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46)
“일리아 님의 생일이니 엄청나겠죠?”
기대에 가득 찬 테시온과 달리 카르한은 조금 두려워졌다. 헤인리의 주도 하에 준비하고 있다는 말만 들었지, 자세한 것은 몰랐다.
마차는 드넓은 블로든 저택 정원을 가로질렀다. 창을 통해 정원을 구경하던 카르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결국 일리아는 생일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만약에 클리프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혼자만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왜 제게는 말해주지 않았을까. 섭섭함을 느낀 카르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테시온의 설명처럼 가족끼리 생일을 보내려고 말하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고개를 내저은 카르한은 제게 주어진 사명을 떠올렸다. 중요한 임무인 만큼 실수 없이 해내야 했다.
어느덧 마차는 저택 본관에 도착했다. 카르한과 테시온은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생일 특유의 들뜬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한적하고 조용했다.
카르한은 속으로 안도했다. 얼마나 요란한 생일을 보낼지 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는 평범하게 갈 모양이었다.
테시온을 먼저 보낸 카르한은 본관 건물에 들어섰다. 고용인들에게 물어서 계단을 올라가니, 금방 방에서 나오는 일리아와 마주쳤다.
“카르한? 여긴 어쩐 일이에요?”
놀란 일리아가 묻자, 카르한이 미리 외워둔 대사를 내뱉었다.
“오늘 수업이 일찍 끝나서 왔습니다. 혹시 시간 있으십니까?”
“저는 괜찮아요.”
“그럼…… 잠깐 정원을 걸으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카르한은 고민 있어 보이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고개를 갸웃하던 일리아가 그래요, 하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본관을 빠져나와 정원 뒤편으로 향했다. 카르한이 맡은 임무는 일리아를 호숫가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실은 고민이 있어서…….”
“무슨 일인데요?”
카르한은 최대한 느릿하게 말을 시작했다. 본관에서 호숫가까지는 거리가 제법 있었기에,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가야 했다. 카르한은 온갖 고민을 늘어놓았다.
“의자가 딱딱해서 허리가 아픈 게 고민인데…….”
나중에는 고민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일리아는 제법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카르한은 잠시 말을 멈추고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생각해보면 둘이서 한참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일부러 둘이 있을 상황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카르한은 문득 메즈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그 후로 계속 생각했지만,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 잘 와 닿지 않았다. 자신이 품은 감정을 사랑이라 부르기엔 뭔가 부족한 것 같았다. 책으로 본 사랑은 좀 더 거창하고 위대했는데, 제 것은 형편없이 느껴졌다.
그리고 만약에 자신이 일리아를 사랑하게 된다면……. 카르한은 근심 어린 얼굴로 침묵했다. 일리아를 호숫가로 유인하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호숫가에 다다랐을 때였다.
펑!! 엄청난 굉음에 카르한이 숨을 멈추었다. 일리아 또한 놀라서 번쩍 고개를 들었다. 넓은 하늘에 엄청난 양의 불꽃이 연이어 터졌다. 어찌나 크고 화려한지, 구름이 가려질 정도였다.
이윽고 웅장한 음악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잠시 넋을 놓은 카르한은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바로 했다. 장미 꽃잎이 잔뜩 뿌려진 호숫가는 마치 융단을 깔아둔 듯했다.
길목에는 양옆으로 검을 치켜든 기사들이 정렬했고, 다른 한쪽에는 고용인들이 질서 있게 서있었다. 그 옆으로 화려한 테이블과 의자, 일리아의 초상화 등이 보였다.
카르한은 마지막으로 호숫가에 띄워진 엄청난 크기의 배를 목격했다. 배에 타고 있던 비올레와 클리프, 헤인리가 동시에 소리쳤다.
“생일 축하한다! 일리아!!”
일리아는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일리아를 반겨주고 있었다.
아직도 얼떨떨하기만 했다. 오늘이 제 생일이긴 했으나,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다. 지난 몇 년간 그러했듯, 조용히 케이크만 자르고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는데…….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저보다 카르한이 더 놀란 얼굴이었다.
호수 중앙에 떠있던 배의 선미 부분이 열리더니, 다리가 놓였다. 배에서 내린 비올레와 클리프, 헤인리가 일리아 앞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눈만 깜빡이는 일리아를 보며 클리프가 웃었다.
“놀래키는 데 성공한 모양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이 녀석이 기획한 거란다.”
비올레가 헤인리를 가리켰다. 평소에도 좀 적극적으로 나서보지 그러냐며 비올레가 혀를 찼다. 비올레의 잔소리를 무시한 헤인리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생일 축하한다, 일리아.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일리아는 아직도 헤인리의 태도가 적응이 되질 않았다. 저를 쌀쌀맞게 대하던 모습이 더 익숙했다. 가족들의 인사가 끝나자, 정렬해 있던 고용인들이 다 함께 소리쳤다.
“진심으로 생일 축하드려요, 아가씨!”
다들 자신이 축하 받는 것처럼 환한 얼굴이었다. 그들의 축하를 받으며 일리아는 덩달아 웃었다.
“먼저 케이크부터 자르자.”
헤인리가 일리아를 이끌었다. 배에 오르게 된 일리아는 어마어마하게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 그중 압권인 것은 엄청난 크기의 케이크였다. 5단으로 이루어진 케이크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먹어도 될 정도였다.
일리아가 케이크 밑단을 조금 자르자 사방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케이크 커팅식이 끝나고 일리아는 커다란 원목 의자에 앉혀졌다. 다음 차례는 선물 증정식이었다.
가장 먼저 프란체가 나섰다.
“제가 직접 깎아서 만든 나무 인형입니다!”
“다람쥐 꼬리 정말 귀엽다. 고마워, 프란체.”
“아가씨 제 선물은…….”
고용인들이 저마다 정성 담은 선물을 건넸다. 선물을 주는 이들이 더 들뜬 얼굴이었다. 한참 만에 고용인들의 선물 증정이 끝나고, 클리프가 나섰다. 그의 손에는 종이 한 장이 들려있었다.
“생일 축하한다, 일리아. 71번가에 위치한 가게를 네게 선물하마.”
문구류를 파는 가게 매입서였다. 일리아가 클리프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끝내자, 비올레의 차례가 왔다.
“내 선물은 북부 별장이란다. 사계절 내내 눈이 내리니, 눈이 보고 싶을 때 가보렴.”
비올레가 별장 정경이 그려진 그림 한 장을 건넨 후, 일리아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물러나고, 헤인리가 앞으로 나섰다.
“예전에 모래를 가득 채운 방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지? 그래서 황금 모래를 준비했다.”
무려 남부 소왕국에서 공수해온 모래였다. 구하고 싶어도 희소성 때문에 왕국에서 반출을 제재했다. 아무래도 모래를 구입하기 위해서 남부 소왕국과 협상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서관 4층에 가 보거라.”
“정말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 오라버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귀한 선물이었다. 번거로웠을 텐데, 저를 위한 마음이 고마웠다.
선물 증정이 얼추 끝나자 뒤에서 지켜보던 카르한이 머뭇거렸다. 하필이면 제 앞에 엄청난 선물들이 쏟아져서,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느껴졌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카르한이 주춤주춤 일리아 앞에 섰다.
“일리아, 생일 축하합니다.”
“당신도 준비했어요? 부담스러울까 봐 일부러 말 안 했는데…….”
일리아가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카르한은 한참 만지작거리던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습니다.”
“고마워요, 카르한. 나중에 열어볼게요.”
궁금하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조금 있다가 열어볼 생각이었다. 특히 비올레와 헤인리가 관심 많아 보였다. 한참 웅장하게 울려 퍼지던 음악이 잔잔해졌다. 지금부터는 식사 시간이었다.
음식은 갑판 위에 차려져 있었고, 모두들 자유롭게 배를 오가며 음식을 담았다. 동선이 꼬이지 않도록 백작가 사람들, 기사, 고용인들 구역은 따로 나뉘어 있었다. 대신 모든 고용인들이 파티를 즐길 수 있도록 음식 담는 것은 직접 해야 했다.
“일리아, 너는 앉아 있거라. 우리가 담아 갈 테니까.”
일리아가 다가오자, 헤인리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멈칫한 일리아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카르한은 접시 하나만 들고 고민에 잠겼다. 음식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담아가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러자 비올레가 참견했다.
“양고기 구이가 맛있어요. 내일도 훈련하려면 든든히 먹어둬야죠.”
“……오늘 양배추 샐러드가 신선합니다.”
옆에서 음식을 담던 헤인리가 슬쩍 말을 덧붙였다. 비올레와 헤인리가 카르한의 옆에 달라붙어서 살갑게 대하자, 그 모습을 본 클리프는 그대로 멈추었다.
“아니……, 둘 다 소공자와 언제부터 친해진 거지?”
분명 싫어하지 않았던가? 혹시 나만 몰랐나? 클리프는 어리둥절하다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흠흠, 디저트는 당근 케이크가 괜찮습니다.”
덕분에 카르한은 고민 않고, 추천 받은 음식을 전부 담았다. 접시를 가득 채운 카르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테시온이 프란체, 말렉과 함께 식사하고 있었다.
“기대 많이 했는데, 역시 상상 이상입니다! 웬만한 생일 연회는 발도 못 내밀겠습니다.”
“당연하지요. 블로든이니까요. 몇 년 전에는 이보다 더 화려했습니다.”
테시온의 칭찬에 프란체가 어깨를 으쓱였다. 가만히 지켜보던 카르한은 그쪽에 합류하려 했다. 그때, 비올레가 냉큼 카르한을 붙잡았다.
“소공자, 어디 가시나요? 저희와 함께 식사하지요.”
카르한은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비올레의 뒤를 따랐다.
“많이 담아왔네요.”
자리에 앉아 있던 일리아가 반겨주었다. 마지막으로 클리프와 헤인리까지 착석하자, 테이블이 북적해졌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 식사하게 된 카르한은 조금 긴장했다. 처음 블로든 저택에 왔을 때가 생각났다. 카르한은 식사하기 전,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오늘 파티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일 파티에 초대된 사람 중, 외부인은 카르한과 테시온뿐이었다. 일부러 초청해주었다는 사실이, 카르한은 무척 고마웠다. 건방진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마치 블로든 가문의 일원이 된 것 같아서 기뻤다.
전에 초대 받았을 때만 해도 화목하고 따뜻해 보이는 일리아의 가정이 부러웠다. 이제는 부럽기보다는 이곳에 속할 수 있어서 그저 행복했다. 평소보다 한껏 부드러워진 카르한의 얼굴을 본 클리프가 농담 삼아 말했다.
“와주셔서 우리야 고맙지요. 그나저나 평소보다 좀 들떠 보이십니다?”
“아, 그게 제가 다른 사람 생일 파티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라서…….”
카르한이 조금 쑥스러워하자, 다들 멈칫했다. 비올레와 클리프, 헤인리는 묘한 눈으로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카르한의 집안 사정을 알고 있는 일리아가 소리쳤다.
“많이 먹어요, 카르한!”
일리아는 제 앞에 내밀어진 접시를 그에게 양보했다. 그것을 본 헤인리는 음식을 좀 더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다. 저택 요리사들이 혼신의 힘을 발휘해서 그런지, 한 입 먹을 때마다 혀가 황홀해졌다. 깔끔하게 접시를 비워나가던 카르한은 어떤 음식을 먹고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가 상기된 얼굴로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 말에 일리아의 가족들은 자기가 먹은 것 중에 맛있었던 음식을 내밀기 시작했다. 묵묵한 얼굴에 생기가 돌 때마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잘 먹어서 그런지, 지켜보는 사람이 뿌듯해졌다.
길고 긴 식사가 끝나고, 온갖 행사가 이어졌다. 유명한 서커스단의 묘기를 본 후에 이국에서 온 무희들의 춤도 구경했다. 이쯤 되면 축제나 다름없었다.
오후부터는 블로든 가문 사람들끼리 모여 술을 마셨다. 다들 주당인지라, 술자리는 끝나지 않았다.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둑해졌을 무렵. 다들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저택으로 돌아갔다. 시끌벅적했던 생일 파티가 끝난 것이다.
다들 뒷정리 하는 사이, 카르한은 별관에 들러 물건을 하나 가져왔다. 그리고 호숫가로 돌아와 저택에 들어가려는 일리아를 불렀다.
“괜찮으시다면 잠깐 산책하겠습니까?”
마침 일리아도 술을 깰 겸 바람을 쐬고 싶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천천히 후원 쪽으로 걸어갔다. 입구에 목련이 줄지어 심긴 후원은 계절상 다른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저 멀리 보랏빛으로 수놓인 길이 보였다. 풍성한 꽃잎을 늘어뜨린 등나무가 터널처럼 이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발걸음을 나란히 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속도에 맞춰서 느릿하게 걸음을 뗐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일리아의 얼굴은 아직도 상기되어 있었다. 좋은 꿈을 꾸고 막 일어난 사람처럼 몽롱해 보였다.
“몇 년 전만 해도 당연했던 풍경이었는데, 지금껏 잊고 있었거든요.”
이렇게 모두가 시끌벅적한 생일을 보낸 건 간만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은 헤인리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생일날에는 리하트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리고 저녁에 부모님이 준비해둔 케이크를 자르는 것으로 대충 마무리했다.
“아참, 선물 지금 열어봐도 돼요?”
일리아가 카르한에게 물었다. 그가 준 상자는 손바닥 크기여서 일부러 가지고 왔다.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일리아가 포장을 뜯고 상자를 열었다.
부드러운 벨벳 사이에 자수정이 총총 박힌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사방이 푸르스름한 빛으로 물들어서 그런지, 자수정 위로 푸른 물이 들었다. 목걸이를 매만지던 일리아가 활짝 웃었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매일 하고 다닐게요.”
일리아는 지금 바로 목걸이를 걸어보려다가 포기했다. 구조가 약간 복잡해서 도움을 받아야 할 듯했다. 다시 상자에 넣으려는데, 카르한이 조용히 일리아를 불렀다.
“저기……. 일리아.”
일리아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카르한이 쑥스러운 듯 눈을 내리깔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속눈썹에 가려졌던 푸른색 눈동자가 구름 속에 숨어있던 달처럼 어스름한 빛을 띠었다. 일리아를 두 눈에 담은 카르한이 물었다.
“제가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일리아는 멍하니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뒤늦게 정신 차린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부탁해도 될까요?”
일리아는 상자에서 목걸이를 꺼내 카르한에게 넘겨주었다. 천천히 뒤돌아선 일리아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넘겼다. 희고 가는 목덜미가 드러났다.
카르한은 계속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았다. 먼저 말을 꺼내긴 했지만, 한 번도 누군가에게 목걸이를 해준 적이 없었다. 스스로도 목걸이를 즐겨 하지 않는 편이었기에 더더욱 낯설었다.
카르한은 조금 긴장한 채 목걸이 양쪽 끝을 잡았다. 손이 워낙 커서, 목걸이 체인이 가느다란 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한쪽을 잡은 채 앞으로 반 바퀴 둘렀다. 목걸이 끝과 끝을 확인한 카르한은 천천히 맞춰 나갔다. 착용 구조가 꽤 복잡했기에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했다.
카르한은 고리를 잡은 손가락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러자 고리가 부러질 듯 활짝 열렸다. 깜짝 놀라 손에서 힘을 빼자, 그제야 적당히 벌어졌다. 휴우, 하고 카르한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자칫했으면 선물하자마자 제 손으로 부술 뻔했다.
카르한은 좀 더 집중해서 목걸이를 채웠다. 한창 끙끙대는데, 향기가 훅 끼쳐왔다. 꽃향기가 아닌 햇볕에 잘 말린 이불처럼 포근한 냄새였다. 뒤늦게 정신이 퍼뜩 들었다. 집중하느라 이렇게까지 가까이 다가간 줄 몰랐다.
그는 급히 얼굴을 물렸다. 동시에 달칵 하고 목걸이가 단단히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끝났어요?”
뒤돌아 서 있던 일리아가 물었다. 카르한은 대답할 겨를도 없이 황급히 손을 떼어냈다. 분명 주변이 온통 조용한데, 제 가슴만 시끄러웠다. 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뗀 카르한이 뒤늦게 대답했다.
“……다 됐습니다.”
일리아가 천천히 뒤돌았다. 어둠이 완전히 깔려오기 전의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은 자수정 목걸이가 존재를 드러냈다. 한눈에 반해 덜컥 사버린 목걸이답게 처음부터 일리아 것인 듯 어울렸다.
카르한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손수 고른 물건을 착용한 걸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래서 다들 선물을 주고받는 듯했다.
“어때요?”
일리아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물었다. 카르한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아름답습니다.”
말하고 보니 목걸이를 칭찬한 것 같았다.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으며 정정했다.
“아니, 무척 잘 어울립니다.”
진심 가득한 얼굴에 일리아는 괜히 쑥스러운 듯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고마워요. 나중에 거울로 한번 봐야겠어요. 그런데 계속 들고 다니던 그건 뭐예요?”
“아.”
카르한이 바닥에 내려놓은 물건을 집어서 일리아에게 내밀었다.
“사실 선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것도 제 거예요?”
“전에 드리려고 했는데, 계속 시기를 맞추지 못해서…….”
이전에 카르한은 일리아에게 커프스단추를 선물 받은 적이 있었다. 답례할 겸 양산을 구입해서 블로든 저택을 찾아갔었다. 그리고 그날, 리하트와 사건이 일어났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지라 그때 샀던 양산을 지금껏 주지 못한 채였다.
“이건 뭐예요?”
“뜯어보시면 아실 겁니다.”
선물을 받은 일리아가 리본 끈을 풀었다. 포장지가 벗겨지자, 새하얀 양산이 드러났다. 끄트머리에 달린 레이스가 인상적이었다. 카르한이 자신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미 많이 갖고 계실 것 같지만…….”
“이건 없어요.”
일리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레이스가 잔뜩 달린 양산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일리아의 취향이었다. 양산을 직접 골랐을 카르한이 상상되지 않아, 일리아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혹시 강매 당해서 산 건 아니죠?”
“아닙니다.”
카르한은 그것만큼은 자신 있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은근히 뿌듯해 보이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점원이 다른 걸 추천해주긴 했는데, 거절했습니다.”
일리아는 긴장한 얼굴로 거절했을 카르한을 상상했다. 거절을 못해서 강매 당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괜히 웃음이 나왔다.
카르한의 손에 들렸을 때 작아 보이던 양산은 일리아의 손에 들어오니 크기가 적당했다. 일리아는 양산을 이리저리 살피다, 한번 펼쳐보았다. 움푹한 그릇처럼 둥글게 펼쳐진 양산은 가볍고 튼튼해서 들고 다니기 딱 좋았다.
“햇볕이 점점 뜨겁던데, 잘 쓸게요.”
일리아는 다시 양산을 접어서 손에 쥐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준 커프스단추 달아 봤어요?”
“아까워서 아직은…….”
착용한다고 닳는 소모품도 아니지만, 그것마저도 아까운 듯했다. 그의 마음을 알듯도 했기에 일리아는 더 이상 별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발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멀게만 느껴지던 등나무 터널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런데 생일은 어떻게 알았어요?”
“백작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일리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번에도 조용히 넘어가려고 생각했거든요. 괜히 말했다가 부담 줄까 봐 그랬어요.”
“오히려 늦게라도 알아서 다행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선물을 챙길 수 있었다고, 카르한이 중얼거렸다.
“카르한은 생일이 언제예요?”
“저는 겨울이 생일입니다.”
이제 초여름이 오고 있었다. 겨울이 오려면 반년은 족히 기다려야 했다.
“기다렸다가 그때 축하해줄게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은 속으로 안도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함께할 수 있음에.
일리아와 카르한은 등나무가 양옆으로 펼쳐진 터널 안으로 들어섰다. 보랏빛 커튼을 촘촘히 달아둔 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잎이 하늘을 뒤덮었다.
“요즘 계속 당신이 날 피한다고 생각했어요.”
툭 던져진 한마디에 카르한이 우뚝 멈춰 섰다. 덩달아 멈춰 선 일리아가 카르한을 마주 보았다.
“저번에도 물어봤지만……, 혹시 나 피하는 거 아니죠?”
카르한은 냉큼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로 일리아를 피해 다녔으니 말이다.
“내가 뭔가 실수했어요?”
“아닙니다.”
그건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피해 다녔다고 묻는다면 카르한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스스로도 명확한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카르한은 일리아를 향한 마음이 무엇인지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때 꽃잎 하나가 하늘하늘 내려와 일리아의 머리카락에 앉았다. 그것을 본 카르한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굽이치는 금빛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머리카락에 달라붙었던 꽃잎이 떨어져 나가, 아주 느리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일리아와 카르한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카르한은 홀린 듯이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황혼을 담은 보라색 눈동자는 초저녁과 밤의 경계를 품은 듯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눈동자를 통해 한 폭의 풍경을 보았다. 다시는 저것보다 더 황홀한 장면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얽혀드는 시선 깊은 곳에서 거대한 파도가 한껏 밀려왔다. 흠뻑 빠져버릴 것 같아서 두렵지만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꽃잎은 어깨에서 허리로, 무릎으로…… 마침내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머리 위로 늘어진 등나무 꽃잎이 몇 장 더 떨어졌다. 기밀하고 촘촘해서 무엇도 침입할 수 없을 것 같던 두 사람의 시선 사이로 꽃잎 하나가 내려왔다.
카르한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단단히 얽혀들었던 눈빛이 풀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마구 뛰는 심장 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했다. 누군가 제 몸을 짓누르는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카르한은 물속에 잠겼다 나온 사람처럼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다리가 아파서 그러니, 먼저 가십시오. 금방 뒤따라가겠습니다.”
일리아는 괜찮으냐고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다리는 핑계라는 걸 알아챈 눈치였다.
“멀리 안 갈 테니까 천천히 와요.”
일리아가 먼저 걸음을 뗐다. 점점 거리가 벌어지자, 카르한은 품에서 급히 약통을 꺼냈다. 물도 없이 알약을 씹어 삼켰다. 숨을 천천히 내뱉어도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질 뿐이었다.
약효가 돌기를 기다리던 그는 멀어져가는 일리아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때 발치를 휘돌던 바람이 하늘로 치솟더니, 세차게 내리꽂혔다. 주렁주렁 달린 등나무 꽃잎이 보랏빛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시야를 가리는 어마어마한 꽃비에 카르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꽃잎이 머리와 얼굴을 스치는 감각이 생생했다.
서서히 바람이 멎고 허공을 맴돌던 꽃잎이 바닥에 전부 내려앉았을 때. 카르한은 서서히 눈을 떴다. 사방이 온통 어둑했다. 잔잔하게 깔려있던 황혼도 전부 물러나고 없었다. 빈틈없이 바닥을 메운 꽃잎이 보라색인지 검은색인지 제대로 분간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유독 선명한 한 사람이 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쏟아지는 꽃잎을 막기 위해 양산을 쓴 일리아가 뒤돌아 선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쿵, 가슴 언저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카르한은 손에 쥐고 있던 약병을 놓쳤다. 알약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빈 약통이 꽃잎 위를 뒹굴었다.
어째서인지 메즈라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언젠가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한 날이 온다면…… 그때는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말은 간혹 시간이 지나서야 깨닫게 되는 날이 온다. 지금처럼.
그리고 그의 마음을 모르는 그녀가 이름을 불러왔다.
“……카르한?”
그러니까 이것은.
사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