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48)
-성격 나쁜 계집애.
스텔라는 자신만 아등바등하고 있다는 것이 억울했다.
일리아의 뒤만 쫓는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일리아에게 약혼자가 생겼다. 일리아는 약혼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모양인지, 착하고 얌전한 척하기 바빴다. 스텔라는 그것이 무척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 장담했지만, 일리아의 착한 척은 계속 진행되었다. 말수도 적어졌으며 말을 걸어도 가만히 웃고 말았다. 몇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일리아의 존재감은 점점 흐릿해져갔다. 가만히 있어도 사교계의 주인공이던 그때의 일리아는 더 이상 없었다.
그 사이 스텔라는 좋아하던 소설의 여주인공을 따라 하기 위해 살을 뺐다. 그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더니, 스텔라는 단숨에 사교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일리아 때문에 늘 조연에 불과하던 스텔라는 비로소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즐거움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이 자리가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스텔라는 일리아가 언제 다시 자신의 자리를 넘볼지 몰라서 불안하기만 했다.
강박관념에 시달리듯 자기 관리에 힘쓰는 한편, 그녀는 계속해서 일리아를 넘어설 방법을 찾았다. 카르한 에반테온과의 약혼이었다. 만약 카르한과 결혼하게 된다면 스텔라는 공작부인이 될 수 있었다. 일리아보다 더 높은 신분을 거머쥐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스텔라는 카르한 에반테온과 약혼하고 싶다고 부모님을 졸랐다. 다행히 에반테온 가문 쪽에서도 싫지 않은 듯, 긍정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스텔라는 이 약혼이 성사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카르한이 일리아와 교제하고 있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스텔라가 번쩍 눈을 떴다. 동시에 두통이 밀려와, 스텔라는 잠시 심호흡을 내뱉었다. 몸이 좀 괜찮아졌을 즈음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화려한 벽지에 온갖 물건으로 가득 찬 자신의 침실과 달리, 하얀 벽지에 가구도 거의 없는 방이었다. 스텔라가 누워있는 침대와 협탁 그리고 의자가 전부였다.
“꿈인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스텔라는 가장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전에 눈독 들였던 가게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아.
깨닫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깼네.”
깜짝 놀란 스텔라가 몸을 일으켰다. 문가에 일리아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여긴 또 어디야!”
“우리 가문 병원.”
느슨하게 팔짱을 푼 일리아가 스텔라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 모습이 마치 사냥감을 눈앞에 둔 짐승 같아서, 스텔라는 이불만 끌어올렸다. 침대 맡에 멈춰 선 일리아가 스텔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 내 앞에서 쓰러진 건 기억나? 일단 치료는 끝냈어.”
“도와달라고 한 적 없어.”
까칠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일리아가 입술을 비뚤게 끌어올렸다.
“싸가지 없는 것.”
일리아의 입에서 나온 말에 스텔라가 잠시 얼빠진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정작 험한 말을 한 일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스텔라를 슥 훑었다.
“약 끊는 게 좋을 거야.”
어깨가 흠칫 굳어졌다. 스텔라는 설마 하는 눈으로 일리아를 응시했다.
“무, 무슨 약?”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해봤지만, 일리아는 전부 알고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계속 복용하면 나중에 제대로 못 걸을 거라고 의원이 그러더라. 그리고 거기서 더 뺄 필요 없잖아.”
스텔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일리아가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치욕스러웠다.
스텔라는 지금까지 부작용은 있지만, 살을 빼는 데 효과적인 약을 복용해왔다. 그러면서도 혹시 살이 찔까 두려워했고, 최근에는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게 되었다. 약을 끊을까 고민했으나 체형이 원래대로 돌아갈까 싶어서 복용을 멈추지 못한 상태였다.
입술만 세게 깨무는데, 일리아는 지나가듯 툭 말했다.
“필요하면 내가 아는 상담사 붙여줄게.”
스텔라는 혼란스러워졌다. 항상 저를 무시하던 일리아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혹시 약점을 잡았다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알량한 동정일지도 몰랐다. 스텔라는 앙상하게 말라버린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지금 날 동정하는 거야? 속으로는 비웃고 있을 게 분명하면서!”
스텔라가 소리 지르자, 일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스텔라는 지금까지 꾹꾹 삼켜왔던 말을 퍼부었다.
“날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셈인데? 전부 네 탓이야, 내가 이렇게 된 건!!”
금방 숨이 차서 헐떡이는데, 가만히 있던 일리아가 물었다.
“내 탓이라고?”
“…….”
“내가 뭘 했는데.”
여전히 침착한 보랏빛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 눈을 마주한 스텔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사실 스텔라도 알고 있었다. 일리아는 딱히 제게 잘못한 점이 없다는 것을.
스텔라를 벼랑까지 내몬 것은 주변 사람들의 평가와 비교였다. 스텔라는 그저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내가 너보고 살 빼래? 아니면 뒤에서 네 험담이라도 했어?”
스텔라는 입술을 다물었다. 이렇게 화난 얼굴로 말을 쏟아내는 일리아는 처음이었다. 늘 웃는 낯으로 저를 무시하거나 비꼬는 모습만 봐 왔었다.
“오냐오냐도 한두 번이지. 내가 네 부모님도 아니고, 언제까지 징징거림을 받아줘야 하는데.”
스텔라는 얼어붙은 채 침묵했다. 반박해야 하는데, 아직도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스텔라는 이불만 꼭 쥐다가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난 네가 싫어.”
“처음으로 서로 의견이 맞네. 나도.”
냉큼 돌아온 대답에 순간 울컥했다. 이렇게 대놓고 싫다 말한 적은 처음이었는데, 바로 받아칠 줄이야. 일리아가 제게 잘못한 점을 떠올리던 스텔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내 약혼자도 채갔잖아.”
“말은 똑바로 하자. 약혼 이야기만 오가고 있었을 뿐, 그냥 스토커였잖아.”
“스토커라니!”
“밤낮으로 찾아가고 따라다니는 게 스토커지, 아님 뭐야?”
스텔라는 입술을 깨문 채 일리아를 노려보았다. 한 마디도 지질 않아서 짜증이 났다. 스텔라는 쥐고 있던 이불을 내던졌다.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게 없어.”
“자꾸 내가 할 말 네가 한다?”
“아, 좀, 그냥 들어!”
스텔라가 발칵 화내자, 일리아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제야 병실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스텔라는 애꿎은 바닥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번에 네가 날 도와줬다고 해서 고맙진 않아.”
일리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입 모양으로 ‘싸가지.’ 하고 말한 것 같았다. 도대체 저런 상스러운 말은 어디서 배운 거람. 스텔라는 인상 쓴 채 말을 이었다.
“어차피 너도 지금껏 나 무시했잖아. 그리고 너랑 있으면 맨날 비교 당해서 짜증 난다고.”
스텔라는 자신이 지금껏 받아온 상처를 떠올렸다. 일리아는 평생 모를 열등감이었다.
“열심히 노력해도 들려오는 건 네 이야기뿐인데…….”
예절 교수가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그 정도로 되겠어요? 블로든 영애께서는 이틀 만에 습득하셨어요.
눈을 꾹 감았다 뜬 스텔라가 중얼거렸다.
“내가 원하는 건 처음부터 전부 다 쥐고 있었으면서…… 잘난 척하고…….”
“…….”
“그래서 네가 싫었어.”
거기까지 말하고 나니 속이 좀 후련했다. 만났다 하면 시비 걸기 바빴는데, 속에 있던 감정을 전부 꺼내놓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 말한 거야?”
조용히 있던 일리아가 물었다. 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일리아가 바로 본론부터 말했다.
“나도 너 싫어해.”
스텔라가 발끈하자, 일리아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가만히 있는데 시비 걸고, 우리 가문 도안 훔쳐서 출시하고. 이번 티파티에 초대한 것만 봐도 나 망신 주려던 속셈이었잖아.”
구구절절 맞는 말에 스텔라는 뜨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특히 마차 도안을 훔친 것은 범죄나 다름없었다.
물론 스텔라가 직접 시킨 일은 아니었다. 블로든 가문 디자이너가 직접 델로타 저택에 찾아와 도안을 팔겠다고 제안했고, 그걸 사들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도둑질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오래도록 마음이 찝찝했다. 스텔라는 한참 입술을 달싹였다.
“……다른 건 안 미안한데, 도안 훔친 건 사과할게.”
고개를 뻣뻣하게 든 상태였기에 미안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사과였다. 하지만 이건 스텔라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막상 사과하고 보니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일리아에게 복수하기 위해 리하트와 협력했던 것도 그렇고…….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발을 빼긴 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니 리하트와 너무 성급하게 손을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쪽에서 오는 연락을 전부 무시하긴 했지만, 잠깐이라도 협력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스텔라 델로타.”
조용한 부름에 스텔라가 움찔했다.
“수프는 삼킬 수 있어?”
“몰라.”
일리아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가자, 스텔라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수프가 걸쭉하면 토해서.”
“그럼 최대한 묽은 수프로 준비하는 걸로 하고.”
일리아가 스텔라를 똑바로 보며 단호히 말했다.
“상담 받아.”
“…….”
“섭식장애는 심리적인 요소가 크다고 하더라.”
스텔라는 대답하지 않고 손톱만 잘근잘근 씹었다. 가벼운 한숨을 내뱉은 일리아가 뒤돌아섰다.
“나 바쁘니까 이만 갈 거야. 쉬다가 알아서 가.”
손톱을 물어뜯던 스텔라가 조용히 물었다.
“……소문 퍼뜨릴 거야?”
“그럴 생각이었으면 저번 티파티 때 퍼뜨렸지.”
일리아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생각해보니 티파티 후로 제 소문이 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일리아가 비밀을 지켜준 것이었다.
스텔라는 입술을 달싹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일리아는 그런 스텔라를 힐끗 본 후에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탁,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스텔라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뭐야…….”
얼굴이 붉어진 스텔라는 애꿎은 베개만 쥐었다.
***
카르한은 거울을 들어 제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부기가 많이 빠져서 외출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며칠 전만 해도 붉은 자국이 가시질 않아서 괜히 신경 쓰였다. 싸워서 생긴 상처 같아서 사납던 인상이 더욱 흉흉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카르한은 느릿느릿 옷장을 열어 옷을 꺼내 입었다. 오늘만 더 쉴까 싶었지만, 더 이상 수업을 빠질 수 없었다.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유독 선명하게 남은 그날 밤. 카르한은 지금까지 품고 있던 감정을 완전히 자각했다. 이전부터 일리아를 의식해온 것도, 그녀가 불러주는 제 이름이 특별하게 느껴지던 것도……. 전부 일리아를 사랑해서라는 걸 깨달아버렸다.
카르한은 망망대해를 떠도는 조각배처럼 방황했다. 감정을 자각하긴 했지만, 그 후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기에.
카르한은 객관적일 정도로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 도움만 받는 형편에 일리아와 나란히 설 자격조차 없을 정도로 부족하기만 했다. 그런 주제에 저를 좋아해달라고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
거기다 일리아가 제 마음을 알게 되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았다. 이미 한쪽이 전혀 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데, 어찌 편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이 관계가 변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분명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카르한은 제 마음이 죽었으면 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전부 사라져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흘러도, 사그라지기는커녕 보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
탁, 힘없이 옷장 문이 닫혔다. 나갈 채비를 마친 카르한은 조용히 침실을 나선 후 마차에 올라탔다. 창가에 고개를 기댄 카르한은 눈가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고요한 공간에 있으면 온갖 상념이 그를 괴롭혔다. 그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질 못했더니, 눈꺼풀에 추를 단 듯 무겁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하지……. 만약 오늘 일리아를 만나게 된다면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다 레베타가 했던 말이 불쑥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블로든이 진심으로 널 사랑할 것 같으냐.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워서 카르한은 눈을 꾹 감았다. 마침내 눈을 떴을 때, 마차는 블로든 가문의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초여름이 달려오는 중인 듯 저 끝에서부터 짙은 녹음으로 물들어가는 중이었다. 이미 수십 번도 더 방문했지만, 어마어마한 크기의 정원이 적응되질 않았다. 한참을 달려 별관 현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카르한은 주위를 가볍게 살폈다.
“오셨습니까.”
그러나 그를 반기는 것은 고용인뿐이었다.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쉬우면서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일리아를 만났더라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었을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카르한은 수업을 듣는 방에 가방을 갖다놓은 후,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는 블로든 가문 기사들이 한창 훈련 중이었다. 연습용 검을 고른 카르한이 합류하려 했다. 그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소공자.”
가벼운 차림을 한 비올레가 서 있었다. 카르한이 정중히 인사를 건네자, 비올레가 싱긋 웃었다.
“오랜만에 대련할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카르한은 검에 집중해서 잡념을 떨쳐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곧바로 연무장 가운데에 섰다. 훈련하던 기사들이 잠시 멈춘 채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검을 고쳐 쥔 카르한이 심호흡을 내뱉었다. 지금까지 비올레와 몇 번이나 붙었으나,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체격과 힘의 차이가 뚜렷한데, 실력으로 전부 상쇄한 것이다.
마주 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맞부딪친 검이 날카로운 음을 연주했다. 공방이 빠르게 오갔다. 그러나 카르한은 평소와 달리 비올레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급급했다.
흔들리는 칼날 끝을 본 비올레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검을 휙 거두었다. 카르한이 당황해하자,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집중을 못 하는 것 같군요.”
뜨끔한 카르한이 서서히 검을 내려놓았다. 비올레는 그런 카르한을 위아래로 살피며 말을 이었다.
“검에서 복잡한 상념이 그대로 묻어나오고 있어요. 혹시 그동안 무슨 일 있었나요?”
카르한은 침묵했다. 뒤늦게 사랑을 깨달아서 방황하고 있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상대는 짝사랑 상대의 어머니였다. 카르한이 대답하지 않자, 비올레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소공자.”
나직하나 또렷하게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였다. 카르한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 보았다.
“이 연무장에서만큼은 당신을 내 제자라고 생각해요.”
“…….”
“스승으로서 제자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카르한의 입매는 도통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올레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해결이 안 되는 고민거리라면 부수는 것도 해답이에요.”
카르한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카르한의 고민거리는 일리아였기 때문에.
“……그건 안 됩니다.”
열심히 머리 굴리던 카르한은 한숨을 삼켰다. 마땅히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거짓말에 재능이 없어서 오히려 의심을 살지도 몰랐다. 그리고 사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실은 제가…….”
카르한은 아주 어렵게 입을 뗐다.
“일리아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
비올레는 이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카르한을 쳐다보았다.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카르한이 우물쭈물했다.
“계속 이 감정이 뭔지 몰라서 답답했는데, 얼마 전에 깨닫게 되어서…….”
고백하고 나니 귀 끝이 붉어졌다. 잠시 어이없다는 눈으로 카르한을 쳐다보던 비올레가 한쪽 팔을 허리에 짚었다.
“아니, 그럼 진심으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교제한 건가요? 둘이 연회에서 첫눈에 반해서 교제했다면서……?”
카르한은 말없이 눈동자만 굴렸다. 지금 다른 사람들은 일리아와 카르한을 연인 사이라고 알고 있었다. 여러 이유로 계약 연애를 그만두지 못한 탓이었다.
“일단 검 들어요.”
어느새 비올레는 검을 단단히 쥔 상태였다. 카르한은 긴장한 상태로 검을 들었다. 그 후로 카르한은 비올레에게 열심히 굴려졌다. 말만 대련이지 실컷 얻어터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참 후에 카르한이 잔뜩 지쳐서 나가떨어지자, 비올레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이제라도 좋아하게 되었다니까 여기서 끝낸 거예요.”
만약 마음이 식었다는 둥 괘씸한 이야기가 나왔더라면 진즉 쫓아냈을 거라고 말한 뒤, 비올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처음에는 둘이 서로 마음도 없는 상태에서 교제를 시작했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은 카르한이 먼저 일리아를 좋아하게 되었고 말이다.
하긴 일리아가 갑자기 교제하는 사람이 있다며 덜컥 카르한을 소개해준 것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래도 둘 사이에 뭔가 있는 듯했다. 뭐, 귀여우니 봐줄까…….
사실 이 정도로 마무리한 것은 카르한에게서 어떠한 사욕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놓고 탐욕을 드러내던 리하트와 달리 카르한은 일리아에게 바라는 게 딱히 없어 보였다.
그리고 본인은 몰랐던 모양이지만, 일리아를 바라볼 때 카르한은 늘 애정 어린 눈이었다. 비올레 또한 일리아의 남편감으로 카르한 정도면 괜찮다고 내심 생각하기도 했고 말이다.
흙먼지를 털어낸 비올레가 바닥에 주저앉은 카르한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뭐가 고민이에요?”
카르한의 얼굴이 금방 어두워졌다. 눈을 내리깐 카르한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제가 좋아할 자격이 있을지…….”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땅을 파고 들어갈 것 같았다.
“좋아하는 데 자격이 어디 있나요.”
“……!”
“그렇게 땅 팔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표현해요! 지레 혼자 겁먹지 말고.”
비올레는 손에 들린 검을 힐끗 보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사랑은 쟁취하는 거예요.”
비올레의 외침에 카르한은 잠시 멍해졌다. 그런 카르한을 보며 비올레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생긴 것만 곰인 줄 알았는데, 성격까지 물렁한 곰이었잖아.”
전장의 악귀니, 성격이 더럽다느니, 제멋대로 군다느니……. 도대체 그딴 소문은 누가 낸 건지. 혀를 차던 비올레가 단호히 말했다.
“소공자, 곰처럼 굴지 말고 여우가 되어요.”
“예. ……예?”
카르한이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달리, 눈을 순하게 깜빡였다.
“적극적으로 나서보란 말이에요. 너무 대놓고 말고 은근하게.”
무척 어려운 요구 사항이었지만, 카르한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보았다. 그제야 비올레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도 소공자에게 어느 정도 마음이 있으니 교제하는 거겠죠.”
카르한은 침묵했다.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열심히 해봐요.”
비올레는 언제 몰아붙였냐는 듯 짤막한 응원을 남긴 채 연무장을 떠나버렸다. 멀어져가는 비올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르한은 검을 칼집에 넣었다.
어찌 되었든 비올레는 카르한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포기하라고, 자격도 없다고 말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채찍질했다.
카르한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새파란 하늘에 조각구름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저 하늘처럼 머릿속이 화창해졌다. 복잡하기만 하던 마음이나 걱정도 떠나간 상태였다. 지금은 그저 일리아가 보고 싶었다.
카르한은 수건으로 땀을 닦은 후에 간단히 몸을 씻었다. 별관으로 향하던 카르한은 일단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당장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부담 주고 싶지는 않으니, 조금씩 제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그저 나아갈 뿐, 받아주는 것은 일리아의 몫이었다. 그러는 동안 부족한 점을 메워나가며 일리아와 나란히 설 자격을 갖출 생각이었다. 비올레가 해준 말을 천천히 곱씹던 카르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여우가 되라는 건 뭐지…….”
비유 같은데, 여우의 습성에 특별한 점이 있나? 지금까지 본 여우들은 그냥 짐승이던데. 아무래도 나중에 집에 돌아가기 전에 서점에 들르는 것이 좋을 듯했다.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카르한은 별관 앞에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들었을 때, 현관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일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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