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63)
일리아는 찻잔을 내려놓고 스텔라를 응시했다. 예전이었다면 스텔라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사이가 나빴고, 지금도 앙금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다. 앙숙으로 지내온 세월이 길었으니 말이다.
스텔라가 제게 한 짓을 생각하면 선뜻 용서할 수 없었다. 카르한을 못살게 굴었던 적도 있었기에 더더욱. 그래서 일리아는 정말 많이 고민했다.
꼭 스텔라가 만든 꽃차가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밤낮으로 생각했지만, 다른 제품은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첫 사업인 만큼 무척 공들이고 있었고,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일리아는 스텔라의 꽃차가 필요했다.
그러다 며칠 전 카르한과 이야기하다가 우연히 스텔라 이야기가 나왔다. 오히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델로타 가문과 잠깐 협력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당신은 괜찮아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저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도 해서……. 델로타 영애가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스텔라에게 스토킹 당했던 카르한은 오히려 그녀에게 일말의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소심한 자신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지 못해서 스텔라에게 기대감을 심어주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말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한 남자라고 일리아는 다시금 생각했다.
카르한 생각을 그만둔 일리아는 레몬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그리고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스텔라의 티파티에서 먹은 디저트도 별로였지만, 이건 더 별로였다.
“케이크 먹어봐.”
“……디저트는 안 먹어.”
스텔라가 거절했다. 아직까지 체중 조절을 하는 모양이었다.
‘안 먹어보니까 자기 집 디저트가 맛없다는 걸 모르는 거 아냐?’
일리아가 미간을 찌푸리자, 스텔라는 오해했는지 말을 덧붙였다.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어.”
“뭐, 그건 됐고.”
일리아는 꽃차를 한 모금 마셔 입을 헹궈냈다.
“이번에 온천 사업 이야기 들었지?”
스텔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블로든 가문 부지에서 온천이 터졌다는 이야기는 소문이 워낙 크게 나서, 모를 수가 없었다.
“대형 휴양지를 짓는 중인데, 거기에 디저트 가게를 하나 열려고 해. 그래서 제안을 하나 할까 하는데.”
“……뭔데?”
“정기적으로 꽃차를 납품 받고 싶어.”
“제정신이야?”
스텔라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아무래도 자기 찻집에서 디저트 가게 이야기를 하니 발끈한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손님이 하나도 없는 가게를 둘러보았다. 스텔라가 꽃차로 대박쳐서 직접 디저트 가게와 찻집을 몇 번 운영했던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는 가게마다 족족 망했다. 차는 잘 만드는데, 가게 운영에 재능이 없는 것이었다. 아마 이 찻집도 몇 달 내로 접게 될 것 같았다.
협상하러 온 이상, 일리아는 스텔라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대신 다른 쪽으로 말을 꺼냈다.
“물론 네 꽃차 홍보도 넣어주고, 진열대에 상품을 비치할 생각이야.”
스텔라가 잠시 움찔했다.
“너도 가게 운영보다 꽃차 생산과 납품에 신경 쓰면 지금보다 더 잘될걸.”
“…….”
스텔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한 번 정도는 대박을 쳐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꾸역꾸역 가게를 열긴 했지만, 손해만 보고 있었다.
연달아 망하니, 부모님도 이제 슬슬 찻집 사업은 접어야 하지 않겠냐고 물어 왔었다. 그러나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스텔라는 입을 다물었다. 무엇보다 경쟁자인 일리아에게 자신의 약점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여는 디저트 가게는 냅킨 하나까지 최고급으로 구성할 거야.”
일리아의 말에 스텔라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네 꽃차가 필요해.”
스텔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일리아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드는 찻잎을 계속 찾아보는데, 네 꽃차만 한 게 없더라고.”
“…….”
“맛도 좋은데 상품 포장도 예뻐서 마음에 들어. 넌 안목이 좋으니,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상품을 만들 수 있겠지.”
“내가 안목이 좋다고……?”
스텔라가 무척 얼떨떨한 말투로 되물었다. 일리아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다기도 가게랑 잘 어울리고 색감 배치도 훌륭해.”
찻잔을 내려놓은 일리아가 느슨한 시선을 보냈다.
“저번에 보니까 정원도 잘 꾸며 놨던데.”
물론 그 정원에 심어놓은 꽃은 일리아가 팔아넘긴 것이었다. 하지만 꾸미는 것은 스텔라의 능력이었다.
“난 그런 거 잘 못하거든.”
일리아의 마지막 말에 흔들리던 눈동자가 멎었다. 아무 말 않던 스텔라는 두 손으로 드레스자락만 움켜쥐었다. 어느새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델로타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로 자라온 스텔라는 인정받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했다. 그러나 다들 스텔라를 인정해주는 대신, 일리아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해 왔다.
죽기 살기로 일리아를 뒤따라갔지만, 재능과 운은 이길 수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일리아라는 거대한 그늘 아래를 걸어올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경쟁자인 일리아가 자신을 인정해준 것이었다.
혼자만 경쟁자라 생각하고 일리아는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줄 알았는데……. 어떤 순간보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스텔라는 심호흡을 내뱉었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고민할 시간을 줘.”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텔라의 감각이 있으면 블로든 가문에서 개량한 꽃을 이용해 새로운 꽃차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특별한 꽃차일 터였다. 스텔라는 움켜쥐고 있던 드레스자락을 놓으며 웅얼거렸다.
“만약 내가 꽃차를 납품한다고 해도, 넌 계속 경쟁자야.”
“걱정 마. 나도 너랑 친구처럼 지낼 마음은 없으니까.”
단칼에 돌아온 대답에 스텔라의 속눈썹이 잠깐 흔들렸다. 일리아는 이미 식어버린 차를 마셨다.
앞으로도 스텔라와 허물없는 친구처럼은 지낼 수 없을 것이다. 서로에게 상처 받아온 기억은 완전히 지워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스텔라는 계속 경쟁자로 남아줬으면 했다. 그편이 훨씬 재밌을 것 같았다.
차를 전부 마신 일리아는 이만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때 스텔라가 입을 열었다.
“……리하트 테르시안 말인데.”
일리아가 멈칫하자, 스텔라가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우리 집 찾아왔었어.”
“왜?”
“네 약점을 알려줄 테니까 돈 달라고.”
일리아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둘이 아무 접점도 없을 텐데, 이제 하다 하다 스텔라에게 찾아간 모양이었다.
“……무슨 일 저지를 것 같아서. 경고해주는 거야.”
별다른 의미는 없다고 스텔라가 덧붙였다.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텔라는 입술을 달싹였다. 뭔가 망설이는 눈치였다.
“하고 싶은 말 있어?”
“사실, 이전에 리하트 테르시안하고 잠깐 협력한 적이 있는데…….”
일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레 놀란 스텔라가 빠르게 외쳤다.
“나도 좀 아닌 것 같아서 금방 발 뺐어. 내가 도운 건 에반테온 공작가 고용인을 매수해준 거뿐이야……!”
스텔라의 변명에 일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리하트가 자신도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이 이상하긴 했다. 카르한이 임시 후계자라는 걸 알아내서 제게 일러바치러 오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카르한을 진짜 후계자로 앉혀야겠다고 결심하긴 했지만…….
이제야 의문이 전부 풀렸다. 생각에 잠겨 있던 일리아가 아무 말 하지 않자, 스텔라가 우물쭈물하다가 중얼거렸다.
“……그건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사과보다는 인정에 가까웠지만, 자존심이 강한 스텔라를 생각하면 이 정도도 큰 발전이었다.
“그래.”
일리아는 덤덤히 대답해주었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고 딱히 손해 본 것은 없었다. 도리어 리하트가 난동을 부렸기에 카르한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스텔라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에반테온 소공자 말인데…….”
카르한이 언급되자, 일리아의 부드러운 눈매가 약간 치켜 올라갔다. 스텔라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달싹여, 참았던 숨과 함께 목소리를 내뱉었다.
“……미안하다고 전해줘.”
일리아는 스텔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무척 단호히 말했다.
“네가 직접 만나서 제대로 사과해.”
스텔라가 고개를 들어 일리아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일리아는 금화 한 개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차 잘 마셨어. 찻값 두고 간다.”
일리아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딸랑, 하고 문에 달아둔 종 소리가 들려왔다. 스텔라는 일리아가 마셨던 찻잔을 바라보았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텅 비어 있었다.
***
에반테온 공작저 후원에는 아름드리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촘촘히 드리운 나무 그늘 아래, 티세트가 놓였다. 작은 테이블 앞에는 레베타 에반테온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던 손이 멈추었다. 레베타는 다음 문장을 읽지 못하고 그대로 시집을 덮었다. 또다시 이전에 있었던 일이 불쑥 생각난 탓이었다.
얼마 전 그녀는 남편인 에반테온 공작과 함께 잠깐 외출했다. 황제께 직접 받은 오페라 표를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오페라 극장에서 블로든 가문 사람들과 카르한을 만났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그렇게 학대하겠어요. 그렇죠?
간혹 일리아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후로 레베타는 카르한을 대했던 자신의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방에서 나오지 마!
-정말 구제 불능이야.
-어쩌다 너 같은 걸 낳았을까.
너무 화가 나는 날에는 손찌검도 서슴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자신의 행동은 학대가 분명했다. 레베타는 다시금 괴로워졌다. 마치 카르한의 이상 행동을 처음 목격했을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만 해도 내 아들은 착한 아이니까 잘 달래줘야지, 자신이 이해해줘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르한은 거짓말을 일삼았고, 점점 손버릇이 나빠졌다.
한번 의심하고 나니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전부 카르한의 소행 같았다. 한참 고민한 끝에 레베타가 취한 행동은 도피였다.
부모는 아이가 어떤 짓을 하든 품어줘야 한다고? 아니, 그랬으면 자신이 먼저 미쳤을 것이다. 이상한 것은 카르한이었고, 같은 상황에 처했으면 다들 자신처럼 행동했을 터였다.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나서야 마음이 진정되었다.
하지만 간혹 아주 먼 과거가 떠올랐다. 카르한을 처음 품에 품었던 날. 관심 없어하는 공작을 대신해 자신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었던 일. 장남인 블레어드와 달리 카르한은 온전히 저 혼자 키워냈기에 그만큼 애착이 컸다.
저를 향해 웃어주던 어린 카르한을 떠올린 레베타는 고개를 내저었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과거의 환영을 쫓아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마님, 서신이 왔습니다.”
다시 책을 읽으려는데, 고용인이 후원에 찾아왔다. 서신을 받은 레베타는 봉투에 적힌 이름을 보고 반색했다. 블레어드가 보낸 것이었다. 곱게 봉투를 뜯은 레베타가 편지지를 꺼내들었다.
첫 글귀는 구구절절한 안부인사로 시작되었다. 레베타는 글자 하나하나 소중히 읽어 내렸다.
[저는 어머니께서 돌봐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지만, 오랫동안 어머니를 뵙지 못하니 무척 그립습니다.] [여름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감기가 지독하다 하니 몸조심하십시오. 어머니께서 아프시면 제 마음이 아픕니다.]편지는 온통 레베타를 걱정하고 있었다. 내용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은 레베타는 편지지를 곱게 접어서 다시 봉투에 넣었다. 이 세상에서 레베타를 위해 줄 사람은 오직 블레어드뿐이었다.
레베타는 답장을 쓰기 위해 고용인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 명령했다. 고용인이 잠시 후원을 떠난 사이, 한 남자가 찾아왔다. 카르한에게 붙여두었던 감시인이었다.
“마님, 소공자께서 검술 대회에 출전했다는 정보입니다.”
“검술 대회?”
“예. 황실에서 주최한 검술 대회인데, 벌써 64강에 올랐다고 합니다.”
카르한이 매일같이 어디론가 빠져나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봤자 블로든 저택만 오가는 것이 전부였다. 어차피 블로든 가문과 약혼시켜야 했고, 고작 저택 안에서 뭘 하겠나 싶어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검술 대회에 출전했다니. 한참 생각하던 레베타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검술을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카르한이 우승할 리 없었다. 지금까지는 요행으로 올라갔다 한들, 쟁쟁한 수재들이 전부 모이는 대회가 아닌가.
오랫동안 전쟁터를 누볐다 한들, 훈련 받지 않은 검술은 시정잡배의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사람을 죽여 사고를 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그렇게 되면 잠시 수그러든 나쁜 소문에 확신을 심어줄 것이 분명했다.
“내버려두거라.”
오히려 카르한의 평판을 떨어뜨릴 기회일지도 몰랐다.
***
검술 대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카르한은 그사이 16강까지 올라왔다. 예선전과 달리, 상대가 카르한을 보자마자 기권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카르한과 맞붙어서 세 합을 넘기지 못했다.
그 때문에 아직 결승도 아니건만, 사람들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666번이 괴물 같은 실력자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말이다.
경기가 끝나고 블로든 저택에서는 작은 파티가 열렸다.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 블로든 가문 사람들의 모습에 카르한은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마지막 경기를 치르고 일주일이 흐른 오늘. 16강과 8강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출전자가 적은 만큼 관중석은 친지보다는 진짜 검술대회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카르한은 대기실에 앉아서 앞 경기를 지켜보았다. 실력이 비등비등해서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팽팽한 시합이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공방이 오간 끝에 결국 45번이 승리를 거두었다.
막 경기를 치른 두 사람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45번은 잔뜩 들뜬 얼굴이었고, 그와 붙었던 172번은 의자에 털썩 앉더니 겨우 울음을 삼켰다.
대기실과 이어진 통로에서 172번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가족들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한숨만 내쉬던 172번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 쪽으로 향했다.
카르한도 덩달아 그쪽을 응시했다. 제법 극성인 가족들이어서 카르한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꾸 대기실 통로까지 찾아와서 응원하거나, 힘내라며 이런저런 간식을 쥐여 주곤 했었다. 이윽고 시끄러운 목소리가 대기실 안까지 들려왔다.
“이런 쓸모없는 자식!”
“벌써 지다니, 네 친척들을 볼 낯이 없구나!”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마치 자신이 야단맞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15번, 666번 대기해주세요.”
대회 안내인의 말에 카르한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카르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경기장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발걸음 소리에 맞춰서 쿵쿵,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대기실을 벗어나 완전히 경기장으로 나서자,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원형으로 둘러싸인 관중석에서 수많은 시선이 쏟아졌다. 모두가 그를 보고 있었다.
카르한은 겨우 고개를 들어,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을 응시했다. 다들 웃으며 카르한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카르한은 그들과 똑같이 마주 손을 흔들려 했다. 그러나 몸이 고장 난 것처럼 제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경례.”
어느새 상대가 마주 서고, 서로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마친 카르한은 칼집에서 검을 뽑으려 했다.
“…….”
검 손잡이에 닿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카르한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그러나 떨림은 쉽사리 멎지 않았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카르한은 알 수 없었다. 이미 수많은 경기를 치러오지 않았던가. 가야 할 길이 먼데 벌써부터 긴장하게 되면…….
카르한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다시 관중석을 바라보았다. 일리아와 잠깐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카르한은 두려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실망시킬까 봐 겁이 나는 것이다.
카르한은 지금껏 블로든 가문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뭐든 실패 없이 해내왔다. 예술 분야부터 후계자 수업, 검술 훈련까지……. 다들 잘하고 있다고, 이대로만 하면 된다고 칭찬해주었다.
만약 여기서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까 경기에서 진 사람처럼 되는 걸까. 온갖 상념과 함께 막대한 부담이 카르한을 짓눌러왔다.
이런 기분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지금껏 누구도 카르한에게 기대를 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실패해도 덤덤히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카르한을 끝까지 믿고 응원해주었다. 자신이 보답할 길은 우승뿐이었고, 실패는 용납할 수 없었다.
“666번?”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카르한은 뒤늦게 정신 차렸다. 상대는 이미 검을 뽑고 기다리고 있었다. 카르한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빼들었다. 어찌나 손 떨림이 심한지, 쭉 뻗은 칼날이 바람에 휘날리는 꽃대처럼 보였다.
심판이 경기 시작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두 자루의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카르한은 단 한 합 만에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자신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잔뜩 긴장한 몸이 마음처럼 움직여주질 않았다. 공격을 할까, 방어를 할까. 혹시 자세가 어긋나지는 않았을까. 카르한이 머뭇거리는 사이, 상대의 검은 점점 더 빠르고 날카로워졌다.
그에 비해 카르한은 방어하기 급급했다. 누가 보아도 카르한이 밀리는 모양새였다. 카르한은 애써 잡념을 떨쳐내고 검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잔뜩 힘을 실어 날아오는 검을 쳐냈다. 상대의 팔이 크게 흔들리더니, 결국 검을 놓치고 말았다.
“……666번 승리!”
심판의 판정에 카르한은 숨을 내뱉었다. 고전 끝에 겨우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다음부터는 자세에 유의해주십시오.”
카르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허리춤에 집어넣고 대기실로 들어왔다. 구석으로 향한 카르한은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앉았다. 손 떨림은 아까보다 더 심해졌다.
아직도 경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한참 그러고 있던 카르한은 저를 부르는 희미한 목소리를 들었다.
“카르한.”
카르한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대기실 안으로 고개만 빼꼼 내민 일리아가 보였다.
일리아를 발견한 카르한은 표정이 확 풀어졌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지금은 일리아를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실망시키는 것도 싫었다.
그러나 일리아를 저대로 세워둘 수 없었기에, 카르한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복도로 나오자 일리아가 카르한을 구석구석 살폈다.
“뭔가 이상해 보여서 내려왔어요. 몸 상태가 안 좋은 거예요?”
“……아닙니다.”
“아프지 않다니 다행이에요. 다들 걱정했어요.”
카르한이 입술을 잘근 깨문 채 눈을 피했다. 그 모습에 일리아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어깨가 심하게 떨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일리아는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카르한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솔직하게 말해줘요.”
일리아가 저렇게 물을 때마다 카르한은 숨길 수 없어졌다. 한참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겨우 목소리를 내뱉었다.
“……실패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모두를 실망시킬까 봐.”
“카르한.”
일리아가 조용히 카르한을 불렀다. 카르한이 서서히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맑은 보라색 눈동자에 잔뜩 위축된 카르한의 모습이 비쳤다.
“우리는 완벽한 당신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카르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카르한을 마주 보던 일리아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아, 그의 떨리는 손을 보았다.
“지더라도 괜찮아요.”
“…….”
“당신은 지금까지 충분히 노력했고, 우린 그걸 알고 있어요.”
손을 뻗은 일리아가 카르한의 손을 잡아주었다. 평소보다 차가운 두 손이 일리아의 작은 손에 붙잡혔다.
“처음 대회에 출전해서 여기까지 오른 게 얼마나 대단한데요.”
벌써 8강이었다. 천 명이 넘는 사람 중, 여덟 번째 안에 든 것이다. 우승하지 않더라도 카르한의 강함은 입증되었다. 그리고 찾아보면 검술 대회 말고도 입지를 다질 기회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