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7)
“저는 제 약혼자랑 파혼하고 싶거든요. 소공자께서도 약혼을 원치 않으시는 것 같던데.”
“하지만 그럴 수는…….”
“그럼 이대로 스토커랑 약혼하겠다는 말이에요?”
카르한이 어깨를 굳혔다. 일리아는 딱딱해진 그의 얼굴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델로타 영애를 좀 아는데, 점점 더 심하게 집착할걸요? 결혼하고 나면 숨 쉬는 것도 참견할지도 몰라요.”
지금보다 더 심해질 집착을 상상한 듯 카르한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그러나 그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되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요.”
일리아는 팔을 뻗어, 카르한의 등이 닿지 않은 쪽 문을 열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돌아갔다. 카르한을 스쳐지나가며 일리아가 속삭였다.
“사흘 뒤 두 시에 레디슨 거리의 중앙 3번째 시계탑에서 만나요.”
속삭임은 바람 같았고, 문이 닫힘과 함께 목소리도 흩어졌다.
테라스를 빠져나온 일리아는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자 연회장은 반짝이는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녁이라 그런지 아까보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상태였다.
흥겨운 음악과 춤을 추는 남녀, 구석에서 속살거리는 이들. 널리고 널린 싸구려 화폭을 눈앞에 둔 듯 무심히 둘러보다가 걸음을 뗐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원래는 리하트에게 결혼식을 미루자고 통보하러 온 자리였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듯했다. 에반테온 소공자가 제게 협력하면, 곧바로 파혼할 생각이니 말이다.
일리아는 곧바로 연회장을 나섰다. 어둑해진 정원으로 나오니 대기하고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다가왔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뒤따라온 놈이나 위험해 보이는 이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시선이 일리아에게 고정되었다.
“아가씨, 연회는 즐거우셨습니까?”
“혹시 누가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일리아는 옅게 미소 지었다. 충성심 가득한 눈빛을 보고 있으면, 내 편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역시 내 사람들에게만 잘하면 되지.’
아무에게나 다 잘해주는 건 쓸데없는 짓이었다. 일리아가 새삼 깨닫고 있는데, 프란체의 표정이 점점 나빠졌다.
“정말로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응?”
프란체는 허리춤에서 칼이라도 뽑을 기세로 외쳤다.
“어떤 놈입니까! 제가 당장……!”
“아무 일도 없었어.”
일리아가 뒤늦게 그를 말렸다. 프란체는 가만히 있으면 귀족처럼 번듯하고 우아해 보였으나, 일리아와 연관된 일에서는 시정잡배처럼 날뛰었다. 욕도 어찌나 잘하는지, 일리아가 알고 있는 험악한 말들도 대부분 그에게서 배웠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를 전속 호위 기사로 삼은 이유는 하나였다. 실력. 성년식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프란체는 일리아가 아는 한,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였다.
“뭐, 짜증 나는 얼굴을 보긴 했는데…….”
“어떤 놈입니까?”
리하트를 떠올리며 말하자, 프란체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평소라면 중재 역할을 맡을 말렉도 눈빛이 달라졌다. 만약 일리아가 이름만 대면 그놈을 당장 끌고 올 터였다.
프란체가 금방이라도 안으로 달려갈 것처럼 굴자, 말렉이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프란체, 여기서 소란을 일으키면 아가씨께 폐를 끼칠 테니 일단은 참아라.”
“하지만…….”
프란체는 분한 듯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말렉이 그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뭐라고 수군거렸다. 습격 어쩌고 하는 말이 들려왔다. 일리아는 그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난 괜찮아. 신경 쓸 거 없어.”
일리아는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 찬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저곳에서 다른 이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떠들 리하트가 눈에 선했다. 고개를 조금 더 올리니, 아까 서 있었던 테라스가 보였다.
에반테온 소공자…….
바람이 불어왔다. 일리아의 환한 금발이 바람결을 따라 흐트러졌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일리아가 테라스에서 시선을 떼고 말했다.
“복수는 내가 직접 할 거니까.”
***
“으……. 머리야.”
늦은 아침, 잠에서 깨어난 일리아는 머리를 짚었다. 누군가가 제 머리를 중앙에 두고 톱질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독한 술을 마셨더니 숙취가 있는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느릿하게 이불을 밀어내고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잠시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일리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더니, 고용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쟁반이 들려있었다. 일리아는 쟁반에 놓인 묽은 토마토 수프를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일어나시면 꼭 드시라고 하셨어요.”
“오라버니가?”
아무래도 헤인리는 자신이 술을 마신 것을 알고 숙취에 좋은 음식을 보낸 것 같았다.
일리아는 그릇을 받아 수프를 먹었다. 배 속이 따뜻해지는 것과 동시에 기분이 묘했다. 이전이었다면 있는 듯 없는 듯, 서로에게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로 무시할 줄 알았는데…….’
며칠 전, 일리아는 헤인리에게 사과했다. 지은 죄가 있으니 사과를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작 한 발자국 나아갔을 뿐이지만, 그때의 사과는 절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비틀어졌다고 생각했던 관계에 희망이 보였다. 일리아는 빈 그릇을 내밀며 말했다.
“오라버니께 잘 먹었다고 전해줘.”
“네, 아가씨.”
고용인이 방을 나가고, 일리아는 어제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정리해 나갔다.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카르한 에반테온이었다.
‘그 사람이 에반테온 소공자일 줄은…….’
지나가는 인연이라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 오르골 가게에서 봤을 때는 단순히 호구라고 생각했는데, 그 악명 자자한 에반테온 소공자일 줄이야.
수많은 소문을 휘감고 다니는 그는 생각보다 더 희한한 사람이었다. 높은 자리에 있음에도 지위를 이용할 줄 모르는 남자.
권위라거나 자만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도리어 이용당하기 딱 좋을 정도로 자기주장이 약했다. 그래서 일리아는 그 점을 이용했다.
-동맹을 맺고 서로의 파혼을 돕는 거예요.
스스로 생각해도 무척 당돌했다. 아무리 유한 성격이라 한들, 상대는 에반테온이었다. 말 한 마디로 타인을 짓누를 수 있는 막대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심지어 일리아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가족들에게도 감춰놓은 비밀을 털어놓았다. 약혼자가 배신했으며 파혼을 생각 중이라는 것.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다시없을 기회였고, 가장 좋은 수였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신분이 필요했다. 리하트조차 감히 에반테온 가문에 대적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에반테온을 방패막이 삼는 대가로 일리아는 카르한에게 델로타 백작가문보다 더 많은 부를 쥐여줄 수 있었다.
마침 델로타와 작위도 같으니 이쪽이 더 나은 조건이라 할 수 있었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일종의 등가교환인 셈이었다.
‘게다가 스텔라를 상대로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할 필요도 없고.’
스텔라 델로타에게는 지금까지 당한 게 많았다. 가문끼리 사이가 좋지 않은 데다가 만날 때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왔다.
일리아는 착한 약혼자가 되고 싶어서 평판에 무척 신경 썼기에 매번 당하기만 했다. 드디어 되돌려줄 기회가 찾아왔다.
‘그 전에 에반테온 소공자가 거래를 받아들이는 게 우선이겠지만.’
일리아는 카르한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
사흘 후, 약속 당일이 됐다.
일리아는 간단하게 치장을 끝낸 후, 최대한 눈에 덜 띄는 마차에 올라탔다. 약속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일찍 나갈 생각이었다.
번화가까지 나온 마차는 약속 장소인 시계탑을 지나쳤다. 그때 일리아는 시계탑 아래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잠깐, 멈춰 봐.”
일리아의 말에 마차가 멈추었다. 일리아는 커튼을 완전히 걷어내고 창문을 통해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멀리서도 눈에 띈다 싶더니, 카르한 에반테온이었다.
일리아는 자신이 시간을 착각했나 하고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많이 남았는데?”
한 시간 동안 저러고 있을 생각이었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고위 귀족들은 대부분 약속 시간에 일부러 늦곤 했다. 상대에게 제 위치가 더 높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간단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초장에 기를 눌러놓으려고 몇 시간씩 늦는 이들도 허다했다.
그러나 카르한은 그런 얕은 수 따위 생각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지나치게 착실한 남자였다.
일리아는 저만치 서있는 카르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카르한을 피해 빙 돌아갔다. 다들 필사적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저 서 있을 뿐인데, 보기 드문 장신이라 그런지 위압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어두운 색이라, 무겁다 못해 무서웠다.
“얼굴이 아깝네.”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활용할 줄을 몰랐다. 일단 칙칙한 옷부터 좀 어떻게 하고 싶었다. 일리아는 이렇게 된 이상 볼일을 뒤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대로 한 시간 동안 방치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아이고!”
카르한의 앞을 지나치던 노인이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렸다. 간신히 넘어지진 않았으나, 들고 있던 봉투에서 사과와 빵 같은 식료품이 바닥에 흩어졌다.
우두커니 서 있던 카르한이 허리를 숙여 사과를 주웠다. 그러자 노인이 화들짝 놀라서 무릎을 꿇었다.
“아, 안 됩니다! 저희 가족의 오늘 치 식량입니다. 제발 이것만큼은…….”
마치 카르한이 강탈하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노인은 안 된다며 싹싹 빌었고, 그것을 본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카르한은 말없이 사과를 내밀었다. 노인이 황급히 사과를 낚아챈 후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도망치듯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 버렸다.
카르한은 노인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동요도 없었다.
‘……익숙하다고 해서 괜찮을 리는 없지.’
거절도 못 하고 이리저리 휘둘리기 좋은 호구라고 생각했다. 수동적이며, 먼저 나설 줄을 모르는 사람.
하지만 방금 모습을 보고 일리아는 생각을 조금 바꾸었다. 호구는 호구인데, 천성이 착한 남자였다. 오해 받을 줄 뻔히 알면서도 노인을 도와준 것이었다.
어떻게 지금까지 진짜 성격을 안 들켰을까. 일리아는 아무것도 못 본 척 카르한에게 다가갔다.
“일찍 오셨네요.”
고개를 돌린 카르한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언제 오신 거예요?”
“좀 전에 왔습니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 한 시간이나 남은 거 아세요?”
“……혹시 늦을까 봐.”
느릿하게 대답한 카르한이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왜 이렇게 일찍 왔느냐고 묻는 듯했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일찍 나왔는데, 취소됐어요.”
사실대로 말하면 자긴 괜찮으니 볼일 보고 오라고 말할 남자였다. 하얀 거짓말을 곁들인 일리아가 먼저 걸음을 뗐다.
“여기서 이야기할 일은 아니니, 일단 따라오세요.”
일리아가 앞장서고,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카르한이 뒤를 따랐다. 시계탑에서 동쪽으로 걸었다. 소광장의 삼 층짜리 분수대를 지나고, 수많은 간판을 지나쳤다.
번화가를 벗어나니, 옹기종기 모인 주택들이 늘어졌다. 아이비로 뒤덮인 담벼락 귀퉁이를 돌자 골목이 나타났다.
얼마나 걸었을까, 골목 끄트머리에 가게가 하나 있었다. 음지에서 유일하게 햇빛이 드는 자리였다. 무척 외진 곳이라 아는 사람만 찾아올 수 있을 듯했다.
카르한은 찻잔 그림이 그려진 나무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찻집인 모양이었다. 일리아가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가게는 아늑하고 깔끔한 분위기였다. 테이블마다 간이 칸막이와 커튼이 달렸고, 타원형의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테이블이나 의자는 전부 고급이었으며, 소품 하나하나 세심한 손길이 닿아 있었다. 번화가 목 좋은 자리에 있었다면 문전성시를 이룰 법한 훌륭한 가게였다. 그러나 위치가 위치인지라,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리아는 가게 안쪽으로 걸어가 아무 자리에나 앉았다. 마치 주인처럼 거리낌 없는 태도였다. 잠시 망설이던 카르한이 맞은편에 앉았다.
“수행원은 데리고 오지 않았나요?”
“한 명 있긴 한데, 일이 있어서 오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무려 에반테온의 후계자인데, 호위 정도는 데리고 오는 게 당연하지 않나. 일리아가 의아하게 생각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대부분은 다가올 생각도 하지 않는지라.”
대충 납득이 갔다. 아까도 카르한의 주변만 한산했었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무척 조용하군요.”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해뒀어요.”
“……대여하신 겁니까?”
“아뇨, 제 가게거든요.”
그는 곧장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일리아는 테이블 끄트머리에 놓여 있던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일상 이야기를 하듯 말을 이었다.
“이틀 전에 매입했어요. 이 가게 근방은 전부 제 소유예요.”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는 카르한에게 일리아가 메뉴판을 내밀었다.
“뭐 드실래요?”
“……영애와 같은 것으로.”
“홍차 두 잔 준비해주겠어?”
일리아의 목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문 쪽에 서 있던 호위 기사 말렉이 부엌으로 들어갔다.
카르한이 잠시 그쪽을 보는 사이, 일리아가 메뉴판을 치웠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동안 생각해봤어요?”
일리아가 제안한 거래는 ‘서로의 파혼을 도와줄 것’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카르한은 아직 약혼하지는 않았으나,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었다.
카르한은 말없이 제 손가락을 매만졌다. 길쭉한 손가락이 얽혔다가 풀리기를 반복했다. 한참 만에 그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사실, 제안을 거절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겁니다.”
일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얼굴은 전혀 거절하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
“거절하겠다고요?”
일리아가 묻자, 카르한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치 훈계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거절하는 것이 무척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그를 찬찬히 살피던 일리아는 다시 질문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상대 집안과 논의 중이고, 집안에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
거절하는 이유 중, 그의 의견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무언가에 잔뜩 억압된 사람 같았다. 가만히 듣던 일리아가 물었다.
“소공자의 의견은요?”
“……제 의견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공자의 약혼이잖아요. 결정은 당신이 하는 거예요.”
일리아의 말에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는 듯 당황한 모습이었다.
“당신이 원해서 하는 약혼이라면 납득할게요. 소공자는 진정 델로타 영애와 약혼하고 싶나요?”
카르한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은 마치 목소리를 가두는 감옥이 된 것처럼 한참 동안 열릴 줄 몰랐다.
“저는…….”
곤혹스러운 듯 그의 시선이 허공을 배회했다. 일리아는 스스로의 마음을 파악하지 못한 카르한을 대신하여, 자신이 본 그대로를 말해주었다.
“제가 본 소공자는 약혼이 싫은데도 참는 것처럼 보였어요.”
꿰뚫어오는 시선에 카르한은 어깨를 짧게 떨었다. 한참 말이 없던 그가 느릿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제가 감히 결정을 내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안 될 거 뭐 있어요.”
냉큼 돌아오는 대답은 시원했다. 마치 파혼 정도는 별일 아닌 것처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또한 스스로 결정 내리지 못했어요. 늘 남의 의견을 따랐죠.”
“…….”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일리아의 보라색 눈은 햇빛이 비치는 수면처럼 반짝였다. 생동감 넘치는 눈이 카르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남들이 손가락질한다고 해도 어쩌겠어요. 그들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닌데.”
무덤덤하던 카르한의 얼굴이 조금씩 허물어졌다. 속눈썹이 떨렸고, 단단히 다물린 입매에 틈이 생겼다. 짧은 시간 동안 무척 생각이 많아 보였다. 일리아는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혼자 결정을 내리기 두렵다면, 차라리 저한테 사기 당한 거라고 해요.”
일리아는 자기를 탓해도 된다고 당당히 말했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제가 책임지겠어요.”
일리아의 말이 끝났을 때, 카르한은 침묵했다.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꼼짝 않았다.
일리아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이제 그의 결정만이 남았다.
가게 안은 온통 조용해서 바깥의 바람 소리만이 숨소리처럼 희미하게 들려왔다. 길고 긴 정적을 깨고 그가 입술을 열었다.
“……영애를 믿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저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 않습니다.”
덤덤하지만 솔직한 말이었다. 카르한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곱씹듯 눈을 감았다. 다시 그가 눈을 떴을 때, 깊숙한 다락에 햇빛이 들듯 푸른색 눈동자에 빛이 돌았다.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잘 생각했어요.”
일리아가 활짝 웃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때마침 홍차가 나왔다. 나이든 남자는 홍차만 내어주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를 매입하면서 함께 고용했어요. 차를 잘 끓이더라고요.”
귀가 들리지 않으니 어디다 이야기를 발설할 걱정도 없었다. 대신 일리아의 호위 기사가 직접 메뉴를 알려줘야 했지만 말이다.
일리아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종이를 꺼냈다.
“계약서예요.”
카르한은 종이를 확인했다. 계약서는 이미 빈틈없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