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62)
목청 높여 응원하던 사람들이 잠시 조용해졌다. 카르한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멍하니 글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카르한은 현수막 아래에서 익숙한 사람들을 발견했다. 헤인리를 제외한 블로든 가문 사람들과 프란체, 말렉 그리고 테시온이 앉아 있었다.
카르한이 그쪽을 바라보자, 클리프와 비올레가 작은 현수막을 들었다.
[최고다, 카르한 에반테온] [내 제자 힘내라]카르한은 눈만 깜빡이며 현수막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그러다 일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일리아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이 넓은 경기장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관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이런 미친 응원은 처음이야. 돈이 남아도는 집안인가?”
“뭐야, 블로든이잖아?”
블로든 가문 사람들을 확인한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돈 쓸 만하네.
“그런데 왜 블로든이 에반테온 소공자를 응원해?”
“어디 산골에 박혀 있다가 왔니? 블로든 영애랑 에반테온 소공자 연인 사이잖아.”
웅성거림이 가라앉을 즈음 대회 안내인이 모두에게 들리도록 쩌렁쩌렁 소리쳤다.
“그럼 바로 시합을 시작하겠습니다!”
첫 경기 대진표는 따로 없었고 1번과 2번, 3번과 4번이 붙는 식이었다. 시합에서 이긴 사람이 다음 경기로 올라가는 승자 진출전이었다.
앞 번호부터 경기장으로 우르르 나갔다. 이번 대회는 출전한 사람이 많은 탓에, 동시에 경기가 치러졌다. 본격적인 시합이 시작되고, 사방에서 칼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르한은 대기실에 앉아서 시합을 구경했다. 예선이라 그런지 시합은 금방금방 끝나버렸다. 카르한은 비올레가 준 검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검법서에 기록된 자세에서 벗어나면 반칙이에요.
카르한은 비올레의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오랫동안 전장을 굴러온 카르한은 수많은 실전을 겪어왔다. 거기다 체력이나 힘도 우세해서 누구보다 유리했다.
그러나 카르한에게는 대회가 유독 까다로웠다. 이곳은 전장이 아니었기에 규칙이 여럿이었고, 이런저런 이유로 반칙패를 당할 수 있었다.
살아남기 위한 실전용 검술을 익혀온 카르한은 대회에 부적합한 버릇이 남아 있었기에 조심해야 했다. 한참 기다린 끝에 마침내 카르한의 차례가 되었다.
“665번, 666번 나가주십시오.”
번호가 불린 카르한은 대기실을 벗어나, 경기장으로 나갔다. 카르한이 경기장으로 나오자 주위가 술렁였다. 시합을 치르던 사람도, 구경꾼들도 전부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카르한은 심판의 지시대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
상대방의 얼굴이 익숙했다. 황궁에 대회 출전 접수장을 내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봤던 사람이었다. 하인과 함께 왔던 남자는 무척 자신만만한 얼굴로 우승을 확신했었다.
-도련님 실력이 최고입니다.
-당연하지. 벌써부터 나랑 붙을 사람이 불쌍해지는걸.
카르한은 그때 그가 했던 말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첫 경기인데 벌써부터 어마어마한 실력자와 붙다니……. 긴장한 카르한의 미간이 좁아졌다. 오랜만에 나온 버릇이었다. 그러자 상대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카르한의 인사에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쓱해진 카르한이 허리춤에 찬 칼집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카르한이 검을 빼드는 순간 상대가 소리를 질렀다.
“기권!!!”
카르한과 심판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상대가 한쪽 손까지 번쩍 들며 소리쳤다.
“무조건 기권입니다!!!”
왜 그러지. 카르한은 당황한 얼굴로 다시 검을 집어넣었다. 스스로를 엄청난 실력자라 일컫던 남자는 심판의 옷자락까지 붙들고 말했다.
“기권 받아주실 거죠? 예?”
“일단…… 기권 처리하겠습니다. 이번 시합은 666번의 승리입니다.”
“감사합니다!!”
심판의 말에 상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검만 꺼내들었을 뿐인데 얼떨결에 승리하게 된 카르한은 눈만 깜빡였다. 뭔가 급한 일이 생겼나. 다시 대기실로 돌아온 카르한은 다음 경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예선 대회가 끝났을 때. 카르한은 허리춤에서 검도 뽑지 않은 채 64강에 오르고 말았다.
***
노을이 지기 시작했을 때, 경기가 마무리되었다. 나흘 후에 64강과 32강 경기가 있을 예정이었다.
경기에 참전한 사람들과 가족들이 우르르 대회장을 나왔다. 그들의 얼굴엔 희비가 교차했다. 출전한 인원은 천 명이 훌쩍 넘었지만, 예선전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반의반도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얼추 빠져나갔을 때, 카르한은 대회장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클리프가 손을 흔들었다.
“소공자!”
카르한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클리프가 잘했다며 카르한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오늘 수고 많았지요.”
카르한은 머쓱해졌다. 사실 수고라고 할 것도 없었다. 경기가 있을 때마다 얼굴만 살짝 비쳤다가 들어간 것이 전부였다. 나름 심기일전하고 나왔는데, 검을 휘두를 일이 아예 없었다.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운도 실력이지요. 그나저나 소공자, 배고프지 않습니까.”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클리프가 웃었다.
“근처 식당을 잡아두었습니다.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갑시다.”
카르한과 클리프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헤인리는 휴가를 낼 수 없어서 오지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아까 보이지 않아서…….”
“대신 결승전에는 꼭 참석하겠다고 합니다.”
안 오면 끌고 올 거라며 클리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클리프에게 잡혀오는 헤인리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아서 카르한은 그저 옅게 웃었다.
두 사람은 대회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식당에 도착했다. 외관이 무척 훌륭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점심, 저녁에 딱 한 테이블만 받으며 유명인사가 아니면 아예 예약조차 받아주지 않는 곳이었다.
클리프가 식당에 들어서자, 안쪽에 앉아 있던 비올레가 반겨주었다.
“어서 와요.”
클리프는 냉큼 비올레의 옆에 앉았다. 그러고 나니 남은 자리는 하나뿐이었다. 카르한은 망설이지 않고 일리아의 옆에 앉았다.
“예선 통과한 거 축하해요.”
일리아의 축하에 카르한이 뒷목을 쓸었다.
“백작부인께서 검까지 주셨는데, 쓸 일이 없어서…….”
“뭐, 솔직히 예선은 손 안 대고 이길 줄 알았어요.”
비올레는 전부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물론 다음 경기는 요행을 기대하기 어렵겠지만요. 하여튼 수고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카르한은 쑥스러운 듯 작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모두가 흐뭇하게 웃었다.
“바쁘실 텐데, 와주실 줄 몰랐습니다.”
“놀라게 해주려고 일부러 말 안 한 거예요. 참고로 테시온도 협조했어요.”
일리아의 설명에 카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테시온이 자연스럽게 블로든 가문 사람들과 앉아 있어서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다.
“하아……, 사실 거창한 응원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클리프가 무척 아쉽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관현악과 불꽃만으로도 충분히 거창한 것 같은데……. 카르한은 입 밖에 내뱉지 못하고 말을 삼켰다.
“처음 구상한 것은 대회장 입구부터 융단을 쭉 깔고, 꽃가루를 뿌리는 거였습니다. 대회장 입구부터 화한을 세워두려고 했는데…….”
“아무리 응원이 자유라고 해도 그건 좀 민폐니까요. 사실 저도 아쉽긴 해요. 제대로 못 한 것 같아서.”
함께 아쉬워하는 일리아와 클리프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던 비올레가 카르한에게 시선을 보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속삭였다.
“이제 앞으로 쭉쭉 올라갈 일뿐이에요.”
오늘 시합을 보면서 비올레는 감회에 젖었다. 분명 처음 카르한을 가르칠 때만 해도 괴물이 될지, 영웅이 될지 궁금했었다.
카르한의 검술은 살의를 품은 검이었다. 그랬기에 대련을 치렀을 때, 비올레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대련은 살의가 목적이 아니니 말이다. 그때의 카르한은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기술이 부족했다.
“검술로 최고가 되는 거예요.”
비올레가 카르한을 보며 미소 지었다. 비올레는 뛰어난 검사였지만, 여검사로서 더 올라갈 길이 없어서 내려왔던 사람이었다. 황궁 대회만 봐도 ‘귀족 영식’만 참가할 수 있다고 못 박아두었고, 비올레가 미혼일 때는 여검사에 대한 대우가 더욱 열악했다.
이제 와서 미련은 없으나,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카르한이 대신해줬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이 직접 가르친 제자니 말이다.
잠시 후 직원들이 음식이 담긴 접시를 가지고 왔다. 테이블 위에 접시가 빼곡하게 놓였다. 직원들이 물러나자, 클리프가 테이블 밑에서 과실주를 꺼내들었다.
“기쁜 날에는 술이 빠질 수 없지요!”
클리프가 모두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리고 다들 술과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접시에 가득했던 음식은 빠르게 비어갔다. 잔에 담긴 술은 그보다 더 빨리 사라졌다.
카르한은 블로든 가문 사람들의 술 마시는 속도에 감탄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다들 술고래였다. 길었던 식사가 끝나고, 비올레와 클리프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데이트 좀 하고 들어갈 테니, 일리아 너는 먼저 돌아가렴.”
“알겠어요. 나중에 집에서 봐요.”
두 사람이 가게를 나가버리고, 일리아와 카르한만 남았다. 시끌시끌하던 가게 안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할까 싶어서 눈만 도르르 굴리던 일리아가 아참, 하고 입을 열었다. 일리아가 작은 상자를 꺼내서 내밀었다.
“이건……?”
“선물이에요.”
“지금 열어 봐도 되겠습니까?”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르한이 조심스레 상자 뚜껑을 열었다. 하늘색 손수건이 예쁘게 접혀 있었다. 손수건을 집어 들어 살펴보니, 하단에 아기자기한 흰 꽃 자수가 놓여 있었다.
“원래 어제 주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완성하지 못했어요.”
“……혹시 직접 만드신 겁니까?”
“당연히 손수건은 산 거고, 자수만 놓은 거예요. 저번에 당신이 화분 줬잖아요. 그 꽃을 새겨봤어요.”
카르한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지금까지 일리아에게 받은 건 많지만, 이건 정말 못 쓸 것 같았다. 무려 일리아가 직접 만들어준 것이 아닌가. 거기다 자수의 의미까지 너무나 특별했다.
“……못 쓸 것 같습니다.”
“마음에 안 들어요?”
“그게 아니라, 아까워서 그렇습니다.”
카르한은 때가 탈까 싶어서 서둘러 상자에 손수건을 넣었다. 그리고는 상자 겉면만 만지작거렸다. 귀한 선물을 받았으니, 보답해야 할 것 같았다.
카르한은 고개를 들어 일리아를 응시했다. 터질 것 같은 심장 소리를 들으며 카르한이 말했다.
“이번 대회, 꼭 우승하겠습니다.”
***
환한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 바쁜 일과를 마친 일리아는 말렉과 티타임을 가졌다. 꽃차를 한 모금 마신 일리아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손수건을 받고 정말 좋아하던 카르한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다른 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카르한으로 가득해졌다.
연회에서 카르한을 향한 마음을 자각한 후로, 점점 더 그가 좋아졌다. 스스로 주체할 수 없어질 정도로 말이다.
일리아는 카르한과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겁이 나서 선뜻 나서지 못했다. 또다시 자신의 연애가 실패할까 봐. 카르한은 저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봐. 무엇보다 그와 어긋나는 것이 무서웠다.
찻잔을 내려놓은 일리아가 말렉을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고민하던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말렉, 혹시 누군가 좋아해본 적 있어?”
“……음.”
예상 못 한 질문에 말렉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래전 일을 더듬던 그가 대답했다.
“딱 한 번, 있습니다.”
“교제했어? 고백은 누가 했어?”
말렉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어쩌다가?”
“분명 상대도 제게 호감을 보였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망설였죠. 연애가 처음이라서 걱정이 많았거든요.”
말렉은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시기를 놓치고 각자 갈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
“결국 상대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고……, 나중에 우연히 만났을 때 그런 말을 하더군요. 네가 날 좋아하는 줄 몰랐다.”
그 말을 하는 말렉은 왠지 허탈해 보였다.
“저는 열심히 표현한 줄 알았는데,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그랬구나.”
“많이 후회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걸 알았더라면 고백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 말이 일리아의 가슴에 푹 하고 꽂혔다. 일리아는 입술을 깨문 채 생각했다. 자신과 카르한도 그렇게 어긋나게 될 것인가. 이미 긴밀하게 얽힌 사이니까 완벽한 타인이 되진 않을 거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지 않는다면 영원히 친구라는 자리에 머무를 뿐이다.
머리가 맑아졌다. 오랜 고민 끝에 확신이 섰다.
‘고백하자.’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고백을 받아주든 거절당하든 일단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고마워, 말렉.”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말렉은 왜 이런 걸 물어보냐고 질문하지 않았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말렉이 알고 있을 정도로 티를 많이 낸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언제 고백할지 고민했다. 카르한은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있으니, 당장 고백하는 건 적절하지 않았다. 검술 대회가 끝나고 나서나 리하트와 파혼을 매듭지은 다음이 좋을 듯했다.
파혼 소송은 이미 걸어뒀으니, 재판관에게 약간의 성의만 보이면 다음 달 내로 결과를 받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일리아는 다시 찻잔을 집어 들었다.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꽃차 향기가 좋았다. 역시 다른 걸 다 마셔 봐도 스텔라가 만든 꽃차만큼 괜찮은 상품은 없었다.
일리아는 향긋한 꽃차를 한 모금 더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할 일이 있었다.
“외출하자.”
그리고 연무장에 가있던 프란체까지 데리고, 말렉과 함께 셋이서 외출했다. 마차를 타고 번화가에 도착한 일리아는 어느 번듯한 가게 앞에 멈춰 섰다.
화려하지만 촌스럽지 않은 예쁜 가게였다. 색감도 좋고 목도 좋은데,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일리아는 망설임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점원의 인사가 들려왔다. 가게를 둘러보던 일리아는 무척 당황한 표정을 한 스텔라와 눈이 마주쳤다.
“너, 너 왜 여기에…….”
“손님인데?”
일리아의 대답에 스텔라는 입술만 벙긋거렸다.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 고장 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가게는 스텔라가 운영하는 고급 찻집이었다. 가게 내부를 둘러보던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 꽃차 팔아 볼 생각 없어?”
스텔라는 여전히 얼어붙은 채였다. 방금 일리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빈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차는 많은데, 디저트가 몇 개 없네.’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가게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밝고 깔끔한 내부에는 가게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가구가 배치되어 있었다. 예전에 스텔라의 티파티에 초대 받았을 때도 생각했지만, 안목 자체는 훌륭했다.
일리아는 다시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점원을 불렀다.
“주문할게요.”
뒤로 물러서 있던 점원이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장미 꽃차와 레몬 케이크 주세요.”
주문을 받은 점원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정신 차린 스텔라가 빠르게 다가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찾아온 거야?”
“식사는?”
“했, 아니……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스텔라가 소리치자, 일리아는 한쪽 눈썹만 살짝 들어 보였다. 그러자 스텔라는 잠깐 수그러들긴 했지만,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일리아는 가만히 스텔라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쩍 마른 느낌이었는데, 살이 좀 붙은 것 같았다.
잠시 황궁 연회장에서 봤던 스텔라가 떠올랐다. 스텔라의 주변에는 추종자가 바글바글했다. 보기만 해도 피곤해졌지만, 스텔라는 오히려 즐기는 눈치였다.
일리아는 그것도 나름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에게 벽을 치는 자신과 달리, 스텔라는 적극적으로 사교계에 뛰어들었다. 거기다 감각도 있었기에 수많은 유행을 일으키며, 자사 제품을 완판시키기도 했다.
‘확실히 재능은 있는데…… 사업 운영에 약하단 말이지.’
일리아는 생각을 접어두고 스텔라에게 말했다.
“한 잔 사줄 테니, 시켜.”
“여기 내 가게거든?”
스텔라는 고개를 팩 돌리더니, 똑같은 장미차를 시켰다. 잠시 후 점원이 꽃차와 케이크를 가지고 왔다.
일리아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은은한 향기가 무척 좋았다. 이 차를 한 번 마신 후로는 다른 차는 맛이 없어서 곤란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