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74)
일리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기부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는 걸 목표로 해야겠어요.
직접 돈을 기부하는 건 부담스러워도, 물건을 사는 행위만으로도 기부가 된다면 다들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거라고 일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카르한.
일리아가 카르한을 끌어안았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기분 좋은 듯 눈매를 접었다.
-이번에 자선경매를 열어야겠어요.
일단 귀족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우선이었다. 일리아는 기부를 하나의 유행처럼 일으킬 생각이었다.
-유행을 문화로 정착시키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이죠.
그렇게 말하는 일리아는 무척 눈부셨다. 일리아라면 분명히 성공을 거둘 것이다.
-안 쓰는 물건 있으면 줘요. 경매에 부치게요.
-제 물건을요?
-당신 요즘 인기 많아요. 비싸게 팔릴걸요?
검술 대회에서 우승한 이후로 카르한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고, 일리아가 말해주었다. 카르한은 그런가……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 카르한은 에반테온 공작저를 방문했다. 경매에 내놓을 물건을 가져올 겸, 일리아가 준 선물들을 챙길 생각이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한 번은 들러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카르한은 본관에 들어섰다. 깊은 적막감이 카르한을 감싸왔다. 늘 활기찬 블로든 저택과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였다.
카르한은 스산한 복도를 쭉 걸어, 침실에 도착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남의 방에 들어온 것처럼 낯설었다. 방 안을 가볍게 둘러본 카르한은 필요한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르골, 커프스단추, 책……. 전부 일리아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한참 짐을 꾸리던 카르한은 마지막으로 옷장을 열었다. 일리아가 안겨준 옷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끝으로 갈수록 유행 지난 옷이 걸려 있었다.
“……기부할 수 있겠지? 일단 가져가볼까.”
유행은 지났지만, 깨끗하게 입어서 새것 같았다. 카르한은 옷을 꺼내 차곡차곡 가방에 넣었다. 그러다 단추가 하나 떨어진 옷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몇 년 전 황궁에 입궁했을 때 입었던 옷이었다. 그걸 기억하는 이유는 그때의 기억이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이 옷을 입었던 날, 카르한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었다. 나중에 집에 돌아왔을 때서야 단추 하나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마 뭔가에 걸려서 뜯어진 모양이었다. 수선하려고 했지만, 똑같은 단추를 구하지 못해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이게 아직도 옷장에 남아 있었구나…….”
잠시 고민하던 카르한은 그 옷도 가방에 집어넣었다.
다 챙기고 보니 생각보다 짐이 많았다. 카르한은 옷 때문에 무게가 상당해진 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장정 하나를 매달고 뛴 적도 있었는데, 이 정도는 무거운 축에 속하지도 않았다.
문 앞에 선 카르한은 마지막으로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오랜 시간을 보내왔던 공간이었다. 유년기 내내 머물렀던 곳이었고, 좋았던 추억보단 나쁜 기억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카르한이 머무를 수 있던 유일한 장소였다.
카르한은 느릿하게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계단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이와 눈이 마주쳤다. 블레어드였다.
“드디어 왔구나.”
블레어드가 웃으며 카르한의 앞으로 걸어왔다. 잠시 멈춰 선 카르한은 블레어드를 마주 바라보았다.
“소식은 전해 들었겠지?”
블레어드는 내년 봄에 열릴 총회를 언급하고 있었다. 이내 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파악한 블레어드가 미소를 지웠다.
“사실 이렇게까지 돌아갈 필요가 전혀 없는데.”
무척 귀찮다는 듯 블레어드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카르한이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한마디만 했어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진 않았을 것이다.
카르한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눈으로 카르한을 응시하던 블레어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블로든 하나만 믿고 덤벼봤자, 과연 그걸 네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카르한의 눈동자가 짧게 떨렸다. 블레어드는 카르한을 어떻게 흔들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늘 카르한을 부족하다고 말해왔다. 마치 세뇌 당하기라도 한 듯 그 말이 오랫동안 카르한의 발목을 붙잡았다.
“기생충 같은 네놈이 이번에는 블로든을 갉아먹을 생각이구나.”
파문이 일었던 카르한의 눈동자가 어느새 덤덤해졌다. 카르한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계속 떠들어 보십시오.”
“……뭐?”
“나한테 겁먹지 않은 척 애쓰는 걸로 들리니까.”
여유롭기만 하던 블레어드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블레어드가 카르한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무슨 개소리야.”
“그때 그 일도, 결국 나를 무서워해서 견제한 거잖습니까.”
카르한은 자신과 레베타 사이를 이간질한 것을 언급했다. 서늘한 눈으로 블레어드를 바라보던 카르한이 말을 이었다.
“지지 않을 겁니다. 그딴 더러운 짓이라도 해야 겨우 설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당신한테는.”
“카르한 에반테온……!”
블레어드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카르한은 그 손이 제 몸에 닿기 전에 손목을 틀어쥐었다. 손목이 으스러질 것 같은 악력에 블레어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카르한이 속삭였다.
“난 이제 도망치지 않아.”
과거에는 무서워서 도망쳤지만, 지금은 아니다. 실패해도 응원해줄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아니라고 부정하면 믿어줄 이들이 있었다.
“무슨 짓이야!”
그때 복도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르한과 블레어드가 고개를 돌려, 그쪽을 응시했다. 고용인 두 명을 대동한 레베타가 다급히 달려왔다.
“어서 그 손 놓지 못해!”
냉큼 블레어드의 옆에 선 레베타가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묻지도 않고 무조건 블레어드 편을 들고 있었다.
때를 놓치지 않은 블레어드는 단숨에 태도를 달리했다. 그가 무척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말에 상처 받았다면 미안하다.”
카르한은 블레어드를 강하게 밀쳐냈다. 블레어드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자, 레베타가 부축해주었다.
“네가 난폭한 성정인 건 알고 있었지만……! 거리의 무뢰배들도 너 같진 않을 거다!”
익숙한 상황이었다. 레베타는 늘 블레어드만 감쌌고, 모든 것을 카르한 잘못으로 돌렸다. 그때마다 상처 받아 왔지만, 이제는 그녀의 비난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앞으로도 레베타는 블레어드만을 위할 것이고……, 카르한은 더 이상 그녀의 애정이 필요 없었다.
카르한이 덤덤히 레베타를 응시하자, 그녀가 움찔했다. 마치 타인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항상 생각했습니다. 제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는지.”
“…….”
“아니라고 부정해도 당신은 믿어주지 않았지요.”
카르한은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 변명하고 싶지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생각도 없었다.
“지금 와서 진실을 말해봤자 믿지 않을 테니……, 공작부인께서는 계속 보고 싶은 것만 보십시오.”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레베타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할 말을 끝낸 카르한은 먼저 등을 돌려버렸다.
“카르한!”
등 뒤에서 레베타가 소리쳤다. 그러나 카르한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마침내 카르한이 분쟁 지역으로 떠나는 날이 오고 말았다.
캄캄하던 주위는 어느새 푸르스름한 여명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꼭두새벽부터 블로든 저택 현관 앞은 많은 이들로 북적였다. 짐을 싣던 고용인들을 뒤로한 채 카르한과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마주 섰다.
“무리하지 말고, 쉬면서 천천히 가요.”
“그 지역은 춥다고 하니, 도착하기 전에 미리 두꺼운 외투를 입는 게 좋겠습니다.”
“예, 전부 명심하겠습니다.”
비올레와 헤인리의 조언에 카르한이 대답했다. 내내 기운 없는 얼굴로 서 있던 클리프가 말했다.
“돌아오면…… 저와 오케스트라 감상하러 가는 겁니다. 알겠지요?”
카르한은 옅게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선물이 있어요.”
일리아는 뒤에 서 있던 고용인에게 무언가를 받아서 건넸다. 얼떨결에 검은 곰인형을 품에 안게 된 카르한이 눈을 깜빡였다.
“판매되지 않는 거예요. 당신을 위해 만들었어요.”
기간을 맞추느라 조금 힘들었다고 일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장난감 사업을 운영하는 일리아가 바쁜 와중에 저를 위해 특별한 선물을 마련해준 것이다. 카르한은 솜이 빵빵하게 들어간 곰인형을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소중히 데리고 있다가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저도 선물이 있습니다.”
옆에 대기하던 헤인리가 슬쩍 끼어들었다. 헤인리는 길쭉한 원통을 하나 내밀었다. 정체불명의 선물에 카르한이 갸웃거렸다. 그러자 헤인리가 작게 속삭였다.
“일리아 초상화입니다.”
“!”
이 귀한 걸……! 카르한이 눈을 크게 뜬 채 헤인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은테 안경을 추어올리며 중얼거렸다.
“잠시 대여해주는 겁니다.”
“꼭 돌려드리겠습니다.”
카르한은 귀품을 하사 받기라도 한 듯 두 손으로 받았다. 훈훈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일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일리아가 뭐냐고 묻기 전에 클리프가 나섰다. 코끝이 조금 붉어진 클리프는 화분 하나를 내밀었다.
“제가 키운 겁니다.”
순금으로 만든 호화로운 화분에 순무 하나가 심겨 있었다. 클리프가 순무를 건네주자, 블로든 가문 사람들 전부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진짜 저걸 주시다니…….”
그들의 수군거림을 들어보면 순무가 아니라 저택 문서라도 준 것 같았다.
“거기 환경이 척박하여 채소가 귀하다고 들었으니, 비상식량으로 먹어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저번부터 생각했지만, 클리프가 기르는 순무는 뭔가 특별한가 싶었다. 화분까지 받자 이제 남은 손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올레가 나섰다.
“내 선물은 지금 없어요.”
비올레는 카르한을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짤막한 선물 증정식이 끝나고, 일리아와 카르한은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다. 어제 나눴던 대화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온종일 같이 있으면서 그렇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도, 아쉽기만 했다.
카르한이 먼저 손을 뻗어 일리아의 손을 잡았다. 새벽 공기 때문에 조금 차가워진 손바닥에 온기가 옮겨갔다. 두 손에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카르한은 손가락 끝으로 일리아의 반지를 문질거리다가 입을 떼었다.
“제 생일이 되기 전에 돌아오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봄이 오기 직전의 겨울, 그때가 카르한의 생일이었다. 그리고 분쟁 지역에 가서 오랫동안 끝나지 않은 전쟁을 매듭짓는 것이 카르한의 소임이었다. 카르한은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몇 달 만에 끝내겠다고 맹세했다.
가을 초입의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쌀쌀해진 바람이 스쳐지나가자, 카르한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서 일리아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추우니 빨리 들어가십시오.”
“외투 안 벗어줘도 돼요. 현관 앞인걸요.”
“저는 마차에 실은 외투를 입으면 됩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몹시 그다운 행동에 일리아는 입술을 다물었다. 몇 달 사이, 카르한은 많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구석도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카르한 님,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
테시온이 다가와서 말해주었다. 프란체와 말렉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왔는지 테시온의 코끝이 조금 붉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어떤 그늘도 없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 카르한이 마차에 올라탔다. 카르한은 마차 창문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여행 떠나는 사람을 배웅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모습에 카르한은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드디어 마차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블로든 저택 본관이 점점 멀어지고, 흐드러지다 못해 꽃잎이 떨어진 장미들이 마차를 둘러쌌다.
카르한이 눈을 감았다. 곧이어 닫혔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의 눈동자는 결의로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카르한은 홀로 다짐했다.
***
카르한이 분쟁 지역으로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일리아는 카르한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다가, 비올레와 상의해서 유통망을 늘려보기로 했다.
카르한이 갈 분쟁 지역은 수도에서 먼 지방이었기에 뭔가 보내려고 해도 오래 걸렸다. 운송비가 비싼 탓에 물건을 잔뜩 실어서 이곳저곳 경유했는데, 차라리 지역마다 운송 업체를 두면 어떨까 싶었다.
경유지에서 재분류해서 운송한다면 지금보다 속도가 빨라질 터였다. 더불어 유통 단계도 대폭 축소할 수 있을 것이다.
일리아는 수도에서 판매되는 물건이 지방에서 열 배 넘는 가격에 팔리는 경우를 봤었다. 유통업자들이 폭리를 취해 가격을 지나치게 높인 것이다.
만약 작은 마을까지 단번에 운송할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된다면, 지방 사람들도 지금보다 저렴하게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 구상을 끝낸 일리아는 고민하지 않고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실행에 옮겼다.
“후우…….”
바쁘게 일하던 와중, 한숨이 튀어나왔다. 일부러 다른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정을 빡빡하게 잡았는데도, 때때로 카르한이 불쑥 생각났다. 잘 가고 있을지, 식사는 잘 하는지……. 울적해진 일리아는 기분을 전환할 겸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걷던 일리아는 점점 더 기분이 가라앉았다. 어디를 가도 카르한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곳곳에 전부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탓이었다. 일리아는 어느새 카르한이 머무르던 방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일리아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아버지?”
일리아의 부름에 클리프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일리아는 어쩐 일로 여기에 있냐고 묻는 대신, 제안을 건넸다.
“잠깐 차라도 마실까요?”
“그러자꾸나.”
클리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근처 응접실로 향했다. 자리에 앉은 일리아와 클리프는 가벼운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새 화제는 카르한으로 넘어왔다.
“잘 가고 있겠죠?”
“그렇겠지. 네 엄마가 호위까지 붙여줬으니까.”
비올레는 작별 선물로 든든한 비밀 호위를 붙여주었다. 혹시 습격을 받을지도 모르니, 카르한을 따라다니며 수상한 자들을 처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카르한이 알게 되면 신경 쓸까 봐 일부러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 순무를 주실 줄 몰랐어요.”
클리프는 카르한에게 순무가 심긴 화분을 선물해주었다. 뜬금없는 선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그냥 평범한 순무가 아니었다.
클리프는 작년에 취미로 화훼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손에 들어간 식물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심지어 저 먼 곳에서 공수해온 선인장까지 단숨에 죽였으니, 말 다 한 것이다.
상심한 클리프는 텃밭에서 순무 하나를 가져왔는데, 유일하게 죽지 않고 버텼다. 그는 무척 기뻐하며 순무를 애지중지 키웠다. 이름도 지어주고 영양제도 듬뿍 주었다.
노래를 들려주면 잘 큰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노래까지 불러줄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 그렇게나 아끼던 순무를 카르한에게 준 것이다.
“순무는 또 키우면 되니까.”
클리프는 왠지 아련한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그나저나 자선 사업 건은 잘 되어가고?”
“네, 일단 어떻게 할지 초안은 잡아뒀어요.”
일리아는 자선 경매부터 열기로 했다. 경매로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후에, 후원자들을 모을 계획이었다. 일회성으로 끝내지 않고, 꾸준히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일리아는 첫 번째로 빈민가부터 구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빈민가 출신인 프란체와 바네사에게 조언을 구했다. 프란체는 빈민에게도 배움의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고, 바네사는 환경을 바꾸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의 의견을 따라, 일리아는 빈민가에 학교를 세우고 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야겠다고 결정 내렸다. 만약 이 계획이 성공을 거두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될 것이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흐뭇한 얼굴로 일리아를 바라보던 클리프가 말했다.
“나도 경매에 내놓을 만한 물건을 찾아보마.”
“고마워요. 아버지.”
벌써 출품할 물건만 해도 열 손가락을 넘어갔다. 바네사가 습작 그림을 한 점 주기로 했고, 비올레와 헤인리도 동참했다. 황후 또한 소식을 듣고 기꺼이 애장품을 내놓겠노라 약조했다.
‘카르한이 준 옷, 확인도 못 했네.’
카르한은 떠나기 전에, 가방 하나를 건네주었다.
-유행이 지나긴 했는데, 전부 깨끗하게 입어서 가져왔습니다.
-잘했어요. 원단만 잘라서 다시 활용하면 되니까요.
-아, 옷 한 벌은 수선해야 합니다. 단추가 하나 떨어져서…….
일리아는 아직도 가방을 열어보지 못했다. 겨우 그의 빈자리에 익숙해지려 하는 참이었다. 괜히 카르한의 옷을 보면 더 보고 싶을까 봐 참고 있었다.
클리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에 다른 일정이 있었다.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그래, 일찍 들어오거라. 저녁에는 다 같이 식사할 거니까.”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여준 후에 응접실을 나섰다. 외출 준비를 끝낸 일리아는 프란체와 말렉을 대동하고 저택을 빠져나왔다.
일리아가 향한 곳은 델로타 저택이었다. 저택 현관 안으로 들어선 일리아는 문 앞에 서 있던 스텔라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