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53)
14장
***
완연한 여름이 찾아오고, 수도가 떠들썩해졌다. 황궁에서 여름 연회가 열린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황후에게 직접 초대장을 받게 된 일리아는 연회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카르한은 갈지 말지 망설이기에, 꼭 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번에야말로 이전과 달라진 카르한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때였다. 나쁜 소문을 걷어내고, 그의 평판을 높여줄 절호의 기회였다. 다들 힘주고 올 테지만, 황궁 연회 주인공은 카르한이 될 것이다.
연회에 참석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카르한과 함께 입장할지 고민이 되었다. 일리아는 아직 파혼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리하트 쪽의 평판이 완전히 무너졌고, 카르한과 교제하고 있다는 소문도 제법 퍼졌을 테니 차라리 같이 입장하는 게 나았다. 괜히 따로 행동했다간 온갖 추측이 난무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에반테온 공작부부의 귀에도 들어갈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초대장을 받은 후로 연습에 들어갔다.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는 법, 연회장에서 지켜야 할 예의, 표정 관리. 그리고 연회의 꽃이라 불리는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둘이서 춤을 맞춰보기로 했다.
“……춤을 춰본 적이 없다고요?”
카르한은 느릿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당신 한 번 배우면 바로 익히잖아요.”
일리아는 카르한이 다른 공부처럼 춤도 금방 익힐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 가볍게 춤을 맞춰 보았고……. 일리아는 무척 심각한 얼굴로 선언했다.
“오늘부터 특별 훈련에 들어가도록 하죠.”
뭐든 척척 배우던 카르한이었지만, 춤은 도통 늘지 않았다. 동선과 박자는 전부 외웠으면서 부드럽게 이어나가질 못했다. 뻣뻣하고 어색한 몸짓에 웃음만 나왔다. 나중엔 카르한이 하도 발을 많이 밟아서, 자진해서 맨발로 춤을 추었다.
일리아는 하루에 두세 시간씩 시간을 내 집중적으로 연습 시켰다. 열심히 연습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 앞에 선보여도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는 됐다.
그리고 연회 전날, 바네사가 특별한 선물을 주었다. 연회에서 입을 드레스에 그림을 그려준 것이다. 바네사가 제안했을 때만 해도 순전히 재밌을 것 같아서 승낙했는데, 완성된 것은 하나의 작품이었다.
드레스 밑자락에 꽃밭이 펼쳐진 것처럼 섬세한 꽃이 그려져 있었다. 굵직하고 파격적인 그림만 그리는 줄 알았는데, 천재는 역시 달랐다.
마침내 연회 당일이 왔다. 잘 차려입은 가족들이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일리아가 연회에 간다 하니 전부 참석하기로 한 것이었다.
“우리는 따로 탈게요.”
가족들이 같이 타자고 조르자, 일리아는 선을 그었다.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안 그래도 카르한은 잔뜩 긴장해 있는데, 여기서 더 부담 주고 싶지 않았다.
가족들을 떼어놓고 마차에 올라탄 일리아는 맞은편에 앉은 카르한을 가볍게 살폈다. 몸에 딱 맞는 밝은 와인 색 연회복을 입고 머리는 깔끔하게 손질한 상태였다. 평소에도 잘생겼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는데, 작정하고 꾸며 놓으니 아주 빛이 났다.
‘연회장에서 말없이 서 있으면 조각상인 줄 아는 거 아냐?’
일리아는 그의 외모에 연신 감탄했다. 홀린 듯이 카르한을 살피던 일리아가 어, 하고 입을 열었다.
“커프스단추 했네요?”
소매에 묘하게 익숙한 커프스단추가 달려 있다 싶었는데, 이전에 일리아가 선물해준 것이었다. 일리아가 알아보자, 카르한이 쑥스러운 듯 눈을 내리깔았다.
“하고 나오면 든든할 것 같아서…….”
카르한은 커프스단추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미소 지었다. 황궁을 향해 달리던 마차가 마침내 멈추었다. 늦은 오후였지만, 해가 길어진 터라 아직 주위가 밝았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블로든 백작 부부가 걸음을 뗐다. 새로운 은테 안경을 쓴 헤인리가 뒤따랐다. 가장 늦게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가 연회장에 입장하기 전,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카르한은 조금 떨리는 손으로 일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잠깐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은 팔짱을 꼈다. 맞닿은 몸에서 긴장이 느껴졌다. 일리아는 그제야 자신도 긴장했음을 깨달았다.
이런 대규모 연회는 오랜만이었다. 좋든 싫든 필연적으로 앙숙인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저를 두고 열심히 입방아를 찧어댈 사람들이 벌써 눈에 선했다.
마침 연회장 안쪽에서 들려오던 음악이 멎었다. 블로든 백작 부부와 헤인리가 먼저 입장했다.
“들어가요.”
일리아의 속삭임과 함께 두 사람은 연회장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눈부실 정도로 화려한 연회장이 펼쳐졌다. 드넓은 공간에 수많은 사람이 무리지어 있었다. 순간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적이 흘렀다. 모든 이들이 일리아와 카르한을 주목하고 있었다.
시선의 압박 속에서 일리아는 가볍게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얼굴들이 몇 보였다. 그리고 일리아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추었다. 눈이 마주치자, 스텔라가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모른 척하자는 건가.’
어차피 사이가 좋은 편도 아니었으니,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일리아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두려는데, 스텔라가 다시금 일리아를 힐끔거렸다. 마치 아닌 척하면서 의식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왜 저래?’
고개를 돌린 일리아는 연회장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먼저 입장한 블로든 백작 부부와 헤인리는 일리아의 곁에 섰다. 오랜만에 블로든 가문 모두가 모이자, 모두들 정신없이 살피느라 바빴다.
햇살처럼 반짝이는 환한 금발이 셋이나 있으니 절로 시선이 갔다. 거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른 것은 전부 최고급이었다. 환산하자면 성 한 채씩은 업고 입장한 셈이었다. 눈으로 보이는 재력에 귀족들은 입만 떡 벌렸다.
그들은 일리아의 옆에 선 카르한을 뒤늦게 보고 흠칫했다. 벌써부터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일리아는 제 곁에 딱 달라붙어 있는 가족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다들 각자 볼일 보시는 건 어때요?”
“우리는 신경 쓰지 말거라.”
“제가 신경 쓰여요.”
단호한 말에 가족들은 아쉬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걸음을 뗐다.
“무슨 일 있으면 꼭 부르거라.”
일리아는 대답 대신 손을 흔들어주었다. 팔짱 낀 블로든 백작 부부는 연배가 비슷한 귀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헤인리는 직장 동료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겨우 둘만 남게 되자, 일리아가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긴장한 얼굴이긴 했지만, 아직까진 괜찮아 보였다.
일리아는 뺨이 뚫어질 것 같은 시선을 받았다. 다들 제게 말을 걸고 싶어서 안달이 난 얼굴이었다. 하지만 제 옆에 있는 사람이 카르한이라는 것을 알고 차마 다가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옆에 계신 분, 에반테온 소공자 맞지요?”
“왜 두 분이서 같이 입장하신 걸까요?”
“블로든 영애께 말을 걸고 싶은데, 소공자가 좀 무서워서…….”
“그래도 이전보다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진 것 같지 않아요?”
“그건 그래요. 하지만 소문이…….”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일리아가 알기론 카르한의 평판은 최악이었다. 오랫동안 전쟁터를 구른 후, 수도로 귀환하고 나서는 얼굴도 거의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모임에 나갈 때마다 나쁜 소문만 더 쌓고 돌아왔다고 들었다.
다들 눈치만 보며 선뜻 나서지 못하는데, 어떤 영식 하나가 호기롭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블로든 영애. 이전에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데,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일리아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리하트 쪽 사람은 아니었고, 모임에서 몇 번 인사를 나눴던 기억이 가물가물 떠올랐다.
“물론이에요. 오랜만이죠?”
일리아가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덩달아 웃던 영식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가 조금 긴장한 얼굴로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눈높이가 다르니 압박감이 대단했다. 그래도 안색이 환해져서 이전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영식이 용기를 내어 카르한에게 인사를 건넸다.
“멀리서만 뵈었는데……,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카르한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섭게 치켜 올라간 눈매가 조금 가라앉았다. 카르한이 다물린 입매를 열고 대답했다.
“반갑습니다. 카르한 에반테온입니다.”
짧은 인사였다. 그러나 모두들 카르한이 평범하게 인사를 받아주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괜히 욕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영식의 얼굴도 밝아졌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한 번쯤 꼭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영식은 적당히 예의를 갖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와 마찬가지로 긴장했던 카르한의 표정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
칼바람이 멎고 잔잔한 바람이 부는 것처럼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말을 걸어왔다.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이전부터 계속…….”
“소공자, 저는…….”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에반테온 소공자였다.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목이 썰린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남자가 평범하게 인사를 받아준다는 사실에 다들 흥분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자 카르한이 당황했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고 점점 굳어져 가는데, 일리아가 팔짱 낀 손에 힘을 살짝 주었다. 카르한이 고개를 돌리자 일리아는 입 모양으로 말했다.
‘강아지.’
강아지와 들판을 뛰어노는 걸 상상해 보라는, 둘만의 암호였다. 단단하게 굳어있던 팔에 힘이 조금 풀어졌다. 카르한의 입꼬리에 희미하지만 확실한 미소가 떠올랐다. 미소를 본 사람들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들은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카르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들 지금껏 서늘하다 못해 살기등등한 분위기와 위압감에 억눌려, 본능적으로 얼굴 보는 걸 피해왔다. 그런데 매서운 기운이 걷히고 평범하게 웃고 있으니, 가슴을 흔들어 놓을 미남이었다.
넋 놓고 바라보던 귀족들이 잔뜩 흥분해서 질문을 쏟아냈다. 근처를 배회하던 이들도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누가 보아도 지금 연회의 주인공은 카르한이었다.
물론 일리아도 예외는 아닌지라, 한참 질문 공세를 받아야 했다. 일리아는 옆에서 대화의 흐름을 잡아주었다. 카르한이 부담스럽지 않을 선에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런데…… 두 분 교제하시는 겁니까?”
누군가가 슬그머니 질문을 던지자, 다들 궁금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일리아는 대답하는 대신 싱긋 웃으며 카르한의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그러자 카르한의 귓불이 조금 붉어졌다.
아아, 하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눈치 없이 리하트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대충 눈도장 찍는 건 성공했고…….’
일리아는 가볍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귀족들은 언제 카르한을 기피했냐는 듯 호의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소문 때문에 멀리했을 뿐, 카르한은 친목을 쌓기에 누구보다 훌륭한 상대였다. 공작가 후계자인 데다, 몸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으니…….
잠시 팔불출 같은 생각을 한 일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슬슬 카르한과 따로 움직일까 싶었다. 계속 같이 있으니, 그가 다른 영식들과 대화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조금 불안하긴 해도 혼자서도 대화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좋았다.
주변을 살피던 일리아는 또다시 스텔라와 눈이 마주쳤다. 계속 저를 보고 있었는지 스텔라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진짜 뭐지.’
모르는 척할 거라면 관심을 끄면 될 텐데. 혹시 자신이 소문을 퍼뜨릴까 봐 경계하는 건가. 왠지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든 일리아는 한숨을 삼켰다.
일리아가 팔짱 낀 팔에 힘을 풀었다. 카르한이 반사적으로 붙잡자, 일리아가 작게 속삭였다.
“카르한, 저는 잠시 다른 사람들 좀 만나보러 갈게요.”
카르한의 표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무척 서운한 얼굴로 그가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왠지 모를 양심의 가책을 느낀 일리아가 손끝으로 카르한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친구를 사귈 기회잖아요.”
그도 다른 이들과 친분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특히 젊은 영식들이나 귀족들은 그의 평판과 권력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카르한은 마지못해서 손에 힘을 풀었다. 가지런하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진 것이 보였다.
‘많이 불안한가.’
잠깐 마음이 흔들렸지만 다시 단단히 먹었다.
“나중에 봐요.”
일리아는 손을 흔들어준 후 자리를 벗어났다. 그곳에서 조금 멀어졌을 즈음, 일리아가 뒤돌아보았다. 카르한의 주변은 발 디딜 틈 없이 바글거렸다. 그래도 나중에 찾기는 쉬울 것 같았다. 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홀로 우뚝 솟아 있으니 말이다.
‘이제 어디로 가지.’
부모님이나 헤인리에게 갈 마음은 없었다. 가족들도 각자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었다. 일리아는 고민하다가 영애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금까지는 사람과의 관계가 피곤해서 일부러 피해왔다. 하지만 평생 사람들과 담을 쌓을 수는 없으니, 이제부터 조금씩 친분을 쌓아볼까 싶었다. 카르한에게 바뀌라고 요구했으면서 저 자신은 제자리걸음이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안쪽으로 걸어가던 일리아는 또다시 스텔라와 눈이 마주쳤다. 다른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저를 향하고 있었다. 감시당하는 기분을 지우지 못한 일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진 일리아가 대놓고 스텔라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스텔라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가 일리아가 계속 저를 본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홀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확실히 이전보다 혈색이 좋아 보였다.
“왜 혼자 있어요? 친구도 없어요?”
첫마디부터 시비였다. 스텔라의 말을 무시한 일리아가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아까부터 자꾸 쳐다보던데, 나한테 할 말 있어요?”
“……할 말은 무슨.”
스텔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거 가지고 오해하지 말아요.”
스텔라는 불쾌하다는 듯 쏘아붙였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그녀의 말투에 독기가 빠져 있었다. 매번 만났다 하면 날카롭게 힐난하기 바빴는데…….
그러고 보면 스텔라도 좀 바뀐 것 같았다. 일리아는 주위를 둘러본 후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채 속삭였다.
“그때 일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니까, 감시할 필요 없어요.”
“감시라니…….”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스텔라가 당황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소문낼까 봐 지켜보던 거였잖아요.”
“소문 안 낸다고 했잖아요. 감시 같은 거 안 해요!”
돌아온 대답에 오히려 일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럼 말고요.”
오해가 풀리고, 일리아와 스텔라는 한참 티격태격했다. 서로 만났다 하면 시비 걸기 바빴기에 본능 같은 말싸움이었다. 두 사람 다 성격이 너무 달라서 한마디 꺼냈다 하면 부딪쳤다. 하지만 악의가 담긴 말싸움은 아니었다.
대화가 길어지자 주위에서 사람들이 시선을 보내왔다. 싸우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특히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한 두 사람이었기에 오해 받을 만했다.
일리아가 느긋하게 스텔라의 말을 받아치고 있는데, 영애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스텔라의 추종자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블로든 영애,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스텔라와 일리아는 말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스텔라를 비호하듯 좀 더 앞으로 나섰다.
“델로타 영애에게 큰소리치다니, 너무 뻔뻔한 거 아닌가요?”
주변의 시선이 이쪽에 모였다. 그녀가 다른 이들에게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남의 남자 빼앗은 주제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대화를 몰래 엿듣던 이들도 부채질을 멈추었다. 여자의 발언에 일리아는 스텔라를 슥 바라보았다. 그녀가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낼 줄 몰랐는지 스텔라는 무척 당황한 얼굴이었다.
물 먹이려고 일부러 판을 짰나 싶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일리아가 스텔라를 훑자, 여자가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에반테온 소공자가 델로타 영애의 약혼자였던 걸 몰랐을 리 없을 텐데요.”
일리아는 그제야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이전에 스텔라가 주최한 모임에서 봤던 그 백작영애였다.
제게 대놓고 시비를 걸더니, 여기서도 이럴 줄이야. 아무래도 그때는 자신이 카르한과 교제 중이라는 걸 몰랐다가 이번에 확신한 모양이었다.
다른 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방금 들은 이야기로 입방아를 찧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여기까지는 예측한 일이었다. 카르한과 계약 연애를 제안했을 때만 해도 소문이 좀 더럽게 날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앞에서 대놓고 욕할 사람은 없을 줄 알았는데…….
“왜 말씀이 없어요? 피해자인 델로타 영애께 사과라도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스텔라에게 자세한 내막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일리아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백작영애가 움찔했다. 받아칠 준비를 끝낸 일리아가 입을 열려던 때였다.
“불쾌하네요.”
일리아와 백작영애가 동시에 스텔라를 쳐다보았다. 뜻밖에도 먼저 나선 것은 스텔라였다.
“남자를 뺏겼다니, 내가요?”
몸을 틀어 백작영애를 마주한 스텔라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싸늘한 시선에 백작영애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스텔라는 불쾌함을 팍팍 내비치며 쏘아붙였다.
“억측하지 말아요. 일리아 블로든은 내가 버린 걸 주웠을 뿐이니까.”
일리아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하지만 일부러 끼어들지 않았다.
“하, 하지만…… 그런 말씀은 없으셨…….”
당황한 백작영애가 말을 더듬었다. 스텔라는 턱을 치켜들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그런 말을 나눌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던가요?”
“…….”
“헛소문이나 퍼뜨리지 말아요.”
완벽하게 선 긋는 말이었다. 스텔라 편에 서서 일리아를 비난했던 백작영애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많이 창피했는지 그대로 몸을 틀어, 테라스 쪽으로 가버렸다.
“참나. 편 들어주는 척하면서 물 먹이기는.”
스텔라는 불쾌하다는 듯 부채를 흔들었다. 그녀가 남기고 간 잔향을 전부 떨쳐내려는 것 같았다.
스텔라는 자존심이 무척 센 편이었다. 방금 백작영애의 발언은 스텔라를 남자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여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스텔라 성격이라면 못됐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자기가 버리는 입장이어야 했다. 일리아는 스텔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봐요?”
스텔라가 까칠하게 말했다. 그래도 백작영애를 상대할 때보다는 많이 누그러진 말투였다. 스텔라는 활짝 펼친 부채를 착, 접으며 중얼거렸다.
“오해하지 말아요. 당신을 도우려고 한 건 아니니까.”
“알아요. 그냥 스토커가 그런 말 하는 게 웃겨서요.”
“아, 정말……!”
스텔라가 황급히 일리아를 쏘아보았다. 일리아는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렸다 내렸다. 목소리도 낮췄고, 주변을 둘러싸던 사람들도 가버려서 들을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불안했는지, 스텔라는 좀 더 안쪽으로 이끌었다. 벽에 딱 달라붙은 스텔라가 아예 편하게 말을 걸었다.
“너도 욕 안 먹고 좋잖아.”
카르한과 스텔라는 약혼하지 않았지만, 교제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스텔라가 꼭 사귀는 것처럼 행동했기에 약혼이 거의 확실시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스텔라 쪽에서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다면, 일리아나 카르한이 욕먹을 일은 없었다. 바람이라는 오명을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일리아는 리하트와 파혼 전이긴 했지만, 지난 연회 사건 덕분에 다들 일리아가 파혼을 요구해도 리하트가 놔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