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44)
“보여주지 그랬어요.”
“일리아 님께 가장 먼저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바네사가 활짝 웃다가 캔버스를 올려둔 이젤 쪽으로 걸어갔다. 흰 천으로 덮어둔 캔버스가 보였다. 바네사가 천을 걷어내자 그림이 드러났다.
“……!”
클리프는 동상이 된 것처럼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림을 응시했다. 금방이라도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의 반응을 확인한 일리아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일리아는 캔버스에 담긴 그림을 찬찬히 살폈다. 완성되기 전에 한 번 봤지만, 역시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한참 조용하던 클리프가 흥분에 가득 차 방방 뛰며 소리쳤다.
“일리아!! 당장 전시회를 열자꾸나!”
***
그 후로 일리아는 클리프를 도와,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바네사의 그림에 푹 빠진 클리프는 하루빨리 전시회를 열어야 한다고 성화였다. 이런 그림을 묵혀두는 건 죄라며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바네사의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완성된 작품을 제외하고는 전부 습작에 가까웠다. 의견을 나눈 끝에 바네사의 작품은 클리프가 기획하던 전시회에 출품하기로 하였다. 작품 자체로도 충분히 빛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실력으로 승부를 보기로 했다.
대신 일리아는 작은 행사를 기획했다. 화가의 이름은 전부 익명으로 하고, 관람객들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 앞에 장미를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장미를 가장 많이 받은 작품은 화가가 직접 와서 인사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전시회 개관 당일,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몰려왔다. 관람객들은 저마다 마음에 드는 작품에 장미를 한 송이씩 내려놓았다. 아직 오전이었는데 바네사의 그림 앞에는 장미 언덕이 만들어졌다.
“정말…… 대단한 그림입니다.”
바네사의 작품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프란체가 감탄했다.
“그리운 느낌이에요.”
선은 거칠고 힘차게 뻗어나갔으나 색감은 밝고 따스했다.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아닌, 생명감 넘치는 빈민가의 풍경이었다. 빈민가 출신인 프란체는 그림이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사람들도 전부 바네사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그림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그림에 관심 없거나 잘 모르는 이도, 까다로운 안목을 가진 사람도 그녀의 그림을 칭찬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작품을 봤지만 정말 대단하군.”
누군가가 제법 큰 목소리로 칭찬을 쏟아냈다.
“장담하는데, 분명 저 그림을 그린 화가는 3대 문파에 속해 있을 걸세.”
일리아는 목소리의 주인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중년의 남자가 바네사의 작품을 보며 자신감 넘치게 의견을 내놓았다.
“처음 보는 기법인데, 막 예술 아카데미를 졸업한 대형 신인인 모양이야.”
그림 한 점으로 추측을 늘어놓은 사내가 턱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저 과감한 붓 자국을 보니 남자겠어.”
“그림 하나로 그렇게 많은 것을 파악하시다니, 역시 백작님이십니다.”
옆에 있던 이들이 아부하자 백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야기를 엿들은 주변 사람들은 ‘유명한 신인이래.’ 하고 정보를 퍼뜨렸다.
일리아는 잠자코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추측이 전부 틀리긴 했지만, 익명으로 작품을 공개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의 이름만 보고 작품을 판단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문파인지, 아카데미를 졸업했는지, 성별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일리아는 그런 것을 다 떠나 바네사가 오직 실력으로 빛을 보길 바랐다.
“일리아.”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일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카르한이 서 있었다. 오후 수업을 받고 곧바로 온 모양이었다.
“전시회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일리아는 카르한을 살폈다. 최근 서로 바빴더니 얼굴을 제대로 볼 틈이 없었다.
“작품 소개해줄게요.”
일리아는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카르한은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일리아의 손에 잠자코 끌려갔다. 한참 작품을 감상하던 카르한이 중얼거렸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천재인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제가 발견했어요.”
일리아가 자랑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카르한은 잠시 시무룩해졌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들고 있던 장미꽃 한 송이를 내려놓았다.
잠시 지켜보던 일리아는 주위를 가볍게 살폈다. 슬슬 자신이 초대한 사람들이 올 때가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묘하게 익숙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일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수한 차림새와 달리 얼굴에서 귀티가 흘렀다. 확실하진 않으나 고귀한 사람일 것 같았다. 여인은 이내 뒤에 서 있던 키 큰 여자와 함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카르한과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데,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바네사의 그림을 보며 희대의 걸작이라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신선한 작품에 목말라 있던 노귀족들에게는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과 같았다.
“소공자도 오셨군요.”
노귀족들이 카르한을 알아봤다. 그들은 여전히 카르한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전처럼 무턱대고 경계하거나 날을 세우진 않았다. 카르한 또한 긴장하지 않고 자신을 낮춰서 공손하게 말을 걸었다.
마음이 풀린 노귀족들은 그에게 질문을 툭툭 던졌고, 카르한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요즘 젊은 사람 같지 않게, 고미술에 해박하십니다그려.”
“블로든 백작님께 많이 배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여러분께도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뭐……, 아는 선에서라면…….”
은근히 죽이 잘 맞는 그들을 보며 일리아는 속으로 웃었다. 공통 주제가 있으니 카르한도 수월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문득 처음 만났을 때의 카르한이 떠올랐다. 말주변이 없어서 대답도 제대로 못 하던……. 그때를 떠올리면 몇 달 사이 참 많이 변했구나 싶었다.
노귀족들을 살피던 일리아는 에반테온 공작가 원로와 눈이 마주쳤다. 짧게 눈인사하자,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말수가 적어서, 일리아와 대화를 나눈 적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늦은 오후 무렵, 전시회는 성황리에 끝났다. 원래라면 직원들이 작품 앞에 놓인 장미를 셀 예정이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누가 보아도 바네사의 그림 앞에 놓인 장미가 월등하게 많았기 때문이었다. 앞에 놓인 장미로 작은 꽃밭을 조성해도 될 정도였다.
관람객들은 화가의 얼굴을 보기 위해 기다렸다. 꽃을 가장 많이 받은 화가는 관람객들에게 직접 인사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화가일까?”
“아까 지나가다 들었는데, 궁정 화가의 제자래.”
“유학 다녀왔다던데.”
화가에 대한 무분별한 정보들이 기정사실처럼 되었다. 그 중심에는 추측을 잔뜩 늘어놓던 백작이 있었다.
전시장 직원들이 작품 하단에 이름표를 달기 시작했다. 왜 진작 알아보지 못했냐며 탄식하는 사람부터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전시회 주최자인 클리프가 바네사의 작품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오늘 전시회에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약속대로 가장 많은 장미를 받은 화가를 소개합니다.”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기대 어린 얼굴로 화가가 등장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인파 사이에서 잔뜩 긴장한 바네사가 쭈뼛거리며 튀어 나왔다. 작품 앞에 선 바네사가 스스로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이 작품을 그린 바네사라고 합니다.”
바네사를 본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여자잖아? 남자 아니었어?”
“성이 없는 걸 보니 평민인가?”
아까 열심히 추측을 늘어놓던 백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부하던 이들은 난감한 얼굴로 백작을 쳐다보았다.
“질문이 있소.”
백작이 손을 들자, 바네사가 시선을 주었다.
“어느 문파 소속인지, 아카데미는 언제 졸업했는지 궁금하군.”
바네사가 일리아 쪽을 한번 쳐다보았다. 일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호흡을 한 바네사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는 누군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간 적도,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도 없습니다.”
그 말에 백작의 얼굴이 왕창 구겨졌다. 그가 손을 들어 바네사를 삿대질하며 호통 쳤다.
“여기가 시장 바닥도 아니고, 화가도 아닌 자의 그림을 걸어뒀단 말인가!!”
백작의 노성에 바네사의 어깨가 완전히 움츠러들었다. 힐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블로든 백작께서 우리의 안목을 너무 무시한 것 아닙니까.”
화살은 클리프에게 향했다. 백작의 얼굴에 악의가 차 있었다. 보잘것없는 무명 화가의 그림을 훌륭하다 떠들어 댔기에, 제 안목이 폄하된 것 같아 불쾌해하는 기색이 그득했다.
“…….”
바네사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거기다 클리프까지 함께 비난 받자, 무척 당황한 듯했다. 웅성거리던 관람객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잔뜩 부풀었던 기대가 꺾인 탓인지, 바네사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맞아. 우리가 돈까지 내고 감상하러 왔는데, 자격도 없는 사람의 그림을 봐야겠어?”
“익명으로 이런 행사를 연 걸 보니 속이 뻔하군.”
사람들이 하나둘씩 비난하자, 일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어야만 훌륭한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거기다 다들 자기가 예상한 것과 달라서 반발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빠르게 바네사와 클리프를 살폈다. 덜덜 떨고 있는 바네사는 입술을 꾹 다문 채였고, 클리프는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할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일리아는 아무래도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그림을 그릴 자격은 누가 주는 겁니까?”
묵직한 저음이 커다란 공간을 두드리자,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마구 떠들어 대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일리아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아주 잠깐 카르한과 눈이 마주쳤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이 상황이 버거운 듯 카르한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완전히 결심을 내린 듯했다.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놓은 카르한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작품 앞에 멈춘 그가 등을 돌려, 관람객들을 마주했다. 건장한 체구에 한 번 놀란 사람들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카르한의 얼굴을 보고 아예 입을 다물었다. 카르한은 작품 아래에 수북하게 쌓인 장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 작품이 가장 많은 장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의 선택이었습니다.”
그 말에 관람객들이 움찔했다. 그들은 직접 장미를 내려놓은 순간을 기억했다.
“저는 문파나 학벌을 떠나서 마음을 사로잡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화가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당신이 뭘 안다고…….”
백작이 곧바로 반박했다. 그러자 카르한이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눈길만 줬을 뿐인데, 백작은 놀라서 몸을 뒤로 뺐다. 이내 그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제 편이라고 생각했는지, 금방 당당해졌다.
“만약 화가에 대해 미리 알았더라면 꽃을 두지 않았을 거요.”
그가 팔짱을 끼며 거만하게 말을 이었다.
“그린 이의 사상이나 환경 등을 전부 고려해서 선택한 것이니까.”
백작은 화가가 예상한 만큼 훌륭한 배경을 지닌 인물이 아니기에, 그림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기중심의 오만한 판단이었다. 듣다 못한 클리프가 나섰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오히려 제가 더 실망했습니다. 블로든 백작!”
백작이 지지 않고 호통치자, 군중 속에 섞여 있던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아직 그림 볼 줄을 모르는군요.”
차분한 비판에 백작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사람이 워낙 많아, 누가 발언했는지 찾지 못했다. 백작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상대가 다시 말했다.
“오히려 상상했던 것과 달라서 재밌는 거 아니겠습니까. 당신의 주장은 아집으로 보입니다.”
“내가 후원하는 화가들이 몇인 줄 아시오? 비겁하게 사람들 틈에 숨어서 떠들지 말고 얼굴을 보이시오!”
자기 안목이 최고임을 강조하던 백작이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자 백작에게 일침을 가한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백작은 관중 사이에 파묻혀 있던 남자를 마주 보았다.
“!”
백작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조금이라도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예술에 조예 깊다고 명성이 자자한 에반테온 공작가의 원로였다.
“아침에 내 친우인 궁정 화가가 이 그림을 보고 훌륭하다 칭찬하기에, 저도 일부러 감상하러 온 겁니다.”
궁정 화가까지 언급되자, 사람들이 술렁였다.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인정한 그림인 것이다. 궁정 화가와 안목을 나란히 하고 싶었던 관람객들은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나는 처음부터 저 그림이 좋다고 생각했어.”
“오히려 작품이 화가 이미지랑 달라서 신선하지 않나?”
너도나도 그림이 좋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백작이 당황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건 제대로 된 그림이 아닌…….”
백작은 허둥대며 딴소리를 꺼내려 했다. 그러자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의 회원들이 일제히 그를 비난했다.
“듣자하니 어이가 없군. 당신 눈만 최고인 줄 아시오?”
“도대체 몇 명이나 후원하기에 그리 으스대는지 한번 들어나 봅시다.”
쟁쟁한 노귀족들이 몰아붙이자,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이미 저를 지지하던 흐름은 끝나버렸고, 아부하던 이들마저 눈을 돌렸다. 어찌할 바 몰라 하던 그는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쯧. 눈을 발에 달았나.”
재수 없다며 노귀족 하나가 혀를 찼다. 상황이 대강 마무리되자, 바네사는 힘이 풀렸는지 그대로 주저앉았다. 일리아가 곧바로 바네사에게 다가갔다.
“바네사, 괜찮아요?”
“네,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거예요.”
일리아는 해쓱해진 바네사를 위로했다.
“미안해요. 제가 좀 더 적극적으로 해결해봤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일리아 님 덕분에 제가 여기에 설 수 있었는걸요.”
바네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바네사의 그림이 좋다 보니 별일이 다 생기네요. 일단 좀 쉬다 와요.”
일리아는 클리프에게 말해서 바네사를 안쪽에 데려다주게 하였다. 할 일을 마친 일리아는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에게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해결할 수 있었어요.”
일리아의 인사에 노귀족들은 손을 내저었다.
“우리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좋은 작품이 폄훼당하는 게 싫었을 뿐입니다.”
일리아는 옅게 미소 지었다. 사실 방금과 같은 상황을 아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나서봤자, 어린데 뭘 아느냐며 무시당할 뿐이었다.
그래서 예술 쪽에 권위 있는 노귀족들을 초대했고, 예상대로 노귀족들의 도움 덕분에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일리아는 다시 한번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나저나 이번에 소공자를 다시 봤습니다.”
“맞습니다. 작품에 대한 열정이 그렇게 대단한 줄 처음 알았습니다.”
노귀족들의 시선이 카르한을 향했다. 호의로 가득한 눈빛이 쏟아지자, 카르한은 어색해서 눈동자만 굴렸다.
“카르한, 고마워요.”
일리아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카르한이 엄청난 용기를 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떨리는 눈동자를 봤으니 말이다.
“말 잘하던데요?”
“그게 실은…….”
카르한이 일리아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요즘 교수님과 웅변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웅변이요?”
“예, 나중에 작위를 계승하면 국무 회의에 참여해야 한다고…….”
일리아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도대체 수업 때 어떤 것들을 배우는지 궁금해졌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노귀족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 더 나누었다. 그러다 한 노귀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블로든 양, 소문을 들었습니다.”
“아, 저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 비루먹을 놈이 다 있다니……!”
평소에 끓는점이 높은 노귀족 하나가 역정을 냈다. 일리아는 그들이 왜 그러는지 금방 깨달았다. 리하트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이다.
연회 사건 이후로 일리아는 집 밖에 나갔다 하면 리하트 이야기를 들었다. 소문은 점점 더 부풀려져서 리하트는 천하에 다시없을 쓰레기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일리아는 불쌍한 피해자로서 사람들의 동정을 샀다.
“소공자가 듬직하니, 잘 어울립니다.”
“그래요. 그런 놈이랑은 어서 파혼하고 둘이 약혼하세요. 우리도 축하하러 갈 테니.”
노귀족들이 흐뭇한 얼굴로 일리아와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카르한은 오늘 노귀족들에게 점수를 제대로 딴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힐끗 살폈다. 무척 복잡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표정을 잘 읽는 일리아도 지금만큼은 카르한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나랑 약혼하는 게 싫나?’
거기까지 생각한 일리아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 약혼할 사이도 아닌데, 순간 이상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카르한과 자신은 그냥……. 일리아는 잠시 생각을 멈추었다. 이 관계를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머릿속이 깜깜했다.
‘그만 생각하자.’
상념을 떨쳐내기 위해 일리아는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아직도 퇴장하지 않은 관람객들이 제법 있었는데, 다들 바네사가 사라진 방향만 주시했다. 아무래도 바네사와 대화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소공자.”
그때 계속 침묵하던 에반테온의 원로가 카르한을 불렀다. 카르한은 긴장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괜찮다면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군요.”
카르한이 일리아를 힐끔 보았다. 일리아는 다녀오라는 의미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두 사람이 자리를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휴식을 취하러 갔던 바네사가 돌아왔다. 그러자 작품을 감상하는 척하며 전시장을 떠나지 않던 이들이 전부 모여들었다.
“바네사 님! 작품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림을 보자마자 운명이라고 느꼈습니다!”
“어허! 순서는 지킵시다.”
다들 바네사를 둘러싸고 그림을 그려달라고 난리였다.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도 무척 적극적이었다. 당황한 바네사가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조언을 구하는 얼굴에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계약을 맺긴 했으나, 반년에 작품 하나씩만 넘겨주면 다른 일은 간섭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막 뜨는 화가가 될 바네사에게는 부수입도 필요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바네사를 독점하지 말라고 성화일 게 분명했다.
바네사 또한 저와만 거래하고 싶진 않을 터였다. 오래 그림을 그리려면 여러 사람이랑 일하며 몸값을 높이는 쪽이 나았다. 일리아의 대답을 들은 바네사는 결심을 마쳤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모두에게 선언했다.
“저는 후원자인 일리아 블로든 님을 통해서만 작업을 받겠습니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