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76)
“보기보다 철저하군요.”
“제가 의심이 많아서요.”
“나는 영애가 마음에 들었어요. 하지만.”
레베타는 무릎에 손을 얹은 채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주제를 모르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아요.”
일리아는 스텔라보다 장점이 많아서 선택한 패였다. 하지만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굳이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레베타에게는 스텔라가 있었다. 약혼을 취소하고 싶지 않다고 울고불고 매달리던 스텔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델로타 영애와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결국 스텔라가 언급되자, 일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언제든 카르한의 약혼자를 갈아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아들이라는 밑천을 두고 장사하려는 레베타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서 소공자가 분쟁 지역으로 가 있는 사이에 다시 약혼자를 바꾸시려고요?”
더 이상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린 레베타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쳤다.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소공자는 공작부인께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요?”
생각해본 적 없다는 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레베타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자랑스러운 아들이죠.”
“에반테온 공자와 똑같이요?”
레베타의 반듯하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은 질색이었기에, 일리아는 계속 궁금했던 것을 대놓고 물었다.
“공작부인께서 왜 소공자에게만 매몰차게 구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대가 무엇을 안다고!”
레베타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동자에는 불안함과 분노가 가득했다. 마치 지금껏 꼭꼭 숨겨온 본심이 파헤쳐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카르한에게 무엇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전부 거짓말이에요.”
“아뇨, 제가 직접 보고 판단한 거예요.”
일리아의 대답에 레베타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그래서 그 애가 내가 자기를 괴롭혔다고 하던가요?”
“…….”
“분쟁 지역으로 떠난 것도 내 잘못이라고 탓할 거냐고요!”
일리아가 침묵하자, 레베타는 입술만 짓씹었다. 그녀가 의자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우아한 공작부인은 온데간데없고, 잔뜩 불안해하는 여인만 있을 뿐이었다.
“……잘못은 그 애가 한 거예요.”
레베타는 숨도 쉬지 않고, 지금까지 카르한이 저질렀던 잘못을 늘어놓았다. 무척 아끼던 물건을 훔친 것, 짐승의 사체를 침실에 던져둔 것, 옷을 난도질한 것……. 거기까지 말한 레베타가 좀 더 떳떳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대도 내 입장이 되었다면, 그렇게 했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레베타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만약 그녀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그건 실수가 아니라 고의에 가까웠다. 한 명을 괴롭히기 위해서 악의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일리아가 아는 카르한은 절대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었다.
‘블레어드의 소행이겠지.’
그러나 레베타는 블레어드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일리아는 제 앞에서 여우처럼 굴던 블레어드를 떠올렸다가 지워냈다. 그놈이라면 충분히 레베타를 구워삶았을 것 같았다.
“소공자가 잘못을 저지르는 걸 직접 목격하신 적이 있나요?”
“…….”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 한 번쯤은 현장에서 잡힐 만하잖아요.”
레베타는 대답하지 못했다. 몇 년 동안 이어진 기행이었지만, 목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건…….”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던 레베타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카르한이 집을 떠난 후로 그런 일이 뚝 끊겼어요.”
“소공자가 스스로 집을 떠날 때까지 누군가가 죄를 뒤집어씌웠을 수도 있죠.”
레베타가 입술을 짓씹기 시작했다. 기어코 그녀의 입술에 핏물이 맺혔다.
“……무례하군요.”
레베타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일리아를 노려보았다.
“내가 오해했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나는 틀리지 않았어요.”
결국 그녀가 취한 것은 회피였다. 지금까지 굳게 믿어온 진실을 함부로 파헤쳤다가, 저 자신이 무너질까 싶어서였다. 레베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약혼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하죠.”
레베타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공작부인.”
일리아의 부름에 그녀가 멈춰 섰다.
“후회하지 마세요.”
“내가 후회할 것 같아요?”
레베타가 비웃었다.
“아까 했던 말은 정정하죠. 내 아들은 블레어드 하나뿐이에요.”
그녀는 자신이 잠깐이라도 흔들렸다는 사실을 떨쳐내듯, 단호히 말했다.
“난 그 애를 위해 뭐든 할 수 있어요.”
***
카르한이 수도를 떠난 지 열흘이 지났다. 식사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마차는 열심히 달렸다.
처음에는 번듯한 건물들이 거리를 꽉 채웠지만, 수도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거리는 쇠퇴해갔다. 대도시를 벗어나, 소도시로……. 그러다 작은 촌락만 간간이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카르한은 황량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곧 도착하겠습니다!”
마부의 말에 테시온이 엉덩이를 들었다 뗐다. 며칠 내내 계속 앉아 있어서 그런지 불편한 모양이었다. 마차가 워낙 크고 넓어서 누워도 될 정도였지만, 어찌 그러겠냐며 끝끝내 사양했다.
창문에 고개를 기댄 카르한은 엘리오드 백작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기묘한 만남이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그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떠나버렸다. 카르한에게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다. 아니, 요구한 게 있다면 블레어드의 신변이었다.
굳이 물어보진 않았지만, 개인적인 복수를 매듭짓고 싶은 듯했다. 카르한은 일단 엘리오드 백작의 말이 진실인지부터 파악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착하면 편지부터 보내야지.”
카르한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일리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편지의 반절 이상은 보고 싶다는 말로 가득할 것이다.
뒤늦게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가을 초입인데도 잎사귀 없는 마른 나무들로 채워져 있었다. 다 쓰러져가는 집들이 드문드문 보이다가 사라졌다. 이곳은 에반테온 공작령에서도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지역이었다.
마차는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저택 앞에서 멈추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관리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와 고용인들이 카르한을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카르한이 가만히 바라보자, 남자가 움찔했다. 뒤에 서 있던 고용인들도 눈이 마주치자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카르한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만나자마자 저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오랜만이었다. 평생 익숙했던 반응이었는데, 그간 잊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이 마을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소개한 관리인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짐은 저희가 옮길 테니, 먼저 침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일단 마을을 둘러보겠습니다.”
“지금 당장 말씀이십니까?”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관리인은 망설이다가 마지못해서 걸음을 뗐다.
“초행이시니, 제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카르한과 테시온은 관리인을 따라 마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가를 살펴본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카르한과 테시온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삭막하다 못해서 쓰러지기 직전의 집들이 즐비했다. 심한 경우에는 집터에 지붕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무언가만 세워져 있었다. 아무리 전쟁터와 가까운 마을이라 한들, 정도가 심했다.
“이대로 방치되어 온 겁니까?”
카르한의 물음에 관리인이 어깨를 움찔하며 대답해주었다.
“이 마을은 세금을 낼 형편조차 되지 않아서, 도리어 구휼금을 받아 쓰고 있습니다. 요즘은 그조차 받기가 어려워…….”
잦은 전쟁과 식물이 잘 자라지 않는 척박한 토지 탓에 자급자족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단체로 이주하자니, 공작이 허가를 내어주지 않았다. 아예 땅을 비워두면 몰래 들어온 야만족들이 터를 잡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저희는 계속 이렇게 지내왔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관리인의 목소리는 묘하게 차가웠다. 알량한 동정을 하는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수도에서 좋은 것만 보고 살아온 귀족들에게 이곳은 황무지나 다름없을 테니 말이다.
카르한이 지나가자, 마을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어떤 이들은 카르한과 마주치자마자 주저앉았다.
“역병 환자도 이 정도 취급은 아닐 텐데…….”
테시온이 미간을 좁힌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에 카르한은 자신이 검은 옷을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일은 분홍색 셔츠를 입어야지.
혼자 다짐한 카르한은 잠시 멈춰 섰다. 반쯤 무너진 담벼락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왜 저렇게 된 겁니까?”
“얼마 전에 비가 많이 와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짓자니, 일할 사람이 없어서…….”
젊은이들은 전쟁에 나가버려, 마을엔 노약자만 남아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카르한이 말했다.
“그럼 제가 고쳐보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무너진 돌덩이들은 장정 둘 이상이 붙어야 겨우 들 수 있을 정도였다. 막 와서 의욕이 넘쳐서 저러나, 하고 다들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돌무더기 앞에 선 카르한이 큼직한 바위를 붙들었다.
“!!”
지켜보던 이들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거대한 바위가 단숨에 담벼락 위에 놓인 것이다. 다들 경악하는 사이, 카르한은 다시 두 번째 돌덩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녁 안으로 다 쌓아드리겠습니다.”
***
루벤투스는 공작령 끄트머리에 위치한 마을의 관리인이었다. 마을을 돌보며 공작 가문에 보고를 올리고, 부상당한 병사들을 돌보는 것이 그의 주된 임무였다.
바쁜 나날을 보내던 루벤투스는 얼마 전에 위로부터 지령을 전달 받았다. 에반테온 소공자가 앞으로 분쟁 지역에 머무를 테니, 적당히 대우해주라는 명령이었다.
루벤투스는 그때부터 근심 걱정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소공자는 제국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유명 인사였다.
이름 뒤에는 항상 전쟁광, 살인귀, 개차반…… 그런 말들이 붙었다. 분명 작년에 수도로 귀환한 것으로 아는데, 살육을 못 잊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오는 걸까 싶었다.
한참 걱정하던 루벤투스는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어차피 이렇게 작은 마을은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지금까지 이곳을 들렀던 귀족들은 더럽고 불쾌한 곳에 있기 싫다며 금방 떠나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카르한이 도착했을 때, 루벤투스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차갑고 매서운 인상이긴 했으나 말투와 행동은 무척 정중했다. 작은 마을의 관리인인 그에게도 꼬박꼬박 존대해주었다.
멀리서 오느라 피곤할 텐데, 카르한은 곧장 마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반쯤 무너진 담장을 보던 카르한이 말했다.
-그럼 제가 고쳐보겠습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광경이 펼쳐졌다. 마을 사람 셋이 겨우 달라붙어야 들 수 있는 돌을, 카르한이 번쩍 든 것이다.
그는 힘들지도 않는지 척척 담장을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루벤투스는 충격 받았다. 어마어마한 괴력도 놀라웠지만, 흙먼지를 뒤집어쓰고도 묵묵히 돌을 쌓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카르한은 정말로 저녁이 오기 전까지 담장을 전부 말끔하게 보수해놓았다. 뒤늦게 정신 차린 루벤투스는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 목욕물을 준비해두었다.
“씻고 나오시는 동안, 저녁을 준비해두겠습니다.”
카르한이 씻는 동안, 루벤투스는 고용인과 함께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오랜만에 식량 창고를 탈탈 털어 그나마 번듯한 음식을 마련했다. 그는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상한 분이야. 행패 부리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첫인상이 날카로워서 긴장했지만, 상상과는 달랐다. 아무래도 소문은 부풀려진 모양이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카르한과 테시온이 새로 옷을 갈아입고 식당에 도착했다. 아까와 달리 분홍색 셔츠를 입은 카르한의 모습에 루벤투스는 잠시 멈칫했다. 얼굴이 잘생겨서 그런지, 어색하지 않고 제법 어울렸다.
“앉으십시오.”
카르한이 상석에 앉자, 접시가 테이블에 하나씩 놓였다. 옥수수 수프, 밀빵, 닭고기 구이, 약간의 과일이 전부였다. 높으신 분을 대접하기엔 한참 부족하지만, 이 정도면 특식이었다. 카르한의 눈치를 보던 루벤투스가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감사합니다.”
카르한은 가장 앞에 있던 접시부터 깔끔하게 비워나갔다. 음식이 형편없다고 포크를 던지면 어쩌나,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루벤투스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가 뒤늦게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
“언제쯤 전장으로 가실 예정입니까?”
“사흘 후에 떠날까 싶습니다.”
이곳은 변경과 가장 가까운 마을이었다. 분쟁 지역이라 해도 매일 전투가 벌어지는 건 아니었기에, 카르한은 이곳에서 사흘 정도 머무른 후에 전투지로 떠날 생각이었다. 가서 상황을 살핀 후, 전투가 없을 때는 이곳으로 돌아와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루벤투스는 제 앞에 놓인 음식을 깨작거렸다. 창고에 남아 있는 식료품을 떠올리면 마음 놓고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카르한이 조용히 물었다.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원래라면 루벤투스가 해야 할 말을 카르한이 하고 있었다. 당황한 루벤투스는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이제 곧 겨울이라, 식량을 비축해두어야 합니다. 그래도 귀하신 분께서 오셨으니…….”
카르한이 미간을 좁혔다.
“근처 영지에서 식량을 조달 받지 못하는 겁니까.”
“작년에 흉년이라며 구휼금이 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쟁터와 가깝기에 병사들이 이곳까지 흘러들어올 때가 잦습니다.”
요즘 들어 군영지에서 이탈한 병사들이 많았다. 그들까지 챙기다 보니 물자가 부족해졌다. 루벤투스는 순식간에 어두워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올해는 유독 힘든 겨울을 나게 될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뒤늦게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본의 아니게 이 땅의 주인인 공작을 탓하는 것처럼 말해버렸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는 공작의 차남이었다. 황급히 변명하려는데,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그거라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예?”
카르한이 포크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벤투스는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따라, 현관 앞으로 나갔다. 깜깜해진 허공을 바라보며 서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마차 여러 대가 줄줄이 들어오고 있었다.
루벤투스가 입만 떡 벌리고 있자, 카르한이 마차로 다가가 천 덮개를 벗겼다. 곡식, 건조 과일, 육포, 간식까지 다양했다. 짐마다 어떤 품목인지 적혀 있어서 분류하기 쉬웠다.
카르한은 포장지에 적힌 글씨를 보고 멈칫했다. 그러더니 혼자 감동에 젖어서 포장지 위의 글씨를 손끝으로 쓸었다. 고개를 든 카르한이 말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예, 겨울은 충분히 날 수 있습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루벤투스는 무척 밝은 얼굴이었다. 카르한은 짐마차를 힐끗 보았다.
어차피 혼자서 다 쓸 수 없는 양이었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도 이런 상황을 예상했기에 일부러 짐을 과하게 꾸려준 것이었다.
이걸로 이번 겨울은 어찌 넘길 수 있을 것 같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공작이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다면 이 마을은 결국 쇠락할 것이다.
카르한이 맡은 임무는 야만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지, 마을을 구휼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은 그저 전쟁터로 떠나기 전에 잠깐 머무르는 곳에 불과했다.
하지만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분명 일리아도 자신의 고민을 들었더라면 망설이지 말라고 응원해주었을 것이다. 고심하던 카르한이 루벤투스에게 물었다.
“행정 관리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그게…….”
루벤투스는 우물쭈물했다. 이곳 관리인은 루벤투스 혼자뿐이라 행정 쪽은 손 놓은 지 오래였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루벤투스는 카르한을 데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창고나 다름없어 보이는 집무실에 들어섰을 때, 카르한은 어마어마하게 쌓인 서류탑을 목격했다. 전투 보고서, 자금 계획서, 마을에 출입한 사람 명단까지……. 서류가 분류되지 않고 마구잡이로 섞여있었다.
“이런 실정이라……, 죄송합니다.”
“제가 정리해도 되겠습니까?”
카르한의 물음에 루벤투스는 잠시 망설였다. 저렇게 많은 걸 어떻게 정리한단 말인가. 자칫 잘못 건드리면 지금보다 더 엉망이 되어버릴 것이다. 차마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없었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한이 겨우 빈자리를 확보해 책상 앞에 앉고, 테시온이 보조해주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서류 정리를 시작했다.
“!”
루벤투스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카르한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서류를 분류하고 있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잠시 넋 놓고 서 있던 루벤투스는 카르한의 손이 스치고 간 서류를 확인했다. 같은 범주끼리 분류해둔 데다가 안건까지 세부적으로 재정리해두었다.
조용히 경탄하는 루벤투스의 눈빛엔 이미 존경이 가득했다. 도대체 누가 소공자를 개차반이라고 했던가! 그딴 소문을 낸 놈을 찾으면 바로 멱살을 쥐고 흔들어줄 수 있었다.
“엣취.”
그때 테시온이 재채기하자, 카르한이 잠시 하던 일을 멈추었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카르한이 서서히 고개를 돌려 루벤투스를 바라보았다. 루벤투스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누른 채 목청 높여 말했다.
“이곳에 계시는 동안, 성심성의껏 소공자님을 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