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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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화창한 오후, 일리아는 평소보다 짙게 화장을 하고 붉은색 드레스를 입었다. 거울을 본 일리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에 올라탄 일리아가 맞은편에 앉은 말렉에게 물었다.
“내가 연회에 참석한다는 소문은?”
“전부 뿌렸습니다.”
“잘했어.”
많은 연회를 물색하던 중, 일부러 규모가 큰 것으로 골랐다. 할 일은 전부 끝났으니, 이제 미끼를 물기만을 기다리면 될 듯했다.
사실 리하트 문제는 천천히 처리할 생각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실행에 옮기려 했다. 하지만 헤인리를 건드린 순간, 일리아는 더 이상 참고 넘길 수 없게 되었다.
마차를 한참 타고 도착한 곳은 수도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저택이었다. 제대로 된 문지기도 없었기에 일리아는 곧바로 저택 안에 들어섰다. 대문을 통과하자마자 현관이 보였다. 정원이 이렇게나 짧은 집은 처음이었다.
일리아는 현관 앞에 서서 기둥에 그려진 가문 문장을 보았다. 그날 리하트의 집에서 봤던 문장이었다. 문장을 살피던 일리아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벌써 몇 달이 지난 일이지만, 리하트가 낯선 여자와 침대를 뒹굴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일리아는 표정 없이 굳게 닫힌 문을 응시했다. 오늘 일리아가 만날 상대는 바로 리하트와 바람 피웠던 여자였다.
말렉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고용인으로 보이는 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말렉의 얼굴을 알아본 고용인이 눈을 크게 떴다.
“오셨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고용인이 금방 자리를 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일리아는 활짝 열린 현관문 앞에 서서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여자를 응시했다.
계단을 전부 내려온 여자와 일리아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이 저택의 주인 딸인 로즈 바엘라였다.
“안녕? 나 알지?”
“다, 당신은……!”
일리아의 얼굴을 알아본 로즈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일리아가 짙은 미소를 짓자, 로즈는 당황해하며 고용인에게 소리쳤다.
“뭐 하고 있어! 당장 쫓아내!”
그러나 고용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색이 된 로즈가 고용인을 재촉했다.
“어서!”
“저 지금부터 일 그만둘게요.”
“그게 무슨…….”
고용인은 곧바로 뒤돌아서서 현관을 나가버렸다. 고용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로즈는 입술만 벙긋거렸다. 가만히 지켜보던 일리아가 팔짱을 꼈다.
“봉급을 계속 미뤘나 봐? 금방 넘어오던데.”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일리아의 양옆에 서 있던 기사들과 눈이 마주치자, 몸이 움츠러들었다. 로즈가 다급히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누구 없느냐!! 얼른 저 여자 끌어내!!”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깊은 적막감이 피부를 파고들어오자,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제 집을 둘러보았다.
“아까 그 고용인이 마지막일걸.”
“뭐……?”
“내가 돈으로 다 처리했거든.”
로즈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일리아는 고개를 기울인 채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부친이 제법 큰 빚을 졌지?”
“어떻게 그걸…….”
“내가 채권을 샀으니까 알지.”
로즈가 눈을 크게 떴다. 일리아는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좁혀진 거리만큼 로즈가 한 걸음 물러섰다. 걷고, 물러서고…… 거리가 좁혀질 듯 좁혀지지 않았다.
저택 안으로 완전히 들어온 일리아는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작은 저택 안은 싸구려 장식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돈이 될 만한 것은 이미 다 팔아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당장 너를 길바닥에 앉힐 수 있어.”
“설마 보복하려고…….”
얼어붙어 있던 로즈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일리아는 피식 웃었다.
“원해?”
가벼운 말투였지만 일리아라면 정말 그럴 수 있다는 걸, 로즈는 알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의 입에서 변명이 튀어나왔다.
“나는 정말 몰랐어…….”
“다 알고 왔으니, 피해자인 척은 하지 말고.”
일리아가 딱 잘라 말하자, 로즈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일리아의 말처럼 로즈는 리하트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장난을 시작했다. 리하트와 있으면 온갖 사치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미한 시골 소귀족인 그녀가 수도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도 리하트 덕분이었다.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일리아에게 현장을 들키고 말았다. 로즈는 그대로 리하트에게 잘려나갔다. 아쉬웠지만 그보다 블로든에게 보복당할까 봐 겁이 났다.
다행히 일리아 쪽이 잠잠해서, 잘 넘겼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로즈는 자신의 미래가 뻔히 보이는 것 같아서 눈을 질끈 감았다.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뜻밖의 말에 로즈가 눈을 번쩍 떴다. 차가운 눈으로 저를 응시하는 일리아가 보였다.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길바닥을 떠도느냐, 안락한 생활을 지속하느냐가 결정될 거야.”
일리아는 입매를 비틀어 웃으며 물었다.
“어때, 내 제안 들어볼래?”
***
며칠 전, 테르시안 후작이 죽을상을 하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유를 물으니 에반테온 공작에게 된통 깨졌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공작이 직접 헤인리 블로든의 승진을 승인해주었다고 말했다.
-둘이 접점이 전혀 없어 보였는데…….
헤인리의 일에 에반테온 공작이 나설 이유가 하등 없다며 후작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리하트는 설마 싶어졌다. 분명 카르한 에반테온은 가족들에게도 외면 받는 임시 후계자라 하였다. 본인도 그것을 인정한 눈치였고 말이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리하트는 후작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은…….
일리아가 카르한 에반테온과 교제한다고 실토하자, 후작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걸 왜 이제 말하느냐!! 쓸모없는 놈. 제대로 하는 게 없구나!
그날 리하트는 길길이 날뛰는 후작에게 혼쭐이 났다. 그리고 다음 날, 후작은 황궁에 발이 묶여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후작의 비리가 터졌기 때문이었다.
처음은 작은 불씨에 불과했다. 그러나 증거 자료들이 속속히 쏟아지고, 증언이 이어지자 불씨는 커다란 불길로 번져갔다. 더 이상 황실 측에서도 손 놓고 방관할 수 없어졌다. 결국 후작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테르시안 후작은 에반테온 공작의 눈치를 보느라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후작의 위세는 점점 깎여가고, 황궁 내에서도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뇌물을 바쳤던 이들도 점점 발길을 끊었다.
그나마 든든한 뒷배인 황태자비가 이리저리 힘써준 덕에 재판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일주일간의 근신처분과 약간의 징계를 받게 되었다.
그사이 리하트의 어머니인 테르시안 후작부인은 앓아누웠다. 심혈을 기울이던 사업이 망하기 직전에 이른 것이다.
후작부인은 헤인리를 빌미로 돈을 뜯어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도리어 역풍을 맞은 데다가, 이곳저곳에서 받아오던 자금까지 전부 끊겼다. 비올레의 연줄로 알게 된 협력 업체들이 전부 등을 돌린 탓이었다.
투자금을 회수하기엔 이미 늦었고, 계속 진행하기엔 지금까지 쏟아 부은 만큼의 돈이 필요했다.
-우리도 블로든 같은 부자가 될 수 있었는데……, 네 잘못이야!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진 후작부인은 리하트를 비난하고 탓했다.
그리고 시오나 또한 상황이 좋지 않은 듯했다. 이번 일이 잘 풀릴 거라 생각해 남편에게 무리하게 투자를 권한 것이다. 기다리지 못하고 거액을 빌려 어머니의 사업에 투자했는데, 이자를 갚기도 빠듯한 듯했다.
시오나는 곧바로 테르시안 저택에 찾아와 리하트에게 가지고 있는 거라도 내놓으라고 성화였다. 가족들에게 잔뜩 시달린 리하트는 집에 붙어있지 못하고 바깥을 나돌기만 했다.
“전부 나 때문에 잘 먹고 잘 살았던 거면서!”
시오나와 대판 싸운 리하트는 외투를 집어던졌다. 가족들뿐만 아니라, 가문 사람 전체가 돈, 돈, 해대고 있었다.
리하트는 잘나가던 과거가 무척 그리웠다. 일리아와 교제하던 시절, 그는 황제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사람들은 리하트를 치켜세워주었으며, 자신이 못 가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리하트는 제가 대단해서 그런 거라 단단히 착각했다. 그것이 전부 일리아의 손으로 세운 금빛 모래성이라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사랑한다고 말할 땐 언제고…….”
일리아가 원망스러웠다. 자신이 잘못한 점이라면 바람피운 것이 전부였다. 처음이니 용서해줄 법도 한데, 일리아는 매몰차게 뒤돌아섰다. 그사이 새로운 남자를 만난 것으로 보아, 때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리하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요즘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비리 사건에 휘말린 것도, 어머니의 사업 건도 일리아가 꾸민 짓이 분명했다. 괘씸하고 분해서 속만 들끓었다.
“찾아가봐야 하나…….”
파혼해주겠다고 말하면 일리아도 저를 만나줄 것이다. 관계를 돌이키기엔 늦었으니 파혼을 대가로 돈을 뜯어내는 게 합리적일지도 몰랐다.
세가 꼬박꼬박 나오는 건물이라도 달라고 할까 고민하는데, 누군가가 찾아왔다. 소식통으로 심어둔 이였다.
“일리아 블로든 님께서 연회에 참석하신다고 합니다.”
“사실이야?”
심드렁하게 이야기를 듣던 리하트가 고개를 홱 들었다. 지금껏 연회고 뭐고 집에 박혀서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던 일리아였다. 정말로 연회에 참석한다면 이번이 기회였다.
“초대장 받아놔!”
리하트는 이번에야말로 담판을 지을 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연회 당일. 리하트는 연회에 참석할 채비를 마쳤다. 사치를 끊지 못해서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값비싼 물건은 상당수 팔아치웠지만, 혹시 몰라 남겨둔 옷과 장신구를 착용했다.
거울 앞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하던 리하트는 문득 아쉬워졌다. 예전 같았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 물건을 착용하고 나갔을 터였다. 옷장처럼 쓰던 가게들도 전부 출입 금지가 되어버렸으니……. 파혼해주는 대가로 의상실을 몇 개 받아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리하트는 곧바로 침실을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한참을 달려, 그가 탄 마차는 연회장 근처에 멈춰 섰다. 초저녁인데도 건물 안쪽에서 환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요즘 집안 분위기가 나빠지고 돈 나갈 구석이 많아, 자중하고 있었다. 연회는 간만에 참석하는지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리하트는 당당한 걸음으로 연회장에 입장했다. 안으로 들어선 리하트는 인사 받아줄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예전 같으면 꿀 냄새 맡은 벌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어야 정상이었다. 그 연회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환영 받는 것이 당연했다.
너무 빨리 왔나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리하트가 좀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지켜보던 이들이 수군거렸다.
“요즘 안 보이더니 오늘 딱 왔네요.”
“그나저나 당신, 테르시안 영식과 좀 친하지 않았어요?”
“돈 좀 쓰기에 대접해줬지, 요즘은 영…….”
“하긴 옷만 봐도……. 유행 다 지난 거네요.”
그들은 사이좋게 리하트를 헐뜯었다. 평소에 리하트를 아니꼽게 보던 이들이었다.
“블로든이랑 파혼한다던데?”
“그게 사실이었어?”
누군가의 발언에 다들 흥미진진해 했다.
“타블로이드지에 뜬 기사도 그렇고…… 블로든 영애가 에반테온 소공자랑 함께 다닌다는 걸 들은 적이 있어서.”
“에반테온 소공자 이야기는 헛소문 아니었어? 그럼 테르시안 쪽은 진짜 파혼 당한 건가?”
“하긴 블로든 영애가 아까웠지.”
다들 통쾌한 얼굴로 건배하듯 샴페인 잔을 들었다.
“뭐야…….”
리하트는 저를 보며 수군거리는 것을 눈치채고 그쪽에 눈길을 주었다. 제법 신분 높은 귀족 가문 자제들이었다. 그럭저럭 친분이 있었는데, 다들 평소와 달리 먼저 인사를 건네러 오지 않았다. 한 번쯤은 먼저 인사하러 가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하며, 리하트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다들 오랜만에 뵙습니다.”
리하트가 다가오자, 다들 바쁜 척하거나 무시했다. 몇몇은 아예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띤 채 자기들끼리 숙덕거렸다. 묘한 기류가 흐르자, 리하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이래? 리하트가 물어보려는데,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던 후작 영식이 말을 걸었다.
“요즘 잘 보이지 않더니,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가 리하트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불쾌해진 리하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집안 상황이 썩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리하트는 발끈한 나머지 과도하게 힘을 주어 말했다. 후작 영식이 빙글빙글 웃으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정말 파혼하신 겁니까?”
그가 이죽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지금껏 잘난 약혼자 덕분에 왕 노릇 하지 않았습니까.”
리하트는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사이가 나쁘긴 해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시비를 걸어온 적은 드물었다.
리하트는 제 편을 들어줄 사람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말리기는커녕 재미있다는 얼굴로 관망했다. 당혹스러웠다. 저를 치켜세워주고 아첨하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다.
그때 연회장이 술렁였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리하트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입구를 쳐다보았다. 연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들어오고 있었다.
서서히 시선을 들어 올린 리하트는 얼굴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일리아 블로든이었다.
***
일리아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리하트가 있었다.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리하트를 마주한 일리아는 이내 눈을 돌려버렸다.
한 걸음씩 옮기자, 분홍빛 드레스가 만개한 꽃잎처럼 퍼져나갔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이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블로든 영애, 간만에 뵙는군요.”
“저를 기억하시는지요. 이전에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모두들 일리아에게 잘 보이고 싶어 꼬리를 살랑댔다. 인사를 받아주던 일리아가 미소 지었다. 한층 상냥해진 얼굴을 본 사람들은 넋을 놓고 덩달아 웃었다.
‘오랜만이라 벌써 피곤하네.’
웃고 있던 일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연회에 참석하는 건 오랜만이라 그런지, 다들 조금이라도 친분을 쌓아보려고 눈이 발갰다. 피로했지만 사교계에 집착하던 리하트를 생각하면, 장소는 연회장이어야만 했다. 예상대로 꼼짝없이 서 있던 리하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일리아.”
그가 일리아를 불렀을 때, 주위 사람들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일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리하트를 응시했다.
“이야기 좀 해.”
잠시 테라스로 나가자는 의미였지만, 일리아는 고개만 살짝 기울였다.
“우리 사이에 해야 할 이야기가 있나요?”
“남처럼 굴지 마. 아직 난 네 약혼자라고.”
다들 흥미진진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진실은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빠르게 분위기를 파악했다. 제 편을 들어줄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관망하는 입장이었다. 중립에 선 사람들을 어떻게 끌어들이느냐가 중요했다.
일리아는 진흙탕 싸움으로 함께 추락하는 것보단 철저한 피해자가 되는 편이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욕을 듣는 것보단 동정이 낫지.’
일리아는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처연한 느낌을 자아냈다. 일리아는 사연 많아 보이는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리하트. 사실 나는…… 당신과 마주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요.”
목소리에서 슬픔이 묻어나왔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일리아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제가 지겨워져서 다른 사람을 만나놓고…… 이제 와서…….”
리하트는 일리아가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낼 줄 몰랐는지 얼굴이 굳어졌다. 듣고 있던 이들이 리하트를 쓰레기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하실 말씀이 뭔데요……?”
일리아가 고개를 살짝 들고 리하트를 쳐다보았다. 축 내려간 눈매가 불쌍하게 보이는 데 한몫했다.
“그건 오해라니까.”
리하트가 다급히 지껄였다.
“몇 번이나 해명했잖아. 이제 와서 왜 이래?”
“다른 여자랑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걸 제 눈으로 직접 봤는데, 오해라고요……?”
일리아의 힘없는 중얼거림에, 영애 하나가 리하트의 머리를 쥐어뜯듯 부채를 잡아당겼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부채 깃털이 손바닥에 잡혔다. 주위가 술렁였다. 분위기가 점점 불리한 쪽으로 흐르자, 리하트가 재빠르게 부정했다.
“내가 바람이라고? 생사람 잡지 마.”
어차피 바람 피웠다는 증거도 없었다. 비록 일리아에게 현장을 들켰지만, 그 장면을 본 사람은 일리아뿐이었다. 증인으로 내세울 사람도 없으니, 발뺌하면 그만이었다. 바람 피웠다고 인정했다 한들 일리아와 저만이 알고 있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한 리하트는 금세 의기양양해졌다. 오히려 일리아를 의심 많은 사람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왜 나를 못 믿는 건데? 난 처음부터 너밖에 없었어.”
“…….”
“예전부터 계속 집착하더니 이제는 이상한 피해망상까지 생긴 거야?”
리하트가 태도를 달리하자, 일리아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나오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