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51)
쭈그리고 있던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연무장 잔디를 새로 교체한다는 말을 들었다. 카르한은 아직도 멀쩡해 보이는 잔디를 한번 둘러보았다.
몇 년은 그대로 써도 될 것 같은데, 블로든 가문 측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전체적으로 보수 공사를 한다고 했다.
카르한이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연무장 구석에 피어난 작은 야생화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꽃으로 화려하진 않으나 묘하게 눈길을 사로잡았다.
카르한은 왠지 일리아의 하얀 뺨을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흔한 들꽃이 무척 특별하게 느껴졌다. 오후에 연무장을 싹 갈아엎는다고 했으니 이 꽃도 가차 없이 매몰될 것이 분명했다.
카르한은 두 손을 뻗어, 흙을 살살 팠다.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캐낸 후에 손수건으로 감쌌다. 이제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하던 카르한은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
“이상하단 말이야.”
펜을 내려놓은 일리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며칠 전부터 카르한의 태도가 이상했다. 갑자기 벽을 치질 않나, 살짝 노출이 있는 옷을 입질 않나……. 물론 그의 몸매가 좋아서 그런지 자꾸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어서,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는데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다무는 것을 보았다. 그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뭔가 떠오를 듯 말 듯 했다. 연애 소설에 나오는 오만하고 저돌적인 주인공 느낌이랄까…….
물론 느낌만 그렇고 하나같이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영문을 알지 못한 일리아는 테시온을 슬쩍 불러내서 물었다.
-요즘 소공자한테 무슨 일 있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갑자기 늑대에 꽂히신 것 같습니다.
특히 얼마 전에는 빨간 모자와 늑대라는 동화까지 샀다며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안타깝게도 테시온도 카르한이 왜 그러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일리아는 이전에 카르한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갑자기 카르한이 여우를 좋아하느냐 물어 와서 늑대가 좋다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카르한은 무척 심각해 보였다.
‘혹시 나 때문인가…….’
그냥 여우가 좋다고 할 걸 그랬나. 질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뒤늦게 궁금했다.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은 일리아는 버릇처럼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카르한이 선물해 준 것으로, 가볍고 편해서 자주 착용하고 다녔다. 목걸이를 만지고 있으면 목덜미에 감촉이 느껴지는 듯했다. 길쭉하고 단단한 손가락, 제 피부보다 뜨겁던 체온.
일리아는 목걸이를 놓고 다시 자료를 읽었다. 온천 사업을 도맡았기 때문에 도안부터 자재까지 제 손을 거치지 않는 게 없었다. 그래서 밤낮 없이 바쁘게 일하는 중이었다.
한참 글자를 읽던 일리아는 눈이 뻑뻑해져서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넓은 창문을 통해 정원까지 훤히 보였다. 멀리서부터 정원을 가로지르는 한 사람이 보였다.
일리아는 홀린 듯이 그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현관과 가까워진 그가 멈춰 서더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거리가 제법 있는데도 카르한은 정확히 저를 보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르한이 본관을 찾아올 이유는 제게 볼일이 있을 때뿐이었다. 집무실을 나온 일리아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자 현관 밖에 서 있는 카르한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는 고용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카르한.”
일리아가 이름을 부르자, 카르한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시종일관 딱딱할 것 같던 얼굴 위로 감정이 서렸다. 기쁜 기색을 띤 푸른색 눈동자가 일리아를 응시했다.
천천히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치켜 올라간 눈꼬리는 입꼬리와 반대로 아래로 휘어졌다. 누구라도 시선을 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예쁜 미소였다.
일리아는 그대로 멈춰 선 채 그를 응시했다. 서늘한 얼굴 위로 떠오르는 다정한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저 멀리서 어수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제 가슴 안쪽에서 불어오는 부드럽고 따스한 바람이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일리아가 계단을 완전히 내려왔다. 그리고 카르한의 손에 들린 작은 화분을 발견했다.
“……그건 뭐예요?”
화분 안에 손톱만 한 흰 꽃이 옹기종기 심겨 있었다. 꽃을 제법 잘 안다고 자부하는 일리아조차 처음 보는 꽃이었다. 아무래도 들판에서 자라는 야생화 같았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카르한이 일리아의 앞에서 멈춰 섰다.
“선물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카르한은 손에 들고 있던 화분을 일리아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화분을 받아들었다. 카르한의 손에 들렸을 때는 분명 작아 보였는데, 일리아에게 넘어오니 그리 작지는 않았다.
“예쁘다…….”
일리아가 무심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원에 만개한 화려한 꽃만 보다가 수수한 야생화를 보니 도리어 눈길을 끌었다.
“연무장에서 발견한 꽃인데, 일리아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잠시 눈을 내리깐 그가 일리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최근에 바쁘신 것 같아서…… 제가 본 풍경의 일부를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함께 공유하고 싶었다고 그가 쑥스러운 듯 속삭였다. 일리아는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카르한이 본 풍경을 함께 본 것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고마워요. 창가에 두고 잘 길러볼게요.”
카르한은 환하게 웃는 일리아를 눈에 담았다. 이 순간을 전부 기억하기 위해서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가슴의 떨림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솔직히 일리아가 이렇게 좋아해줄 줄은 몰랐다.
일리아의 이상형에 가까워지기 위해 책을 참고했을 때와는 무척 다른 반응이었다. 카르한은 이제 늑대 같은 남자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아, 그리고 카르한…….”
일리아의 부름에 카르한이 겨우 눈을 깜빡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일리아가 말했다.
“전에 여우 좋아하냐고 물었잖아요.”
“……예.”
“역시 저는 늑대보다 여우가 좋은 것 같아요.”
카르한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여우, 말입니까……?”
“네.”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르한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참고하겠습니다.”
왠지 비장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일리아는 생각했다.
‘갑자기 사냥에 관심이 생겼나?’
거기까지 생각하니 이제야 말이 되는 것 같았다. 저번에 여우를 좋아하느냐 물었던 이유는 제게 사냥감을 선물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몰랐다. 눈치 없이 여우보다 잡기 어렵다는 늑대를 말해버렸으니…… 카르한은 무척 난감했으리라.
드디어 깨달음을 얻게 된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조했다.
“여우면 충분해요.”
그리고 며칠 후.
테시온이 정말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일리아를 찾아왔다.
“카르한 님께서 이번에는 여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책을 전부 사들이시는데 어떡하면 좋을까요?”
“……?”
“여우 습성을 알아보시는데, 설마 여우를 기르려고 하시는 건지……. 에반테온 공작저는 애완동물을 기를 수 없는데 말이죠…….”
테시온의 말에 일리아는 덩달아 심각해지고 말았다.
***
이른 오후, 일리아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창틀에 둔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물끄러미 야생화를 바라보던 일리아는 이틀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테시온에게서 카르한이 이상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리아는 결국 대놓고 그에게 물어보았다.
-저번에 여우 좋아하냐고 물어본 이유가 뭐예요?
-그게…….
카르한은 머뭇거리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것을 수상하게 생각한 일리아가 선수 쳤다.
-사실 저는 사냥감 이야기하는 줄 알았거든요.
-……진짜 여우가 좋으신 겁니까?
-?
-여우 같은 사람을 비유한 줄 알았는데…….
카르한은 무척 심각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상하게도 대화하면 할수록 어긋나기만 했다. 결국 이야기는 거기서 매듭지어진 듯했다.
그리고 어제, 카르한은 진짜 여우 한 마리를 잡아왔다. 어떻게 상처 하나 없이 생포해온 것인지 무척 신기했다.
백작저 사람들이 전부 그걸 구경하는데, 나중에 집에 돌아온 비올레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카르한을 그대로 끌고 나가버렸다. 한참 후에 돌아온 카르한은 비 맞은 여우처럼 처량한 모습이었다.
“어머니랑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도통 알려주질 않아서 아직까지 감이 오질 않았다. 일리아는 다시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수북하게 쌓인 서신을 보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중 반절 이상이 바네사와 연관된 청탁 편지였다.
‘이제 슬슬 결정 내려야겠네.’
전시회 이후로 아직까지 다음 의뢰를 받지 않았다. 신비주의도 좋으나,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기껏 모아둔 관심이 흩어질 터였다. 반짝 뜨는 화가로 만들지 않으려면 다음 작품을 내야 했다.
하지만 바네사는 일리아가 선택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좋다는 의견이었다. 결국 결정권은 일리아에게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바네사의 다음 의뢰를 결정해야 할 듯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일리아가 멈칫했다. 오늘 저를 찾아올 방문객은 없었다.
“작품 의뢰 때문에 찾아오셨다는데…….”
아무래도 애가 달아서 직접 찾아온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고민하지 않고 돌려보내려 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고용인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일리아는 옷매무새를 고친 후 곧바로 손님이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무릎에 손을 얹은 채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여인이 보였다. 기척을 느낀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찾아와서 미안해요.”
문가에 멈춰 선 일리아가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이슈타르 제국에 광휘가 영원하기를, 일리아 블로든이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일리아는 잔뜩 긴장한 채 손님을 맞이했다. 가족들도 없이 혼자서 황족을 상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황후가 방문한 목적이 저를 만나기 위함이었기에 더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그녀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집 주인 같은 태도였으나, 그녀의 신분을 생각하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문가에 서 있던 일리아는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걸어와 황후의 맞은편에 앉았다.
일리아는 최대한 공손한 자세를 취한 채 조심스레 황후를 살폈다. 가까이서 보니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연회에서 먼발치로 몇 번 본 것이 전부일 텐데, 어째서 낯익은지 알 수 없었다.
‘……아.’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일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이전에 바네사의 작품이 걸린 전시회에서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수수한 차림새에도 기품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고귀한 사람일 거라 멋대로 추측했는데……, 황후였을 줄이야.
머리가 어지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생각을 멈추고 손을 들었다. 뒤에 대기해 있던 고용인이 차를 내어왔다. 찻물이 우러나자 그윽한 향기가 퍼져나갔다. 찻잔을 든 황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블로든이 주최한 전시회에 방문한 적이 있어요. 거기서 제 마음을 사로잡는 그림을 보았죠.”
일리아는 말의 서두만으로도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그림을 의뢰하러 왔나 보다 하고 생각하는데, 이어지는 말은 예상과 달랐다.
“본론부터 꺼내자면…… 그대가 데리고 있는 화가를 궁정 화가로 불러들이고 싶어요.”
그 말에 찻잔을 내려다보던 일리아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달칵, 찻잔이 받침대에 맞물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황후가 시선을 마주해왔다.
“계약금의 세 배를 지불한 뒤에 보상으로 그대가 원하는 걸 한 가지 들어주겠어요.”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황후의 제안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계약금은 둘째 치고 원하는 걸 한 가지 들어준다니. 황후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말이니, 리하트와의 파혼 정도는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바네사에게도 무척 좋은 기회였다. 평민이 궁정 화가가 되다니,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만약 궁정 화가가 된다면 돈과 명예를 전부 거머쥘 수 있을 터였다.
그런 장점을 제외하고라도 이 제안은 받아들여야 했다. 안 그래도 블로든 가문은 황실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여기서 더 눈 밖에 났다간 온갖 제재가 들어올 것이 뻔했다.
한참 말이 없던 일리아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최대한 공손한 태도를 취한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제안은 제가 결정할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황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는 전적으로 바네사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이런.”
황후의 탄식에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나, 자신의 발언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일리아는 서서히 눈을 떴다. 예상과 달리 그녀에게서 불쾌한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안타깝게 되었어요. 그녀에게는 이미 거절당했답니다.”
“……네?”
“그대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며, 제안을 재고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영애가 제안을 받아들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하고 그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황후는 이내 미련을 버렸는지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떨쳐냈다.
그녀가 천천히 허리를 곧게 세우고 무릎에 손을 얹었다. 행동 하나하나에서 우아함이 묻어나왔다. 마침내 그녀가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내 의뢰를 첫 번째로 받아주겠어요?”
바네사가 권한을 위임한 덕에 일리아는 첫 의뢰인을 고를 권리가 있었다. 일리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지금까지 수많은 청탁을 받았지만, 바네사의 이름을 알리는 데 황후보다 더 나은 의뢰인은 없었다. 앞으로 모든 이들이 바네사를 주목하게 될 것이다. 일리아는 서서히 긴장을 풀고, 마주 웃어 보였다.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황후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일리아와 황후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나이 차이가 두 배 이상 나는 두 사람이었지만, 미술에 관심이 많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예술 작품에 대해 간단한 견해를 나누다 보니 은근히 취향이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관심사는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제법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황후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름에 황궁에서 연회가 열린다는 거, 알고 있지요?”
일 년에 두어 번 정도 황궁에서 연회가 열렸다. 귀족 영식, 영애만 참석했던 저번 연회와 달리, 여름 연회는 규모 자체가 달랐다. 귀부인과 귀족들 그리고 지방의 소귀족들도 함께하는 자리였다.
그녀가 직접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반드시 참석해달라는 의미였다.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후가 웃으며 속삭였다.
“그럼 그때 만나도록 하지요.”
***
며칠 전, 카르한은 수도 외곽까지 나가서 여우를 잡아왔다. 생포하느라 애 먹긴 했지만 일리아에게 뭔가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카르한은 직접 잡아온 여우를 일리아에게 선물했고, 그는 그대로 비올레에게 끌려 나가서 잔소리를 들었다.
-여우가 되라고 했더니, 진짜 여우를 잡아오면 어떡해요?
-일리아가 진짜 여우를 원하는 것 같아서…….
카르한의 대답을 들은 비올레는 황당해했다. 비올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소공자, 여우 짓이라는 거 알아요?
카르한이 모른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비올레는 그 의미를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었다.
-대놓고 말고 은근슬쩍 환심을 사는 거예요. 상대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때로는 과장이나 약간의 거짓말도 필요한 법이죠.
그제야 카르한은 비올레가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곰처럼 둔하게 굴지 말고 약삭빠르게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카르한이 잡은 여우는 숲에 풀어주었다. 살아있는 여우는 처음 본다며 일리아가 좋아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덜컹덜컹, 바깥에서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가에 기댄 채 멍하니 햇살을 쬐던 카르한은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은 테시온을 힐끗 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카르한을 보고 있었는지 곧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카르한은 요즘 테시온이 저를 많이 걱정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을 해서 염려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뭐라고 말해야 그를 안심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던 카르한은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테시온.”
“예, 카르한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