 가장 예쁜 색을 뽑아 톡 떨어뜨린 것 같았다. 바람이 불어오자, 꽃잎이 물결치며 향긋한 향기가 퍼져나갔다. 다들 황홀한 얼굴을 하자, 스텔라는 뿌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계절이 바뀌기 전에 정원을 한번 손보았어요.”
“정말 아름다워요!”
“처음 보는 꽃인데, 이름이 뭔가요?”
다들 재잘거리며 칭찬을 쏟아냈다. 그중 몇몇은 탐욕 어린 눈길을 보내며 질문했다.
“꽃 이름은 저도 모르겠어요. 저도 어렵게 구한 꽃이거든요.”
스텔라의 대답에 질문을 던진 이들이 아쉬움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조차 어렵게 구했다면 정말 가지기 어려운 꽃일 터였다.
스텔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힐끔 바라보았다. 놀라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스텔라는 입술만 꾹 깨물었다.
바로 저 표정이 보고 싶었다. 매사 심드렁하게 굴던 일리아 블로든이 놀라는 모습을 말이다. 일부러 블로든 저택에서 봤던 꽃밭의 두 배 넓이로 만들었는데, 보람이 차고 넘쳤다.
“아직 부족한 것 같아서, 꽃밭을 차츰 더 늘려보려고요.”
스텔라는 일리아를 힐끗거리며 말했다. 일리아가 더더욱 놀라워하자, 스텔라는 만족스러운 듯 턱을 치켜들었다.
‘여기서 더 늘린다고?’
일리아는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다. 처음에 꽃밭 크기를 보고, 얘가 모종을 이렇게 많이 사갔나 싶었다. 왠지 교수들 초빙하고 나서도 돈이 남아돈다 했다. 그리고 스텔라가 꽃밭을 더 늘리겠다는 말을 듣고 놀란 까닭은…….
‘아무래도 빨리 키우라고 해야겠네.’
공급자인 일리아조차 모종이 부족했다. 블로든 저택에 심으려고 했던 모종까지 팔아야 할 듯했다. 이왕이면 팔 수 있을 때 많이 팔 생각이었다. 음흉한 미소가 절로 지어진 일리아는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다.
꽃밭을 지나, 후원 안쪽으로 들어서자 티 테이블이 보였다. 얇은 비단으로 덮인 테이블 위에는 4단으로 이루어진 디저트 트레이와 주홍색 꽃이 꽂힌 크리스털 화병, 티세트 등이 있었다.
일리아는 속으로 감탄했다. 무척 화려한데 촌스럽다는 느낌은 없었다. 색감의 조화와 배치가 훌륭한 덕분이었다. 별로 칭찬하고 싶진 않지만 안목이 제법 괜찮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다들 자리에 앉으세요.”
스텔라의 말에 일리아는 자리를 확인했다. 원래 주최자의 자리를 상석으로 두고 거리가 멀면 멀수록 좋지 않은 자리였다. 그리고 일리아의 이름이 적힌 자리는 가장 말석이라 불리는 위치였다.
일리아는 눈썹을 한번 치켜 올리곤, 누구보다 먼저 자리에 앉았다. 스텔라와 다른 영애들은 당황한 눈으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도리어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저를 응시하는 이들을 마주 보았다. 안 앉고 뭐 하냐는 시선에 스텔라는 미간을 좁혔다.
말석에 배치 받은 일리아가 치욕스러워하거나 따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덥석 착석한 것으로 모자라 말석이 상석이라도 된 것처럼 굴 줄은 몰랐다.
스텔라는 무척 찝찝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결과적으로는 원하는 대로 됐지만, 그 과정이 전혀 통쾌하지 않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고, 스텔라는 테이블에 놓인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뒤에서 대기하던 고용인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고용인들이 찻잔에 차를 따르는 것을 지켜보던 일리아는 쏟아지는 시선에 뺨이 따끔거렸다.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이들부터 곁눈질하는 이들까지, 모두가 일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많이 봐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싹 살펴오자, 일리아는 속으로 웃었다. 지금 일리아가 착용한 것은 전부 블로든 사의 물건이었다. 그러니 저를 보는 눈빛이 호의든 적의든 상관없다. 한번 관심 있게 봐두면 다음에 무의식중에라도 자신이 착용했던 물건들을 눈여겨볼 테니까.
‘뭐, 취향이 맞으면 하나쯤 사겠지. 돈 많으니까.’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유행에 민감한 돈 많은 손님들이었다. 그랬기에 일부러 아직 출시도 하지 않은 새 제품들을 착용하고 왔다. 몇몇이 팔찌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일리아는 일부러 소매를 살짝 쓸어 올렸다.
찻잔이 가득 채워지고 고용인들이 뒤로 물러서자, 일리아를 향한 시선이 흩어졌다. 모임의 주최자인 스텔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각자 간단하게 인사말을 할까요. 서로 모르시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스텔라를 시작으로 한 명씩 이름과 가문을 밝혔다. 투자의 귀재라 불리는 백작의 딸, 무역왕의 딸, 부동산 큰손……. 다들 제국에서 돈으로 한가락씩 하는 가문이었다. 마침내 마지막으로 일리아의 차례가 다가왔다.
“일리아 블로든이에요.”
짤막한 소개에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주위에 앉아 있던 이들이 샐쭉 웃으며 말을 걸었다.
“블로든. 유명하지요.”
“제국에 블로든 가문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나긋한 말투는 가시가 서려 있었다. 일리아는 기분이 묘해졌다. 제 이름을 듣고 알랑거리는 이들은 많았지만, 지금과 같은 태도는 오랜만이었다. 다들 잘사는 집안이라 아부할 필요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저를 경쟁자라 생각한 것인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그때 스텔라의 오른쪽 자리에 앉아 있던 갈색 머리카락과 눈이 마주쳤다. 투자로 이름을 날린 백작 영애였다.
“그나저나 영애는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일리아는 제게 질문을 던진 백작 영애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가업을 잇거나,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녀는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블로든 가문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정작 영애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요. 지금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요?”
일리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가업을 물려받겠다고 선언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한 일은 없었다. 경제 활동이라면 가게랑 건물 몇 채를 굴리는 것이 전부였다. 거기다 금맥에서 나오는 지분의 반절이 제 것이었다.
가끔씩 어머니와 아버지의 일을 돕기도 하고, 이전에 투자해둔 사업도 몇 가지 있고……. 생각보다 이것저것 하는 건 많았지만, 구구절절 말하기는 귀찮았다.
“작은 가게를 몇 개 가지고 있긴 해요.”
간략한 대답에 백작 영애가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
“기대했는데 조금 실망스럽네요. 그저 가문의 수혜를 받는 것이 전부라니…….”
부모의 돈으로 가게를 차려 편하게 돈을 버는 거겠지, 하고 그녀가 추측하듯 말했다. 일리아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갈색 눈동자에 혐오와 편견이 서려있었다. 블로든 가문은 대단하지만 일리아 자체는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걸로 수익이 나긴 하나요?”
“그럭저럭 나쁘진 않아요.”
“적자가 나도 메워줄 배경이 있으니, 마음이 편하겠어요.”
빈정거리는 말을 들어도 일리아는 여전히 느긋한 얼굴이었다. 유유자적한 모습에, 그녀가 눈썹을 좁혔다. 그리고 일리아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을 하는지요?”
마치 물어봐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어깨를 폈다.
“투자를 하고 있어요.”
“투자요?”
“영애는 잘 모르시겠지만, 전망을 알면 투자로도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릴 수 있지요.”
부모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돈을 벌 수 있다며 그녀가 자랑 섞인 설명을 내놓았다. 일리아는 지루한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향긋한 꽃향기가 코끝에 머물렀다.
‘이 집 꽃차는 잘 만드네.’
예전에 이름을 내건 꽃차로 대박을 쳤다더니……. 스텔라의 재능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 같았다. 지루한 이야기가 끝나지 않자, 일리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투자는 해봤어요.”
“그래요? 소액으로요?”
제 기준으로는 소액이었다.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웃었다.
“소액으로는 큰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죠.”
백작 영애는 그럼 안 된다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거금을 투자했는데, 1년 만에 수익을 배분 받았어요.”
스스로가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다분했다. 그녀는 마치 물어봐주길 바라는 듯 일리아를 힐끔거렸다. 일리아는 순순히 질문을 던졌다.
“얼마나 벌었는데요?”
“이백만 크로엘이요.”
금액을 들은 일리아는 작게 탄식했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위로를 건넸다.
“저런……, 다음에는 더 잘 되겠죠.”
일리아의 말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순식간에 표정이 안 좋아진 영애를 보며 일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응? 망한 거 아니었어?’
일리아는 뒤늦게 대화의 흐름을 되짚어보았다.
‘아, 자랑하는 거였구나.’
일리아는 뒤늦게 자신이 눈치 없었음을 깨달았다. 제게 그 정도 수익은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별생각 없이 말해버렸다.
자랑하려다가 졸지에 위로를 받게 된 백작 영애는 자존심이 상한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윽고 그녀가 빈정거리듯 물었다.
“아까 투자해본 적이 있다고 했죠? 수익이 얼마나 되는데요?”
일리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곧바로 무역선 투자가 떠올랐다. 처음으로 북측 왕국과 교역이 뚫리고, 투자자들의 든든한 지원을 받은 상선이 대거 출항했다.
그때 일리아는 작은 선박에 약간의 돈을 투자했었다. 그 왕국에서만 나는 모래가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한참 흘러, 투자했다는 것조차 잊고 있을 즈음. 단 한 척의 배만 제국으로 돌아왔다. 복잡한 해류를 읽지 못한 상선들이 전부 침몰한 것이었다.
일리아가 투자한 배는 작은 데다가 선장의 노련한 기술 덕분에 무사히 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탓에 왕국에서 가져온 최초의 물건들은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리게 되었다.
“삼백만 정도 수익을 얻은 것 같네요.”
일리아가 덤덤히 대답하자 백작 영애가 미간을 찌푸렸다. 일리아가 백만 정도 더 벌긴 했지만, 투자는 역시 수익률을 봐야 했다.
“수익률은요?”
“정확하진 않은데, 3천 배 정도일 거예요.”
듣고 있던 누군가가 티스푼을 떨어뜨렸다. 푼돈으로 그 돈을 버는 게 가능하다고? 백작 영애는 따지듯이 물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베니시아 왕국과 처음 교역할 때 투자했거든요.”
베니시아와 첫 교역 때 선박이 단체로 침몰한 사건은 워낙 유명했다. 백작 영애는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순식간에 주위가 조용해지자, 스텔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스텔라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차가 식겠어요. 제가 직접 만든 건데, 한번 시음해보세요.”
스텔라의 말에 다들 얌전히 차를 마셨다.
“향이 정말 좋네요.”
“색감도 예뻐요. 이번에도 인기가 좋을 것 같아요.”
알랑거리는 칭찬이 쏟아지고, 스텔라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끌어냈다.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자 영애들은 너도 나도 이야기에 참여했다. 다들 관심사가 비슷하다 보니 물질적인 것들이 주로 대화에 올랐다. 요즘 유행하는 물건이나, 경매, 투자…….
일리아는 차를 홀짝홀짝 마시며 이야기를 들었다. 대부분은 알고 있는 것이지만, 제법 쓸모 있는 정보도 화두에 올랐다. 그러다 대화가 영양가 없는 주제로 빠지자, 심심해진 일리아는 둥글게 둘러앉은 영애들을 살폈다.
모임에 참석한 영애들은 스텔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잘 보이고 싶어서 대놓고 알랑거리는 이들부터 은근히 아부하는 이들까지. 이 모임에서 스텔라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블로든에 가려져 있긴 해도, 델로타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가문이었다.
거기다 스텔라는 어린 영애들뿐만 아니라, 귀부인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행보 하나하나 주목을 받았으며, 유행의 중심에 서 있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일리아는 멀찍이 앉아 있던 스텔라와 눈이 마주쳤다. 스텔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잘 봐두라는 듯 그녀가 턱을 치켜들었다.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지만, 일리아는 별생각 없이 쿠키를 집어 들었다. 쿠키를 한 입 먹은 일리아는 조용히 내려놓았다.
‘……다과는 맛없네.’
차는 훌륭한데 디저트는 그냥 그랬다. 일리아는 스텔라 쪽을 힐끗 보았다. 스텔라의 접시는 텅텅 비어 있었다. 부스러기도 없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빈 접시였던 모양이었다. 자기 집 디저트가 맛없다는 걸 알고 일부러 받지 않았나 의심이 갔다.
일리아가 스텔라의 빈 접시를 쳐다보자, 그것을 알아본 누군가가 재빨리 말을 걸었다.
“스텔라 님 접시에만 아무것도 없네요. 고용인이 실수했나 봐요.”
스텔라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 그녀는 손을 들어 고용인을 불렀다. 고용인은 잠시 눈치 보다가 디저트가 담긴 접시를 스텔라의 앞에 내려놓았다. 여자는 무척 뿌듯한 얼굴로 스텔라가 쿠키를 먹기를 기다렸다.
스텔라는 잠시 망설였다. 자신이 모두에게 대접한 디저트를 대놓고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스텔라는 쿠키를 먹었다. 그러자 여자는 활짝 웃으며 다른 디저트를 권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대화의 흐름은 허영과 자랑으로 넘어갔다.
‘집에 가고 싶다…….’
괜히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해서 여기서 고통 받고 있었다. 지루해진 일리아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리고 아까 제게 투자를 운운하던 백작 영애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 일로 마음이 상했는지 눈빛이 매서웠다.
“그나저나 우연히 타블로이드지를 읽다가, 익숙한 이름을 봤거든요.”
백작 영애의 말에 잠시 대화가 멈추었다. 그녀가 일리아를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블로든 영애. 테르시안 영식과 무슨 일이 있었나요? 자세한 이야기 좀 해주세요.”
그녀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일리아에게 꽂혔다. 일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을 회피한다고 생각했는지, 백작 영애는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떠벌렸다.
“제목만 봐서는 테르시안 영식이 바람이라도 피운 모양이던데……. 조만간 두 분 결혼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결혼할 거라고 난리를 피우더니, 결국 그렇게 되었냐며 비웃었다.
“맞아요. 파혼할 거예요.”
일리아가 순순히 수긍하자, 백작 영애는 웃음기를 거두고 안타까운 척 중얼거렸다.
“상심이 크겠어요. 약혼자가 바람이라니…….”
“그러니까요. 결혼식을 앞두고 말이에요.”
“오랫동안 교제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곧바로 다른 이들이 말을 받았다. 너무 속 보여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다들 일리아를 조금이라도 깎아내리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어차피 재력으로는 깔 수 없으니, 남자에게 버림받은 비참한 여자로 만들 생각인 듯했다.
“속으로는 아쉬워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테르시안 영식 정도면 손꼽히는 신랑감이잖아요.”
백작 영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리하트의 장점을 늘어놓았다. 가만히 들어주던 일리아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선한 인상 때문에 상냥한 미소가 지어지자, 모두들 말을 멈추었다. 일리아는 저를 걱정하는 척하며 깎아내리던 이들을 향해 화사하게 웃어주었다.
“다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들의 비꼼을 무시한 일리아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되물었다.
“그런데 그쪽은 테르시안 영식 같은 바람둥이가 취향인가 봐요? 아까부터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무슨……!”
“소개해드릴까요?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래요.”
일리아의 말에 백작 영애는 붉어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 주제를 끌고 가봤자 건질 게 없음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일리아는 스텔라를 힐끗 보았다. 뭔가 한마디라도 거들 줄 알았는데, 아까부터 조용했다. 그럴 애가 아닌데, 하고 유심히 보니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 보였다.
자세히 살피니 입에 뭔가를 머금고 있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조용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도와줄까, 말까.’
마음 같아서는 별로 돕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안색만 봐서는 당장 숨넘어갈 것 같았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보단 낫지.’
고민하던 일리아는 입을 열었다.
“델로타 영애. 긴히 할 말이 있어요.”
스텔라가 고개를 들어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나눌 말은 아니니, 잠깐 시간을 내어주겠어요?”
일리아의 말에 몇몇이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뭐라 하기 전, 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리아는 의자를 밀어 넣고 스텔라를 뒤따랐다.
다급한 걸음으로 티파티장을 벗어난 스텔라는 이내 정원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티파티장과 멀어졌을 즈음 수풀에 고개를 처박았다. 우웨엑, 하고 구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따라 온 일리아는 걸음을 멈춘 채 얼굴을 굳혔다.
‘혹시…….’
저번에 다이어트를 독하게 했다더니, 혹시 먹고 토하는 건가 의심이 갔다. 이전에 블로든 저택에 쳐들어왔을 때보다 좀 더 마른 것 같기도 했다.
몇 번이고 구역질하던 스텔라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일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스텔라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이 창피한 듯했다.
“물 가져다 줘?”
“웬 참견이야!”
스텔라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으며 중얼거렸다.
“……네가 없어도 알아서 잘 해결할 수 있었어.”
절대 도움 받을 생각이 없었다고 스텔라가 강조했다. 일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예쁘다고 얘를 도와줬담.’
참새처럼 짹짹거리는 스텔라를 보며 일리아가 무심히 말했다.
“이제 괜찮아 보이네.”
스텔라는 입매를 꾹 다문 채 일리아를 노려보았다. 눈동자에 서린 감정이 복잡해 보였다. 자존심 상한 것 같기도 했고,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평소와 같은 독기는 없었다. 스텔라는 일리아를 가만히 노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혹시 약점이라도 잡으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왜?”
일리아의 반응에 스텔라가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입술을 우물거리던 스텔라는 결국 팩 뒤돌아섰다. 스텔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일리아는 프란체가 이런 상황에 자주 하던 말을 내뱉었다.
“……싸가지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