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55)
“괜찮습니까?”
구석구석 시선이 닿자, 일리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대답해주고 싶은데 심장 뛰는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놀랐다. 카르한이 낯설게 느껴졌다.
일리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카르한은 서서히 몸을 숙였다. 시야를 나란히 한 카르한이 속삭였다.
“많이 놀랐습니까? 혹시 다친 곳이라도…….”
그가 안절부절못하자, 일리아는 겨우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알고 있던 카르한이었다. 일리아는 생각을 멈추고,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내저었다.
“덕분에 아무 일도 없었어요. 고마워요.”
그제야 카르한이 심각한 표정을 풀고 눈을 둥글게 떴다. 분위기가 대번에 바뀌자, 멀어졌던 사람들도 눈치 보며 다시 다가왔다. 일리아는 리하트가 빠져나간 입구를 잠깐 바라보았다.
‘끝났네…….’
리하트가 당한 사기꾼은 일리아가 엄선해서 보낸 사람이었다. 제대로 해먹었는지 떠나기 전에 일리아에게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러 왔었다. 지금쯤이면 그 사기꾼은 제국을 떠난 후일 것이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으니, 이제 와서 그를 찾으려고 해봤자 아무 소용 없었다. 남은 것은 테르시안 가문의 몰락이었다. 아무리 후작이 녹봉을 벌어온다 해도, 이자가 더 빨리 쌓일 것이다.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었다.
“…….”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스텔라는 유독 조용했다. 마치 충격 받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스텔라는 무턱대고 찾아와서 소리 지르는 리하트를 보며,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고 있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카르한을 쫓아다니던 제 모습을 말이다. 그때 스텔라와 카르한의 눈이 마주쳤다.
“!”
스텔라는 그대로 굳어졌다. 그와 얼굴을 마주한 것은 무척 간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스텔라가 언질 없이 에반테온 공작저에 쳐들어갔을 때였다. 그 이후 일방적으로 약혼 취소 통보를 받았다.
당황한 스텔라와 달리, 카르한은 무척 덤덤한 얼굴이었다.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눈동자가 스텔라를 담았다. 스텔라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스텔라는 카르한이 무서웠다. 남들이 떠들어대는 소문을 믿었고, 세상에 다시없을 나쁜 남자라고 생각했다.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을뿐더러, 저만 보면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스텔라는 카르한의 변화가 누구보다 뚜렷하게 느껴졌다. 분위기나 표정, 인상, 말투까지……. 전부 일리아를 만난 후로 바뀐 것이었다. 스텔라는 아까 일리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냥 스토커가 그런 말 하는 게 웃겨서요.
일리아가 저를 스토커 취급할 때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해왔다. 눈이 마주친 순간은 짧았다. 카르한은 스텔라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의 눈길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일리아를 향했다. 그때 일리아가 뭔가를 발견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카르한, 소매가…….”
카르한이 뒤늦게 일리아를 따라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미안해요. 잠시 자리 좀 비울게요.”
일리아는 주위에 몰려 있던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카르한과 함께 연회장 구석으로 향했다.
“술 냄새 나는데, 어쩌다가 쏟은 거예요?”
일리아는 카르한이 술을 즐기지 않는 걸 알고 있었다.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던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술이 있어서 가져오다가, 들고 있던 잔이 깨져서…….”
“잔이 깨져요?”
일리아가 깜짝 놀라서 묻자, 카르한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유리잔이 조금 약한 것 같았습니다.”
“다친 곳은요?”
카르한은 고개를 흔들려다가 멈칫했다. 그가 슬그머니 손바닥을 내밀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 좀 봐주시겠습니까?”
일리아는 순순히 카르한의 손바닥을 잡고 살폈다. 희미하게 스친 상처가 있긴 한데, 피는 비치지 않았다. 혹시 유리가 박혔을까 싶어, 일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꼼꼼히 확인했다. 일리아가 꼼질거리며 손바닥을 만지자 카르한의 표정이 점점 미묘해졌다.
“제가 보기엔 괜찮은 것 같은데, 의원을 불러 달라 할까요?”
“아닙니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으니.”
일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일리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그래도 명색이 황궁 연회인데 그렇게 약한 유리잔을 내놓다니…….”
일리아가 대신 화를 내주자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사람들이랑 대화는 좀 했어요?”
“생각보다 많이 했습니다.”
“안 그래도 다들 당신 이야기 하느라 바쁘더라고요. 이참에 친분을 많이 쌓아두면 좋죠.”
카르한은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가슴이 뜨끔해졌다. 영식들이랑 대화하다가 막판에 유리잔을 깨고 그대로 나와 버렸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일리아를 모욕하는데, 어찌 듣고만 있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일리아를 욕하던 남자의 멱살을 잡고 싶을 정도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카르한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요즘 폭력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듯했다.
***
연회장 입장과 동시에 블로든 백작 부부는 주변 이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한 쌍의 잉꼬부부라 불리는 비올레와 클리프는 각자의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이들이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비올레 블로든을 모를 수가 없었고, 예술에 관심 있는 자들은 클리프의 이름을 외워두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워낙 바쁜 탓에 웬만한 연회나 모임에는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다들 이번 연회를 기회라 생각하며, 줄을 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블로든 백작님, 저번 전시회 정말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백작부인. 저는…….”
단단히 팔짱 낀 비올레와 클리프는 쏟아지는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러면서도 괜히 먼 곳을 힐긋거렸다. 일리아가 있는 곳이었다.
성년식도 치른 다 큰 딸이었으나,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이번 연회도 꼭 참석할 필요는 없었는데, 일리아가 간다 하니 일부러 따라 나온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일리아는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받아왔다. 배신은 일상이었고, 주변 사람 때문에 납치당한 적도 있었다. 때문에 타인을 경계하며 불신하는 편이었는데, 리하트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괜찮아진 줄 알았다. 그런데 리하트 그놈이 무려 바람을 피운 것이다.
그들은 일리아가 힘들어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한 달 동안 방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았을 때 어찌나 불안하던지. 물론 지금은 카르한을 만나고 많이 좋아졌지만, 부모인 비올레와 클리프는 여전히 일리아가 걱정되었다.
비올레는 일리아의 옆에 서 있는 카르한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거둔 비올레는 귀족들과 적당한 사교를 이어나갔다.
“부인, 축하드려요. 이번에 온천 개발 사업을 하신다고 들었어요.”
“그건 딸아이 거라서요.”
비올레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다들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딸에게 온천 사업을 전부 넘겨줄 정도면 도대체 블로든이 가진 부는 어느 정도란 말인가. 다들 감탄하며 블로든 백작 부부에게 잘 보이려 애썼다.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오는데, 어느 중년 귀족이 슬그머니 물었다.
“그런데 따님께서 에반테온 소공자와 교제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걱정되진 않으십니까?”
비올레와 클리프가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주목받게 된 귀족이 큼큼, 헛기침을 내뱉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부모 입장에서는 조금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자식이 있는 사람으로서…….”
걱정하는 척하면서 블로든 부부의 의중을 궁금해하는 기색이 다분했다. 혹시 에반테온 가문을 통해 정계 쪽에 발을 뻗치려는 속셈인가 떠보는 것일지도 몰랐다. 미소 짓고 있던 비올레가 정색하며 대답했다.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네요. 소문과 달리 에반테온 소공자는 참 괜찮은 사람이에요.”
“……예?”
“성실하고 겸손한 데다가 성품마저 훌륭하지요.”
거기다 예술도 좋아한다며 클리프가 자연스럽게 사심을 넣어 거들었다. 블로든 부부의 말에 귀족들은 잠시 옆에 있는 사람과 얼굴을 마주 보았다. 혹시 서로 다른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나……?
비올레가 더 할 말 있냐는 시선을 보냈다. 먼저 화제를 꺼낸 중년 귀족이 머뭇거렸다.
“아니 그래도…….”
“아참, 저희는 재력이나 신분은 안 봅니다. 성격만 좋으면 됐죠.”
그쪽이 재력을 따지면 황족 외에 결혼할 상대가 없지 않나……? 귀족들의 머릿속에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비올레는 멀찍이 서 있는 일리아와 카르한을 보며 말했다.
“둘이 잘 어울리지 않나요? 제가 보기엔 그런데.”
“…….”
결국 중년 귀족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더 이상 무슨 말도 꺼낼 수 없게 원천 봉쇄 당한 탓이었다.
비올레와 클리프는 처음에 카르한을 반대했던 것도 잊어버린 채 그를 칭찬했다. 떨떠름한 얼굴로 듣던 귀족들은 나중에는 진짜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카르한에 대한 이야기는 끝나고 다른 화제로 옮겨갔다.
“금맥 건으로 논의를 드리고 싶은데…….”
“아, 딸아이가 지분 반을 가지고 있어서 상의하고 말씀드릴게요.”
“저는 바네사라는 화가에게 의뢰를 하고 싶은데…….”
“미안합니다. 그 화가는 일리아랑 개인적으로 계약해서 저희는 권한이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일리아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듣고 있던 귀족들은 생각했다. 이쯤 되면 블로든 가문의 실세는 일리아 블로든이 아니냐고.
***
카르한은 술에 젖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연회장에 홀로 남은 일리아는 제게 말을 걸어오는 이들과 적당히 대화를 나누었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웅장한 음악이 들려왔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 말에 웅성거리던 이들이 곧바로 양옆으로 갈라졌다.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통해 남녀가 팔짱을 낀 채 내려오고 있었다. 황제는 계절도 잊은 듯 연회복에 기다란 남색 벨벳 망토를 두른 채였고, 황후는 화려한 금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이 층계참에 멈춰 서자, 귀족들이 예를 갖추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잠시 넋 놓고 바라보던 일리아는 뒤늦게 정신 차렸다. 고개 숙이려는 그때, 황후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인사하듯 황후가 눈웃음을 지었다.
마주 웃어준 일리아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적당히 예를 갖춘 후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그러자 황제 부부의 뒤편으로 걸어오는 젊은 남녀가 보였다. 황태자와 황태자비였다.
일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일리아는 이전에 황태자비와 대화해본 적이 있었다. 황태자비가 리하트의 사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리하트와 틀어진 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이윽고 황제가 입을 열었다.
“바쁜 와중에 모두들 이렇게 자리해 주어서 고맙소.”
주름이 자글자글한 황제는 한 손에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그는 제게 예를 갖추는 귀족들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그 후로 제법 긴 연설이 이어졌다. 지루하기 짝이 없었으나, 감히 황제의 말을 끊어낼 사람은 없었다.
찬찬히 귀족들을 살피던 황제의 눈길이 블로든 백작 부부에게서 멎었다. 이마에 주름이 좀 더 깊이 패었다.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황제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전부터 황제는 블로든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알아서 숙이고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금은 꼬박꼬박 내고 있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황실과 거래할 때도 칼같이 정산해버리니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블로든을 제재하기는 어려웠다. 블로든이 망하면 제국이 휘청거릴 것이었다. 장황한 연설을 끝낸 황제가 뒤돌아섰다. 그가 그대로 퇴장해버리고, 남은 황족들은 계단 아래로 내려와 측근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귀족들이 흩어지고, 일리아도 걸음을 떼려 했다. 그때 제 쪽으로 다가오는 헤인리를 발견했다. 일리아가 놀란 눈으로 그를 불렀다.
“헤인리 오라버니.”
목소리를 들었는지 헤인리가 바로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가벼운 장식이 달린 연회복을 입은 헤인리가 냉큼 일리아 앞으로 왔다.
“계속 널 찾아다녔단다.”
“너무 넓어서 엇갈렸나 봐요.”
“그래, 언제 돌아갈 예정이니.”
헤인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은근히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조금 있다가 가려고요.”
아직 황후께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일리아와 헤인리는 잠시 옆으로 빠져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공자는?”
“잠시 자리를 비웠어요.”
“그래. 아까 리하트를 보고 깜짝 놀라서 널 찾아다녔다.”
“카르한이 도와줘서 별일 없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헤인리는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둘이 서 있으니, 주변 영애들이 힐긋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전부 헤인리에게 보내는 눈빛이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헤인리는 훌륭한 남편감이었다. 비록 혼인 시기를 놓치긴 했지만, 제국 제일 부자인 블로든 가문 후계자인 데다가 나이에 비해 직급도 높았다.
거기다 외모도 훌륭한 편이었다. 비올레를 닮아 선이 고왔고, 환한 금발과 연녹색 눈동자는 주변의 이목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영애들이 오라버니한테 관심 많아 보이는걸요?”
“전부 돈만 보고 그러는 거지.”
냉소적일 정도로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일리아는 잠시 헤인리를 쳐다보았다. 언제 결혼할 건지, 연애에 관심은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드디어 오라버니랑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오는구나! 하고 일리아는 두근거렸다. 그러나 헤인리는 그 시선을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걱정 마라. 당분간 결혼할 생각은 없으니까.”
일리아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가만히 일리아를 내려다보던 헤인리가 중얼거렸다.
“솔직히 네가 연회에 참석할 줄은 몰랐어.”
“어째서요?”
“넌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맞는 말이었다. 일리아는 꼭 참석해야 할 의무가 없으면 모임에도 거의 나가지 않았다. 리하트와 연애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사교계에 발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반복되는 대화에 피로감을 느꼈고, 사람과의 관계에 지쳐버렸다.
사실 이번 연회에 참석한 까닭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르한의 평판을 끌어올릴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고 일리아는 이전부터 계속 바뀌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왕 사업을 물려받기로 했으니, 다른 사람과 친분을 차근차근 쌓아 볼 생각이었다. 타인을 분석하고 의심하는 것도 줄이고…… 이 기회에 남과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는 걸 극복하고 싶었다. 일리아는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부러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싫다고 영영 피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
헤인리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으나,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소공자가 있어서 다행이구나.”
일리아는 눈을 깜빡이며 헤인리를 살폈다. 확실히 헤인리의 카르한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왠지 카르한을 반대하던 과거의 헤인리가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카르한을 알고 지낸 지 고작 몇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사이 카르한은 제게도, 가족들에게도 깊숙이 파고든 것 같았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헤인리는 잠시 한곳을 가만히 보았다. 중년 남성에게 붙잡혀서 쩔쩔매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
“옆 부서 사람이랑 내 부하.”
이래서 공직자는 불편하다며 헤인리가 혀를 찼다. 다들 황궁에서 일하니, 황궁 연회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저 젊은 남자는 연회까지 와서 옆 부서 사람에게 설교를 듣고 있었다. 헤인리가 그쪽을 신경 쓰자, 일리아가 등을 밀었다.
“가보세요.”
“……미안하다. 무슨 일 있으면 꼭 부르고.”
헤인리가 자리를 뜨고, 일리아는 카르한을 기다렸다. 그때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옆으로 갈라지더니, 남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일리아를 향해 걸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일리아가 곧바로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이슈타르 제국에 광휘가 영원하기를. 일리아 블로든이 황태자비를 뵙습니다.”
일리아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 뒤쪽에 서 있는 리하트의 누나, 시오나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시오나가 샐쭉 웃으며 부채를 흔들었다. 황태자비와 사촌지간이니, 그녀에게 자신의 험담을 늘어놓은 것 같았다.
‘아직도 연회장에 남아 있었네.’
아까 리하트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퇴장한 걸 모르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한참 늦어서야 입장한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황태자비는 차가운 인상의 미인이었으나 묘하게 피로에 젖어 보였다. 싸늘한 눈빛으로 일리아를 바라보던 황태자비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영광입니다.”
황태자비는 잠시 일리아를 살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던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놀라워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마지막으로 황태자비를 만났을 때와 지금 제 모습이 너무 다르긴 했다. 화장이나 옷차림뿐만 아니라, 행동마저도 말이다. 관찰을 마친 황태자비가 입을 열었다.
“테르시안 가문이 저의 과거 본적이라는 건 알고 있지요?”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비의 아버지는 선대 테르시안 후작이었다. 그러나 후작 부부는 어린 딸만 두고 마차 사고로 죽고 말았다. 지금은 선대 후작의 동생인 현 테르시안 후작이 작위를 계승 받은 상태였다.
현 테르시안 후작은 조카를 황태자비로 추대하려 힘썼다. 물론 황태자비가 선대 후작 생전에 황태자의 약혼녀로 내정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턱을 치켜든 황태자비가 다시 질문했다.
“그대가 테르시안 가문을 모욕했다던데, 사실인가요?”
“아닙니다.”
일리아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단호히 대답했다. 황태자비가 시오나를 힐끗 본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듣기로는 언쟁이 있었다던데요.”
뜻밖의 말에 일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언쟁이라니? 혹시…….
“설마 일전에 가게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황태자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전에 일리아는 길거리에서 시오나와 마주쳐, 육아용품 가게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지갑 취급 했었지.’
실컷 물건을 고른 후 저보고 계산하라던 뻔뻔함을 잊을 수 없었다. 분명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떠들어 댔을 것이 훤히 보였다.
“언쟁이라고 할 만한 일도 없었는걸요.”
일리아는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해주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서 가게에 끌려갔으며, 계산을 요구 받은 일. 그리고 자신이 계산해주지 않자, 시오나가 일방적으로 난동을 피운 것까지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황태자비는 잠시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싸늘하던 눈동자에 당혹감이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