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57)
15장
***
리하트는 정신없이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카르한이 붙잡았던 손목이 떨어질 것처럼 시큰거렸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마차를 타고 테르시안 후작저택으로 돌아온 리하트는 서류 더미를 헤집었다. 전부 중개업자가 작성해둔 서류로,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장 중개업자에게 연락하려던 리하트는 그가 새로운 거래처를 확보한다며 외국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젠장…….”
숨이 턱턱 막혀 왔다. 그래도 아직 희망이 남아 있었다. 중개업자가 어디로 가는지 주소를 말해놓고 갔으니, 그쪽에 사람을 보내볼 생각이었다. 왕실 측에 공문을 보내서 거래가 성사된 것이 맞는지 사실을 확인하고……. 그리고……, 그리고…….
닳고 닳은 실타래처럼 생각이 이어지지 않고 자꾸 끊겼다. 불안이 그를 좀먹었다.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훑던 리하트는 숨을 삼켰다. 은행에서 빌린 돈이 얼마나 되더라? 다른 업자에게 치러야 할 대금은? 생활비로 쓰기 위해서 지인들에게 빌린 돈은……?
계산조차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바위처럼 리하트를 짓눌러왔다. 갚아야 할 돈을 생각하면 마치 압사당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팔 수 있는 건 이미 전부 다 팔았고, 저택을 넘겨도 빚을 다 갚지 못할 것이었다. 심지어 생산했던 1만 개의 상품은 중개업자가 직접 유통시켜주겠다며 가져간 상태였다. 리하트는 핏기가 싹 가신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왜…… 왜 의심할 생각을 못 한 거지…….”
리하트는 처음 중개업자를 만났을 때를 되짚어 보았다. 중개업자는 신원이 깨끗했다. 귀족은 아니었으나, 상인으로서 평판이 좋았다. 유명 인사들과 두루두루 친한 편이었고, 이전에 맡은 거래도 전부 성공적이었다. 중개업자로서는 완벽할 정도였다. 리하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날이 밝으면 지인을 찾아가면 되겠지.”
그들은 알 것이다. 중개업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에 있는지 말이다. 분명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정보를 흘렸을 터였다.
리하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마지막으로 봤던 일리아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저번 연회에서도 그랬다. 치정사건이 일어나기 전,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난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일리아가 짜놓은 판에 놀아났다는 생각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어디까지 계획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애꿎은 종이만 구기고 있는데, 복도에 발걸음 소리가 쿵쿵 울려 퍼졌다. 이윽고 침실 문이 발칵 열리고 시오나가 뛰어 들어왔다.
“리하트 테르시안!!”
소리를 지르며 달려온 시오나가 리하트의 멱살을 붙잡았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가 윽박질렀다.
“사기 당했다니!!!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이거 놔.”
“내 돈! 내 돈은 어쩔 거냐고!!”
멱살로는 부족했는지, 시오나가 리하트의 머리를 잡고 뜯었다. 손아귀의 힘이 대단해서 비명이 절로 나왔다.
“미쳤어?”
리하트는 거칠게 시오나를 밀쳤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시오나가 소리 질렀다.
“너만 믿고 투자했다고! 이제 어쩔 거야……. 다 너 때문이야!!!”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시오나가 악을 쓰며 리하트에게 달려들었다. 소란을 듣고 고용인들이 달려와 시오나를 떼어놓으려 했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그게 왜 내 탓이야!! 내가 투자하랬어? 결혼했으면 그쪽에나 신경 쓸 것이지!”
리하트가 마주 소리치자, 시오나가 욕설을 내뱉었다. 저주에 가까운 상스러운 욕설에, 리하트는 참지 못하고 시오나와 머리채를 잡으며 싸웠다. 소란이 점점 커지자 후작 부부가 나타났다.
“뭐 하는 짓이냐!!”
지팡이를 든 테르시안 후작이 노성을 내질렀다. 후작부인이 싸움을 말리려 하자, 시오나가 울면서 말했다.
“리하트 저 자식이 사기 당했다고요!”
“……뭐?”
후작부인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섬뜩할 정도로 정색한 후작부인이 리하트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니?”
“중개업자가 사기꾼이었대요!”
털썩, 후작부인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넋이 나간 것처럼 그녀가 혼잣말하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꿈이겠지. 말도 안 돼…….”
“어머니!”
리하트가 시오나를 밀쳐내고 후작부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후작부인이 고개를 홱 돌려 리하트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이지?”
순간 리하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숨 쉬듯이 나오던 변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리하트가 대답하지 않자 후작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놀란 세 사람이 후작부인을 불렀지만, 그녀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옆에 있던 고용인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혼절한 그녀를 일으켰다. 고용인이 후작부인을 부축해 나가버리자, 소름끼치는 정적이 흘렀다.
훌쩍이던 시오나조차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석상처럼 우뚝 서 있던 후작의 얼굴이 점점 흙빛이 되었다. 그는 지팡이를 부러뜨릴 것처럼 쥐었다.
“이, 이…….”
지팡이를 번쩍 치켜 올린 테르시안 후작이 리하트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식!!”
“악! 아버지!”
정정한 사내가 쇠 지팡이로 때리니 눈물 나도록 아팠다. 그러나 후작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 쌓인 울분을 터뜨리듯 리하트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전부 네 잘못이다!! 황궁 내에서 끈 떨어진 신세가 된 것도, 유서 깊은 저택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기 직전이 된 것도……!”
후작이 구부러진 지팡이를 내던지며 소리 질렀다.
“당장 나가!!!”
웅크리고 있던 리하트는 강제로 끌려 나갔다. 사기꾼을 잡아올 때까지 절대 들어올 생각 말라며, 후작이 길길이 날뛰었다.
야밤에 그대로 쫓겨난 리하트는 그제야 눈물이 나왔다. 대문을 붙잡고 잘못했다고 빌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리하트는 욱신거리는 몸을 질질 끌고 저택에서 벗어났다.
머리는 쥐어뜯기고, 오늘 연회를 위해 새로 맞춘 옷은 누더기나 다름없어졌다. 리하트는 일단 중개업자가 친분을 자랑했던 이들을 찾아가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중개업자 지인들의 집을 돌기 시작했다. 야밤에 불쑥 찾아온 리하트를 보며 대부분 눈을 찌푸렸지만,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여서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아, 그 사람? 술친구로 지냈지만 사적으로는 잘 몰라서…….”
“이야기 들어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그런데 자기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걸.”
“뭐 하던 사람인지 대충 듣긴 했는데, 확실하진 않아서요.”
다들 하나같이, 잘 모르겠다고만 답했다. 중개업자와 친분이 있음을 인증해줬던 이들이 하는 말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친하긴 한데 잘은 모른다.’
비틀대며 걷던 리하트는 길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로서 확실해진 것이다. 자신이 제대로 사기 당했다는 사실이.
***
연회장의 화려한 불빛이 점점 멀어졌다. 카르한은 마차로 돌아가기 전, 잠시 멈춰 서서 연회장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있었던 곳인데 신기루처럼 멀게 느껴졌다. 저를 향하던 사람들의 호의나, 일리아와 함께 춤을 추었던 것……. 마치 한여름 밤의 꿈을 꾸고 일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고개를 드니 아까 일리아와 함께 나갔던 테라스가 보였다. 잠깐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는데, 테라스에 나온 후로 일리아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열이 있는 듯 얼굴도 붉었고,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근래에 계속 무리했더니 몸살이 온 게 아닌가 싶었다.
카르한은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내비쳤고, 일리아도 동의했다. 그리고 일리아는 블로든 가문 사람들과 함께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테라스에서 시선을 거둔 카르한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우리 앞으로도…… 좋은 친구로 지내요.
문득 테라스에서 일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직 제대로 고백해보지도 못했는데, 일리아는 이미 카르한과의 관계에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
달이 구름에 숨은 것처럼 카르한의 얼굴도 조금 어두워졌다. 전에도 일리아는 카르한에게 좋은 친구라 말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데, 과연 이 관계가 친구일까. 정말 그 이상은 될 수 없는 걸까.
잠시 음울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되돌아왔다. 카르한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달라졌구나…….”
예전이었으면 혼자 실망하고 포기했을 것이다. 안 될 거라고, 이미 끝났다고. 하지만 일리아의 한마디에 물러서기엔 카르한은 이미 너무 많이 바뀌어버렸다.
무엇보다 차근차근 쌓아올려 뒤늦게 알게 된 이 마음을 접고 싶지 않았다. 매일매일 더 커져가는 마음을 어떻게 한순간에 꺼뜨리겠는가. 물론 제 감정을 계속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저 멀리 카르한의 마차가 보였다. 그쪽으로 걷던 카르한은 마차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진갈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여자는 카르한의 모친인 레베타였다.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레베타가 카르한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너, 뭐 하고 다니는 것이냐.”
레베타의 입에서 차가운 비난이 쏟아졌다.
“내가 눈에 띄지 않게 있으라 하지 않았던가?”
카르한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레베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면으로 마주해 올 줄 몰랐는지, 레베타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카르한의 머릿속에 과거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레베타는 카르한이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존재였다. 순종하고 굴복하는 것이 당연했다.
한때 카르한은 그녀의 가족이 되고 싶었다. 형인 블레어드처럼 사랑받진 못해도, 그녀에게 이름뿐인 혈육이 아니라 가족임을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미련이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싫습니다.”
“뭐……?”
예상치 못한 대답에 레베타가 되물었다.
“저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이 한 마디를 내뱉기까지 많은 시간을 걸어왔다. 이제 빛이 드는 양지가 얼마나 따뜻한지 알고 있었다. 카르한은 더 이상 그늘에 속하고 싶지 않았다.
“싫다고……?”
잘못 들었다는 듯 레베타가 되물었다. 카르한은 부정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짜 네 자리도 아닌데, 착각이라도 하는 거 아니냐.”
레베타가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에반테온의 후계자는 블레어드다. 감히 네놈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
“공작부인.”
레베타가 흠칫했다. 마치 타인을 부르는 것 같은 말투였다. 그녀가 입을 다물자 카르한은 지금껏 속으로만 담아왔던 말을 뱉었다.
“제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카르한은 늘 궁금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어머니가 그리도 저를 미워하는지. 레베타가 못된 아이라고, 구제 불능이라고 비난할 때마다 카르한은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바탕으로 자신을 정의 내렸다.
-구제 불능이라니! 당신같이 착한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요.
일리아는 카르한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오히려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자신은 일리아의 말을 믿을 것이다.
“가증스러운 것.”
레베타가 주먹을 쥔 채 바들바들 떨었다.
“네놈이 한 짓을 전부 잊은 거냐.”
“…….”
“너 때문에 나는 미칠 것 같았는데.”
증오 어린 눈빛에 카르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 어릴 적부터 그랬지. 항상 아닌 척 시치미 떼곤 했어.”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아끼던 물건을 부수고, 난도질한 짐승 사체를 침실에 던져놨으면서……!”
그 일은 카르한도 기억했다. 레베타가 사색이 된 채 저를 바라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는 레베타가 왜 그러는지, 어째서 제 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했다.
“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
“태연하게 거짓말하다니 뻔뻔하기도 하지.”
하지만 레베타는 당연히 카르한의 짓이라 단정 내린 지 오래였다.
“꼴도 보기 싫으니 빨리 분쟁지역으로 가버려라.”
이전에 카르한은 에반테온 공작과 거래를 했었다. 헤인리 블로든을 도와주는 대가로 분쟁지역에 다녀오기로 말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침묵하던 카르한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카르한과 레베타가 틀어져서 이득 볼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 그걸 아는 건 자신뿐이었다.
“형님을 의심해본 적은 없습니까?”
블레어드 이야기가 나오자, 약점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레베타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냐.”
“방금 말씀하신 것들이 형님께서 한 짓이라면…….”
“그 입 다물어!”
황궁 안이라는 것도 잊고 레베타가 소리쳤다. 그녀는 블레어드 이야기만 나오면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행동하곤 했다.
“요즘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더니, 혹시 네게 헛바람을 넣은 게 블로든이냐?”
그녀가 일리아를 언급하자, 이번엔 카르한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맞구나.”
그냥 델로타와 약혼을 추진했어야 했는데……. 하고 레베타가 혼잣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헤어지라고 하고 싶은데, 아직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블로든 가문과 약혼을 추진해야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터였다. 레베타는 표정을 굳힌 채 중얼거렸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그 말을 듣자 카르한은 피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저 작은 애정만 바랐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나 잘못된 것이었나. 카르한은 이제 남아있던 미련을 전부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저는 살아남을 겁니다.”
레베타가 눈을 부릅떴다. 그런 그녀를 보며 카르한이 힘주어 말했다.
“그래서 에반테온 공작이 될 겁니다.”
***
황궁 연회가 끝나고 며칠이 지났다.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을 두고 수도에 온갖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단연 화제가 된 것은 카르한이었다. 에반테온 소공자를 둘러싼 나쁜 소문은 어린아이도 알 정도로 유명했다. 살인귀, 피에 미친 전쟁광, 미친개…….
그러나 이번 연회에서 카르한은 만나본 이들은 하나같이 소문이 잘못되었다고 떠들어댔다. 정중했다, 머리도 좋고 잘생겼더라, 공작가 후계자로서 자질이 충분해 보이더라……. 카르한의 평판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물론 카르한에 대해 좋은 이야기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사람들은 카르한이 여전히 미친놈인데, 일리아 블로든을 만나서 자제하는 거라 소문을 냈다.
카르한 다음으로 화제가 된 것은 리하트였다. 이미 리하트는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치정극을 한 편 썼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연회에 얼굴을 내밀더니, 끝내 일리아를 해하려 했다는 사실에 다들 분노했다.
더불어 리하트가 사기 당했다는 소식이 널리 알려졌다. 유서 깊은 테르시안 저택은 은행 소유가 되었으며, 돈을 쏟아 부었던 장난감 사업은 경매에 부쳐졌다.
그럼에도 빚을 다 갚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화려한 재기를 꿈꾸던 리하트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후우.”
일리아는 펜을 내려놓았다. 도저히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결재해야 할 서류는 산더미 같은데,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찬 탓이었다.
일리아는 머리를 식힐 겸 후원을 산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시에 서류를 왕창 들고 들어온 말렉과 눈이 마주쳤다.
“잠깐 산책하려고. 당장 봐야 할 서류는 후원에 가져다줘. 차 마시면서 보게.”
일리아는 곧장 본관을 빠져나왔다. 정오라 그런지 뜨거운 햇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녹음이 우거진 나무 아래로 피신한 일리아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별관 앞에 도착하고 말았다.
일리아는 현관을 확인했다. 오늘 수업이 없었는지, 카르한의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관에 들르면 카르한이 있는 게 당연했기에, 텅 빈 현관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연회에 다녀온 지 벌써 일주일가량이 흘렀다. 그 후로 카르한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피하고 있었다. 또다시 가슴이 갑갑해졌다.
사실 일리아는 카르한에게 오래전부터 호감을 느꼈고, 점점 끌렸다. 하지만 관계가 변하는 것이 두려워, 마음의 문에 자물쇠를 걸고 내내 모른 척해왔다. 지금껏 잘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완벽하게 닫혔다 생각했던 문에는 빈틈이 있었다.
카르한은 물안개처럼 조금씩 밀려와 틈에 스며들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물안개는 웅덩이가 되었고, 이내 파도가 되어 일리아를 휩쓸어버렸다. 더 이상 스스로에게 거짓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어쩌지.’
오랜만에 찾아온 사랑은 일리아를 들뜨게 만들다가도 불안 속으로 처넣어버렸다. 마음 편히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일리아는 항상 처음 시작할 때 끝을 염두에 두곤 했다. 결국에 헤어질 거라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무엇보다 카르한이 저를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제게 호감이 있는 건 확실하지만.
‘그 호감이 나와 같은 마음일지는…….’
카르한은 워낙 다정한 남자니까. 거기다 자신은 카르한이 지금껏 받지 못했던 것들을 해주었다. 그러니 당연히 호의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자신을 좋아해줬던 다른 사람들처럼, 돈으로 감정을 사게 된 것은 아닐까 싶어서 괴로웠다.
겨우 카르한 생각을 떨쳐낸 일리아는 천천히 걸어 후원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해 있던 말렉이 의자를 빼주었다. 일리아가 의자에 앉는 동시에 말렉이 보고를 시작했다.
“소송장은 오늘 아침에 넣었습니다.”
“리하트 쪽은?”
“아마 내일이면 그쪽도 서류를 받아볼 겁니다.”
드디어 파혼 소송이 시작되었다. 리하트 쪽은 변호인을 선임할 돈도 없었고, 재판은 일리아가 훨씬 유리했다. 유래 없는 치정 사건을 일으킨 데다가 이번 연회에서는 폭력을 행사하려 들지 않았던가.
소송에서 승리해 리하트와 파혼하고 나면, 공작부인이 약혼을 추진할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카르한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카르한의 후계자 입지를 완전히 다질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