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58)
이번 연회를 통해 평판이 많이 좋아졌으니, 가문 내에서도 발언권이 조금씩 생길 테고 말이다.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테르시안 가문 측에서 운영하던 사업장이 경매로 나왔습니다.”
“좋아, 사들여.”
“이미 망한 사업체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우리 가문이랑 공동사업 하려던 거였잖아. 다시 되찾아 오는 거지.”
그래도 리하트가 돈을 많이 부어서 그런지 기반은 잘 다져진 상태였다.
“리하트는 한 번 말아먹었지만, 내 재물운이 얼마나 좋은지 어디 한번 보자고.”
고개를 끄덕인 말렉이 다음 보고를 이어나갔다.
“바네사 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니, 시간 나시면 방문해달라는 전언입니다.”
황후가 의뢰한 작품을 그리려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연회에서 황후와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다음에 입궁할 일이 생기면 찾아뵈어야 할 듯싶었다.
말렉의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그는 이제 온천 부지에 공사가 시작된다고 말해주었다. 이미 지반을 다진 상태에서 온천이 터진 것이었기에, 건물을 올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을 듯했다.
“그리고 다음 달에 황궁에서 검술 대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서류를 넘기던 일리아가 멈칫했다. 생각보다 일렀다. 작년에는 가을 이후에 열렸기에 올해도 그때쯤 할 줄 알았다.
황실에서 주최한 검술 대회는 귀족 영식이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다. 우승자는 출세가 보장될 정도이니, 만약 이번에 카르한이 우승하게 되면 후계자로서 입지를 완전히 다질 수 있다.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다시 카르한을 떠올린 일리아는 한숨을 내뱉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피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굴 자신도 없었다.
“아가씨?”
한숨 쉬는 일리아를 본 말렉이 조심스레 불렀다. 잠시 고민하던 일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말렉은 저보다 십 년은 더 살았으니, 한 번쯤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상담을…….
“아가씨!!”
저 멀리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리아와 말렉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프란체가 후원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프란체!”
말렉의 호통에 프란체는 잠깐 주춤했다가 금방 일리아 앞까지 뛰어왔다. 일리아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 외출한다더니?”
“외출하고 오는 길입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큰일 났습니다!”
“……뭔데 그래?”
프란체가 해쓱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온천 인근 상인들이 단체로 시위 중입니다!”
“뭐, 시위?”
프란체의 말을 듣자마자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지나가다가 너무 소란스러워서 보니까, 온천 사업을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가봐야겠어.”
일리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분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마차에 올라탔다. 저택을 빠져나온 마차는 어느덧 온천이 터진 부지 근처에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팻말을 든 사람들이 단체로 항의하고 있었다.
“우리는 뭘 먹고 살란 말이냐!”
“블로든의 횡포다!”
“집 앞에 그렇게 큰 건물을 짓다니, 햇빛은 어떻게 보라고!”
사람들은 저마다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다. 온천 부지가 주거지역이 아닌지라, 시위에 나선 이들은 대부분 인근 소상인들로 보였다. 그리고 소수의 주민들은 일조권 침해와 이 근처가 너무 시끄러워지는 것을 염려했다.
일리아는 심각한 얼굴로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실 돈 많은 귀족 가문이 주변 상권을 먹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바로 옆에 동종 업계가 들어선다 해도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얌체 같은 귀족들은 어떤 가게가 잘 되는지 알아봐뒀다가 똑같은 물건을 파는 가게를 근처에 차리는 경우도 많았다. 가격을 저렴하게 매겨 기존 가게에서 손님들을 하나둘 뺏으며 성장했다.
손님을 빼앗긴 가게 입장에서는 무척 억울한 일이나, 감히 귀족에게 대항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보복 당하기 십상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번 일리아의 온천 사업은 전례 없는 대형 사업이었다. 근처 상인들이 죄다 위기감을 느꼈는지, 다 같이 작정하고 모인 듯했다.
‘내가 실수했구나.’
지금껏 없던 대형 휴양 시설을 지어야겠다는 생각만 했지, 주변 상권은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어떡하죠? 역시 마님께 연락을 드려야 할까요?”
프란체가 발을 동동 구르며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일리아 또한 비올레를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 맡은 대형 사업이니 스스로 헤쳐 나가고 싶기도 했다. 그러기 위해 경영 수업을 듣지 않았던가.
“내가 나서볼게.”
프란체와 말렉이 엄호를 위해 일리아 옆에 딱 달라붙었다. 일리아는 시위하는 사람들 앞으로 나섰다. 시위대들이 잠깐 말을 멈추고 시선을 보냈다. 일리아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온천 사업의 대표인, 일리아 블로든입니다.”
“일리아 블로든……?”
누군가의 중얼거림과 함께 순간 긴장이 흘렀다. 그리고 사람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블로든 가문의 실세라던……?”
“미친개를 길들였다던데. 저렇게 작은 체구로…….”
그들의 말에 일리아는 당황스러웠다.
‘실세? 미친개?’
전부 일리아는 모르는 일이었다. 블로든 가문의 실세는커녕, 자신은 아직 배우는 처지에 불과했다. 미친개는 또 뭐란 말인가. 일리아는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사정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최선을 다할 테니, 잠시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까?”
일리아의 정중한 부탁에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던 일리아는 근처 찻집을 통째로 빌렸다.
“음료는 제가 사는 것이니 부담 가지지 마세요.”
시위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졸지에 음료 수십 잔을 팔게 된 찻집 주인만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일리아는 일단 비슷한 불만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아서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그리고 말렉은 자연스럽게 일리아를 도와, 상황을 정리했다.
“인근 주민들은 건물이 집을 가려서 햇빛을 보지 못하는 문제와 주변이 시끄러워지는 것이 불만이라고 합니다.”
“으음, 어려운 문제네요.”
온천이 여기서 터져버렸으니, 위치를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죄송하지만, 집을 저희에게 파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이사 비용도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뭐, 값만 잘 쳐주신다면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어쩌다 보니 여기서 사는 거지, 주거지로는 부적합했고 주변은 낙후된 건물뿐이었다. 팔리지 않는 집을 사준다니 거절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 중년 남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갑자기 이사 가라니, 돈만 주면 다입니까! 이곳에서 삼 대가……,”
“보상금은 따로 10만 크로엘씩 드리겠습니다.”
“……살아왔으면 많이 살았지!”
돈만 주면 다였다. 중년 남성은 언제 언성 높였냐는 듯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인근 주민들이 모두 물러나자, 다음 순서로는 소상인들이 자리했다.
일리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어보았다. 동정을 호소하는 이부터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형 복합 시설이 들어서면 손님을 빼앗길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제가 조사해보니 이곳은 번화가와 떨어진 곳이라 유동 인구가 적습니다. 휴양 시설이 들어서면 오히려 상권이 살아나지 않을까 싶어요.”
일리아는 그간 조사했던 자료를 사람들에게 뿌렸다.
“그리고 같은 업종의 가게를 여는 것은 피하도록 검토해보겠습니다.”
똑같은 가게가 들어올까 우려하던 이들이 안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는 이들에게 보상을 제안하지 않았다. 아까 주민들에게 보상금을 주기로 약속한 것은 그들이 누려야 할 권리를 침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이들에게 보상금을 주면 분명 관계없는 이들까지 돈을 바라고 달려들 것이었다. 차라리 함께 공생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 나았다. 신중하게 고민하던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 가게를 이용한 영수증을 가지고 오면 온천 입장권을 할인해주는 행사를 진행할까 싶은데, 어떠신가요?”
“예?”
다들 깜짝 놀라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런 행사가 생긴다면 온천 이용객들이 인근 가게를 이용할 확률이 높아진다.
“저희는 좋습니다.”
머뭇거리던 상인들은 누군가 대답하자마자 너도나도 동의하기 시작했다. 일리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동의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 또한 좋은 가게들과 협력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뚱하게 있던 사람들마저 표정이 사르르 풀리고 말았다. 일이 마무리되고, 일리아는 폐를 끼쳐 미안하다며 다시 사과했다. 그리고 일이 바빠 먼저 돌아가 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따지러 왔던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저렇게 좋은 귀족은 처음이었어.”
“역시 블로든 가문 실세는 다르네.”
“오늘부터 블로든 사에서 나온 물건만 산다.”
다들 호의 가득한 얼굴이었다. 어떤 여자가 머리에 두르고 있던 띠를 풀었다. ‘온천 사업 결사반대’라고 적은 머리띠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며 그녀가 말했다.
“블로든 가문에 취직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
***
크리스털 잔에 검붉은 와인이 채워져 나갔다. 값비싼 수입 가구와 윤기 흐르는 러그, 실크 벽지……. 모든 것이 최고급으로 이루어진 방은 주인의 호화로운 생활을 알려주는 듯했다. 원목 의자에 앉아 있던 사내는 와인이 담긴 잔을 천천히 흔들었다.
“지루하군.”
지금 그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주위가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처음에는 휴양 온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좋을 뿐, 일 년이 넘어가니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나고 자란 제국 수도와 비교하면 이곳은 시골이나 다름없었다.
“언제까지 여기에 박혀 있어야 하는지.”
미간을 찌푸린 사내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누구보다 화려한 생활을 즐기고 있으나, 불만은 점점 쌓여갈 뿐이었다.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블레어드 님. 편지가 왔습니다.”
“들어 와.”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테이블에 편지 봉투를 내려놓고 물러났다. 사내, 블레어드 에반테온은 테이블에 놓인 두 통의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나는 어머니인 레베타 에반테온이 보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제국 수도에 심어둔 정찰자의 편지였다.
약 일 년 전, 블레어드는 사람을 죽이고 이곳으로 도망쳐왔다. 제국에 있을 때 그는 어느 비밀 모임의 회원이었다. 일탈을 꿈꾸는 귀족 자제들이 모여서 만든 모임으로 아편과 도박, 수많은 범죄 행위가 성행했다.
블레어드는 평소처럼 술과 약을 먹은 후 카드게임을 즐겼다. 그러다 상대와 시비가 붙었고 홧김에 술병으로 머리를 내리쳐 살해하고 말았다. 운이 나쁘게도 죽인 상대는 백작의 외동아들이었다.
뒤늦게 정신이 돌아온 블레어드는 그 일을 묻으려 했다. 목격자들의 입을 단속했으며, 증거도 전부 은폐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임 회원들은 블레어드의 보복이 두렵기도 했고, 자신이 불법 모임에 참석했다는 것이 들킬까 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아들을 잃게 된 백작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백작은 끈질기게 추적해나갔고, 결국 목격자 중 하나가 양심 고백을 했다. 아들을 죽인 것이 블레어드 에반테온이라고 말이다.
백작은 곧바로 에반테온 가문을 찾아왔다. 고발하겠다고 날뛰는 백작에게 에반테온 가문 측은 합의를 시도했다. 그 틈을 타 블레어드는 외국으로 도망쳤다.
백작은 합의를 거부하고 고발하겠다고 펄펄 뛰었으나, 증거가 없었다. 사실을 털어놓은 목격자조차 재판에 증인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거부한 것이다. 결국 백작 측은 막대한 합의금을 불렀다.
에반테온 가문 측에서도 블레어드의 평판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합의금을 주겠다고 말했지만, 워낙 큰 금액이라 아직까지 마련하지 못했다.
블레어드는 테이블에 올려둔 편지 두 통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레베타가 보낸 편지였다.
[잘 지내고 있니? 요즘 들어 네가 참 보고 싶구나.]안부인사로 시작된 편지는 구구절절 걱정뿐이었다. 혹시 쓸 만한 정보가 있나 싶어 무심한 눈으로 읽어 내려가던 블레어드의 눈이 멎었다.
블레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동생인 카르한이 저를 대신하여 후계자 자리를 꿰찼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다. 어차피 임시일 뿐이지만. 카르한은 후계자로서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으니, 염려할 것은 없었다.
블레어드는 어머니의 편지를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다른 편지를 집었다. 편지에는 최근 제국 수도에서 있었던 일들이 적혀 있었다. 대충 읽어 내려가던 블레어드의 얼굴이 점점 가라앉았다.
편지에는 카르한의 평판이 무척 좋아졌다는 것과 카르한이 일리아 블로든과 교제한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구석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그의 손에 편지지가 단숨에 구겨졌다. 블레어드는 이제 얼굴도 가물가물한 동생을 떠올렸다. 태어날 때부터 제 자리를 위협하던 존재. 수재라 불리는 자신을 단숨에 뛰어넘을 진정한 천재.
“이제 와서 감히 내 자리를 노리겠다고……?”
공작 부부가 제 편이고, 카르한을 바닥 밑까지 처넣었는데도 여전히 불안했다. 방심했다간 놈이 치고 올라올 것 같아서. 편지를 바닥에 내던진 블레어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제국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군.”
***
황궁에서 검술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제국이 떠들썩해졌다. 작위를 받지 못한 귀족 영식들만 참석할 수 있었는데, 우승자는 제국 제일 검으로 인정받았다. 우승자들 중에서 출세한 사람이 많았기에, 인생 역전을 꿈꾸는 한미한 귀족 자제들까지 대회에 참여하려 몰려들었다.
그리고 약 보름 동안 대회에 출전할 사람들은 접수장을 내야 했다. 접수장만 보내는 것은 불가능했고, 본인이 직접 오거나 적어도 대리인을 보내야 했다.
대회 출전 접수를 받던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왠지 복도가 시끄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도련님께서 꼭 우승하실 겁니다.”
“당연한 소릴.”
옆구리에 화려한 검을 찬 귀족과 하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들어오고 있었다. 도련님이라고 불린 쪽이 건들거리며 종이 한 장을 내려놓았다.
“여기 접수장.”
남자는 서류를 확인했다. 수도 변두리에 위치한 자작 가문 장남이었다.
“접수되었습니다.”
며칠간 그는 온갖 사람들을 만났다. 자기가 우승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부터 반쯤 떠밀려서 온 사람까지 다양했다.
벌써 몇 년째 이 일을 하고 있는 남자는 이런 부류가 무척 가소로웠다. 척 봐도 금방 떨어질 것 같은 사람들이 특히 유세를 부렸다.
“그런데…… 이번에 누가 출전하나?”
“접수 기간이 많이 남아서 신청서가 별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슬그머니 떠보는 물음에 남자는 에둘러 대답을 거절했다. 자작 영식이 어깨를 으쓱였다.
“보나마나 실력도 없는 자들이 기회다 싶어서 신청서를 내겠지.”
“맞습니다. 알고 보면 도련님이 대회에 참석한다는 소문이 나서 다들 피한 게 아닐까요?”
“그런가? 이해는 되는군.”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이렇게나 손발이 척척 맞는 주인과 하인이라니. 나중에 대회에서 떨어지면 둘 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자작 영식이 돌아가고 남자는 접수장을 정리했다. 아까 자작 영식에게 대답했던 것과 달리, 벌써부터 쟁쟁한 인물들이 보였다. 아카데미 검술부 수석과 검술로 유명한 가문의 차남 등……. 올해는 누가 우승을 거머쥘지 궁금했다.
똑똑,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남자가 대답했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고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바삐 움직이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는 숨을 쉬는 법도 잊고 말았다.
존재만으로도 뚜렷한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껏 수많은 검사들을 만나왔지만, 이런 기백은 처음이었다. 거기다 워낙 장신이라 고개를 한참 들어야 했다.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여기서 접수장을 내면 됩니까?”
정중한 말투에 남자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마어마한 기세와 달리 무척 예의 발랐다. 지금까지 성격 더러운 귀족들을 많이 봐 왔던 남자는 자신이 자연스럽게 편견에 휩싸였구나 하고 반성했다.
남자는 그가 내민 접수장을 받았다. 이름을 확인하던 남자가 멈칫했다.
요즘 가장 화제가 된 인물이었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카르한이 물었다.
“혹시 진검 말고 날이 뭉툭한 검을 써도 되는지요.”
남자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목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상부와 논의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묵묵한 얼굴로 인사를 건넨 카르한이 곧장 뒤돌아섰다. 멍하니 있던 남자는 문이 닫히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던 그는 생각했다. 왠지 이번 대회 우승자는 이미 정해진 것 같다고.
***
검술대회 출전 접수를 끝낸 카르한은 오랜만에 블로든 저택에 방문했다. 스승인 비올레에게 이 소식을 전해줄 생각이었다. 미약하지만 한 걸음씩 나아간다는 생각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차에 올라탄 카르한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러다 보니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연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는 레베타 앞에서 후계자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레베타는 길길이 날뛰며 당장 내쫓겠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레베타는 더 이상 마음대로 카르한을 내칠 수 없었다. 현재 카르한에게 많은 이목이 쏠려 있었고, 후계자 자리를 가져갈 블레어드는 아직 제국으로 돌아올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번 검술 대회에서 우승하게 되면, 저를 탐탁지 않게 보던 원로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마차는 어느새 블로든 저택 정원으로 들어섰다. 상념에서 벗어난 카르한은 조금 긴장했다. 오늘이야말로 일리아를 만날 수 있을지 몰랐다. 무슨 이야기를 하지……. 이럴 때마다 말주변이 조금만 더 좋았으면 하고 아쉬워졌다.
어느새 마차는 본관에 도착했다. 카르한은 가벼운 심호흡을 내뱉은 후 마차에서 내렸다. 동시에 현관문이 열리더니, 막 나오는 비올레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