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66)
“아악!!”
거대한 몸집이 허공에 들렸다가 짤막한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내리꽂혔다. 쿵! 굉음과 함께 수염 난 사내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남은 용병과 일리아는 숨도 쉬지 못했다.
일리아의 뒤편에 서 있던 남자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단도를 꺼내들었다. 이 틈을 타, 먼저 반격하기 위해서 카르한에게 달려들었다.
“!”
단도가 카르한의 몸에 닿기도 전, 남자의 팔이 그대로 꺾였다. 남자가 주저앉자, 카르한은 망설임 없이 그의 얼굴을 걷어찼다. 고통에 찬 비명이 골목에 생생히 울려 퍼졌다.
“끄으윽…….”
남자가 바닥을 뒹굴었다. 다시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상처를 입은 채였다.
“살려……,”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 카르한은 구둣발로 그의 다리를 짓뭉갰다. 엄청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남자가 기절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비명 소리가 멎었다.
조용해진 골목에 헐떡이는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지 카르한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가 들이마시기를 반복했다. 카르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골목 안쪽에 홀로 서 있던 일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
카르한은 그대로 멈추었다.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어디 다친 곳 없는지 하나하나 훑고 있었다.
이윽고 카르한이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내던지고 일리아에게 달려왔다. 다리가 몇 번이고 꺾여서 넘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끝내 일리아의 앞까지 다가와, 두 팔로 일리아를 끌어안았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품에 안기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 모든 게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리아를 끌어안은 단단한 두 팔이 떨려왔다. 귓가에 울음 같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직하게 울리는 그 소리가 무척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일리아를 끌어안은 카르한이 제 고개를 작은 어깨에 묻었다. 한 자리에 부슬비가 내리는 것처럼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일리아는 겨우 팔을 들어 카르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온통 땀투성이였다. 도대체 얼마나 뛰어다닌 것인지…….
“카르한, 나 괜찮아요. 다친 곳도 없는데, 왜 이렇게 떨어요. 걱정 많이 했어요?”
일리아는 카르한을 안심시켜 주기 위해 일부러 가볍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카르한이 겨우 목소리를 내뱉었다.
“당연히, 걱정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일리아의 손이 멈추었다. 카르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물기 어린 눈동자가 일리아를 가득 담았다. 일리아를 바라보던 카르한이 울먹이듯 속삭였다.
“당신을 좋아하니까요.”
일리아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느릿하게 눈만 깜빡였다.
“……!”
그리고 뒤늦게 카르한이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카르한의 머리에 얹힌 손이 스르륵 내려갔다. 카르한 또한 일리아를 끌어안은 팔을 거두었다. 그제야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있었다.
주위가 온통 조용한데, 심장 뛰는 소리만 크게 들려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입술만 달싹였을 때.
“찾았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경갑을 갖춘 경비대원 셋이 달려왔다. 카르한이 끌어안아 로브가 벗겨진 탓에 환한 금발이 드러난 상태였다. 금발을 확인한 경비대원이 물었다.
“블로든 영애십니까!”
달려온 경비대원이 잠시 멈칫했다. 일리아 앞에 서 있는 카르한의 뒷모습을 보고 긴장한 얼굴이었다.
“제 연인이에요.”
“아, 에반테온 소공자십니까?”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안심한 듯 긴장을 풀었다. 두 명의 경비대원이 쓰러져 있는 용병들을 일으켰다. 남은 한 명이 일리아와 카르한에게 말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진 듯 축 처져있었다. 거기다 눈은 새빨갛게 충혈된 상태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카르한이 진정한 뒤에 듣는 게 좋을 듯했다.
일리아는 카르한과 함께 경비대원을 따라 우선 근처에 위치한 경비대 건물에 들어갔다. 그리고 경비대원에게 그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물어보았다.
“제가 사라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수도가 뒤집어졌습니다.”
대략적인 설명을 들어보니, 프란체와 말렉이 마차를 습격한 놈들을 전부 제압한 후 곧바로 일리아가 납치되었음을 신고했다.
그때부터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일리아의 가족들은 납치라면 도가 텄다. 납치당했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 지침이 정해져 있을 정도였다.
붙잡힌 용병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즉시 수도 전체에 수배령을 내리고, 황실에서 공문을 받아내 성문을 닫았다. 그리고 용의자를 추린 후, 수도의 용병 집단을 전부 들쑤시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불법 집단을 대거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명분도 있겠다, 이 틈을 타서 미심쩍던 용병 길드를 전부 잡아낸 듯했다.
“그리고 블로든 백작께서 납치범들에게 거액의 현상금도 거셨던지라…….”
“얼마나요?”
경비대원은 침을 꿀꺽 삼킨 후 말을 이었다.
“1,000만 크로엘입니다.”
일리아를 납치한 용병들이 블로든 가문에 요구하려던 금액의 딱 10배였다.
‘내 몸값보다 비싸네.’
그때 경비대 현관문이 부서질 듯이 크게 젖혀졌다. 헤인리와 블로든 백작 부부가 건물 안으로 들이닥쳤다.
“일리아!!!”
“아이고, 내 딸!!”
단숨에 일리아의 뺨을 감싼 클리프가 소리쳤다.
“얼마나 고생했으면! 얼굴이 반쪽이 되었구나!”
“많이 무서웠지? 어디 다친 곳은?”
헤인리가 곧바로 일리아를 살폈고, 마지막으로 비올레가 경비대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납치범 놈들은 어디에 있죠?”
그녀의 말 뒤로 ‘죽여 버리게.’라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일리아를 살피던 세 사람은 뒤늦게 옆에 앉아있던 카르한을 발견했다. 카르한의 얼굴을 본 그들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울었는지 눈도 새빨갛고, 머리카락과 옷도 잔뜩 흐트러져서 엉망이었다.
아니, 왜 소공자가 납치당한 것 같은 얼굴이지…….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안쓰러운 얼굴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비올레의 물음에 카르한이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일리아는 그런 카르한의 손등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카르한이 구해줬어요.”
“……소공자가?”
헤인리가 놀라서 묻자, 뒤에 서 있던 경비대원이 입증해주었다.
“저희가 영애를 찾았을 때, 납치범들은 이미 제압당한 후였습니다.”
모두가 다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카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축 처져 있는 것이, 아직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클리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공자, 일리아를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맞아요. 이렇게 빨리 마무리된 건 처음이에요. 고마워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뒤이어 비올레와 헤인리도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카르한은 묵묵히 고개를 내저었다. 여전히 기운 없는 얼굴로 일리아의 손만 꼭 잡고 있을 뿐이었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죠.”
비올레의 말과 함께 다들 경비대 건물을 빠져나와 마차 한 대에 올라탔다. 워낙 큰 마차라 다섯 명이 앉아도 너끈했다. 푹신한 등받이가 닿자, 순식간에 몸이 피곤해졌다. 납치당하는 건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긴장한 모양이었다.
지쳐버린 일리아는 졸기 시작했다. 카르한이 조심스레 제 어깨를 내주었고, 어느 순간 완전히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어느덧 마차는 저택 본관 현관 앞에서 멈추었다. 잠에서 깬 일리아가 내리자, 프란체와 말렉이 뛰어왔다.
“아가씨…….”
프란체가 일리아의 앞에 멈춰선 채 울먹거렸다.
“잠깐 이야기 좀 해야겠으니, 먼저 들어가 계세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카르한과 가족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현관 앞에는 일리아와 프란체, 말렉만 남았다. 눈물을 글썽거리던 프란체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프란체는 곧장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저는 호위기사 자격도 없는 놈입니다. 잘라주십시오.”
“마찬가지입니다.”
말렉도 덩달아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둘 다 자기 잘못이라며 스스로를 탓했다. 침통한 얼굴의 말렉과 어린아이처럼 우는 프란체를 내려다보던 일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러지 마. 둘 다 나를 구하려고 최선을 다했잖아. 그리고 멀쩡하게 돌아왔는걸.”
일리아가 괜찮다고 달래주었지만, 두 사람은 요지부동이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소매로 닦던 프란체가 말했다.
“제가 너무 자만했습니다. 잠시도 방심해서는 안 됐는데…….”
눈앞에서 일리아가 납치당하고, 프란체는 크게 충격 받았다. 스스로가 몹시 무력하게 느껴진 것이다.
프란체는 제게 달려들던 놈들을 전부 때려눕히고 일리아의 마차를 추격했다. 그러나 이미 떠나버린 마차를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겨우 이성을 붙들고 있던 말렉이 근처 경비대를 찾아가 신고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일리아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경비대원들을 따라 정신없이 수도 여기저기를 뒤졌다.
마침내 블로든 영애가 무사히 구조되었다는 전언이 오고 나서야 둘은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만약 일리아가 잘못되었더라면, 프란체는 이곳에 없었을 것이다.
“아가씨, 저는…….”
프란체가 꺽꺽거렸다. 너무 울어서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쓸모없는, 인간입니다.”
프란체의 마지막 말에 일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둘 다 일어나.”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렉, 프란체. 나는 두 사람을 자를 생각 없어. 어디까지나 불의의 사고였으니까. 그리고…….”
일리아는 화가 난 얼굴로 프란체를 바라보았다.
“약속 지켜, 프란체.”
일리아의 말에 프란체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프란체는 무척이나 오래된 일을 상기했다. 일리아와 프란체의 첫 만남은, 프란체가 감히 블로든 가문 아가씨의 지갑을 훔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배운 것이 소매치기뿐이라, 평소처럼 아무 지갑이나 훔쳤다. 오늘 치 할당량을 채웠다고 기뻐하는 사이, 빈민가로 경비대가 들이닥쳤다.
프란체는 곧바로 붙잡혔고, 자신의 형처럼 매 맞아 죽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리아는 깡마른 소년이 붙잡혀온 것을 보더니 오히려 프란체를 감싸주었고, 빈민가에서 꺼내주었다.
-우리 집에 가자.
일리아는 프란체를 저택으로 데려가서 먹여주고 씻겨주고 교육도 시켜주었다. 프란체는 매일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날까 봐 두렵기도 했다.
블로든 저택 사람들은 다들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태생이 빈민가 출신인지라 스스로 눈치 보게 되었다. 언젠가 내쫓길지 모른다는 걱정도 자꾸만 들었다. 결국 프란체는 보름을 채우지 못하고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달도 뜨지 않은 밤, 프란체는 장식품이나 돈 될 만한 것들을 주머니에 가득 넣은 후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저택이 너무 넓어서 아침이 오기 전까지 탈출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헤매던 프란체는 결국 일리아와 복도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깜짝 놀란 프란체는 그대로 주저앉았고, 주머니 사이로 훔친 장신구가 삐져나왔다.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일리아는 훔친 물건을 봤음에도 모른 척 물었다.
-화장실 가니?
그 말에 프란체는 잘못했다고 빌었다. 은혜도 모르고 나쁜 마음을 먹었다고 용서를 빌자, 일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리 집이 안 맞으면 어쩔 수 없지.
다만 걸어서 나가긴 힘들 거라며 마차를 불러주었다. 프란체는 그렇게 블로든 저택을 떠났다. 다시 길거리로 돌아온 프란체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후회했다.
가지고 나온 돈은 어른들에게 전부 빼앗겼고, 반항하다가 흠씬 두들겨 맞았다. 이 거리에서 프란체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프란체는 계속 일리아를 생각했다. 그렇게 나오지 말 것을. 인생에 딱 한 번뿐인 기회였는데 죽도록 노력해볼걸. 길거리에 앉아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일리아가 다시 찾아왔다.
-네가 나가고 나니까 심심하더라. 다시 돌아오면 안 돼?
프란체는 그때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렸다. 그리고 그날 맹세했던 것을 입에 올렸다.
“……죽기로 했던 목숨, 아가씨께 바치겠습니다.”
프란체는 입술을 떨었다. 사실 그가 검술을 배운 것도, 전부 일리아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감정이 북받쳤는지, 프란체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결국 옆에 있던 말렉까지 눈물을 보였다. 프란체보다 연장자인 만큼 침착한 척했지만, 누구보다 많이 힘들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한바탕 우는 바람에 일리아도 울컥했으나 애써 참았다. 자신이 울면 프란체와 말렉은 더 울 것 같았다. 일리아는 한참 동안 괜찮다고 달래주었다. 겨우 눈물을 거둔 두 사람이 꼬질꼬질한 얼굴로 비장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수련에 들어갈 겁니다.”
“오늘은 쉬는 게 좋지 않겠어?”
“아닙니다.”
이미 마음이 연무장에 가 있는 듯했다. 결국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프란체와 말렉이 연무장으로 가버리고, 일리아는 본관에 들어와 복도를 걸었다.
‘많이 놀랐을 테니까, 내일 함께 차라도 마셔야겠네.’
오늘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싶었다. 말렉은 일리아가 어렸을 적부터 봐온 사이였고, 프란체는 성장 과정을 함께했기에 둘 다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런 일로 벌을 주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일리아는 고용인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걸어갔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니, 푹신한 소파에 비올레와 클리프, 헤인리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일리아는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카르한은요?”
“많이 지쳐 보여서 쉬고 오라고 보냈어.”
헤인리가 대답해주었다. 확실히 피곤할 만했다. 경기 때문에 계속 긴장했을 거고, 직접 저를 찾으러 왔으니.
‘나중에 카르한이 깨어나면, 아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눠봐야지.’
카르한과 해야 할 말이 많았다. 분쟁 지역에 관한 것도, 그리고 고백도……. 일리아는 벌써부터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물었다.
“경기는 어떻게 되었어요?”
“당연히 소공자가 우승을 거뒀단다.”
“경기가 끝났을 때 네가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어찌나 놀랐는지.”
비올레와 클리프가 나란히 말했다. 헤인리가 안경을 추어올리며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납치에 가담한 놈들은 전부 체포했어.”
“…….”
“아마 재판이 열리면 최대 종신형에 그치겠지만……. 그렇게 끝낼 순 없지.”
헤인리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돈을 써서라도 이번 납치에 가담한 놈들을 끝까지 짓밟아버릴 생각인 듯했다.
“그래도 다친 곳이 없어서…….”
일리아를 꼼꼼히 훑던 헤인리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일리아, 네 손목…….”
“아.”
모두의 시선이 일리아의 손목에 닿았다. 흰 손목이 발갛게 부어 있었다. 아까 용병이 손목을 강제로 잡아끌어서 생긴 자국이었다. 손목을 본 클리프가 대번에 흥분해서 소리쳤다.
“아니, 우리 귀한 딸 손목에 무슨!!!”
“지금 당장 그놈들을 찾아가야겠어요.”
비올레가 중얼거리자, 헤인리가 말을 받았다.
“역시 종신형으로는 성이 안 찰 것 같습니다.”
다들 분노에 가득 차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일리아는 흥분한 가족들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 일, 리하트가 주모자예요.”
“뭐라고?”
“아직은 심증뿐이지만, 거의 확실해요.”
아마 용병들을 문책하면 확실한 증거가 나올 거라고 일리아가 말했다. 헤인리의 부드러운 얼굴이 완전히 구겨졌다. 그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비올레 표정도 무척 싸늘해졌다. 만약 리하트가 눈앞에 있었다면 조각 낼 법한 기세였다. 그런 둘 사이에 앉아 있던 클리프가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이 일은 우리가 처리할 테니, 일리아 너는 걱정 말거라.”
일리아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
침실로 돌아왔을 땐 벌써 저녁이었다. 일리아는 저녁도 먹지 않고, 과일로 대충 배를 채웠다. 피곤해서 그런지 식욕이 돋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있던 일리아는 아까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망설임 없이 용병을 짓밟던 카르한……. 일말의 자비 없던 모습과 달리, 그는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무너졌다. 그렇게나 감정을 쏟아내는 카르한은 또 처음이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이 깨어나면 무슨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버렸다.
한참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늦은 시간이었기에 일리아는 의아해졌다. 누구냐고 물으려는 그때, 바깥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 혹시 깨어 있습니까?”
카르한이었다. 일리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아직 잠옷으로 갈아입기 전이었다. 옷매무새만 대충 고친 일리아가 대답했다.
“깨어있어요.”
일리아는 곧장 문을 열었다. 복도에 서 있던 카르한과 눈이 마주쳤다. 애써 진정시켜놓은 심장이 쿵쿵 소리를 냈다.
“괜찮다면……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일리아는 침실을 나왔다. 두 사람은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후원을 산책하는 대신, 응접실과 이어진 테라스로 나갔다.
문을 닫고 나니 저녁 바람이 밀려왔다. 사방은 온통 어둑한데, 보름달이 떠서 그런지 달빛은 밝았다. 고요한 저녁에 2층 테라스와 높이가 엇비슷한 나무만이 바람결에 사부작거리는 소리를 뱉었다. 침묵을 깬 것은 카르한이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계속 쉬었더니, 이제 멀쩡해졌어요. 당신은요?”
“저도 한숨 잤더니 괜찮습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안색이 썩 좋진 않았다. 그를 살피던 일리아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했다면서요? 정말 축하해요.”
“……예.”
일리아의 들뜬 목소리에 그제야 카르한의 표정이 조금 느슨해졌다.
“우승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카르한이 말을 흐렸다. 일리아는 안타까운 얼굴로 입술만 깨물었다가 놓았다.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였기에, 무척 아쉬웠다.
“그래도 진심으로 축하해요. 당신이 우승할 거라고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