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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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검술 대회 결승전이 있는 날 아침. 일리아는 아침 일찍 방문한 손님을 보고 깜짝 놀랐다.
“테시온, 어쩐 일이에요?”
혹시 카르한도 왔나 싶어서 일리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리아가 카르한을 찾는다는 걸 눈치챈 테시온이 입을 열었다.
“저 혼자 왔습니다. 혹시…… 잠깐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왠지 심각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근처 응접실로 들어갔다. 일리아는 고용인에게 허브 차를 준비해 달라 일렀다. 일리아와 테시온이 마주 앉고,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일리아는 재촉하지 않고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었다. 바닥만 내려다보던 테시온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카르한 님께서…… 분쟁 지역으로 떠나시게 생겼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일리아는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말만 분쟁 지역이지, 결국 전쟁터가 아닌가. 일리아는 놀라서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무슨 일로요?”
“이유는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여름이 끝난 후라는 말씀밖에…….”
테시온이 말을 흐리자, 일리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분명 공작 부부의 소행일 것이다. 카르한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아예 치워버리려는 속셈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카르한은 공식적인 에반테온 가문 후계자였다. 게다가 이제 평판도 좋아졌고 입지도 어느 정도 다진 상황이었다. 거절하고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 제가 물어볼게요. 그런 다음 함께 대책을 찾아 봐요.”
“감사합니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테시온이 울먹이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그는 대회 준비를 하러 먼저 돌아가 보겠다고 말했다. 테시온이 떠나고, 일리아는 이미 식어버린 허브 차를 바라보았다. 심란하다 못해 머릿속이 복잡했다.
카르한에게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무슨 연유인지도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정해진 일인지, 아니면 제게 비밀로 한 것인지. 전쟁터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었다고 또…….
“아가씨, 준비하셔야 합니다.”
말렉이 일리아를 불렀다. 정신 차린 일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고민하다 보니 벌써 늦은 오전이었다. 지금부터 슬슬 준비해야, 경기 시작 전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말렉, 프란체 불러주고 마차 대기시켜줘.”
“예.”
일리아는 침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연무장에서 경기가 열릴 예정이었기에, 일리아는 폭이 좁고 활동하기 편한 드레스를 입었다.
현관으로 내려오니,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부모님은 볼일을 본 후에 황궁으로 곧장 간다고 들었고, 헤인리는 아침 일찍 황궁에 출근했다. 자신만 따로 출발하면 되는 것이다.
일리아는 간이 계단을 밟고 마차에 올라탔다. 프란체와 말렉이 맞은편에 앉자 마차가 출발했다. 저택을 빠져나온 마차는 황궁으로 향했다.
창밖을 바라보자 묘하게 눈에 익은 풍경이 보였다. 올해 들어 황궁을 방문하는 게 벌써 세 번째였다. 블로든 저택에서 황궁으로 가는 지름길은 하나뿐이었기에 익숙해진 것이다. 마차는 대로로 나가기 전, 한적한 골목을 통과했다.
“!”
잘 달리던 마차가 급하게 멈추었다. 내부가 크게 흔들리자, 일리아는 반사적으로 마차 손잡이를 붙들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말렉이 다급히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일리아가 중얼거렸다.
“설마 또 사고가 난 건가?”
그때 밖에서 마부가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와서……!”
왠지 바깥이 시끄러웠다. 날카로운 소리와 사람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프란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형님.”
다시 마차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은 프란체가 조용히 말렉을 불렀다.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눈치챈 말렉이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아가씨, 절대 나오지 마십시오.”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프란체와 말렉이 마차 문을 열고 나갔다. 마차 주위로 검을 든 사내 여럿이 둘러싸고 있었다.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훈련 받은 용병으로 보였다. 프란체와 말렉이 동시에 검을 빼들었다.
“공격해!!”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그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프란체는 제게 덤비는 두 놈을 단숨에 제압했다. 덩치 큰 용병들도 프란체와 정면으로 붙으니 금방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프란체가 완전히 우세한 것도 아니었다. 머릿수도 많고 좁은 골목인지라 상대하기 번거로웠다. 사방에서 한꺼번에 달려드니, 한눈팔 수가 없었다.
프란체가 대다수의 용병을 맡는 사이, 말렉은 마차 문에 딱 달라붙어서 접근하는 놈들을 상대했다. 용병들은 마치 일리아의 호위기사들을 잘 알고 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유독 프란체에게 인원이 많이 붙은 것도 그러했다.
하지만 프란체와 말렉이 밀리지 않자, 용병들은 슬슬 당황하는 눈치였다. 머릿수로 밀어붙여도 고작 발을 묶어두는 것이 전부였다. 이대로 시간을 끌어봤자 불리할 뿐이었다.
“형님! 창문 쪽에……!”
한 번에 네 사람을 상대하던 프란체가 그사이 말렉 쪽을 보고 소리쳤다. 말렉은 마차 창문을 건드리는 놈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몸을 틀었다. 프란체의 발을 묶어 놓던 용병 하나가 소리쳤다.
“지금이다!”
외침과 함께 다른 방향에서 두 남자가 튀어나왔다. 그중 하나가 연습이라도 한 듯 신속하게 마부를 끌어내렸다. 마부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동시에 다른 남자가 마차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 돼!!”
“아가씨!”
프란체와 말렉이 소리 질렀다. 마부석에 앉은 남자가 채찍을 휘두르자, 말이 흥분해서 날뛰었다. 말렉이 재빨리 손을 뻗어 마차의 튀어나온 부분을 붙들었다.
그러나 용병들은 말렉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한 손으로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말렉은 결국 마차를 놓치고 말았다.
프란체와 말렉이 용병들에게 격렬히 저항하는 사이, 마차는 곧바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움직이지 마.”
마차 안으로 들이닥친 사내가 단도를 들이밀며 말했다. 일리아는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그저 침묵했다. 사내가 단도를 들지 않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중얼거렸다.
“젠장. 호위기사들이 예상보다 더 괴물이었잖아.”
일리아는 사내를 살폈다. 단순한 용병 같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정보를 듣고 계획적으로 움직인 듯했다. 하필이면 딱 그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도 그렇고, 프란체와 말렉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것처럼 보였다.
‘내 정보를 잘 아는 사람과 결탁한 모양인데…….’
머릿속에 의심되는 인물이 스쳐지나갔다. 생각이 더 이어지기 전, 마차가 멈추었다. 마부석에서 마차를 몰던 사내가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아예 다른 방향으로 틀었으니,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들키지 않을 거야.”
“……우리 둘만 빠져나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계획과 많이 틀어졌는지 그들은 인상을 썼다.
“마차가 너무 눈에 띄어서 버리고 가야 할 것 같아.”
“이걸 버리자고? 아까운데. 마음 같아서는 내다 팔고 싶구만.”
일리아에게 단도를 들이민 남자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그들은 어차피 일리아가 도망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지, 앞에서 대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쩔까. 계획대로 데리고 가?”
“솔직히 말해서 꼭 데려다 줄 필요 없는 거 아냐? 대가를 받은 것도 아니고. 우리야 정보만 얻었으니 됐지.”
“그래도 귀족인데, 나중에 보복 당하면?”
“보복은 무슨. 이미 망했다고 유명하던데.”
단도를 든 사내가 코웃음 쳤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일리아는 이 일의 주모자가 누구인지 알아채게 되었다.
‘리하트 테르시안.’
문득 스텔라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무슨 일 저지를 것 같아서. 경고해주는 거야.
기껏해야 저를 찾아와서 난동 부릴 줄 알았는데…… 결국 갈 데까지 간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용병들의 대화를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다.
리하트 테르시안은 용병들에게 일리아의 정보를 주며 납치해달라고 부탁한 듯했다. 몇 년을 교제했으니 일리아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용병들의 경우에는 일리아를 납치하기만 하면 블로든 가문에서 돈을 왕창 뜯어낼 수 있으니 마다하지 않았을 테고 말이다.
과거에도 이런 식으로 돈을 노리고 납치당한 적이 많았기에, 이런 상황은 익숙했다. 어찌 되었든 계획대로 납치하는 것까진 성공했다. 하지만 이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면…….
‘납치만큼은 나를 따를 경력자가 없을걸.’
일리아는 납치라면 도가 텄다는 것이었다.
일리아를 앞에 두고 숙덕거리던 용병들은 이내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우리 둘이서 돈 나눠 먹자.”
“뭐?”
“어차피 인질은 여기 있으니까, 우리가 직접 몸값을 요구하면 되지.”
단도를 든 남자의 설득에 수염을 기른 사내는 침묵했다. 그러자 남자가 부추겼다.
“다른 놈들이랑 나누면 손에 얼마나 들어올 것 같아?”
“……만약에 보복 당하면?”
“우린 돈만 받고 잠적하면 그만이지. 외국으로 도망치면 어떻게 찾겠어.”
그가 일리아를 힐끗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무려 블로든이야. 부르는 대로 돈을 줄 테니, 평생 놀고먹을 수 있다고.”
“좋아.”
결국 수염 난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의 눈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리고 가만히 듣고 있던 일리아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용병들이 의리가 없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바로 동료들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차라리 돈이 목적이어서 다행이었다. 제게 원한을 품었더라면 무사히 빠져나가기 어려웠을 테니까.
“몸값으로 얼마를 요구하지?”
꿈에 부푼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100만 크로엘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많이 요구하는 거 아냐?”
듣고 있던 일리아는 어이없어졌다.
‘내 몸값이 그거밖에 안 돼?’
고작 그 돈을 받으려고 저를 납치했다니. 구석에 얌전히 앉아있던 일리아는 지난 납치 경력을 총 동원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훌쩍이는 소리를 냈다. 황금빛 미래를 꿈꾸던 두 남자가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어이, 아가씨. 돈만 받으면 풀어줄 테니까 안심하라고.”
“우리 얼굴 봤는데, 그냥 풀어줘도 돼?”
“먼 곳에 떨어뜨려놓고 떠나면 되지. 다들 이 아가씨 찾는 동안 우린 도망가면 되는 거야.”
일리아를 살려두면 돈 버린 셈 치고 자신들을 찾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데 죽여 버리면 외국까지 추격이 붙을지도 몰랐다.
그들은 다시 숙덕거렸다. 어떻게 블로든에게서 돈을 뜯어내고 무사히 도망칠지 궁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때 일리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이 근처에 비자금을 숨겨둔 곳이 있어요.”
두 남자가 동시에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일리아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받고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얼마나 있는데?”
“최소 100만 크로엘 이상이에요.”
용병들의 눈이 금방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아까 그들이 너무 거금이지 않느냐고 낄낄대던 금액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다. 비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면 블로든과 따로 접선할 필요도 없었다. 돈을 찾는 그 즉시 제국을 떠나면 되는 것이다.
“은행 같은 곳은 아니지?”
“제, 제가 소유한 건물 지하에 있어요.”
일리아가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그러자 수염 기른 사내가 의심스러운 듯 말했다.
“함정이면? 괜히 거기까지 갔는데, 사람이 있으면 어떡해?”
“비밀 장소라 아무도 몰라요…….”
일리아의 대답에 두 쌍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부자들은 부모도 모르게 비자금을 은닉한다잖아. 그 돈인가 보지.”
“더럽게 해 처먹었군.”
그들은 자신들이 의적이니 뭐니 헛소리를 지껄였다.
“한 명이 돈을 가져오는 사이, 남은 사람이 인질을 감시하자.”
수염 난 사내의 말에 단도 든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돈 가져올 테니, 네가 감시하고 있어.”
“무슨 소리야? 내가 가는 게 훨씬 낫지. 넌 인상이 험악하잖아.”
누가 돈을 가지러 갈 것인가를 두고 두 사람이 다투기 시작했다. 돈으로 맺어진 동맹답게,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이었다.
일리아는 구석에 앉아서 조용히 구경했다.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납치범끼리 분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긴 적이 있었다.
‘지금쯤이면 수도 경비대에서 날 찾고 있겠지.’
적어도 30분 이상은 흘렀으니, 수도 경비대 전체에 연락이 들어갔을 것이다. 결국 서로를 불신하던 용병들은 결론을 내렸다.
“그냥 함께 가자고.”
“그래, 괜히 흩어졌다가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겉보기엔 타협한 듯하나, 이미 서로에 대한 신뢰는 깨져버린 듯했다. 용병들은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음을 깨닫고 다급히 움직였다.
수염 난 사내가 마부석에서 모자 달린 외투를 주워왔다. 남자 옷이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넉넉하게 감추어졌다.
“어이, 빨리 내려!”
남자가 일리아의 손목을 틀어쥐고 끌어내렸다. 손목이 아파서 일리아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위치는?”
일리아가 우물쭈물하자 그가 단도를 고쳐 쥐며 윽박질렀다.
“똑바로 말해!”
“14번가예요…….”
일리아가 겁에 질린 척하며 대답했다.
“멀진 않지만 그렇게 가깝지도 않군. 앞장서.”
남자가 고갯짓하자 일리아가 먼저 걸어갔다. 수염 난 사내가 일리아의 옆에 섰다. 단도를 치운 사내는 일리아의 등 뒤에 바짝 붙어서 섰다.
세 사람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인적이 드문 골목이라, 다른 사람과 마주친 적은 몇 번 되지 않았다. 그때마다 용병들은 일리아를 호위하는 기사인 척했다.
‘지금쯤이면 마차가 발견되었을지도.’
크고 화려한 마차였기에 금방 눈에 띄었을 것이다. 일리아는 얌전히 걷는 척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근처에 경비대 건물이 있었지.’
일리아는 수도 지리를 대강 알고 있었다. 워낙 납치당하거나 유괴당하는 일이 많다 보니, 부모님이 외우게 한 덕분이었다. 용병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도 서로를 감시하느라 바빴다. 혹시 한쪽이 불순한 마음을 먹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그때 근처에서 구둣발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경비대원을 발견한 남자가 짤막하게 소리쳤다.
“숨어!”
일리아는 팔이 붙들린 채 용병들과 함께 골목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뭐야, 벌써부터 수색이 들어간 거야?”
“설마. 그냥 우연인 거 아닐까.”
당황한 용병들이 벽에 등을 붙였다. 금방 지나가겠거니 했지만, 우연이 아닌 듯 경비대원의 숫자는 점점 많아졌다.
“이 근처를 싹 뒤져 봐라!”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길목을 전부 막아!”
용병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경비대가 자신들을 찾는 것이 분명해졌다.
“빌어먹을, 이제 어쩌지?”
그들은 초조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예상한 것보다 너무 일렀다.
‘우리 가문이 괜히 후원금을 기부하는 줄 아나.’
블로든 가문은 경비대에 지금껏 천문학적인 금액을 후원했다. 제일가는 후원자 집안 딸이 납치당했으니, 이 정도는 당연했다.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일리아는 여전히 겁에 질린 척 연기하며 고개를 숙였다. 방심할 틈을 줘야 했다. 기회가 있으면 도망갈 수 있도록 말이다. 괜히 인질극까지 펼쳐지면 골치 아파진다.
경비대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더 많은 추적이 따라붙었다. 골목 어귀에서 숨죽이고 있던 용병들은 이제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용병들이 빠르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단 왔던 길로 되돌아가자.”
“여기까지 와 놓고? 만약 반대편에도 경비대가 있으면 어쩌려고.”
“그때 가서 생각해. 여기 있으면 무조건 잡혀!”
결국 용병들은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했다.
“빨리빨리 걸어.”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일리아를 재촉했다.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이미 거미줄에 걸린 나방이 된 줄도 모른 채.
일리아는 다시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경비대와 마주치게 되면, 용병들은 서로를 배신할 것이다. 자기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일리아는 그 틈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잔뜩 긴장한 용병들이 발걸음을 죽여 골목을 걸어 나갔다. 좁은 골목을 한참 걷자, 드디어 출구가 보였다. 출구 쪽은 텅 비어 있었다.
소름끼칠 정도로 주위가 조용했다. 경비대의 발소리도,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 옅은 그늘만 드리운 채였다.
“아무도 없어!”
수염 난 사내가 희열에 가득 차 소리쳤다.
“일단 내가 먼저 나가서 확인해볼게.”
그가 먼저 골목 어귀를 빠져나가는 순간이었다. 조용하던 공간에 저벅,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길고 짙은 그림자가 골목 안쪽까지 늘어졌다. 마치 골목 끝에 담벼락이 들어선 듯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르한이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몰라서 다들 굳어져 있을 때, 카르한이 먼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