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64)
일리아는 카르한의 손을 꼭 쥐었다가 놓아주며 씩 웃었다.
“경기에서 지는 건 실패가 아니라, 다음 기회를 남겨두는 거예요. 내년 대회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함께할 거잖아요.”
“계속…….”
카르한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둠에 드리우는 햇살처럼 일리아의 말이 가슴을 파고들어왔다. 카르한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떨림이 멎은 채였다.
긴장이 완전히 달아났다면 거짓말이었지만, 부담은 훨씬 덜어졌다. 전신을 억누르던 승리에 대한 압박감이 사라진 것이다. 카르한이 움츠러든 어깨를 서서히 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일리아는 응원 대신 가벼운 한마디를 남겼다.
“나중에 맛있는 거 먹어요.”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가 다시 관중석으로 올라가고, 카르한은 심호흡을 내뱉었다. 폐부를 찔러오는 공기가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조금씩 머릿속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666번 대기해주세요.”
손바닥을 한번 폈다가 접은 카르한이 경기장으로 발을 내딛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함성과 시선이 무섭지 않게 느껴졌다. 경기장 중앙까지 걸어간 카르한은 블로든 가문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경례.”
상대와 마주 선 카르한이 반듯한 인사를 건넸다. 카르한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칼을 빼들었다. 곧게 뻗은 칼날은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심판의 목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검이 맞부딪쳤다. 채앵- 날카로운 소리가 경기장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다. 잡념 하나 섞이지 않은 검이 곧바로 흐름을 탔다.
비올레에게 배운 대로 힘을 빼고 부드럽게 다음 동작으로 넘어갔다. 검의 궤적이 별자리처럼 한 점으로 이어졌다. 상대가 방어하기 위해서 몸을 뒤로 뺐을 때, 카르한은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
카르한의 검이 상대의 목 아래에서 멈추었다. 순식간에 승패가 갈린 것이다.
“666번 승리!!”
거대한 함성이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에 사람들이 열광했다. 어마어마한 응원을 들으며 카르한은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일리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일리아는 쏟아지는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에 보답하듯 카르한이 마주 웃었다.
***
“적어도 이틀은 푹 쉬도록 해요.”
준결승과 결승만을 앞두고 있는 카르한에게 비올레가 말했다.
“잘 쉬는 것도 훈련이니까요.”
간만에 훈련을 쉬게 된 카르한은 일리아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리아는 아침 일찍 일이 생겨서 외출한 상태였다.
카르한은 지금부터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따로 수업도 없었고, 그렇다고 공작저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산책이나 하며 책을 읽을까 고민하던 그때였다.
“소공자.”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카르한이 고개를 돌렸다. 편안한 복장을 한 헤인리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쉬는 날인 듯했다.
“바쁘십니까?”
헤인리의 물음에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잠깐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까.”
“예.”
카르한은 조금 긴장한 채 대답했다. 헤인리와 마차를 함께 탄 이후로 제법 가까워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눈치를 보게 되었다.
카르한은 헤인리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서관 복도 끝에 화려한 장식이 달린 문이 하나 있었다. 헤인리가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제가 무척 아끼는 공간입니다.”
헤인리는 카르한에게 자랑하고 싶은 눈치였다. 평소에 과시욕이 없던 헤인리였기에 이 방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천천히 문이 열리며 내부가 보였다. 커다란 방 안을 가득 채운 것은 수십 개의 액자였다.
“!”
액자에 담긴 그림을 확인한 카르한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전부 일리아의 초상화였다.
“분기마다 초상화를 그려두었지요.”
헤인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일리아가 작은 아기일 때부터 시작해서 성인이 된 모습까지 순차적으로 걸려 있었다. 카르한은 초상화에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
어릴 적의 일리아는 정말로 천사 같았다. 발그레하고 통통한 뺨과 양 갈래로 묶은 머리까지, 어쩜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무척…… 귀엽습니다.”
미사여구를 곁들일 줄 모르는 카르한이 순수하게 칭찬했다. 정신없이 초상화를 구경하던 카르한이 질문했다.
“이 초상화는 몇 살 때입니까?”
“8살 때입니다. 이 사이 많이 자랐지요?”
헤인리는 그 시절에 있었던 비화를 줄줄 말해주었다. 기억력이 좋아서 그런지 사소한 이야기까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카르한은 토씨 하나 잊지 않으려고 경청했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질문을 던졌다.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초상화를 감상했다. 그러던 카르한은 커다란 곰인형을 안고 있는 일리아의 초상화를 보았다.
“이상하게도 예전부터 토끼인형보단 곰인형을 좋아하더군요.”
제 몸집만 한 곰인형을 안고 있는 일리아는 행복해 보였다. 카르한은 왠지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꼈다. 일리아에게 안겨있는 저 곰인형이 자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초상화를 구경하던 카르한은 어느 그림 앞에서 멈추었다.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든 탓이었다. 카르한은 소녀 시절의 일리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초상화 외에 다른 물건도 있습니다.”
헤인리는 이어진 다른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모여 있었다. 그가 구석에 놓여 있던 거대한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전부 일리아가 제게 써준 편지입니다.”
카르한은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일리아가 직접 써준 편지라니.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가질 수 없는 귀중한 물건이었다. 카르한의 반응에 헤인리는 무척 뿌듯해하며 말했다.
“아카데미에 가 있을 때 일주일에 한두 통은 꼬박꼬박 보내왔지요.”
“정말…… 좋으셨겠습니다.”
“매일 편지만 기다렸을 정도였습니다.”
그때를 회상하는 헤인리의 표정은 무척 부드러워 보였다. 두 사람은 한창 방을 구경했다. 일리아가 과거에 쓰던 물건부터 헤인리에게 선물했던 것까지 다양했다. 보물 창고를 찾은 것처럼 카르한의 가슴이 계속 두근거렸다.
다시 액자가 걸린 방으로 나온 헤인리는 성인이 된 일리아의 초상화 앞에서 멈춰 섰다. 훌쩍 커버린 일리아는 은은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어릴 적의 환한 미소와 사뭇 달라 보였다. 초상화를 바라보던 헤인리가 중얼거렸다.
“일리아가 누구와 결혼해도 마음에 차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소공자라면 왠지 안심이 됩니다.”
일리아를 행복하게 해줄 것 같다고, 헤인리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고개를 돌린 그가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부드러운 연녹색 눈동자에 카르한이 비쳤다.
“어머니께 따로 검술 훈련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괜찮다면 저도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카르한은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작위를 이어받으려면 행정이나 서류 처리 능력도 필수지요.”
“……예, 그건 전부 테시온이 처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카르한이 처리해야 할 서류는 테시온이 도맡았다. 초대장이나 서신 같은 것도 그가 1차적으로 분류해주었다.
“소공자의 보좌관이 유능하긴 하나, 본인이 직접 처리할 줄도 알아야지 않겠습니까.”
카르한은 가슴이 뜨끔해졌다. 확실히 작위를 계승하게 되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업무량이 늘어날 것이다. 테시온 혼자서는 처리할 수 없을 터였다.
지금껏 너무 테시온에게만 의지한 것 같아서 카르한은 속으로 반성했다. 그런 카르한을 바라보던 헤인리가 은테 안경을 추어올리며 말했다.
“행정 업무와 서류 결재는 제가 전문입니다.”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헤인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디에서도 못 받는 수업, 받아보시겠습니까?”
***
결승 경기를 하루 남겨둔 저녁, 에반테온 공작의 호출이 있었다. 전에 헤인리의 문제로 찾아갔던 후로 독대는 처음이었다.
카르한은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두 번 노크한 후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은은한 불빛으로 가득 찬 방이 드러났다.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에반테온 공작이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카르한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공작은 왔느냐는 흔한 인사말조차도 없이 입을 열었다.
“요즘 헛짓거리를 하더군.”
검술 대회에 참가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전부 부질없는 짓이다. 네 본분을 망각하지 마라.”
아무리 날뛰어도 결국 임시 후계자일 뿐이니, 알아서 기권하라는 경고였다. 카르한은 친부인 에반테온 공작을 바라보았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서늘한 얼굴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카르한과 공작은 많이 닮아 있었다. 그러나 카르한에게 에반테온 공작은 레베타보다 더 먼 사람이었다.
에반테온 공작은 오래전부터 가정에 관심이 없었다. 레베타와 결혼한 뒤로도 여전히 애인에게 마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공작으로서 본분만 지켰고, 집안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자신과 상관없다고 선을 긋고 귀를 막았다.
공작은 레베타와 마찬가지로 카르한을 꺼려했다. 블레어드의 경우에는 후계자가 필요해 낳았지만, 카르한은 그의 계획에 없던 자식이었다. 심지어 레베타를 사랑하는 애인으로 착각하여 품었다가 생긴 오점이었다.
철저한 방관자였던 그는 레베타의 소원대로 카르한을 전쟁터로 보냈다. 카르한은 쓸모없는 여분의 존재와 같았기에, 전쟁터에서 죽어도 딱히 아쉬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침묵하던 카르한이 덤덤히 대답했다.
“하실 말씀은 끝나신 겁니까.”
제 말을 듣지 않겠다는 뜻임을 알아차린 공작이 미간을 좁혔다. 그는 가만히 카르한을 노려보다가 이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분쟁 지역에 다녀와야 하는 건 잊지 않았을 테지?”
검술 대회에서 우승해봤자, 곧장 분쟁 지역으로 떠나야 함을 상기시켜주었다. 카르한의 속눈썹이 짧게 흔들렸다. 그제야 공작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결국 제 손바닥 안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가봐라.”
건조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카르한은 곧바로 집무실을 나왔다. 카르한의 표정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벌써 늦여름이었다. 여름이 끝나거든 분쟁 지역으로 떠나라 했으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카르한은 아직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적어도 비올레나 일리아에게는 말해야 할 것 같은데, 계속 미루고 말았다. 완벽하게 숨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헤인리 때문에 분쟁지역으로 가게 됐다는 사실을 알면 일리아가 죄책감을 가질 것이 분명했다.
카르한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카르한을 기다리고 있던 테시온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테시온이 봐도 제 얼굴이 무척 심각해 보인 모양이었다. 카르한은 테시온을 바라보다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조만간 분쟁 지역에 가야 할 것 같다.”
“아니, 어째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테시온이 물었다.
“에반테온 공작께서 결정하신 일입니까?”
카르한은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대신 단호히 말했다.
“나만 가면 되는 일이니 따라올 필요는 없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카르한 님께서 가시는 곳은 전부 따라갈 겁니다.”
카르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카르한은 더 이상 테시온에게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단칼에 거절당한 테시온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블로든 영애께서는 아십니까?”
카르한은 침묵했다. 테시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왠지 화가 난 얼굴로 카르한을 보며 말했다.
“이미 각오한 일이니까 말리지 마십시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카르한 님을 따라갈 겁니다.”
테시온은 바로 방을 나가버렸다.
***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오후. 검술 대회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라 황궁은 평소와 달리 시끌벅적했다.
카르한은 경기 준비를 하러 아침 일찍 황궁에 입궁했다. 오늘 준결승을 치른 다음 곧바로 결승전이 이어질 예정이었다.
황궁 연무장을 가운데 두고 어마어마하게 많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검술 대회를 구경하러 온 귀족들로 가득 차 빈자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중앙에는 황족들이 앉아 있었고, 오른편에는 에반테온 공작 부부가 자리했다. 낯이 익은 이들도 제법 보였다. 미술관에서 연을 맺게 된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 에반테온 원로들, 연회에서 친분을 다진 이들.
마지막으로 블로든 백작 부부와 헤인리가 카르한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일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일이 있어서 조금 늦게 올 모양인 듯했다.
“카르한 에반테온 님, 대기해주십시오.”
666번이 아닌,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이었다. 벌써 이만큼이나 올라왔구나 싶었다.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간 카르한은 곧바로 준결승을 치렀다. 상대는 프란체와 마찬가지로 속공으로 밀어붙이는 유형이었다. 프란체와 대련한 경험이 있는 카르한은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카르한은 수건을 받아 땀을 닦았다. 주위를 둘러보던 카르한은 레베타를 발견했다. 누가 보아도 그녀의 표정은 무척 나빠 보였다. 카르한이 결승전까지 올라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눈이 마주치자, 레베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가버렸다. 시선을 거둔 카르한은 다시 일리아를 찾았다. 여전히 일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싶어서 괜히 걱정되었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경기가 끝날 때까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고민하던 카르한은 의자에 앉아 다음 경기를 지켜보기로 했다. 저 경기에서 이긴 사람과 결승에서 맞붙게 되는 것이었다.
심판이 시작을 알리고, 칼날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 번의 공방이 오갔을 때, 카르한은 누가 이길지 바로 알아차렸다. 카르한이 예상한 대로 검푸른 머리카락을 한 사내가 승리를 차지했다.
“하베론 라베르트 님의 승리!”
주위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하베론이라 불린 사내는 이번 대회의 유력한 우승 후보였다. 대대로 기사를 배출한 가문의 장남이자, 아카데미 검술부에서 수석을 놓친 적 없는 엘리트 중 엘리트였다.
결승전은 하베론이 충분한 휴식을 취했을 즈음 이루어졌다.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가는 카르한의 어깨가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이제 결승인데, 아직도 일리아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판이 카르한을 힐끗 보았다. 그 시선이 조금 미묘해서 카르한은 눈만 깜빡였다.
“경례.”
인사를 나눈 후, 두 사람은 동시에 검을 뽑아들었다. 심판이 경기 시작을 알리자마자, 카르한은 곧바로 공격을 가했다. 묵직한 힘이 실린 검이었지만, 하베론은 생각보다 능숙하게 공격을 받아냈다.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공방이 오갔다. 카르한은 하베론이 자신과 완전히 상반된 검술을 지녔다는 걸 눈치챘다.
하베론의 검술은 정석 그 자체였다. 대회에 가장 적합했으며, 이어지는 동작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기본기 없이 사람을 베는 법을 먼저 배웠던 카르한과 너무나 달랐다. 비올레조차 교과서적인 검법에서 약간 변형된 검술을 사용했기에, 유독 까다롭게 느껴졌다.
카르한은 익숙해지기 위해서 그의 검을 받아내는 것에 집중했다. 조금씩 밀려나던 카르한은 마침내 하베론의 검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카르한은 두 손으로 검을 움켜쥐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반격에 들어갔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몇 번이나 검이 맞부딪쳤다. 팽팽한 기류에 전신이 오싹거렸다. 공략을 찾은 카르한이 자신 있게 공격을 가했다. 막상막하로 보이던 경기가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르한이 승기를 잡은 순간이었다.
“잠깐!”
심판의 외침에 카르한과 하베론이 동시에 멈추었다. 경기가 잠시 중단되자, 심판이 외쳤다.
“방금 자세는 반칙패를 당할 수 있으니 주의해주십시오.”
심판이 카르한에게 경고를 주었다. 카르한은 자신의 자세에 문제가 있었는지 되새겨보았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심판이 그렇다고 하니 유의할 생각이었다. 시합이 재개되고, 끊어진 흐름을 찾아오기 위해서 애썼다. 하지만 카르한 쪽이 우세해질 때마다 심판은 자꾸 경기를 끊고 경고를 주었다.
몇 번이나 반복되다 보니 카르한의 행동 범위가 점점 좁아졌다. 혹시 이것도 경고를 받을까 싶어 소극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계속 경고가 이어지자, 카르한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심판이 자신에게만 불리한 판정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공방이 너무 빠르게 오가니, 반칙인지 아닌지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몇몇 사람들만 고개를 갸웃하거나 소곤거릴 뿐이었다. 그렇다면…….
-체력은 자신 있지요?
비올레의 말을 떠올린 카르한은 자세를 바로 잡고 방어에 주력했다. 시합이 길어지자 하베론의 검이 조금씩 둔탁해지기 시작했다.
“…….”
공격이 통하지 않자, 하베론이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틈이 있는 것 같은데, 그곳을 공격하면 곧장 막혀버렸다. 거기다 카르한은 지치지도 않는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칼 한 자루로 철옹성을 베어내는 기분이었다.
하베론은 이대로라면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본능으로 느꼈다. 이를 꽉 깨문 그는 일격으로 시합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손잡이를 단단히 틀어 쥔 하베론이 온 힘을 다해 카르한에게 파고들었다.
그때 웅크리고 있던 맹수가 이를 드러내듯, 카르한이 처음으로 공격을 취했다. 강한 힘이 실린 검이 동시에 맞붙었다.
카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부러진 칼날이 허공을 베어냈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검 반쪽이 하베론의 동공에 비쳤다. 카르한의 검은 이미 하베론의 목 아래에 자리 잡은 후였다. 부러진 것은 하베론의 검이었다.
툭, 날붙이가 잔디 위로 떨어지고 주위가 침묵에 휩싸였다. 멍하니 지켜보던 심판이 입술을 달싹였다. 꼬투리 잡을 구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심판이 결국 승리를 선언했다.
“카르한 에반테온 님의 승리……!”
심판의 판정과 함께 귀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방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우승을 차지하자마자 카르한은 관중석을 돌아보았다. 수많은 사람 틈에서 햇살처럼 환한 금발을 찾았다. 그러나 일리아는 보이지 않았다.
카르한은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분명 지금쯤이면 일리아가 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승전에는 반드시 참석하겠다고 그랬는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카르한이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자, 안내인이 그를 불렀다.
“바로 우승 시상식이 있겠습니다.”
블로든 백작 부부에게 갈 틈도 없이, 카르한은 곧바로 황제의 앞으로 불려 나갔다. 카르한을 기다리고 있던 황제가 무척 흐뭇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두에게 귀감이 될 만한 실력이었다.”
황제는 연설에 가까울 정도로 공로를 치하한 뒤, 시종관에게 눈짓했다. 시종관이 다가와 검을 내밀었다. 검을 받아든 황제가 말했다.
“앞으로도 제국을 빛내주도록.”
카르한은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검을 받아들었다. 황제는 카르한의 어깨를 두드려준 후에 퇴장했다. 카르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많은 이들이 카르한의 주변을 둘러싸고 축하해주었다.
“소공자가 이길 줄 알았습니다!”
“무척 훌륭한 솜씨였습니다. 축하합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이 다가와, 눈물을 글썽이며 잘했다고 칭찬했다. 에반테온 공작 부부는 이미 자리를 뜬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말을 걸어왔으나, 카르한은 지금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었다. 카르한은 양해를 구한 후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블로든 백작 부부와 헤인리는 갑옷을 갖춰 입은 기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왠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카르한이 다가오자 세 사람은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굳어진 비올레가 입을 열었다.
“소공자, 일리아가 납치된 것 같아요.”
카르한이 우뚝 멈추었다. 멈춰버린 심장이 그대로 곤두박질 쳤다.
“수도 경비대 전체에 연락을 넣어두었는데, 지금 우리도 수색에 나설…….”
주위의 모든 소리가 멎은 것 같았다. 비올레의 말조차 아득하게 들려왔다.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카르한의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서 있던 카르한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황제에게 받은 검을 움켜쥔 채 곧바로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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