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38)
“미안해요. 교제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거절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깐만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저 정말 괜찮은 사람입니다.”
일리아는 그의 자신감에 감탄했다.
‘저 자신감의 반만 떼어내서 카르한에게 주고 싶네.’
그럼 정말 공평할 것 같았다. 일리아는 혼자만의 생각을 갈무리하고 다시 한번 거절했다.
“지금 연인을 기다리는 중이어서 곤란해요.”
“아니, 레이디를 기다리게 하는 연인이라니. 그런 남자는 당장 버리십시오!”
남자가 끈질기게 추근거리자 프란체가 일리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제가 처리할까요?’라고 묻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일반인을 상대로 무력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쫓아낼지 고민하는데, 그가 손을 들어 어느 가게를 가리켰다.
“저기 보이십니까? 저 가게가 제 것입니다.”
일리아의 고개가 남자가 가리킨 방향으로 돌아갔다. 번화가 중심에 위치한 번듯한 레스토랑이었다. 남자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실은 제가 돈이 좀 많습니다.”
아무래도 근거 없는 자신감의 원천은 돈이었던 모양이었다.
“와, 그래요?”
일리아가 관심을 보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저 건물이 제 거예요.”
“예?”
남자가 멈칫했다. 그가 지금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을 짓자, 일리아는 상냥하게 못 박아주었다.
“여기서 세입자분을 만날 줄 몰랐어요.”
남자는 재빨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보기 드물 정도로 환한 금발과 연보라색 눈동자. 입고 있는 옷이나 모자, 가방 등은 그조차 구입하기 망설여지는 최고급 물건이었다.
설마 하던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남자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일리아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카르한을 발견했다.
“혹시…….”
“카르한!”
일리아가 손을 흔들며 카르한을 불렀다. 일리아를 발견한 카르한이 곧장 이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남자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흔히 볼 수 없는 장신의 사내가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카르한과 눈이 마주친 남자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들판에서 무기도 없이 거대한 흑곰과 마주치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그리고 남자를 발견한 카르한 또한 살짝 긴장한 듯했다.
마침내 마주 서게 된 카르한이 남자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식은땀을 흘리던 남자는 곧바로 꼬리를 말았다.
“……실례했습니다!”
그는 반대방향으로 후다닥 뛰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잠깐 쳐다보던 카르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가버려서 다행입니다.”
어떻게 거절할까 고민이었다며 카르한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남자가 잡상인이나 이교도인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프란체는 일리아에게 추근거리던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보다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어찌나 끈질기던지 치워버릴 뻔했습니다.”
“별일 없었잖아. 세입자인데 잘해줘야지.”
일리아가 프란체를 달래자, 카르한이 눈을 깜빡였다.
“이교도 아니었습니까……?”
“아, 그건 아니고……. 방금 저 사람이 저보고 같이 차 마시자고 하더라고요.”
일리아가 별생각 없이 대답하자, 카르한은 무척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깊게 가라앉은 푸른색 눈동자를 보지 못한 일리아는 이미 끝난 일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슬슬 극장으로 갈까요?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아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카르한이 무척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평소에는 일찍 나오는 편이었는데, 오랜만의 데이트에 옷을 고르느라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괜찮아요. 아직 약속 시간도 안 되었는걸요. 이만 갈까요?”
일리아와 카르한은 나란히 걸어 그곳을 벗어났다. 극장 앞에 도착하자 카르한의 얼굴에 감탄과 놀라움이 번져나갔다. 수도에서 가장 큰 극장인 만큼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최근에 연극 본 적 있어요?”
“극장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처음입니다.”
으리으리한 극장을 구경하며 감탄하는 카르한을 보던 일리아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거 알아요? 극장에 들어갈 때는 신발 벗어야 하는 거.”
카르한이 눈을 깜빡였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신발 신고 들어가는데, 예의가 아니거든요.”
일리아의 설명을 들은 카르한은 큰일 날 뻔했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극장 건물 앞에는 줄이 늘어져 있었다.
일리아는 그것을 무시하고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자 건물 입구에 서 있던 극장 직원이 표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일리아가 미리 준비해둔 표를 보여주자, 직원은 활짝 웃으며 비켜섰다.
“……미리 표를 준비해야 했군요.”
현장에서 사는 건 줄 알았다며, 카르한이 낭패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표 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얼마입니까?”
“괜찮아요. 제가 보자고 했잖아요.”
“계속 받기만 했으니 저도 내고 싶습니다.”
카르한은 평소와 달리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한 끝에 일리아가 말했다.
“그럼 저녁 식사는 당신이 내줘요.”
“알겠습니다.”
카르한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까지 함께할 거라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극장 안으로 입장하기 전, 카르한이 멈춰 섰다. 허리를 숙인 카르한이 정말로 신발을 벗으려 하자, 일리아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까 그건 농담이었어요.”
일리아는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카르한을 보았다. 솔직히 이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너무 잘 속는 거 아니에요?”
일리아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 묻자, 카르한은 뒷목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차마 벗지 못한 신발을 내려다보다 말했다.
“일리아는 제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 사실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일리아는 입을 쏙 다물고 말았다. 도대체 저를 향한 신뢰가 얼마나 큰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신발 벗는 게 아니라, 자기 이름을 외치며 입장해야 한다고 해도 믿을 기세였다. 일리아는 무척 진지한 얼굴로 카르한에게 질문을 던졌다.
“누가 제 이름을 사칭해서 돈 빌려달라고 하면 뭐라고 말하라 했죠?”
“……그녀는 나보다 부자니까 사기 치지 마라.”
일리아는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 복도를 걸어간 일리아는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극장은 조금 어둑한 편이었는데, 일리아가 예약한 자리는 무대와 가까우면서도 시야가 탁 트인 위치였기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카르한과 나란히 앉은 일리아는 기대를 품은 채 무대를 응시했다. 계속 바빴던 탓에 연극은 오랜만에 관람하는 것이었다.
“요즘 가장 인기가 좋대요.”
일리아는 카르한을 보며 소곤거렸다. 그의 얼굴도 제법 들뜬 티가 났다. 곧이어 주연 배우 한 명이 등장하더니 연극이 시작되었다.
일리아는 무대에 집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꾸만 몸을 뒤척이게 되었다. 연극 내용이 생각보다 부실했고, 취향과 너무 멀었다. 아직 초반인데도 어떻게 전개될지 훤히 보이는 신파에 가까운 연극이었다.
‘줄거리 좀 미리 알아볼걸.’
일리아는 속으로 후회했다. 예술을 좋아하는 아버지 덕분에 일리아는 살면서 많은 연극을 보았고, 덩달아 눈도 높아졌다.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이 연극은 좀 심했다.
지난 10년 정도는 우려먹은 흔해 빠진 내용이었다. 그나마 배우들의 빛나는 외모로 부족한 내용을 채우고 있었지만, 잘생긴 남자 배우를 보아도 감흥이 없었다. 제 옆에 남자 배우보다 더 잘생긴 사내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사랑, 제발 가지 말아요.”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오.”
주인공이 이별하는 장면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일리아는 카르한에게 미안해졌다. 살면서 처음 보는 연극이 이렇게 재미없는 내용이라니. 연극에 대한 편견이 생기면 어쩌나 싶었다.
무대에 집중하지 못한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카르한은 꼼짝 않고 무대를 보고 있었다. 무덤덤한 얼굴이 평소와 달리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역시 카르한도 연극이 형편없어서 짜증이 났나.’
그때 일리아는 희끄무레한 빛에 비친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새파란 눈동자는 평소보다 반질거렸다. 비 오는 날 옅은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물기가 살짝 비쳤다. 설마 하는데 카르한이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곱게 접어둔 손수건을 꺼내들어 손에 쥐었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본 일리아는 겨우 웃음을 삼켰다. 냉랭한 얼굴을 한 채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역시 연극보다 카르한을 구경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서 다시 무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몰입해 보려고 애썼지만, 점점 늘어지는 내용에 하품만 나왔다. 따뜻하고 어둑한 공간에 있으니 조금씩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 자면 안 되는데…….’
하지만 배우들의 목소리는 소음이 아닌, 자장가처럼 들려올 뿐이었다. 일리아의 눈꺼풀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일리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완전히 잠들고 말았다.
연극은 후반부를 향해 달려갔다. 오해로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던 두 주인공은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깨닫고 격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노골적일 정도로 진한 입맞춤에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보고 있는 자신이 괜히 민망하고 낯부끄러웠다. 혹시 저만 그런가 싶어서 카르한은 슬쩍 일리아를 보았다. 언제 잠들었는지 일리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일어나면 목 아플 텐데. 고민하던 카르한은 손을 뻗어 일리아의 고개를 바로 해주었다. 지탱할 힘이 없는지, 또다시 고개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카르한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제 어깨를 내어주었다. 살짝 높긴 했지만 일리아는 안정적으로 기대어 잠들었다.
그때부터 카르한은 연극에 집중할 수 없었다. 흥미진진하게 보던 내용들도 더 이상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목덜미에 얕은 숨결이 내려앉았다.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금빛 머리카락이 손목을 간질였다.
괜히 긴장되어 뻣뻣하게 앉아 있던 카르한은 다시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일리아의 얼굴을 자세히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깨에 기대 잠든 일리아의 금빛 속눈썹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로 이어진 작은 콧대와 하얀 뺨……. 공기의 흐름이 느려지고, 이 넓은 공간이 망망대해처럼 느껴졌다. 무인도에 떨어진 것처럼 자신의 주변만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 무대 위에서 배우가 뭐라고 대사를 뱉고 있는데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카르한의 시선이 살짝 벌어진 입술로 향했다. 느릿한 숨결이 새어나오는 도톰한 입술이 유독 도드라졌다.
일리아의 얼굴에 천천히 그늘이 졌다. 마침내 숨결이 뺨에 닿았을 때.
“……!”
카르한은 불에 덴 것처럼 놀라서 고개를 뒤로 뺐다. 그 반동으로 어깨가 들썩이자, 일리아가 뒤척이며 고개를 움직였다. 다행히 일리아는 깨지 않았다. 안도하는 동시에 카르한의 뺨과 목덜미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바닥에 닿은 뺨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내가 무슨 짓을……. 카르한은 충격 받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 뻔했는지 뒤늦게 알아차린 탓이었다.
만약 완전히 정신을 놓았더라면 자는 사람에게 입을 맞췄을 터였다. 혼란스러움과 함께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밀려왔다. 최대한 숨을 죽인 카르한은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손수건만 움켜쥐었다.
***
카르한은 아침 일찍 공작저를 나와 블로든 저택에 도착했다. 그는 버릇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헤인리와 마주칠까 싶어서였다.
이전에 한 번 헤인리와 마주쳤다가 집이 뒤집어지는 일이 있었다. 카르한은 헤인리가 무서웠기에 매일 그가 출근할 때를 기다렸다가 들어가곤 했다.
별관에 도착한 카르한은 마중 나온 일리아와 짤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평소 같으면 마냥 좋았을 테지만, 지금은 일리아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이틀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죄책감으로 가슴이 따끔거렸기 때문이었다.
공부방에 들어간 카르한은 교수를 기다렸다. 복습하려고 책과 펜을 꺼냈지만, 손에 잡히지 않았다. 카르한은 버릇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연극을 본 후 카르한은 급한 일이 있다는 핑계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휴일 내내 공작저에 처박혀서 시간을 보냈다. 카르한은 극장에서 있었던 일로 머리가 꽉 차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는 수도 없이 질문을 던져보았다. 배우들이 입맞춤하는 장면을 보고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런 건지, 입술이 예뻐서 잠시 홀렸던 건지…….
하지만 평소의 카르한은 분위기 같은 것을 전혀 타지 않는 편이었다. 남들이 다 흥겨워할 때도 멀뚱멀뚱 서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분위기 탓도 아닌데…….
아무리 고민해도 명확한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카르한은 온종일 일리아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아…….”
저도 모르게 또다시 입 밖으로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일리아는 제게 은인이었다. 집안의 꼭두각시처럼 지내오던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다. 임시 후계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일리아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도리어 진짜가 되어보자고 설득했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말하는 대로 되고 싶었다. 저를 믿어주었으니 최선을 다해 은혜 갚고 싶었다.
카르한이 일리아에게 느끼는 감정은 다양했다. 늘 고마웠고 가끔 칭찬해주면 선물을 받은 듯 기뻤으며 함께하는 시간은 즐거웠다.
단순하게 정의 내릴 수 있던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좀 더 복잡해져갔다. 이전에 리하트와 함께 있는 일리아를 봤을 땐 가슴이 답답했고, 웬 남자가 작업을 걸었다는 걸 들었을 땐 속이 들끓었다.
이것들은 분명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카르한은 일리아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기 어려웠다.
일리아와 자신의 관계는 무엇일까……. 거래와 동맹이 사라진 지금, 그저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관계인 것인가.
“나는 일리아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 거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카르한은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벌써 몇 번이고 탐독했던 연애 지침서였다. 카르한은 애써 책에 집중했다.
“에반테온 님.”
누군가의 부름에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교수인 메즈라 제니어스가 서 있었다.
“노크했는데 대답이 없으셔서 들어왔습니다.”
카르한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노크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을 정도로 집중했던 모양이었다.
“책을 읽고 계셨군요.”
메즈라는 흐뭇한 미소 지으며 성실하다고 칭찬하려다 멈칫했다. 책 속에 익숙한 문장이 보인 탓이었다.
“혹시 그 책은…….”
메즈라가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카르한은 ‘아’ 하고 짤막한 소리를 내뱉은 후 책을 덮어, 표지를 보여주었다.
[연애 왕초보, 고수가 되다! 제2권]제목을 확인한 메즈라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었다. 메즈라가 당황한 까닭은 카르한이 진지한 얼굴로 연애 지침서를 읽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저 책의 저자가 바로 메즈라였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 최연소 교수이자, 천재라 불리는 메즈라는 온갖 서적을 출간했다. 법과 정치뿐만 아니라, 동화책까지 대부분의 분야를 망라했다.
언젠가 그는 새벽 감성에 취해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을 각색한 에세이와 조언으로 채운 글이었다.
연애 고수인 척 심취해서 쓴 후에 잊어먹었다가 나중에 아내가 원고를 발견하고 출간하자고 설득했다. 고민 끝에 메즈라는 필명을 바꿔서 출간했고…… 그것이 대박 났다.
메즈라는 지금껏 자신이 그 책의 저자라는 것을 잘 숨기고 다녔다. 대외적인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바로 앞에서 책을 읽고 있는 카르한을 보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메즈라는 겨우 표정을 수습하고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저와 달리 무척 덤덤한 얼굴이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존심이 상하거나 창피하다는 이유로 이런 책은 몰래 숨어서 읽곤 하는데, 카르한은 당당해 보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메즈라가 입을 열었다.
“그……. 혹시 연애 문제로 고민하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