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6)
“계속 따라오는데, 불편해서…….”
“따라온다고요?”
연회장에서 따라다니는 건 딱히 이상하지 않은데, 뭐가 문제지?
일리아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자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말해 달라는 눈빛을 이기지 못한 남자가 느릿하게 예시를 들었다.
“행동이 조금…… 과합니다.”
듣자하니 그와 약혼 이야기가 오가는 상대는 잠깐이라도 연락이 되지 않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행선지를 말하지 않아도 우연을 가장하여 따라왔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길길이 날뛰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가족들과 왕래하며 벌써부터 부인이 된 것처럼 사사건건 간섭해왔다. 숨이 막힐 정도로. 그의 말이 끝나자 일리아는 생각했다.
‘와. 스토커네…….’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리아는 곧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 남자의 성격으로 보아, 딱 잘라내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오르골 가게의 점원한테도 강매 당할 뻔하지 않았던가.
“……이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지만 번번이 무시당하는지라. 약혼식을 치르면 더 심해질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일리아는 측은한 시선을 보냈다. 귀족 가문에서 정략혼은 아주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스토커는 좀 아니지 않나. 심지어 남자는 상대를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거 큰일이네요. 가족들과 의논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가족들은…….”
그가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지자, 일리아는 화제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저도 이번에 약혼자 때문에 고생을 좀 했거든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묵묵히 저만을 바라보는 눈빛에, 일리아는 가족들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 사람이 저를 배신했어요.”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문을 열고, 리하트에게 파혼하자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파혼까지 가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 많았다.
‘리하트보다 신분이 높았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 텐데.’
울컥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리아가 다시 입을 열려는 그때였다. 테라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에반테온!!!”
카랑카랑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일리아는 술이 확 깼다.
“에반테온,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잖아요!”
길게 늘어뜨린 남색 머리카락에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가 그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테라스 끄트머리에 서 있던 일리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에반테온이라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뭐, 에반테온?!’
일리아는 눈을 부릅떴다. 오늘 연회에 참석한 사람 중에서 에반테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공작 가문의 후계자인 카르한 에반테온. 아까 사람들이 그렇게나 떠들어대던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이 남자가 에반테온 소공자라고?’
일리아는 당황한 나머지 대놓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전장의 살인귀라며? 성격 더럽다며……? 도대체 어디가? 첫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그런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의 팔을 붙들고 뭐라고 말하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뒤늦게 일리아를 발견한 그녀가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내왔다.
일리아는 곧바로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카르한 에반테온과 약혼 이야기가 오간다는 스토커였다.
“……에반테온, 그런데 이 여자 뭐예요?”
여자의 물음에 카르한은 침묵했다. 생각해보면 일리아와 카르한은 서로 이름도 소개하지 않았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여자는 일리아를 아래위로 훑어 내렸다. 그리고 얼굴을 빤히 보더니 확신에 가득 차서 말했다.
“블로든 영애, 맞죠?”
일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척은 해주고 싶은데,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다. 리하트 무리 중 한 사람이었다면 낯이라도 익었을 테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일단 저쪽은 내게 호의적이진 않은 듯한데.’
일리아는 카르한을 힐끗 보았다.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떨리는 눈썹 끄트머리에서 당혹감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갑자기 스토커가 찾아와서 놀란 모양이었다.
‘귀찮으니까 그냥 피하자.’
치정싸움에 말려들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일리아는 자연스럽게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뗐다.
“저는 막 들어가려고 했으니, 두 분 말씀 나누세요.”
“갑자기 자리를 피하는 걸 보면, 제가 없는 사이 수상쩍은 짓이라도 했나 보죠?”
신경을 긁어오는 말에 일리아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누군지 몰라서 입술만 벙긋댔다.
“나를 몰라요?”
자존심이 상한 듯 여자는 언성을 높였다. 일리아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앙칼지게 외쳤다.
“스텔라 델로타예요!”
익숙한 이름에 일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델로타는 백작에 불과했으나, 재력으로 널리 명성을 떨친 가문이었다. 극장, 운송업, 음식점, 의상실 등 여러 사업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델로타 가문 인장을 상표로 내세웠다. 그리고 블로든 가문과 델로타 가문은 서로 앙숙이었다.
원래 델로타 가문은 대대로 제국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하지만 일리아가 태어난 후로 상황이 역전되어 버렸다.
날이 갈수록 격차는 심해졌고, 지금까지 누려온 명성을 블로든 가문에게 고스란히 내어줘야 했다.
자존심 상한 델로타는 그 후로 사사건건 방해를 해왔다. 블로든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면, 물량을 내세우거나 가격을 낮추며 망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일리아의 재물운은 철옹성 같았다. 그들이 아무리 방해해도, 블로든은 망하기는커녕 승승장구할 뿐이었다.
델로타와 엮인 수많은 사건 중에서 일리아의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었다.
‘마차 도안 사건이었지.’
과거에 블로든 가문에서는 신상품 출시를 앞두고 있었다. 선보일 제품은 고급 마차였는데, 출시일 전에 도안을 도둑맞고 말았다. 블로든은 부랴부랴 도안을 새로 만들었고, 일리아도 그 자리에 함께했었다.
부모님은 일리아가 있으면 성공할 거라 믿었다. 결국 최종 도안을 선택하는 것은 일리아의 몫이 되었다.
어린 일리아는 여러 도안 중에서 가장 과감한 디자인을 골랐다. 디자이너들은 난색을 표했지만, 블로든 가문에서 일리아의 말은 곧 신탁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대로 제작에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델로타에서 마차를 출시했다. 블로든이 도둑맞은 도안과 똑같은 마차였다.
도안을 훔쳐간 범인이 델로타라는 것을 알았지만, 증거가 없었다. 도리어 델로타 쪽은 몇 년 전부터 준비했다며 떠들썩하게 선전했다.
그렇게 델로타 가문은 자신만만하게 판매를 시작했지만……. 하늘이 벌을 준 것일까. 델로타에서 선보인 마차는 쫄딱 망했다. 얼마나 망했냐면, 천 대를 생산해서 다섯 대가 팔렸다.
그 후에 블로든 가문이 새로운 도안을 바탕으로 제작한 마차를 출시했다. 너무 특이했던지라, 처음에는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행을 선도하는 이들이 혁명적이라는 찬사를 보내왔다. 유행이라면 돌도 씹어 먹을 사교계에서 마차는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마차를 출시한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블로든은 구백구십오 대의 마차를 팔았다. 정확히 델로타가 손해 본 만큼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서 있는 스텔라는 델로타 가문의 하나뿐인 영애였다.
회상을 끝낸 일리아의 시선이 달라졌다.
‘살 엄청 뺐네…….’
일리아가 아는 스텔라는 덩치가 굉장했었다. 살을 뺐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아예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일리아는 발걸음을 되돌렸다. 귀찮으니 피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앙숙인 델로타 영애라면 또 말이 달랐다. 대놓고 시비를 걸어온다면 더더욱.
“아아, 델로타.”
일리아가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스텔라의 눈썹이 휘어졌다. 그녀는 카르한의 팔을 붙들던 손을 떼어내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마주 서게 되자, 스텔라가 일리아를 훑어 내리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테라스에서 뭐 하는 짓이에요?”
“뭐 하는 짓이라뇨?”
일리아가 되묻자, 스텔라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내 남자랑 한 공간에 있었잖아요! 수작 부리는 거 모를 줄 알아요?”
“영애야말로 자신감이 많이 부족한가 봐요. 저를 견제할 정도니.”
“무슨…….”
스텔라가 주춤하자, 일리아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분명 부드럽고 상냥한 얼굴인데, 눈빛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남이 쉬는 공간에 막무가내로 들이닥치려면 증거라도 들고 왔어야죠. 최소한 입 맞추는 현장이라도 습격하든가.”
증거가 없다면 의심의 근거라도 가져왔어야 했다. 한 달 전 자신처럼, 현장 검거라도 하든가.
일리아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리하트 개자식.
“심지어 아직 약혼한 사이도 아니라던데, 많이 불안했나 보죠?”
“일리아 블로든!”
“아니면 소공자가 못 미더웠어요?”
그러니까 갑자기 쳐들어온 거 아니냐며 일리아가 물었다. 스텔라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나는…….”
스텔라는 변명하기 위해서 뒤에 서 있던 카르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굳어졌다.
일리아도 덩달아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미간을 찌푸린 그는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말을 붙이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에, 에반테온……. 화, 났어요?”
스텔라가 말을 더듬거렸다. 카르한의 매서운 분위기에 압도당해서 겁먹은 듯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일리아는 가만히 카르한을 살폈다.
미간이 좁아지면서 눈썹은 위로 치켜 올라갔고, 눈매는 화살촉처럼 날카로웠다. 원래도 사나운 얼굴인데, 지금은 마치 눈빛으로 꺼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주목 받아서 당황했나 본데.’
일리아는 그의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남들이 보기엔 단단히 화난 얼굴이었다. 마침내 굳게 다물린 입매가 열렸다. 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스텔라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 저는 먼저 들어갈게요. 절대 당신을 못 믿어서 그러는 건 아니에요……!”
당당하게 들이닥쳤던 그녀는 대번에 꼬리를 말고 테라스를 떠났다. 탁, 소심하게 문이 닫혔다.
“싱겁긴.”
일리아가 혀를 차자, 카르한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왠지 못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일리아는 조금 억울해졌다.
이 정도면 무척 고상하게 끝낸 거지. 그리고 숙적인 델로타 가문한테는 가위바위보도 지지 말라 했다.
“먼저 시비 걸어오는데, 가만히 있으면 멍청이죠.”
일리아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멀찍이 떨어져서 일리아를 바라보던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영애께서는 무척 당당하신 것 같습니다.”
‘돌려 까는 욕인가……?’
일리아가 속으로 가늠하고 있는데,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부럽습니다.”
일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 속에서 진의를 파악하려 애썼다. 푸른색 눈동자는 한 점의 거짓도 몰랐다.
“에반테온 소공자께 부럽다는 말을 들을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오히려 누구보다 당당해질 수 있는 사람이 눈앞의 남자였다. 다른 공작가 중에서도 으뜸이라 불리는 에반테온. 그리고 유일한 후계자인 그.
당당하다 못해, 패악을 부린다 해도 앞에서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분이 하나의 성격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저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카르한이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자책에 가까운 어조라 일리아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저 스스로도 에반테온 후계자와 어울리지 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다들 저를 무서워하니까요.”
일리아는 에반테온 소공자에 대한 소문들을 떠올렸다.
피를 즐기는 살인귀. 성격 나쁘고 오만한 사람. 형제를 끌어내리고 후계자가 된 냉혈한. 타인을 벌레 보듯 하며, 수많은 여자를 가지고 놀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나도 안 맞잖아.’
일리아에게 그의 첫인상은 호구였다. 겨우 두 번 본 것으로 판단하기는 섣부르지만, 일리아가 본 카르한은 소문과 달랐다.
예의 바르고,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다는 사과가 먼저 튀어나왔으며,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커다란 새우였다. 나쁜 남자는커녕, 실상은 스토커에게서 도망치는 사람이니…….
아무래도 분위기가 날카로워 오해 받는 모양이었다. 착한 얼굴과 그렇지 못한 성격을 가진 자신과 정반대였다.
“영애께서는 제가 무섭지 않습니까?”
“무서워해야 하나요?”
조심스럽게 던져진 물음에 일리아가 되묻자 카르한이 당황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건 다른 사람이고요.”
아무리 겉모습이 사납다 한들, 가게에서 오르골을 강매 당하던 모습이 각인된 후였다. 그리고 가만히 보고 있으니 점점 그의 표정이 읽혔다.
카르한을 살피던 일리아가 반대로 질문을 던졌다.
“소공자. 아까 그녀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당황한 거였죠?”
“……!”
어떻게 알았냐는 듯, 그의 눈이 커졌다. 일리아는 태평하게 말했다.
“제가 그런 쪽에 감이 좋아서요.”
일리아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고 타인을 분석하는 데 능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기분이 어떤지, 어떤 목적으로 제게 접근했는지. 어쩔 때는 상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필요한 것을 알아차리곤 했다. 편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불쾌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아닙니다.”
일리아의 사과에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여전히 얼떨떨한 듯 카르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처음입니다. 한눈에 저를 제대로 알아본 사람은.”
꼿꼿하게 세워진 몸이 풀어졌다. 팽팽하던 실이 느슨해지듯 몸 선이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지금까지 경직되어 있었던 까닭은 긴장해서였던 거다.
“저는…… 오해받는 게 익숙합니다.”
망설임 끝에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솔직한 말은 처음 내뱉어 본다는 듯, 그 스스로도 낯설어 보였다.
일리아는 완전히 몸을 틀어 카르한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은 열리지 않을 철문처럼 무거웠으나, 새파란 눈동자는 수많은 말을 담고 있었다.
허락을 구하듯 그가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명령을 내리는 데 익숙할 신분의 사내가 제 눈치를 보는 것이 새롭긴 했다.
“듣고 있으니 계속 말해보세요.”
일리아의 대답에 카르한이 어렵사리 다음 말을 꺼냈다.
“다들 저를 무서워하는 것 같습니다.”
카르한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빈틈이 없었다. 사람들이 왜 겁을 먹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다.
“말주변도 없는 데다가, 사실 이렇게 오랫동안 대화를 이어나가는 일도 흔치 않아서…….”
카르한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사납게 느껴졌던 기운이 한층 덜어졌다. 이런 상황이 낯선 듯 순수하게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분석하듯 그의 얼굴을 살피던 일리아는 조금 측은해졌다. 혹시 조금이라도 꾸며낸 구석이 있나 싶었지만, 그렇진 않았다.
일리아의 표정이 좀 더 부드러워졌다. 고해성사든 뭐든 전부 들어줄 것 같은 상냥한 얼굴에 카르한이 안도하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제 얼굴이 많이 흉측해서 그렇겠지요.”
“……?”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일리아는 말문이 막혔다.
내가 지금 흉측이라는 단어를 잘못 알고 있나? 아니, 저 얼굴이 흉측하다면 여기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아틀리에에 그를 세워두면 조각상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다들 제 얼굴만 보면 굳어지곤 해서…….”
일단 소문이 너무 강력해서 그렇지 않을까……. 게다가 인상도 매섭고 표정까지 딱딱했다. 표정이라도 조금 부드러워지면 훨씬 나을 텐데.
“그건 표정이, 으음…….”
“많이 심각한가요?”
“아뇨, 전혀요. 평소에 미소를 짓는 건 어때요? 그럼 괜찮을 것 같은데요.”
일리아가 해결책을 제시하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순간 너무 놀라서 일리아는 숨을 삼켰다.
‘진짜 심각한데…….’
입만 웃으니 더욱 무서워졌다. 잘생겼지만 그 이상으로 살벌한 악당이 ‘너 이제 죽었다’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게 아닌가요?”
일리아의 반응을 본 카르한이 입꼬리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살짝 처진 어깨가 시무룩해 보였다.
일리아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 카르한 정도면 굳이 스스로를 바꾸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위에서 군림하기엔 지금 같은 모습이 유리했다. 도리어 그의 진짜 성격을 남들이 알아버리면 만만하게 볼 터였다.
소문처럼 막 살아도 앞에서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신분이 아까웠다.
‘신분?’
술을 마셔서 둔해진 머리가 순식간에 맑아졌다.
일리아는 고개를 똑바로 한 채 카르한을 제대로 보았다. 눈앞에 서 있는 카르한 에반테온은 황족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를 남자였다. 그리고 그의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에반테온 소공자?”
일리아가 웃으며 그를 불렀다. 사심 가득한 미소였지만, 마치 천사가 내려온 듯 무척 다정해 보였다.
“그러니까 남들이 소공자를 무서워하지 않도록 오해를 풀고 싶은 거죠?”
“예? ……예.”
그가 솔직하게 대답하자 일리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장사꾼인 부모를 똑 닮은 미소였다.
“그거 제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일리아는 난간에서 등을 떼고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갔다. 테라스의 끝과 끝에 서 있던 두 사람의 거리는 단숨에 가까워졌다.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의 등에 닿는 것은 굳게 닫힌 문이었다.
해는 한참 전에 졌다. 황혼의 푸르스름한 빛이 테라스를 덮어왔다. 어둑한 그림자가 카르한의 위로 드리웠다.
“대신, 소공자께서는 저와 거래해 주셔야겠어요.”
일리아의 보라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별처럼 반짝였다. 카르한은 잠시 홀린 듯이 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물론 소공자께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에요.”
카르한이 뒤늦게 정신 차렸다. 이윽고 가느다란 팔이 뻗어져 나와, 그의 어깨를 스쳤다.
놀란 그가 그대로 굳어버렸을 때, 일리아는 살짝 벌어져 있던 커튼을 단단히 쳤다. 연회장에서는 이쪽을 전혀 볼 수 없도록. 천천히 팔을 거둬들인 일리아가 말했다.
“동맹을 맺고 서로의 파혼을 돕는 거예요.”
느릿하게 깜빡이던 푸른색 눈동자가 멎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듯해서 일리아는 좀 더 자세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