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61)
16장
***
길고 긴 이야기를 끝내고 카르한은 일단 공작저로 돌아가기로 했다. 테시온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검술 대회가 끝나고 거취를 결정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잘 들어가요.”
마차에 올라타기 전, 일리아가 카르한에게 인사를 건넸다. 카르한은 그런 일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밖이니까 연인으로서 인사해도 되겠습니까?”
잠깐 멈칫한 일리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르한이 팔을 뻗어, 일리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동그란 이마가 드러나자, 카르한이 천천히 입을 맞췄다.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감촉이 무척 생생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몰라서, 일리아가 눈만 깜빡였다. 천천히 멀어진 카르한이 쑥스러운 듯 눈을 내리깔았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 일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잘 자요!”
상황에 맞지 않는 인사를 해버린 일리아가 도망치듯 마차에 올라탔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비올레와 클리프, 헤인리는 잠시 침묵했다.
떨떠름한 표정을 한 헤인리가 먼저 인사를 건넨 후 마차에 올랐다. 그 다음으로 나선 클리프는 카르한의 두 손을 붙잡고 말했다.
“소공자, 뭔가 필요한 게 있다면 꼭 저를 찾아오십시오.”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다음에 시간이 나면 오케스트라를…….”
사심을 듬뿍 담은 제안에 카르한은 옅게 웃었다. 클리프가 아쉬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마차에 올라타자, 비올레와 카르한만 남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비올레였다.
“두 사람 문제에 우리가 너무 나섰지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카르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일리아가 저를 피하고 있다는 걸 은연중에 느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버리니, 카르한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만약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았더라면 계속 일리아와 어긋났을 것이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탄 마차를 바라보다가 다시 비올레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히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르한은 잠시 망설였다. 비올레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번에 조언해주신 것처럼 제가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보려고 합니다.”
“어떻게요?”
비올레의 물음에 카르한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다음 결심을 끝냈다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검술 대회에서 우승하면, 일리아에게 고백할 생각입니다.”
***
오페라를 보러 다녀온 지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일리아와 카르한은 서로 바빴다. 카르한은 비올레와 맹훈련에 들어갔고, 일리아 또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이전과 달리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어 만나곤 했다. 소소한 이야기만 오갔을 뿐이지만, 그저 좋았다. 헤어질 때는 너무 아쉬워서 괜한 핑계를 댈 정도로 말이다.
“아가씨, 서류 가져왔습니다.”
말렉이 서류를 왕창 들고 들어왔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생각하던 걸 멈추고 서류를 집어 들었다. 가장 위에 있던 서류는 장난감 사업에 관한 것이었다.
이전에 일리아는 리하트가 이끌던 장난감 사업을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경매에 부쳐졌는데, 이미 한 번 망한 사업이라 그런지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헐값에 사들일 수 있었다.
일리아는 장난감 사업을 두고 제법 고민했다. 지금까지 사두기만 하면 대박 치곤 했지만, 계속 요행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왕이면 제 힘으로 성공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인형극과 장난감을 접목해보기로 결정 내렸다. 인형 탈을 쓴 연극이 아이들에게 인기 있으니, 그걸 이용할까 싶었다. 일리아는 블로든 가문 디자이너에게 인형 하나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나무 장난감은 다칠 위험이 크니까, 솜 인형으로 제작하자.
-인형극은 대부분 동물을 주제로 하니까. 흰 토끼는 많으니, 검은 토끼는 어때?
일리아의 의견을 참고해, 디자이너는 도안을 뽑아냈다. 시안을 보기 위해 미리 하나 제작했는데, 일리아의 마음에 쏙 들었다. 주변 사람들도 귀엽다며 사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가장 잘나가는 극단을 찾아갔다.
-제안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일리아는 구체적인 사업 계획을 늘어놓았다. 일단 블로든 사에서 제작한 인형을 연극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외관도 귀엽고, 확실한 성격까지 부여해주면 분명 인기를 끌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극장 출구 쪽에 인형을 진열해두어, 자연스러운 구매를 이끌어내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안 그래도 다음 시나리오를 받아두었는데, 인형도 귀엽고 괜찮군요.
극단주도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표 값 외에도 부가적인 수입을 끌어낼 수 있으니, 오히려 이득이었다.
-그럼 저희 쪽에서는 얼마나 받게 되는 겁니까?
-인형 한 개가 팔리면 극단에 5퍼센트를 드리겠습니다.
-5퍼센트는 너무 적지 않습니까.
-우선 시험 삼아 해보고 인기가 좋으면 다른 인형도 추가 제작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들도 5퍼센트를 떼어드리면 절대 적은 금액은 아니죠.
-…….
-나중에 인형의 인기가 많아지면 도리어 연극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늘지 않을까요?
극단주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100개를 선제작한 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후, 일리아는 곧바로 제작에 들어갔다. 리하트가 생산 기반을 전부 갖춰놓은 상태라 딱 좋았다. 분업 체제로 조를 짜서 시간을 정해두고 교대하도록 만드니, 능률이 훨씬 높았다. 덕분에 납기일까지 넉넉하게 맞출 수 있었다.
“오늘이 새 연극 올라가는 날인가?”
“예, 오전과 오후 두 번 한다고 했는데, 지금쯤이면 오후 연극도 끝났을 겁니다.”
말렉의 대답을 들은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 또한 이번에 새로 올리는 연극의 시나리오를 읽어보았다.
일리아의 인형에 맞춰서 내용이 약간 바뀌긴 했지만, 성인인 일리아가 봐도 제법 재미있었다. 거기다 인형의 성격도 확실하게 부여해주었다. 영웅을 좋아하는 아이들의 심리에 맞춰, 검은 토끼는 정의롭고 씩씩한 성격이었다.
‘나흘 안에 백 개가 다 팔리면 좋겠는데.’
일리아는 너무 욕심 부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때였다.
“아가씨,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예, 극단주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들여보내.”
아무래도 연극이 끝나자마자 저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집무실을 나온 일리아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간단한 치장을 했다.
현관으로 내려가자, 막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극단주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일리아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대박!! 대박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극단주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나 다시금 목소리가 커졌다.
“백 개가 전부 완판되었습니다! 그것도 오전 연극이 끝났을 때요!”
일리아는 얼떨떨해졌다. 아무리 잘되더라도 이틀은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디자인이 잘 뽑혀서 그런지 어른들도 고민 않고 구입하더군요.”
신이 난 극단주가 열심히 떠들어대자, 일리아의 얼굴에도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지금까지 수많은 대박을 쳤으나,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재물운도 작용했겠지만, 이번에는 일리아의 노력과 결정 또한 들어 있었다.
“그리고 연극 반응도 무척 좋아서 하루에 3회로 늘릴까 싶습니다.”
“잘된 일이네요.”
“예! 그러니 다음 제작은 언제쯤 될까요?”
추가 제작을 부탁한다며 그가 사정사정했다. 잠시 고민하던 일리아가 활짝 웃었다.
“지금 당장이요.”
***
황궁 연회 이후, 리하트 테르시안이 사기 당했다는 소식이 수도에 널리 퍼졌다.
처음에 리하트는 아닐 거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결국 추적하고 있던 중개상인의 행방이 뚝 끊기자, 사기 당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 후로는 지옥이었다. 은행에서는 이자와 원금 상환을 독촉했고, 돈을 빌려준 지인들은 매일매일 테르시안 후작 저택을 찾아왔다. 새벽에도 찾아오니, 테르시안 가문 사람들은 잠시 밖에 나와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테르시안 후작은 마지막 희망인 황태자비를 찾아갔다. 지금까지 많은 도움을 받아왔으니, 이번에도 도와줄 거라 믿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선을 넘은 것 같군요.
그러나 황태자비는 딱 잘라 거절했다. 후작은 제발 한 번만 도와달라고 빌었다. 지금까지 혈연을 강조하면 마지못해서 도와주곤 했는데, 이번만큼은 요지부동이었다.
-계속 이러시면 황태자비궁에 출입하는 걸 막겠어요.
황태자비의 말에 테르시안 후작은 결국 뒤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친척들을 찾아가 봤지만, 매몰찬 거절만 돌아왔다. 거기다 시오나는 남편 몰래 추가 대출 받은 것이 들켜서 쫓겨 나왔다.
결국 리하트의 장난감 사업 건물과 부지, 부자재 등은 경매에 넘어갔다. 그래도 내심 본전은 건지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걸었지만, 낙찰가는 터무니없이 적었다.
-안 팔아! 이 돈 받고 어떻게 팔아!
후작부인은 팔 수 없다고 우겼다. 투자한 금액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돈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돈이라도 받고 팔지 않으면 주변 지인들에게 몰매를 맞을 상황이었다.
사업을 처분해 지인들에게 빌린 돈을 갚고 고용인들에게 밀린 월급을 주고 나니 남는 돈이 하나도 없었다.
은행에 이자를 상환해야 하는 날, 후작은 결국 파산신청을 냈다. 후작이 그토록 아끼던 테르시안 저택은 결국 은행 소유가 되고 말았다.
-너 같은 자식은 없으니, 당장 나가라!
후작에게 의절 당한 리하트는 지인의 집을 전전했다.
-너무 오래 머무르는 거 아니야? 내일은 나가줬으면 좋겠어.
몇 안 되는 지인들도 더 이상 리하트를 받아줄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젠장!”
거리로 쫓겨 나온 리하트는 분에 차서 욕설을 내뱉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처 없이 떠돌던 리하트는 문득 스텔라 델로타를 떠올렸다.
이전에 그는 일리아와 카르한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스텔라와 잠깐 협력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스텔라 쪽은 겁이 났는지 금방 발을 빼버렸지만 말이다. 그래도 스텔라는 돈이 많으니까 뜯어낼 구석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리하트는 곧바로 델로타 저택을 찾아갔다. 그러나 스텔라는 대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거대한 철문을 사이에 두고 스텔라가 턱을 치켜들었다.
“찾아온 이유는요?”
“……일리아 블로든의 약점을 알고 싶지 않습니까?”
리하트는 일리아와 스텔라의 사이가 무척 나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스텔라의 구미가 당길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조금만 도움을 준다면…….”
“내 돈 먹고 나르려고 하는 건 아니고요?”
스텔라가 리하트의 말을 잘라냈다. 리하트의 얼굴이 굳어지자, 스텔라가 속삭였다.
“당신이 망했다는 소문이 수도에 자자하던데요.”
“…….”
“그리고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어서 당신이랑 잠깐 협력하긴 했는데, 내 인생에서 가장 멍청한 짓이었어요.”
비아냥거리는 말에 리하트는 철문을 걷어찼다. 그러자 델로타 가문 문지기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리하트는 침을 뱉은 후 뒤돌아서 도망쳤다.
다시 길거리를 전전하게 된 리하트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더 이상 찾아가 볼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모두가 리하트를 비웃었고, 가지고 있던 것은 전부 빼앗겼다. 이 지옥을 빠져나갈 방도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리하트는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곳으로 발걸음하고 말았다. 자신이 사활을 걸었던, 장난감 사업체 부지였다.
번듯한 건물이 세워진 부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꿈과 열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사기 당하지만 않았더라면 잘될 수 있었는데. 일리아 블로든의 손바닥에서 놀아나지만 않았더라면 떼부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망설이던 리하트는 마지막으로 건물을 살펴보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지 안으로 들어선 리하트는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고 의아해졌다. 경매로 넘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무척 분주해 보였다.
“추가 주문이 계속 들어오고 있으니 빨리빨리 움직이자고!”
“완성된 100개는 상자에 전부 담았어요.”
안쪽에서 활기찬 대화가 오가고, 리하트는 그대로 멈춰 섰다. 누가 봐도 장난감 사업은 무척 잘되어가는 중이었다.
리하트는 숨을 삼켰다. 온갖 감정이 밀려들었다. 자신은 망했는데, 사업체를 매입한 사람은 바로 대박을 쳤다고? 부러움과 질투, 시기 같은 감정이 그를 덮쳐왔다.
도대체 누가 사들인 것인가 싶어, 리하트는 건물을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건물 벽에 새겨진 문장을 보고 말았다.
“!”
리하트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려왔다. 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블로든 가문 문장을 노려보았다.
***
카르한은 미리 준비해둔 가죽 경갑을 갖춰 입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귀중히 모셔둔 칼집을 집어 들었다. 흔한 장식 하나 달려 있지 않았으나, 손잡이에 세밀한 세공이 새겨져 있었다.
카르한은 한 손으로 칼집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쥐었다. 스르릉, 날이 칼집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며 빛 아래에 검날이 드러났다.
진검이 아닌 장식용 검인지라 끝부분이 뭉툭했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살상도 가능한 검이었다. 매끄럽게 뻗은 검을 살피던 카르한은 저번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며칠 전, 비올레는 연무장이 아닌 본관의 어떤 방으로 카르한을 불렀다. 비올레에게는 검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는데, 그녀가 직접 수집한 검을 장식해둔 방이었다. 예전에 카르한이 처음 블로든 저택에 초청 받았을 때 안내 받았던 곳이기도 했다.
-검술 대회가 며칠 안 남았죠?
비올레의 물음에 카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카르한을 세워두고 방을 한 바퀴 돌았다. 벽과 장식장에 빼곡하게 진열된 검을 살피던 비올레가 잠시 멈춰 섰다.
비올레는 벽에 걸어둔 검 한 자루를 꺼내, 카르한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검을 받아든 카르한이 비올레를 쳐다보았다.
-이건 왜…….
-응원하는 의미로 주는 거예요.
비올레는 과거를 더듬듯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결혼 전에 썼던 건데, 그 검으로 한 번도 진 적이 없거든요.
카르한은 비올레에게 받은 검을 살폈다. 다른 장식용 검과 달리, 손잡이 부분에 사용감이 느껴졌다. 카르한은 검을 손에 꼭 쥐었다. 어떻게든 검술 스승인 비올레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꼭 이기겠습니다.
잠깐 그때를 회상한 카르한은 검을 허리춤에 찼다. 모든 준비를 끝내니, 테시온이 방으로 들어왔다.
“카르한 님, 후문에 마차를 준비시켰습니다.”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에반테온 공작이 되겠다고 선언한 후로 공작부인의 감시가 붙었다. 지금까지는 몰래 빠져나가거나, 어떻게든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검술 대회가 끝날 때까지는 어떻게든 감시를 피해 볼 생각이었다.
후문 쪽으로 나온 카르한은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드디어 황실 검술 대회에 출전한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드디어 맹훈련한 성과를 보여줄 때가 온 것이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분명 잘하실 겁니다.”
카르한이 심호흡을 내뱉자, 맞은편에 앉은 테시온이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솔직히 카르한 님만큼 실력이 뛰어나신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국 각지에서 실력자들이 모일 텐데…….”
“그 사람들을 전부 이기면 카르한 님이 제일가는 실력자가 되는 거죠.”
테시온이 명쾌하게 말했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인데, 간단하다는 듯 말해버리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마차는 어느덧 경기장 앞에 도착했다. 올해 유독 참가자가 많았기에 황궁 밖에서 경기가 치러졌다. 대신 결승전은 황궁 내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카르한은 마차에서 내려, 원형으로 벽돌을 쌓아올려 지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경기장 바닥에는 모래와 잔디가 깔렸고, 주위에 돌계단이 둘려 있는 형태였다.
경기장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출전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지들이 응원차 따라온 탓이었다. 거의 축제를 방불케 하는 모습에 카르한은 허리춤에 찬 칼자루만 만지작거렸다.
“출전하실 분들은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한 남자가 경기장을 돌아다니며 소리쳤다. 그러자 출전자들이 하나둘 그를 따라갔다.
“저는 따라가지 못하니, 관객석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테시온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카르한은 고개를 끄덕여준 후 남자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경기장 안쪽에는 출전자들이 대기하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 그곳에서도 경기장을 한눈에 볼 수 있었는데, 이미 많은 출전자들이 대기 중이었다.
카르한이 시끌시끌한 대기실로 성큼 들어섰다. 그러자 대기실이 아주 잠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묘한 기류가 흐르자, 카르한은 최대한 구석으로 향했다.
“번호표 받아가세요!”
대회 안내인의 말에 순식간에 침묵이 깨졌다. 출전자들은 번호표를 받기 위해 몰려들었다. 앞 번호를 받으면 운이 좋다는 미신을 믿는 이들이 많았기에 서로 먼저 받으려고 난리였다. 인파에 밀린 카르한은 뒤늦게 번호를 얻었다.
카르한이 받은 번호는 666이었다. 불길하다 여겨지는 숫자에 카르한은 눈만 깜빡였다. 다들 번호표를 확인하는 사이, 안내를 돕던 남자가 경기장 중앙으로 나갔다.
“지금부터 황궁 주최 검술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남자가 대회 시작을 알리자, 관객석에서 함성이 쏟아졌다.
“힘내라!!”
“발로쟈의 장남 페르난드, 우승하자!”
출전자의 친지들은 나팔을 불거나 현수막을 들고 열띤 응원을 쏟아냈다. 경기 시작 전에는 어떠한 응원도 용인되었기에, 기를 써서라도 튀려고 노력 중이었다.
엄청난 함성과 응원에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카르한은 다른 출전자들처럼 경기를 보러 올 사람이 없었다. 가족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너무 바빴다. 아직 예선에 불과했기에 일부러 보러 와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테시온마저 보이지 않자, 이 넓은 곳에서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다른 출전자들이 자신의 가족들을 향해 손을 흔들 때였다.
빰빠밤! 함성을 뒤덮는 관현악 소리가 들려오자, 모두가 놀라서 그대로 멈추었다. 다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하얀 제복을 차려입은 이들이 금관악기를 들고, 경기장에 입장하고 있었다.
우렁찬 음악이 경기장을 메우더니, 이윽고 하늘 위로 화려한 불꽃이 연달아 터졌다. 대낮이라서 불꽃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목을 끌려는 목적인 듯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위쪽을 바라보자, 건장한 사내들이 관객석 최상단에 말뚝을 박고 있었다. 이윽고 말뚝에 붙어 있던 거대한 현수막이 펄럭, 하고 바람에 휘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