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45)
12장
***
전시회가 무사히 끝났다. 일리아는 이번 일이 끝나면 며칠 정도 휴식을 취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게 있다면…….
-저는 후원자인 일리아 블로든 님을 통해서만 작업을 받겠습니다.
바네사의 폭탄 발언이었다. 그 뒤로 블로든 백작가에 작품 의뢰를 하고 싶다는 서신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졌다.
정신없는 와중에 일리아는 사람들의 요청을 정중하게 물렸다. 처음인 만큼 고심해서 골라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일리아가 고민하는 사이, 그림의 가치는 점점 더 올라갔다.
궁정 화가가 인정한 그림, 천재 화가, 대형 신인……. 그런 수식들이 따라붙었다. 그 덕에 작품을 보지 않은 사람들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바네사를 아니꼽게 보는 이들도 많았다. 고지식한 귀족들은 평민 출신에 문파도 없는 여성 화가의 그림이 인기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기존 화가들도 그림을 제대로 배운 적 없는 바네사를 헐뜯고 질투했다. 그래서 일리아는 전시회 기간을 늘리기로 했다. 바네사의 작품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싶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전시회에 찾아왔고, 다들 그림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실력만큼은 감히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논란은 그렇게 종식되는 듯했다.
-저 때문에 죄송해요…….
바네사는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며 안절부절못했다. 일리아에게 은혜 갚고 싶어서 권한을 위임했는데, 오히려 신경 쓰게 만든 것 같다며 미안해했다.
일리아는 괜찮다고 바네사를 안심시켰다.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서신이 쏟아져서 조금 귀찮긴 했지만, 그만큼 바네사가 저를 신뢰한다는 증거였다.
거기다 콧대 높은 고위귀족들도 먼저 연락이 오고 있으니…… 나중에 쏠쏠하게 이용할 수 있을 듯했다. 물론 바네사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지만 말이다.
“답신은 다 썼고…….”
일리아는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관을 빠져나온 일리아는 별관으로 향했다. 마침 수업이 끝났는지 공부방에서 나오는 카르한과 눈이 마주쳤다.
“카르한!”
일리아가 반갑게 부르자, 카르한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지금부터 시간 있어요?”
“예, 방금 수업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럼 같이 구경하러 갈래요?”
카르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호위기사 선발전이 있거든요.”
“아……!”
이전부터 익히 들어왔기에 카르한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곧장 연무장으로 향했다. 도착하고 보니 경기가 한창이었다.
“아가씨!”
일리아를 발견한 기사들이 우르르 나타나서 쇠기둥을 세우고 거대한 차양을 설치했다. 어찌나 신속하고 빠른지 군대에서 훈련받아도 이 정도는 아닐 듯했다.
일리아는 그들이 준비해준 의자에 앉았다. 누군가가 레모네이드까지 건네주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경기를 구경했다. 선발전은 승자 진출전으로 치르는데, 경기가 시작된 지 제법 지나서 실력 있는 자들만 남은 듯했다.
한 경기가 끝나고 프란체가 출전했다. 일리아는 겉으로 누구도 응원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프란체가 이기길 바랐다. 몇 년 동안 함께해온 만큼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리아의 바람대로 프란체는 단 두 합 만에 상대를 제압하고 경기를 마쳤다. 다음 경기가 이어지고, 일리아가 카르한에게 질문했다.
“카르한, 저번에 혹시 원로님이랑 무슨 이야기 나눴어요?”
“그냥…… 지금까지 오해한 것 같다고 사과하셨습니다.”
카르한은 잠시 그날을 떠올렸다. 에반테온 공작가의 원로들은 성향이 둘로 나뉘었다. 장남인 블레어드를 지지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었다.
지지하지 않는 쪽은 카르한을 후계자로 밀어붙였다. 진심으로 따르기 위함이 아닌, 꼭두각시로 세우려는 속셈이었다. 후계자 수업을 받지 못한 카르한이 공작이 되면 원로가 간섭하기 쉬워질 테니 말이다.
그리고 카르한에게 독대를 청한 원로는 중립에 서 있었다. 블레어드를 지지하진 않으나, 카르한도 탐탁지 않아 했다. 장남인 블레어드와 대립하기엔 너무나 수동적이고 의욕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카르한을 다르게 보는 듯했다.
이 이야기를 테시온에게 해줬을 때, 그는 무척 기뻐했다. 테시온은 한 명이라도 포섭해야 한다며 열변을 토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하셨습니다.”
“잘된 일이네요.”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일리아를 보던 카르한은 가만히 손가락만 매만졌다.
어느덧 마지막 경기가 치러졌다. 끝까지 살아남은 프란체와 척 봐도 강해 보이는 기사가 나란히 섰다. 시합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자루의 검이 부딪혔다.
카르한은 프란체에게 주목했다. 프란체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저보다 덩치가 두 배쯤 커 보이는 기사와 싸우는데, 전혀 버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프란체는 빠르게 공격을 가한 후 날렵하게 몸을 뺐다. 반응 속도가 굉장해서, 검이 날아오는 곳을 미리 알고 대비했다. 체구가 호리호리한 편이었기에 그는 속도로 승부를 보고 있었다. 속도보다 힘이 우세한 카르한과는 정반대였다.
지켜보던 카르한의 손끝이 저릿저릿해졌다. 검을 잡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렸다.
“……무척 강하군요.”
“제가 아는 기사들 중에서 가장 강하거든요. 아, 어머니를 제외하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경기의 흐름은 프란체를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상대를 몰아붙였다. 타격이 끝없이 쏟아지자, 상대 기사의 팔이 점점 안쪽으로 굽어 들어갔다.
채앵, 날이 둔탁하게 울리는 소리가 연무장 구석구석에 울려 퍼졌다. 프란체의 검 끝이 상대의 목을 향했다. 항복의 의미로 기사가 검을 내리자, 심판을 보던 말렉이 선언했다.
“올해 선발전 우승자는 프란체입니다.”
“또 저 자식이냐.”
“지겹다, 지겨워!”
기사들이 장난스럽게 야유하자, 프란체는 씩 웃으며 소리쳤다.
“다들 너무 해이해진 거 아닙니까! 더 열심히 수련하고 오시죠!”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내년에는 내가 우승해주마!”
기사들은 한참 어린 프란체에게 패배했음에도 불쾌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프란체의 도발을 웃고 넘겼다. 말렉이 건네준 수건으로 땀을 닦은 프란체가 냉큼 일리아에게 달려왔다.
“아가씨!! 저 우승했습니다!”
프란체가 팔을 붕붕 돌리며 소리쳤다. 방금까지 경기를 치른 사람답지 않게 천진난만한 모습에 일리아는 작게 웃었다.
“그사이 실력이 더 늘었던데.”
“엄청 연습했거든요!”
프란체가 가슴팍을 당당하게 내밀었다. 잘했다고 일리아가 칭찬을 쏟아내자, 프란체가 헤헤 웃었다. 프란체는 일리아 옆에 앉아 있던 카르한에게 말을 걸었다.
“소공자께서도 오셨군요! 제 경기 어땠습니까.”
“좋은 경기였습니다. 보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카르한은 느낀 바를 솔직하게 말했다. 칭찬을 받은 프란체는 뿌듯해했다. 그는 카르한을 은근히 경쟁상대로 여기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비올레의 제자라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쟁자에게 인정받았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선발전을 치를 줄은 몰랐습니다.”
이 정도 규모면 거의 지역 경기 수준이었다. 카르한의 말에 일리아가 대신 대답했다.
“부모님이 정한 규칙이에요. 제 호위는 무조건 가장 강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일리아가 천천히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저희 가문이 좀 유명하잖아요. 그래서 과거에 이런저런 일이 많았거든요. 협박이나 납치 같은…….”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의자 팔걸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의자 팔걸이가 뚝 하고 부러지자, 프란체가 놀라서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배상하겠습니다.”
“아니에요. 팔걸이가 약했나 봐요.”
일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프란체는 여전히 입만 떡 벌렸다. 저 의자 팔걸이가 얼마나 단단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부순 건가 싶어서 프란체가 의자를 요리조리 살피는데, 일리아가 말했다.
“프란체, 우승 축하하고, 일 년 동안 잘 부탁해.”
“아, 예!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신뢰가 가득했다. 카르한은 문득 프란체가 부러워졌다. 만약 자신이 일리아의 호위기사였다면 계속 함께할 수 있을 텐데…….
언제 이 관계가 끝날지 몰라서 불안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공작가 후계자보다 일리아의 호위기사가 더 좋은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프란체와 눈이 마주쳤다. 프란체는 화들짝 놀라더니 뚝 잘려버린 의자 팔걸이와 카르한을 번갈아보았다.
카르한은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뒤늦게 표정을 수습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지 못한 일리아가 손뼉을 쳤다.
“다들 고생했으니 오늘은 맛있는 거 먹자!”
단체 회식에 기사들이 모두 환호성을 내질렀다.
***
테르시안 후작가문에 암운이 드리웠다. 후작이 근신 처분을 받은 후로, 후작가문은 돈이 궁하게 된 것이다.
대대로 공직 생활을 해온 테르시안 후작가는 자금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 편이었다. 뇌물을 받아서 떵떵거려 왔으나 비리 건이 터진 후로 전부 끊겨버렸다. 헤인리의 승진을 막았다가 도리어 된통 당한 탓이었다.
그나마 있는 돈을 다 끌어서 후작부인의 사업에 투자했지만,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는 격이었다. 사업이 망하기 일보 직전이 된 후작부인은 저택을 팔자고 성화였다. 후작이 미쳤냐고 거절하자, 단식 투쟁을 하더니 병석에 누워 버렸다.
시오나의 경우에는 남편의 이름으로 대출을 내 어머니의 사업에 투자했다가 같이 망해버렸다. 그녀는 남편의 분노를 피해 일단 후작저로 피신 왔다. 시오나가 하는 일이라고는 저택에 돈이 될 만한 것이 있나 기웃대는 것뿐이었다.
가족들 모두가 나쁜 상황에 처했지만, 그중 가장 최악인 것은 리하트였다. 리하트의 경우에는 저택 밖에도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외출했다 하면 모두가 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평판이 바닥을 치다 못해서 평생 먹을 욕을 다 먹게 된 리하트는 미칠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또다시 울컥 화가 치밀어, 들고 있던 술병을 던졌다. 벽에 부딪힌 병이 퍽, 하고 깨졌다. 이전 같으면 입도 대지 않았을 싸구려 술이 카펫을 서서히 적셨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연회장에서 당한 수모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저를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 일리아는 매일 파혼 동의서를 보내오고 있었다. 무언의 압박이었다. 모두의 앞에서 약조했으니, 파혼 동의서에 빨리 서명하라고 재촉했다.
“내가 순순히 파혼해줄 것 같아? 어림없는 소리!!”
리하트는 눈앞에 일리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누구 좋으라고 파혼해준단 말인가.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될 소리였다.
한참 욕설을 퍼붓던 리하트는 비틀대는 걸음으로 옷장 앞에 섰다. 텅 빈 옷장에 외투 한 벌이 걸려 있었다.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을 전부 팔고 나서도 딱 한 벌은 남겨두었다. 리하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혹시 언제 연회에 나갈 일이 생길지 모르니 말이다.
리하트는 황금빛으로 가득했던 과거가 그리워졌다. 그때를 상기한 리하트는 한쪽 입매를 비뚤게 치켜 올렸다.
“그래, 파혼해주지.”
그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돈을 내놓으면 말이야.”
***
평소와 마찬가지로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별관 복도를 걷던 카르한은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클리프와 눈이 마주쳤다. 카르한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클리프가 어색하게 말했다.
“아니, 이런 우연이.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카르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빠르게 주위를 살핀 클리프가 오던 방향으로 쭉 걸어왔다. 그리고 카르한을 스쳐지나가면서 쪽지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가버렸다. 클리프가 그대로 사라지고, 카르한은 공부방에 들어와 쪽지를 꺼내 펼쳤다.
[10분 후, 3층 동쪽 끝 방에서 만납시다. 노크는 네 번 연속으로.]첩자끼리 접선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카르한은 느릿하게 가방을 챙긴 후 클리프가 말한 장소로 갔다.
문 앞에 멈춰 선 카르한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연속으로 문을 네 번 두드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복도에 아무도 없지요?”
“예.”
대답하자 문이 열렸다. 거의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만남이었다. 카르한이 안으로 들어서자, 클리프가 문을 잠갔다.
“이해해주세요. 소공자.”
그는 아직도 비올레와 헤인리의 눈치를 보았다. 카르한과 친분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이렇게 몰래 만나곤 했다.
“앉으시죠.”
카르한이 빈 의자에 앉자, 클리프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혹시 이틀 후에 시간 있으십니까?”
카르한은 머릿속으로 수업 일정표를 떠올렸다. 다행히 이틀 뒤는 휴일이었다.
“예, 괜찮습니다.”
“그럼 함께 외출하지 않겠습니까.”
전시회? 오케스트라? 요즘 바빠서 음악 쪽은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빨리 공부해야 하나. 긴장한 카르한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오케스트라를?”
“그것도 좋지만, 이번에는 다른 이유입니다. 저와 생일 선물을 사러 가지 않겠습니까?”
카르한이 눈을 깜빡였다.
“생일이요……?”
“아, 모르셨습니까?”
클리프는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일주일 후에 일리아 생일입니다.”
“!”
놀란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 처음 듣는 소리였다. 생각해보니 서로 생일을 모르고 있었다. 카르한은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가겠습니다.”
***
그로부터 이틀 후. 카르한과 클리프는 일리아에게 필요할 것 같은 물건을 각자 알아본 후에 번화가에서 보기로 했다.
카르한은 이틀 내내 일리아에게 어떤 선물을 줄지 고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일리아에게 필요한 물건이 없어 보였다. 전부 다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카르한은 직접 보고 선물을 사야겠다고 결정 내렸다.
카르한은 버릇처럼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고 말았다. 이왕 빨리 나온 거, 생일 선물이나 좀 더 고민해볼 생각이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모자를 푹 눌러쓴 클리프가 무척 반가운 얼굴로 카르한을 불렀다.
“소공자!”
백작 저택에서는 데면데면 굴었지만, 밖이라 그런지 무척 살갑기만 했다. 어느새 카르한 앞에 멈춰 선 클리프가 시계를 확인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벌써 기다리고 있었군요.”
“아, 미리 도착해 있는 쪽이 마음이 편해서……, 그런데 백작님께서도 일찍 오셨군요.”
“아아, 가족들이 어디 가느냐고 물을 것 같아서 일부러 일찍 나왔습니다.”
클리프의 말을 들은 카르한은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제 일리아는 휴일에 무엇을 할 거냐고 물어왔다. 카르한은 집에서 해야 할 공부가 있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아직도 가슴이 따끔거렸다. 요즘 자주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카르한은 앞으로 거짓말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며, 클리프와 함께 길을 걸었다.
오랜만에 나오는 것인데 거리가 익숙했다. 일리아와 여러 번 와서 그런 모양이었다. 처음 데이트 할 때가 생각나서, 카르한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때 일리아가 옷을 왕창 사주어 어찌나 놀랐는지. 시간이 지나도 그때를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가게 유리창을 통해 물건을 구경하던 카르한이 멈춰 섰다. 공책이나 펜, 잉크 같은 문구류를 파는 가게였다.
“들어가 보지요.”
클리프 또한 관심을 가지며 카르한을 이끌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온갖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카르한은 천천히 진열대를 살폈다. 유리 잉크병, 세공이 들어간 펜촉, 화려한 편지지……. 문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눈 돌아갈 정도로 다양했다.
한참 구경하던 카르한의 눈이 멈추었다. 짙은 남색 표지에 금테를 두른 일기장이 놓여 있었다. 일기장을 집어 든 카르한은 내부를 꼼꼼히 살폈다. 종이 질도 좋았고, 양쪽으로 부드럽게 펼쳐져서 편해 보였다. 전에 일기를 쓴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이거다.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을 고른 카르한은 들뜬 얼굴로 클리프를 찾았다. 가게 구석에서 뭔가를 열심히 작성하는 클리프가 보였다. 카르한의 시선을 느낀 클리프가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미안합니다. 매입서를 작성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
클리프가 종이를 집어서 카르한에게 보여주었다. 가게 매매 계약서였다.
“가게가 일리아 취향인 것 같아서 사버렸지 뭡니까.”
클리프는 카르한의 마음도 모르고 허허 웃었다. 카르한은 조용히 일기장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가게를 통째로 사는 것이 집안 내력인 듯했다.
아무런 소득도 건지지 못한 카르한과 가게 하나를 사버린 클리프는 다시 길거리로 나왔다. 두 사람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했다. 카르한은 괜히 초조해졌다. 왠지 다들 엄청난 걸 준비할 것 같았다.
괜찮은 선물을 해주고 싶은데, 금고에 돈이 얼마 있더라……. 사실 전 재산을 털어도 일리아의 마음에 드는 선물을 살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요즘 참 즐겁습니다.”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던 카르한이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생일을 챙기는 건 오랜만이거든요.”
클리프가 한껏 미소를 머금은 채 카르한을 마주 보았다.
“전부 소공자 덕분입니다.”
“제 덕분이라니…….”
카르한이 얼떨떨한 얼굴로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일리아가 그놈이랑 헤어지고 나서 걱정 많이 했는데……, 금방 괜찮아지더군요. 전부 소공자가 곁에 있어준 덕분이지요.”
“…….”
“요즘 가족들 사이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카르한은 눈을 내리깔았다. 오히려 도움을 많이 받은 쪽은 카르한이었다. 저 때문에 일리아가 실연의 상처를 회복했다니, 당치 않았다.
“분명 다른 가족들도 소공자를 인정하는 날이 올 겁니다.”
클리프는 비올레와 헤인리를 언급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까지 두 사람이 카르한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 제가 중간에서 힘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르한은 영문도 모르고 일단 인사했다.
“아참, 생일 파티 총괄은 헤인리가 맡는다고 하더군요. 일리아에게는 비밀입니다. 깜짝 파티거든요.”
“혹시 저도 가도 되는 자리인지요?”
“물론! 이지요…….”
냉큼 입을 열었던 클리프는 조금 자신 없는 얼굴로 헛기침을 내뱉었다.
“명색이 남자친구인데, 다들 이해해줄 겁니다.”
카르한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소공자는 어떤 것을 선물할 생각입니까?”
아직 정하지 못했다. 아까 본 일기장만큼 마음에 드는 선물이 있을까 싶었다. 그 전에 일기장보다 더 비싸고 좋은 걸 줘야 할 것 같은데…….
길을 걷던 카르한이 우뚝 멈춰 섰다. 카르한은 유리창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지금 골랐습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마침내 일리아의 생일날이 왔다. 카르한은 평소와 달리 긴장한 상태로 마차에 올라탔다. 맞은편에 앉은 테시온은 카르한과 달리 무척 즐거워 보였다.
“외부인이 블로든 가문 생일 파티에 초대 받은 것은 저희가 처음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귀족들과 달리,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생일 연회를 열지 않았다. 가족끼리 조용히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테시온은 생일 파티에 참석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넘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