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68)
“어차피 수업도 마무리되었습니다. 고작 몇 달 사이에 몇 년 치 공부를 끝내실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요.”
처음 카르한을 만났을 때를 상기한 듯 메즈라는 감회에 젖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에반테온 님께서 말하신 기간보다 일찍 끝나서 다행입니다.”
“네?”
“여름 이후로는 시간이 되지 않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어딜 가셔야 한다고…….”
그 말에 일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카르한은 이미 떠날 준비를 전부 해두었구나. 지금까지 자신만 몰랐던 것이다. 일리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메즈라는 말실수했나 싶어서 눈동자만 굴리다 말했다.
“……설마 에반테온 소공자께서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까?”
메즈라는 근심에 가득 차 보이는 일리아를 묘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고민이 있으시다면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
“가끔은 제삼자에게 털어놓는 것도 좋으니까요.”
메즈라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연애 상담은 제 전문입니다.”
일리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메즈라는 이런 반응이 익숙했다. 다들 자신이 공부하느라 연애와 담을 쌓은 줄 알고 있었다.
“제가 바로 연애결혼을 한 사람입니다.”
메즈라가 손에 낀 반지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신뢰도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사실 일리아는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다. 가족들은 난리가 날 터였고,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없었다. 일리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작게 속삭였다.
“고백을 받았는데요.”
메즈라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드디어 소공자가 고백을……! 예전에 카르한의 연애 상담을 해주었던 메즈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곧 전쟁터로 떠날 거라는데, 이유도 말해주지 않아요.”
“…….”
“무슨 생각일까요?”
메즈라는 지금껏 이런 고민을 들은 적이 몇 번 있었다. 대부분은 연인 사이가 깨지는 나쁜 선례만 남겼다. 하지만 자신이 봐온 소공자는 그들과 달랐다.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을까요.”
평소의 카르한을 떠올리며 메즈라가 말을 이었다.
“고백까지 하셨다면, 적어도 그 마음에 거짓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리아는 눈을 내리깐 채 바닥만 바라보았다. 카르한의 눈동자만 봐도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혹시 분쟁 지역에 가는 것이 나와 연관된 문제인 걸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온몸에 핏기가 가셨다. 설마, 아니겠지……?
“일단 그분과 만나서 차분하게 이야기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고마워요.”
일리아는 메즈라의 조언에 따라, 카르한을 만나서 다시 차근차근 이야기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본관으로 돌아온 일리아는 공작저로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카르한은 어제부터 부재중이라고 전해왔다.
‘공작저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도대체 어디로 갔나 싶어 의아해하던 차에 우연히 그의 소식이 들어왔다. 카르한이 블로든 가문 소유의 여관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내가 부르면 안 오겠지?’
그럼 직접 갈 수밖에. 일리아는 곧바로 침실로 뛰어올라가 치장을 끝냈다. 마차에 올라타자, 자연스레 프란체와 말렉이 붙었다. 특히 프란체는 검이 두 자루였다. 요즘 두 명 몫을 할 거라며 양손으로 검 쓰는 법을 익히고 있다 들었다.
마차가 출발하고, 금방 정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생각에 잠겼다. 한참 그러고 있으니 마차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인근 건물에 비해 우뚝 솟은 여관이 보였다. 마차는 여관 앞에서 멈춰 섰다. 일리아는 간이 계단을 밟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때 누군가 여관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고개를 든 순간 상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딘가 익숙한데…….’
왠지 한 번쯤은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진갈색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동자……. 기억을 더듬어 가는데, 상대도 일리아를 보고 똑같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상대가 먼저 알아차렸는지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먼저 아는 척을 해오자, 일리아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이름을 밝히는 동시에 일리아는 누군지 알아차렸다.
“제 이름은 블레어드 에반테온입니다.”
에반테온 공작저 복도에 걸린 초상화 속 인물이었다.
일리아는 제 앞에 멈춰 선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버릇처럼 지었던 미소가 싸늘해졌다.
‘도대체 이 남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카르한의 말로는 사고 치고 외국으로 도망갔다고 했는데. 후계자 자리를 내놓을 정도면 큰 사고였을 텐데, 벌써 돌아오다니.
일리아는 빠르게 블레어드를 살폈다. 차가운 인상인 카르한과 달리, 서글서글한 얼굴이었다. 제법 잘생기기도 했고, 웃는 상이라 그런지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일리아가 그에 대해 몰랐다면 첫인상만 보고 좋은 점수를 주었을 것이다.
잠깐의 공백을 두고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어요. 일리아 블로든이에요.”
빈말로도 반갑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계속 이야기는 전해 들어왔습니다.”
블레어드가 웃으며 입에 발린 말을 내뱉었다. 일리아는 서늘한 미소만 머금은 채 그를 응시했다. 지금 입을 열었다간 가시 돋친 말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블레어드는 개의치 않는 듯 할 말을 이어나갔다.
“이런 곳에서 우연히 만나다니, 마치 운명 같지 않습니까?”
일리아가 조용히 여관 문을 가리켰다.
“우연이 아니라, 이곳에 볼일이 있어서요.”
손가락을 따라 블레어드가 고개를 돌렸다. 도금된 블로든 가문 문장이 박혀 있었다.
“저희 가문 소유의 여관이거든요.”
일리아가 단칼에 차단해버리자, 블레어드가 다시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무척 훌륭한 여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스러운 칭찬이 몸에 밴 듯했다. 어쩌면 리하트보다 더 아부에 능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제 동생을 만나러 왔습니다.”
블레어드가 묻지도 않은 말을 해주었다. 일리아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블레어드는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그간 사정이 있어 계속 떨어져 있었기에…….”
일리아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누가 보면 사이좋은 형제지간인 줄 알겠네.’
일리아는 전부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며 물었다.
“사이가 좋으신가 보군요?”
내심 찔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레베타와 달리,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아주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형제지간이니까요. 제가 형이니 챙겨야지요.”
이런 뻔뻔한 놈을 봤나.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술술 뱉어,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일리아는 도자기같이 매끄러운 얼굴을 깨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머리를 굴렸다.
그때, 여관 문이 부서질 듯이 젖혀졌다. 그 소리에 일리아와 블레어드가 동시에 문 쪽을 바라보았다. 활짝 열린 문으로 누군가가 다급히 나왔다. 카르한이었다.
카르한은 굳어지다 못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일리아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블레어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
카르한은 어젯밤, 블로든 가문 소유의 여관에 도착했다. 프런트에 서 있던 직원이 친절한 얼굴로 카르한과 테시온을 맞이해주었다.
“죄송하지만 신분패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급 여관일수록 신분 확인은 필수였다. 카르한은 품에서 신분패를 꺼내 내밀었다. 신분패를 확인한 직원이 반색했다.
“최상층으로 모시겠습니다!”
그가 바로 다른 직원들을 불렀다. 테시온이 들고 있던 짐이 순식간에 직원의 손으로 넘어갔다.
“방값은…….”
“이전에 에반테온 소공자님께는 돈을 받지 말라는 공문이 왔습니다.”
카르한은 거절의 의미로 지갑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직원의 태도는 강경했다.
“공문을 따르지 않으면 제가 잘립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잘린다는 말에 카르한은 머뭇거리며 지갑을 다시 넣었다. 카르한과 테시온은 얼떨결에 최상층에 위치한 방을 하나씩 차지하게 되었다. 귀빈을 대접하기 위해 평소에 비워두는 방인 듯했다.
방을 안내해준 직원이 짐을 내려놓자, 다른 직원이 다과가 담긴 접시와 음료를 가져왔다.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이 줄을 당겨주십시오. 그럼 편히 쉬십시오.”
깍듯한 인사와 함께 직원들이 방을 나가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카르한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방 안을 둘러보았다. 혼자 쓰기에 민망할 정도로 넓고 좋은 방이었다. 그러나 블로든 저택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일리아에게 상처를 주고 나왔는데,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건가. 카르한은 시무룩하게 처져서 침대에 앉았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니, 망망대해에 떨어진 것 같았다.
익숙하던 정적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벌써부터 일리아가 보고 싶었다. 나중에 분쟁 지역으로 떠나게 되면 이 그리움을 어떻게 참아야 할지…….
카르한은 새벽 내내 뒤척이다가 잠깐 눈을 붙였다. 그리고 점심이 지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카르한 에반테온 님.”
저를 부르는 직원의 목소리에 카르한이 문을 열어주었다.
“손님께서 찾아오셨는데, 들여보낼까요?”
“손님이라니…….”
혹시 일리아가 왔나 싶어서 카르한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기쁘긴 한데, 아직 변명거리를 생각해두지 못해서 난감해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직원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블레어드 에반테온 님이십니다.”
그 이름에 카르한은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은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왜 여기를……?
“1층에서 기다리고 계신데…….”
직원은 카르한의 얼굴을 살피며 말을 흐렸다.
“돌려보낼까요?”
카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멈추었던 숨이 천천히 새어나왔다. 카르한은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자신이 아는 블레어드라면 어떤 핑계라도 만들어서 저를 만나러 올 것이다. 카르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직접 내려가서 만나겠습니다.”
고맙다고 인사한 카르한은 곧장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이었다. 블레어드가 귀환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을 텐데, 몰래 돌아온 것일까.
납덩이를 단 것처럼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카르한은 1층에 따로 마련된 찻집으로 들어갔다. 애매한 시간대라 손님은 없고, 직원 둘만 보였다. 안쪽으로 걸어가자,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블레어드가 손을 들었다.
“이쪽이야.”
카르한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몇 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기억하던 것과 달라진 부분도 있었으나 거의 변함이 없었다. 블레어드의 얼굴을 마주하자, 순간 과거의 잔상이 겹쳐 보였다.
“오랜만이구나.”
다정한 형인 것처럼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블레어드는 앉으라는 의미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그러나 카르한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
블레어드는 질책하지 않고 반듯하게 찻잔을 집어 들었다. 카르한과 태생부터 다르다는 것을 몸짓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었다.
“못 본 사이 많이 바뀐 것 같은데…….”
블레어드가 카르한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그래도 네 이야기는 계속 들어왔지.”
“왜 찾아오신 겁니까.”
카르한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카르한은 에반테온 가문 사람들과 사이가 나빴지만, 특히 블레어드는 최악이었다.
그는 남들 앞에서는 누구보다 자상하고 훌륭한 형이었다. 그러나 둘만 남을 때는 가차 없어졌다. 지금도 블레어드가 제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숨이 막혀왔다.
블레어드는 말없이 미소를 머금은 채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뒤에 서 있던 직원이 물러나고, 정적이 흘렀다. 달칵, 찻잔이 받침대에 놓이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어느새 블레어드의 얼굴에서 다정한 미소가 사라지고 서늘함이 감돌았다.
“버거워 보이는군.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에 앉아 있으니 당연하겠지.”
나직한 목소리가 흐릿해진 상처를 헤집었다.
“일주일 줄 테니, 알아서 정리하고 물러나라.”
“…….”
“이미 부모님과도 이야기가 끝난 일이니, 조용히 해결하고 싶구나.”
카르한이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면 뒤틀린 것이 전부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블레어드는 빛 속에 머무를 것이고, 카르한은 에반테온 가문의 그림자로 남을 터였다.
분명 작년까지만 해도 카르한은 그들의 명령에 순응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카르한은 일리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싫습니다.”
블레어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당신에게 내어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블레어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무척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웃던 블레어드가 중얼거렸다.
“그사이 버릇이 잘못 들었군.”
카르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더니 그가 늘 하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버릇을 고쳐주마.
그러고 나면 괴로운 일들이 펼쳐졌다. 괴롭힘이라는 단어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블레어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카르한의 옆에 선 그가 속삭였다.
“검술 대회에서 우승 한번 하고 나니 세상을 얻은 것 같지?”
“…….”
“평판이 조금 좋아졌다고 자만하는가 본데……. 그까짓 것은 하루아침에 뒤집힐 수 있는데 말이야.”
사실 알고 있었다. 블레어드와 카르한은 출발 노선부터 달랐다. 태어날 때부터 후계자로 자라온 그와 변방으로 몰려났던 자신.
블레어드가 문제를 일으켰다 한들,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에 비해 카르한은 지금까지 평판이 나쁘다가 최근에야 겨우 회복했다.
“무엇보다 원로들이 널 지지해줄 것 같으냐.”
블레어드는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저를 지지해주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걱정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처음에는 흔들렸지만,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단단해져갔다. 예상 밖의 태도에 블레어드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카르한은 블레어드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저와 닮지 않은 형제를 보며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블레어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릴 적에 어머니와 저 사이에 일어난 일들, 당신이 꾸민 겁니까?”
별다른 설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블레어드는 곧장 알아들었다. 직원이 다시 다가오는 것을 보며 블레어드가 환히 웃으면서 속삭였다.
“그걸 이제 알았어?”
카르한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예상했지만 막상 그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충격이 컸다. 어릴 적에는 어머니가 오해로 인해 자신을 혼내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몇 번이고 그런 일이 반복되니, 누군가 저를 모함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한은 한때 블레어드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증거도 없었고, 블레어드는 도리어 교묘하게 카르한의 잘못으로 몰아붙였다.
카르한은 제게 문제가 있는 거라 생각하며 점점 의기소침해졌다. 그 후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서 덮어두었다.
조금만 더 생각해봐도 블레어드의 짓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과거를 들추고 싶지 않아 도피해 온 것이다.
“…….”
카르한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게까지 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기에.
“왜 그랬던 겁니까.”
블레어드는 삐딱하게 마주 선 채 속삭였다.
“내 자리를 넘보는 게 거슬리니까.”
“저는 한 번도 그런 마음을 먹은 적이…….”
“정말 그렇게 생각해?”
블레어드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그의 시선이 바늘처럼 카르한을 찔러왔다.
“때로는 존재만으로도 해로운 것이 있지.”
어느새 그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어차피 어머니는 네 말 같은 건 믿어주지 않을 거다. 증거도 없으니.”
직원과 눈이 마주쳤는지 블레어드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손님?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곧 나갈 테니, 이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자연스레 하대하는 귀족들과 달리 정중한 태도에 직원의 얼굴에 호감이 피어올랐다. 블레어드는 카르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바닥에 힘이 실렸다. 아프진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일단 집으로 돌아와. 오늘 못 한 이야기는 그때 다시 하자.”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블레어드가 걸음을 옮겨, 카르한을 지나쳤다. 두어 걸음 걷던 그가 멈춰 섰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블레어드가 입을 열었다.
“블로든 영애께 안부 부탁하지.”
블레어드가 그 이름을 담는 순간,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굳이 지금 일리아를 언급한 이유는 뻔했다. 그는 카르한의 주변 사람들을 하나씩 빼앗아갈 것이다.
“블레어드……!”
카르한이 언성을 높이자, 뒤에 서 있던 직원이 흠칫했다. 이곳이 블로든 가문 소유의 여관이라는 것을 떠올린 카르한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블레어드는 그런 카르한을 보고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렸다. 미숙한 놈. 블레어드는 다시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블레어드가 완전히 나가버리자 카르한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자신은 여전히 그에게 휘둘릴 뿐이었다. 카르한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때 잠시 밖에 나갔다 온 점원이 안으로 들어와, 다른 직원에게 말했다.
“블로든 영애께서 오셨으니까, 맞이할 준비 하자.”
“정말? 서둘러야겠네.”
“방금 오셨던 손님분이랑 대화 중이시니 조금 걸릴 것 같은데.”
직원들의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카르한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여관을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