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54)
‘카르한이 버림받았다는 상황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카르한이 먼저 스텔라를 찼다는 말이 도는 것보단 나았다. 겨우 평판이 회복되는 중인데, 찬물을 끼얹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사실 두 사람은 교제하지 않았답니다! 하고 변론해도 믿지 않을 테고……. 일리아가 침묵하자, 스텔라가 투덜댔다.
“나도 내 평판이 있단 말이야.”
사실 스텔라가 카르한에게 조금이라도 미련이 있을까 싶었는데, 일말의 감정도 없어 보였다. 정말 단순히 공작부인이 되고 싶어서 카르한을 택한 모양이었다.
옆에 서 있던 스텔라가 일리아를 힐끔거렸다. 이제 그만 다른 볼일을 보러 가도 될 텐데, 스텔라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 많은 친구들이나 보러 가지?”
일리아가 툭 말하자, 스텔라는 길게 늘어뜨린 남색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계속 상대하는 것도 피곤하니까 잠깐 쉬려고.”
스텔라의 시선이 일리아의 드레스에 꽂혔다.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는 드레스 자락 위로 꽃이 피어나는 듯했다. 시선을 느낀 일리아가 물었다.
“왜, 또 따라하게?”
“내가 언제 따라했다고……!”
스텔라가 발끈했다. 머릿속에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스쳐지나갔지만, 일리아는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아는 화가가 그려준 거야.”
“솜씨 좋네.”
“소개해줘?”
스텔라는 웬일이냐는 표정으로 일리아를 살폈다. 일리아는 자본주의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중에 바네사에게 말해둬야겠다. 스텔라라면 거금을 불러도 선뜻 수락할 테니까.
일리아와 스텔라는 생각보다 평범한 대화를 나누었다. 항상 먼저 시비 걸어와서 받아쳤는데, 스텔라의 태도가 바뀌니 일리아도 덩달아 유해진 것 같았다. 이전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둘이 그러고 있는데, 근처를 배회하던 어린 영애들이 와르르 몰려와서 말을 걸었다. 사교계에 막 입문했는지 다들 들뜬 얼굴이었다.
“블로든 영애, 드레스 정말 예뻐요!”
“어쩜 드레스에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하셨어요?”
일리아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사근사근 대답해주었다. 미래의 손님들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존재감 없이 늘 웃기만 하던 일리아가 달라지자, 다들 놀라워하면서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스텔라는 미심쩍은 얼굴을 했으나, 이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귀부인들도 슬금슬금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눈도장 찍으려는 속셈이 다분했다. 누가 뭐라 해도 일리아와 스텔라는 이 연회장에서 가장 돈 많은 영애였으니 말이다.
일리아는 문득 카르한이 잘 하고 있나 궁금해졌다. 그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연회장 입구로 누군가 입장하는 것이 보였다. 리하트였다.
***
일리아와 따로 행동하기로 한 후, 카르한은 혼자서 귀족들을 상대했다. 낯선 사람과의 대화는 여전히 버거웠지만, 일리아 얼굴을 떠올리며 차분하게 대화를 받아주었다.
그러다가 다방면으로 제법 수준 높은 이야기가 오갔는데, 전부 아는 내용이라 카르한은 한마디씩 거들었다.
“소공자께서는 여러 분야를 잘 알고 계시군요.”
무식한 칼잡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카르한을 달리 보았다. 전쟁터에서 오래 굴렀다더니, 그래도 공작의 후계자는 남다르다며 감탄했다. 후계자 수업을 열심히 받은 성과가 드디어 드러난 것이다.
카르한은 칭찬 받고 싶어서 옆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일리아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시무룩해졌다. 카르한의 눈매가 축 내려가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모두의 머릿속에 주인 잃은 강아지가 떠올랐다.
“잠깐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카르한의 말에 다들 아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한은 곧장 일리아를 찾으러 나섰다. 언제 만나자고 정해두지 않았으니, 이제 슬슬 일리아에게 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카르한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워낙 넓고 사람이 많아서 일리아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다 카르한은 샴페인이 늘어져 있는 테이블을 발견했다. 일리아가 즐겨 마시는 술병이 보였다.
일리아에게 갈 핑곗거리를 생각해낸 카르한이 유리잔을 하나 들었다. 다시 일리아를 찾으려는데, 멀찍이서 구경하던 영식들이 몰려들었다.
“에반테온 소공자.”
잘 차려입은 영식들이 카르한에게 말을 걸었다. 바쁘다고 거절할까 고민하던 카르한은 잠깐 정도는 시간을 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리아가 일부러 자리를 비켜준 만큼 이들과 친분을 쌓으면 좋을 듯했다. 그럼 나중에 일리아가 칭찬해줄지도 몰랐다.
“혹시 승마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제가 봐둔 숲이 있는데, 사냥하기 딱 좋은 곳이라…….”
카르한은 차분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정중하고 반듯한 태도에 영식들은 난리가 났다. 소문만 들었을 때는 이런 개차반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
다들 한 마디라도 더 붙여보려고 난리였는데, 유독 카르한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남자가 있었다. 카르한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깨를 움츠린 남자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그……. 소공자, 저를 기억하시는지요? 저번에 한 번 뵌 적이 있었습니다.”
카르한은 그가 누군지 몰랐지만 대강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남자가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 움츠러들었냐는 듯 그는 재빨리 대화에 끼었다.
“괜찮으시다면 전쟁터에서 있었던 일화를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누군가의 부탁에 카르한이 멈칫했다. 단번에 모두의 시선을 받게 된 카르한은 처음으로 제 이야기를 했다.
“제가 있었던 전장은…….”
카르한은 과장 없이 덤덤히 사실만 말해주었다. 짧은 이야기였지만, 카르한의 말이 끝났을 때 다들 흠모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수도에서 귀하게 자란 귀족 영식들은 전쟁 자체에 환상을 품는 경우가 많았다. 영웅을 동경하는 것처럼 말이다.
카르한은 자신의 이야기가 왠지 영웅담처럼 소모된 것 같아서 입이 씁쓸해졌다. 하지만 굳이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까 카르한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남자가 슬쩍 말을 걸었다.
“저번에 뵈었을 때 무작정 자리를 피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
이렇게 융통성 있고 신사적일 줄 몰랐다며, 그가 칭찬 아닌 칭찬을 내뱉었다. 그 말에 카르한은 그제야 남자를 어디서 봤는지 깨달았다. 이전에 일리아가 마차 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 상대 마차 주인이었다.
물론 카르한은 현장에 늦게 도착해서 자세한 이야기는 일리아에게 들었다. 그때 이 남자는 카르한이 오자마자 놀라서 황급히 도망갔었다. 카르한이 눈을 깜빡이자, 남자가 열심히 나불거렸다.
“그때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블로든 영애께서 무슨 말을 하셨을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피해자는 저였는데…….”
그가 억울하다며 속사정을 토로했다.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으니, 카르한이 제 억울함을 이해해주고 일리아에게 한마디 해줬으면 해서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카르한이 묵묵히 들어주자, 그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심기를 거스를까 싶어 돌려 말하긴 했지만, 은근히 일리아를 비난하는 어조였다. 카르한의 표정이 점점 가라앉는 것을 보지 못한 남자는 결국 선을 넘고 말았다.
“호위기사들은 뒷골목 왈패라도 데리고 온 줄 알았습니다. 블로든의 안목도 참…….”
퍽!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놀란 남자가 말을 멈추었다. 두터운 유리잔이 산산이 조각나 바닥에 떨어진 것이 보였다. 카르한이 들고 있던 유리잔이 부서진 것이었다.
카르한은 표정 없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베인 곳은 없으나, 잔에 담겨 있던 술이 소매를 적셨다. 일리아가 준 커프스단추에도 묻고 말았다.
카르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흉흉한 분위기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무표정한 얼굴로 깨진 술잔을 든 카르한은 마치 악귀처럼 보였다.
“……씻어야겠습니다.”
그 말이 경고하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그대로 굳어진 남자가 딸꾹질했다. 카르한은 그를 힐끗 본 후에 말없이 돌아섰다.
일리아를 모욕하자마자 태도가 돌변한 카르한의 모습에, 영식들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들은 카르한에 대한 수많은 소문이 거짓말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여전히 미친개인데, 일리아 블로든이 목줄을 잡은 거였구나……!
***
얼마 전, 리하트 테르시안은 한 남자를 소개 받았다. 제법 이름 있는 중개상인이었다. 마침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끙끙대던 참이었다. 왕국에서 장난감을 대량으로 사들인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사업권을 따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외국어도 문제인데, 무엇보다 그쪽에 연줄이 없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금방 벽에 가로막힌 리하트는 지금이라도 빚을 갚고 사업을 접을까 고민했다. 그러던 차에 한 줄기 햇살처럼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다.
남자는 외국어도 능숙했으며, 왕국의 귀족과 친분이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절묘한 시기에 소개를 받아 사기꾼이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경력도 제법 되었고, 제국 유명 인사들과 두루두루 친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과의 친분이 신원을 증명하는 거라고, 리하트는 생각했다. 그래도 리하트는 완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고, 사업권을 먼저 따내면 중개료를 내겠다고 제안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남자는 진짜로 교섭권을 따왔다. 왕실 측에서 보내온 서류는 아무리 봐도 진짜 같았다. 심지어 1만 개의 장난감을 선주문하겠다고 제안해왔다.
남자는 왕실에서 대금의 10퍼센트를 먼저 지불했다며 수표를 건네주었다. 돈까지 받고 나니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어졌다. 리하트는 그대로 사업을 진행시켰고, 은행에서 추가로 돈을 빌려 1만 개의 상품을 생산했다.
그러는 동안 이것저것 신경 쓸 것이 많아졌는데, 남자는 자신이 아는 화물선 업체가 있다며 추천해주었다. 평균보다 가격이 저렴했기에, 리하트는 운송비로 왕실에서 받은 선금을 전부 주었다.
그리고 포장 부자재나 유통 등등 남자가 추천하는 업체를 이용했다. 남자는 모든 분야에 거미줄처럼 촘촘하고 넓게 손을 뻗고 있었다. 한 번 얽히기 시작하니, 점점 깊은 곳으로 발을 내딛는 느낌이었다.
-다른 왕국 측에도 추천서를 넣어 보겠습니다.
불어나는 빚 때문에 리하트가 걱정하자, 남자는 바로 다음 거래처까지 터주겠노라 말했다. 그의 말에 불안함이 가시고 마음이 든든해졌다.
어차피 잔금을 받으면 빚 정도는 단번에 상쇄할 수 있었다. 지금은 사업을 확장할 때였고, 다음 거래처를 통해 기반을 완전히 다질 수 있을 터였다.
리하트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자신감을 되찾았다. 사업이 성공하면 뒤돌아섰던 이들이 다시 저를 우러러볼 것이 분명했다.
한창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던 중, 황궁 연회 초대장이 날아왔다. 리하트는 고민하다가 참석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연회장에서 망신당한 후로 시간이 조금 흐르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재기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이제 일리아가 없어도 일어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리하트는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은행에서 돈을 빌려 값비싼 옷을 한 벌 지어 입었다. 새 옷을 입으니 마음이 든든했다.
황궁에 도착했을 때, 연회는 이미 한창이었다. 안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오자, 괜히 위축되었다. 한참 저를 욕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했다. 이내 정신 차린 리하트는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들어섰다.
수많은 시선들이 리하트에게 꽂혀들었다. 부채를 펼친 귀부인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영식들은 비웃음을 흘렸다.
“뻔뻔하네요.”
“어떻게 여기에 얼굴을 내밀 생각을 한 걸까요.”
“그러니까요. 블로든 영애가 참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
리하트는 그들의 말을 모두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테르시안 후작은 이미 끈 떨어진 신세였고, 리하트가 블로든과 척을 졌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괜히 블로든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다면 리하트와 거리 둘 필요가 있었다.
분위기를 살피던 리하트의 눈에 일리아가 들어왔다. 일리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주인공처럼 빛나고 있었다. 리하트는 입술을 비틀었다. 원래라면 저곳이 제 자리였어야 했다.
제게 잘 보이려던 사람들은 이제 일리아에게 아부하기 바빠 보였다. 마치 일리아에게 자신의 몫을 전부 빼앗긴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리하트가 성큼성큼 일리아를 향해 걸어갔다. 일리아는 잠시 말을 멈춘 채 리하트를 쳐다보았다. 일리아의 주변을 둘러싼 이들을 살피던 리하트는 스텔라와 눈이 마주쳤다. 눈에 띄게 놀란 얼굴이었다.
스텔라에게서 시선을 거둔 리하트가 일리아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멈추었다. 리하트를 마주한 일리아가 무척 평온한 얼굴로 물었다.
“돈 필요하다고 계속 서신 보내더니, 답장 안 해줘서 직접 찾아온 건가요?”
“아니, 돈 같은 거 필요 없어. 내 손으로 벌 테니까.”
무척 자신만만한 말투에 일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날 버린 걸 곧 후회하게 될 거야.”
“바람피운 주제에 파혼도 안 해주면서 버리기는 무슨.”
여전히 미소를 띤 일리아가 못을 박았다. 일리아는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싸늘한 눈빛으로 리하트를 바라보았다.
“이제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편하게 말 걸지 말아줄래요?”
“아무런 사이가 아니긴. 아직 파혼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았잖아.”
일리아의 눈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리하트는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어차피 이제 자신도 부자가 될 테니, 일리아의 비위를 맞춰 줄 필요가 없었다. 리하트는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자신의 화려한 재기를 알렸다.
“사업이 무척 잘 되고 있어. 겨울쯤이면 테르시안이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지긋지긋하게 나올걸?”
리하트의 말에 듣고 있던 이들이 술렁였다. 테르시안 가문은 사업이 아닌, 공직으로 이름을 알린 가문이었다. 갑자기 사업을 하고 있다 하니 의아하게 여길 만했다.
“겨울에 별장을 사서 파티 열 생각인데, 관심 있으면 오든지.”
몇몇의 눈빛이 싹 바뀌었다. 그들은 리하트의 씀씀이가 얼마나 큰지 옆에서 지켜본 자들이었다. 그저 아부만 조금 해줘도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심드렁하게 듣고 있던 일리아는 팔짱을 낀 채 리하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슨 사업으로 돈 벌 건데요?”
“네 가문이 손 놓은 장난감 사업.”
리하트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너도 들어봤을걸? 소왕국에서 장난감을 다량으로 매입한다는 소식. 내가 그 사업권을 따냈다고.”
“…….”
“무려 1만 개나 선주문을 받아뒀지. 그리고 다음 거래처까지 텄으니 내년에는 더 확장할 거야.”
어떤 상품이든 1만 개라면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주문도 주문이지만, 1만 개를 생산할 기반이 갖춰져 있다는 것만 해도 재력이 대단하다는 증거였다.
리하트는 일리아를 힐끗 보았다. 뭔가 놀라거나 다른 반응이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일리아는 평온해 보였다.
“그래요? 어떤 소왕국인데요?”
“아델다.”
리하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부유하기로 유명한 소왕국이니 일리아도 알 것이었다. 그러나 일리아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제가 들은 이야기랑 다른 것 같네요.”
“뭐?”
리하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영식 하나가 손을 들었다.
“아델다라면 저희 가문과 계약이 체결되었는데요?”
리하트가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 하냐는 표정을 짓자, 영식이 말했다.
“외교관인 사촌 덕분에 얼마 전에 아델다 왕국 측과 논의해 장난감 사업권을 따냈거든요.”
리하트가 추진 중인 사업 내용과 같았다. 리하트의 얼굴이 버쩍 굳어졌다. 그것을 본 영식이 비웃음을 띤 채 말했다.
“그리고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선주문 1만 개는 말도 안 되지요.”
“……웃기지 마. 계약서까지 받아뒀다고. 내가 고용한 중개상인이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 줄 알아?!”
리하트는 험악한 표정을 지은 채 소리쳤다. 중개상인의 신원은 확실했고, 왕국에서 직접 보낸 계약서와 선금도 받았다. 거기다 중개상인은 마치 자기 일처럼 제작부터 유통, 운송까지 모든 분야에 도움을 주었다. 그런 사람이 사기를 칠 리가…….
“…….”
리하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러고 보니 어쩌다 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게 되었던 걸까.
“요즘 사기꾼들이 기승이라 하던데…… 혹시……?”
영식이 슬그머니 사기꾼을 언급하자,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리하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 떨었다. 며칠 전, 중개상인은 다음 거래를 매듭지으러 가기 위해 승선했다. 잘 다녀오라고 배웅까지 해주었는데 설마…….
그때 리하트는 일리아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서린 웃음을 보았다. 뭔가를 깨달은 리하트가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네 짓이지!!”
눈이 뒤집힌 리하트가 주위를 에워싼 사람들을 밀쳐냈다. 그는 잔뜩 성난 얼굴로 일리아의 앞까지 다가왔다. 누가 봐도 뭔가 저지를 것 같은 모습이었다.
“멈춰요! 뭐 하는 짓이에요!”
일리아의 옆에 서 있던 스텔라가 놀라서 소리쳤다. 그러나 리하트의 눈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일어설 마지막 기회였다.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털어 넣었고, 심지어 빚까지 졌다. 그런데 또다시 일리아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이다.
리하트가 길길이 날뛰자,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주춤거렸다. 빨리 경비병을 불러오라는 목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눈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리하트가 일리아에게 달려들었다.
“절대 나만 안 죽어. 죽더라도 같이 죽어야지!”
리하트가 일리아의 멱살을 잡아채려던 순간이었다. 치켜 올라간 리하트의 팔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리하트의 손목을 틀어쥔 것이었다.
“빌어먹을! 누구야!”
흥분한 리하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서늘하게 가라앉은 푸른색 눈동자가 가장 먼저 보였다.
“리하트 테르시안.”
카르한이 리하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바닥이 울릴 듯 몹시 낮은 목소리에 리하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리하트는 뒤늦게 카르한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팔을 뒤틀었다. 그러나 팔이 바위에 짓눌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카르한이 리하트의 손목을 좀 더 세게 붙들었다.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악력에 리하트가 신음을 삼켰다. 고통이 파고들자, 그제야 잃어버린 이성이 돌아왔다.
리하트는 정신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리하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윽!”
손목이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에 리하트는 다시 카르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리하트는 천적을 만난 것처럼 몸을 떨었다.
지그시 리하트를 응시하던 카르한이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카르한의 입에서 소름 끼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랍니다.”
목소리가 마치 칼날처럼 살을 에었다.
“만약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카르한이 리하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경고가 확실하게 전달되었는지, 리하트는 손목을 움찔거렸다. 카르한이 그의 손목을 놓으며 밀쳐냈다.
“꺼지십시오.”
리하트가 주춤거렸다. 그는 더 이상 덤벼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황급히 몸을 틀었다. 입구 쪽으로 뛰어가는 꼴이 포식자를 피해 도망치는 초식동물 같았다.
카르한이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손끝이 희미하게 떨려왔다. 카르한은 날선 기운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험악한 분위기를 느끼고 본능적으로 카르한에게서 조금씩 멀어졌다.
사고 쳤다는 생각에 카르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카르한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 일리아가 서 있었다.
“일리아.”
부드럽게 흩어지는 이름이 카르한의 기운을 가라앉혔다. 순식간에 차분해진 카르한이 일리아를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