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41)
11장
***
이른 아침, 헤인리는 황궁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헤인리는 품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미간을 좁혔다. 직접 작성한 사표 봉투 때문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도 정돈했다.
“안녕하십니까.”
헤인리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쏟아지는 인사를 받아주었다. 오늘이 마지막 출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인사마저 특별하게 느껴졌다. 복도를 쭉 걸어간 헤인리는 팻말에 ‘제2행정부서’라고 적힌 문을 열었다.
일찍 도착했더니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다. 가방을 내려놓은 헤인리는 심호흡을 내뱉었다. 아침부터 테르시안 후작을 만나러 갈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헤인리는 책상 위에 올려둔 자그마한 초상화를 확인했다. 어릴 적의 일리아가 환히 웃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그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졌다.
며칠 전, 술을 잔뜩 먹고 집으로 돌아가 일리아와 대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일리아가 자책하기에 괜찮다고 말해주었지만, 좀 더 제대로 달래줄 것을 그랬다.
헤인리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후작이 출근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생각이었다. 적막감이 감도는 사무실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헤인리 블로든 님 계십니까?”
이름이 불린 헤인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얼굴을 내비친 사내가 말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내였기에 헤인리는 의아해하다가 사무실을 나왔다. 사내는 복도를 걸어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복도 귀퉁이에 멈춰 선 그가 등을 돌려, 헤인리를 마주 보았다.
“유보되었던 승진은 한 달 뒤에 처리될 겁니다.”
“……예?”
예상치 못한 말에 헤인리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아직 술이 덜 깼나? 하고 얼떨떨해하는데, 사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부터 사흘간 휴가를 다녀오시라는 전언입니다.”
“그게 무슨…….”
헤인리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얼굴을 굳힌 채 사내를 쳐다보았다. 테르시안 후작이 대놓고 승진을 막았는데, 갑작스레 마음을 바꿨을 리 없었다.
이 남자는 도대체 누가 보낸 사람이지? 그런 헤인리의 생각을 알아챘는지 사내가 가슴팍에 손을 얹으며 저를 소개했다.
“저는 에반테온 공작 각하의 비서관입니다.”
익숙한 이름에 헤인리가 멈칫했다.
“그럼 이만.”
사내는 할 일을 마쳤다는 듯 고개를 까딱인 후 곧장 자리를 떴다. 우두커니 홀로 서 있던 헤인리는 방금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에반테온 공작이라니. 공작과는 어떠한 친분도 없는데, 어째서 그가 나섰단 말인가.
“……카르한 에반테온.”
헤인리는 뒤늦게 카르한을 떠올렸다. 일리아와 교제하고 있는 카르한은 에반테온 소공자이자 후계자였다. 아무래도 그가 아버지인 에반테온 공작에게 부탁한 모양이었다.
헤인리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저를 도와주다니……. 물론 일리아 때문이겠지만, 지금까지 카르한에게 쌀쌀맞게 굴었던 자신의 행동을 생각하면 그가 도와줄 이유는 하등 없었다.
복도에 홀로 서 있던 헤인리는 천천히 걸음을 뗐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자, 그사이 출근한 사람들이 헤인리를 힐끔거렸다. 헤인리는 바로 제 옆 책상을 쓰는 이에게 물었다.
“후작께서는?”
“아직 출근하지 않으셨습니다.”
헤인리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후 가방을 챙겼다. 오늘부터 휴가를 받았으니 당장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저어…….”
옆자리에 앉은 이가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헤인리가 고개를 들자,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어제 후작님께서 공작 각하의 집무실로 불려 가는 걸 봤습니다.”
“…….”
“얼굴이 완전히 해쓱해져서 돌아오셨거든요.”
그래서 오늘 출근 안 할지도 모른다고 그가 말해주었다. 잠시 말이 없던 헤인리는 대답 대신 환히 웃어 보였다.
데구르르, 톡. 처음 보는 헤인리의 환한 미소에 그는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놓치고 말았다.
***
일리아는 온종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헤인리의 일로 머릿속이 꽉 차버렸기 때문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일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현관이 훤히 보였다. 현관에 세워진 마차가 무척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헤인리의 마차였다.
“……!”
일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퇴근하기엔 너무 이른 오후였다. 설마 오늘 사표를 내고 온 건가 싶어, 일리아는 곧장 현관으로 내려갔다. 드레스 자락을 붙들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일리아는 중앙 홀로 들어오는 헤인리와 눈이 마주쳤다.
“오라버니!!”
다급히 내려오는 일리아의 모습에 헤인리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일리아!”
순간 일리아의 몸이 휘청거렸다. 단숨에 다가온 헤인리가 일리아를 붙들었다. 헤인리의 품에 반쯤 안긴 일리아가 숨을 몰아쉬었다. 일리아는 고개를 번쩍 든 채 물었다.
“원래 이 시간에 오지 않으시잖아요. 설마 사표 내고 오신 거예요?”
“휴가를 받았다.”
“……네?”
헤인리는 일리아를 똑바로 세워주었다. 주위를 둘러본 헤인리가 조용히 제안했다.
“잠깐 정원을 걸을까?”
일리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와 현관 밖으로 나왔다.
만개한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을 걷는 동안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일리아는 괜히 불안해져서 손톱으로 손바닥만 지그시 눌렀다. 정원을 거닐던 헤인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사히 승진하게 되었다.”
그 말에 일리아가 고개를 홱 들었다. 헤인리는 옅게 웃고 있었다.
“네 덕이야.”
“제 덕이라뇨……?”
“에반테온 공작이 직접 나섰거든. 네가 소공자에게 말한 거 아니냐.”
일리아는 깜짝 놀라서 그대로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헤인리와 이야기를 나눴던 그날, 카르한이 벽 뒤에 숨어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정신이 없어서 배웅도 못 해주었다.
일리아는 혼란스러웠다. 그럼 카르한이 대화를 듣고 에반테온 공작을 찾아간 걸까. 하지만 카르한은 가족들과 사이가 나빠 보였는데…… 공작이 순순히 들어줬을 리가.
“그래서 소공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구나.”
“……그게.”
일리아는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니, 카르한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
덩달아 멈춰 선 헤인리는 일리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일리아의 안색이 평소에 비해 창백해 보였다. 사표 이야기를 꺼낸 후로 계속 저를 걱정하더니, 잠도 제대로 못 잔 모양이었다.
여전히 앳되어 보이는 동생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헤인리는 회상에 잠겼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한참 망설이던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조용한 속삭임에 일리아가 생각을 멈추고 헤인리를 마주 보았다. 왠지 쑥스러워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온화한 얼굴이었다. 헤인리는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말을 솔직하게 내뱉었다.
“지금까지 내가 무뚝뚝하게 굴어서, 상처를 많이 입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
“사실 그동안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더구나.”
일리아가 리하트와 교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헤인리는 일리아에게 많이 실망했다. 말 잘 듣던 착한 동생이 저와 싸워 가면서까지 리하트와 만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 마음을 몰라주는 일리아가 원망스러웠지만, 계속 걱정했고 행보에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리하트를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릴까 싶어, 일부러 본심을 숨기고 차갑게 굴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서먹해진 사이는 점점 더 멀어졌다. 이전처럼 대하고 싶은데, 그때는 어떤 식으로 일리아를 대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 계속 무뚝뚝하게 대했다. 그리고 일리아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받은 날부터, 비틀어졌던 관계가 조금 회복되었다.
사이가 괜찮아졌다 한들 아직도 어색함이 감돌고 있었다. 미처 다 허물어지지 못한 벽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그 한 발자국이 어려워서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헤인리는 언젠가 자신의 진심이 통할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직접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잠깐의 침묵이 맴돌고, 헤인리는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아직도 서먹하기 짝이 없었으나, 이제야 속으로 계속 해왔던 생각을 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매몰차게 군 건 본심이 아니었어.”
헤인리는 진심으로 반성한다는 듯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나 때문에 많이 상처 받았을 테지.”
걱정이라는 포장지를 두른 독설로 상처를 주었다. 가족이니 이 정도 참견은 해도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듣는 상대에게는 벽을 쌓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전부 잘못했다.”
만약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일리아가 저를 이토록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뻔했다. 저만이 일리아를 걱정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한참 멍하니 헤인리의 말을 듣던 일리아가 도리질 쳤다.
“아니에요…….”
선명하던 보랏빛 눈동자가 물안개가 낀 것처럼 잠시 흐려졌다.
“저를 위한 거였잖아요. 제가 오라버니 말을 좀 더 귀담아 들었어야 했어요.”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전부 일리아를 위해 쓴소리 한 것뿐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헤인리는 곧바로 품을 뒤져서 곱게 접은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그는 손수건을 손에 쥐여 주는 대신 직접 일리아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앞으로 점차 바꾸겠다고 약속하마.”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그가 속삭였다.
“말투도 고치고…… 표현도 제대로 하고. 지금까지 못 해준 만큼 노력할게.”
“……저도요.”
일리아는 물 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굳건하게 버티고 있던 벽이 무너지는 것이 느껴졌다. 와르르 무너진 벽 밖에 헤인리가 저를 보며 서 있었다. 어릴 적 자신을 돌봐주던 모습 그대로였다.
하루아침에 관계가 완전히 개선될 수는 없다 해도 괜찮았다. 이제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앞으로 어색하더라도 제대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부딪치고 깨지고, 그럼에도 다시 이어붙이면서 나아갈 것이다.
일리아는 참고 있던 눈물을 모두 쏟아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던 헤인리는 조용히 일리아의 등을 도닥여주었다. 그의 눈가도 희미하게 젖어 있었다.
눈물을 한참 쏟아낸 후, 일리아와 헤인리는 정원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함께 공유한 추억부터 서로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까지. 대화를 하면 할수록 멀게만 느껴지던 헤인리가 차츰 가까워졌다.
일리아는 헤인리를 힐끔거렸다. 저를 볼 때마다 차가운 얼굴로 엄하게 말하던 오라버니였다. 오해가 전부 풀려서 그런지 온화하게만 느껴졌다.
‘사과하고 나서도 마음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헤인리 또한 저와 마찬가지로 어색해서 다가오지 못했던 것이다. 잠시 말을 멈춘 헤인리는 버릇처럼 안경을 추어올리려 했다. 손가락에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어색한 듯 뒷목을 쓸어내렸다.
“에반테온 소공자에게 직접 감사 인사를 하고 싶구나.”
일리아는 슬쩍 눈치 보았다. 이전에 헤인리가 카르한 문제로 집을 엎었던 것이 떠오른 탓이었다. 카르한이 저택에 매일 들른다는 걸 다들 알고 있는데, 왜 제게는 말하지 않았냐며 섭섭해 했었다.
“……나중에 자리를 마련할게요.”
갑자기 헤인리가 찾아오면 카르한은 깜짝 놀랄지도 몰랐다. 일리아는 문득 헤인리의 마차를 보고 후다닥 숨던 카르한이 떠올라서 웃음이 나왔다.
“얼굴이 좋아 보여.”
헤인리의 말에 일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리하트 테르시안과 교제할 때는 항상 걱정이 많아 보였는데…….”
헤인리는 지난 몇 년 동안 봐 왔던 일리아를 떠올렸다. 얼굴에 항상 그늘 한 자락이 드리운 듯했다. 지금 행복하다 말하면서도 표정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네가 행복하면 됐지.”
헤인리의 중얼거림에 일리아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헤인리는 잠시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조금 쑥스러운 듯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소공자는 내 생각보다…… 좋은 사람 같구나.”
“그렇다고 제가 말했잖아요.”
아무도 안 믿어줬지만, 하고 일리아가 작게 투덜거렸다. 처음에는 카르한을 반대하던 가족들이 점점 그의 진면모를 알아봐줘서 다행이었다. 매번 오해만 사서 속상했는데 잘된 일이었다.
“오늘부터 휴가니, 쉬실 건가요?”
“아니, 휴가 동안 바쁠 예정이야.”
헤인리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사표 내면서 공론화하려던 후작의 비리 자료를 터뜨릴 생각이거든. 에반테온 공작이 내 뒷배라 착각하고 있을 테니, 지금이 적기지.”
“좋은 생각이에요. 저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거든요.”
카르한 덕분에 잘 해결되었지만, 분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도화선에 먼저 불을 붙인 것은 그쪽이었다.
“오라버니 휴가 동안 저도 바쁠 것 같네요.”
일리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유독 차갑게 빛났다. 일리아는 현관 앞에서 헤인리와 헤어진 후 별관으로 향했다. 노크한 후 방에 들어가니,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카르한이 보였다.
“카르한.”
뭔가 열심히 쓰고 있던 펜이 멈추었다. 카르한이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울었습니까?”
“아.”
일리아는 반사적으로 제 눈가를 문질렀다. 헤인리를 붙잡고 엉엉 울고 왔더니 얼굴이 엉망인 모양이었다. 곧장 오느라 거울을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카르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표정을 굳힌 카르한이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리하트 테르시안 때문입니까?”
“아니에요.”
일리아는 놀라서 고개를 내저었다. 헤인리와 이야기하다가 감정이 북받쳐서 울고 왔다고 말하기는 창피했다.
일리아가 자세히 대답해주지 않자, 카르한이 입매를 꾹 다물었다. 화가 난 것 같으면서도 걱정에 가득 찬 눈이었다.
일리아의 표정이 점점 묘해졌다. 카르한은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뚜렷했다.
“실은…….”
일리아는 머뭇거리다가 이유를 말해주었다.
“오라버니랑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거든요. 이번 기회에 전부 풀고 왔어요.”
아까 있었던 일을 회상한 일리아는 괜히 쑥스러워졌다.
“아참, 오라버니 승진 건이 무사히 통과되었어요. 카르한 당신이 나서 준 거죠?”
카르한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표정을 푼 카르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일리아의 환한 미소에 카르한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카르한은 제 몸속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혹시 그 일 때문에 곤란해진 건 아니죠?”
일리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카르한이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으며, 임시 후계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리아는 알고 있었다. 카르한은 가슴 언저리에서 점점 커져가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래요?”
“저도 크게 기대하지 않고 말씀드려 봤는데…… 해결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매끄러운 거짓말이 흘러 나왔다. 카르한은 자신이 뻔뻔하게 거짓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여름이 지나거든 분쟁지역에 다녀와라.
공작의 목소리가 또다시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수도로 돌아온 지 반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도 전쟁터를 떠도는 악몽을 꾸었다. 분수처럼 솟구친 피가 눈앞을 가리고 이름 모를 이의 단말마가 메아리쳤다. 살려달라는 애원과 죽기 싫다는 외침.
악몽에서 깨고 나면 온몸이 욱신거렸다. 몸에 새겨진 무수한 상흔이 과거를 상기시키듯 아우성쳤다. 상처는 카르한이 하루를 더 살아남았다는 증거였다.
공작이 말한 분쟁지역은 제국에서도 가장 척박한 땅이었다. 살아 나오기 어렵다는 그곳에 칼 한 자루만 가지고 뛰어 들어가야 했다. 카르한은 눈앞에 서 있는 일리아를 마주 보았다.
말간 보라색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덩달아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희뿌연 먼지처럼 떠돌던 끔찍한 기억이 빗물에 씻겨나가듯 점점 흐려졌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기뻐하고 좋아하는 모습만 보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 작은 희생을 치르는 것일 뿐이다.
“……제가 도움이 되었습니까?”
“물론이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카르한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일리아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온 신경이 미소에 사로잡혔다. 가끔씩 그가 웃을 때마다 가슴께가 가려웠다. 뒤늦게 정신 차린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께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대요.”
“제가 한 것도 없는데…….”
카르한이 괜찮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카르한과 얼굴을 마주하던 일리아가 중얼거렸다.
“요즘 당신이 저를 피하는 줄 알았어요.”
카르한이 멈칫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답과 달리 카르한은 슬그머니 일리아의 시선을 피했다. 역시 뭔가 이상하다고 일리아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