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77)
20장
***
일리아는 카르한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비올레가 붙여준 수족들은 공작령을 밟기 전에 돌아왔다. 공작의 허가 없이 타 가문의 기사가 영지에 들어섰다간 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블로든 측에서 사병을 보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대신 일리아는 블로든과 어떠한 관계도 없는 용병들을 고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혹시나 병력이 모자라면 그들을 보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유통망 설립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여러 곳에 지부를 설립하고, 지방을 담당할 상단을 물색 중이었다.
그 외에도 일리아는 자선 사업 때문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경매를 열 적당한 장소를 찾던 끝에, 결국 오페라 극장을 대관하기로 했다.
이번 자선 경매는 크고 화려하게 열 생각이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매년 열리는 행사로 자리 잡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 다음 자선 사업에 도움을 줄 후원자들을 모집할 계획이었다. 일리아는 잠자는 시간도 줄인 채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자선 경매가 있는 날이었다. 일리아는 이른 오후쯤 오페라 극장으로 향했다. 근처에서 볼일을 본 후 산책 삼아 걸어가는데, 앞서 걷는 귀부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요즘 자선 경매로 소문이 자자하더라고요.”
“저는 델로타 영애께서 추천해주셔서 한번 구경하러 왔어요.”
“듣기로는 엄청난 규모로 진행한다던데……, 솔직히 자선 경매가 커 봤자 얼마나 크겠어요.”
“맞아요. 아무리 블로든이 주관한다고 해도 말이에요.”
미술품이나 보석 경매보다는 규모가 작을 거라며 그녀들은 입 모아 말했다.
“그래서 편하게 생각하고 왔는데…….”
하하호호 웃던 귀부인들은 잠시 멈춰 섰다. 그녀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오페라 극장 앞은 수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입장하려고 줄 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장해서, 귀부인들의 얼굴에도 덩달아 긴장이 서렸다. 뒤늦게 도착한 일리아 또한 예상보다 많은 인파에 놀라고 말았다.
“일리아 블로든!”
저 멀리서 스텔라가 뛰어와 일리아 앞에 멈춰 섰다. 인사도 집어치운 그녀가 다짜고짜 물어왔다.
“도대체 경매에 뭘 출품한 거야?”
별로 그렇게까지 특별한 건 없었다. 그냥 주위 사람들한테 받은 걸 경매에 올렸을 뿐이다. 바네사의 그림이랑 황후의 브로치, 카르한의 장갑, 클리프가 외국에서 사온 조각상, 비올레의 검, 헤인리가 쓰던 책…….
“목록이 뜨고 나서, 다른 경매장에서 오늘 경매 취소한다는 공문까지 올라왔다고.”
“…….”
일리아가 예상하지 못한 게 하나 있다면, 주위 사람들이 너무 유명 인사라는 것이었다. 결국 일리아는 번호표까지 만들어서 사람들을 입장시켰다.
다행히 수도에서 가장 큰 오페라 극장을 대관한 덕분에 무리 없이 수용할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자리가 부족할까 싶어서 의자도 따로 마련해두었다.
입장한 사람들은 내부를 둘러보고 감탄했다. 기존 극장과 달리 안은 환했다. 밝은 색 커튼을 달고, 생화와 크리스털로 장식해두어 눈이 즐거웠다. 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간단한 연주회 또한 준비되어 있었다. 말이 간단한 연주회지, 수도 최고 악단들의 공연이었다.
연주가 끝나고 일리아가 무대에 오르자, 시끌시끌하던 내부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일리아는 차분히 자신을 소개한 후 설명회를 시작했다.
“오늘 경매 수익은 빈민 구제와 보육원에 쓰일 예정입니다. 그리고 블로든 가문은 대대적인 자선 사업을 펼칠 예정으로, 함께할 후원자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일리아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발언을 이어나갔다.
“후원자들은 전부 명단에 실릴 것이며, 일정 금액 이상 기부하신 분들은 따로 신문에 게재할 것입니다.”
일리아의 말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였다. 기부자 명단에 오르면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공개적으로 돈이 많다는 걸 과시하는 한편, 좋은 일을 했다고 찬사도 받을 것이다.
사교계는 허영심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 세계였다. 지금까지는 누가 더 비싼 옷을 입고 귀한 보석을 찼는지 자랑했지만, 이제는 누가 더 많이 기부했는지 경쟁하게 될 것이다. 발언을 끝낸 일리아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빈 객석을 찾아 앉았다.
“한번 후원해볼까?”
“얼마나 가려나. 자선 단체들은 대부분 1, 2년 하고 그만두던데.”
좋게 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처음부터 칭찬만 들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앞으로 차차 보여주면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 일리아의 목표였다.
“그럼 지금부터 자선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를 맡을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느슨하게 앉아 있던 사람들도 자세를 바로 한 채 눈을 빛냈다. 다들 노리고 온 물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첫 경매 물품은 스텔라가 내놓은 로맨스 소설책이었다. 유명한 작가에게 직접 원고를 의뢰해서 만든 특별한 책이었다.
‘그 정도로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는 줄 몰랐지.’
스텔라에 대해 알면 알수록 신기했다. 스텔라는 로맨스 소설 애독자로 지금까지 취미를 숨겨왔다. 자신의 위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대놓고 좋아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로맨스 소설 독서회에 다닌다는 말까지 해주었다.
“이 책은 스텔라 델로타 님께서 기증하셨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우르르 팻말을 들었다. 스텔라의 추종자들도 있었고, 정말로 책을 가지고 싶어 하는 이들도 보였다.
입찰 금액이 순식간에 불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최종 낙찰가는 예상보다 훨씬 높은 금액이었다.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스텔라가 앉아 있는 자리를 보았다. 옆모습만 봐도 무척 뿌듯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후로 자잘한 물건들이 경매에 올라갔다. 전부 좋은 가격에 낙찰되었고, 드디어 일리아가 직접 받아온 물건들이 경매에 올라갔다.
“요즘 가장 주목받는 신예 화가인 바네사 님의 습작 그림입니다!!”
“와아악!!”
그때부터 아비규환이었다. 다들 팻말을 흔들고 소리 지르며 난리도 아니었다. 관심 없던 사람들도 저건 사야 하나? 싶어서 참여하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가장 앞자리에서 팻말을 치켜드는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을 발견했다. 다들 벌떡 일어나서 팻말을 붕붕 흔들고 있었다. 바네사의 그림을 가지고 싶다고 노래 부르더니, 참지 못하고 경매에 참가한 모양이었다.
천정부지로 오르는 금액에 사회자가 당황했다. 이 정도면 웬만한 경매에서도 손꼽히는 금액이었다.
“네! 550만 크로엘에 낙찰되었습니다!”
엄청난 금액에 객석이 술렁였다. 감히 그 이상을 부를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이 아쉬워하며 팻말을 내리자, 다음 물건이 경매에 올라갔다.
어떤 물건이 올라오든 경쟁이 치열했다. 클리프의 조각상은 예술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 중 하나가 사들였고, 비올레의 검은 유명한 사업가의 손에 들어갔다.
특히 헤인리가 아카데미 시절에 썼던 책은 열성 학부모끼리 경쟁이 붙어서 난리도 아니었다. 분위기는 점점 과열되었고, 목표 금액은 달성된 지 한참 지난 후였다.
마침내, 사회자가 유리 상자에 든 물건을 단상에 올려두었다. 유리 상자 안에는 검은색 가죽 장갑이 들어 있었다.
“이 장갑은 아주 특별합니다. 이번 황실 검술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신 카르한 에반테온 님께서 기증해주셨습니다!”
카르한이 떠나기 전에 경매에 내놓고 싶다고 부탁했던 물건이었다. 옷도 왕창 넘겨주었는데, 유행이 지났으니 시설에 기부해달라고 말했기에 경매에 올리지 않았다.
옷이 든 가방은 아직도 손대지 못한 상태였다. 카르한이 너무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을 때 열어볼 생각이었다.
“검술 대회 때 꼈던 장갑이래.”
“가지고 싶어.”
거의 대부분의 객석에서 팻말이 올라갔다. 카르한의 인기가 한눈에 보이는 것 같아서 일리아는 흐뭇하게 웃었다.
‘카르한이 직접 이걸 봤으면 좋았을 텐데…….’
첫 만남 때, 카르한은 사람들이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이 고민이라고 말했었다. 이제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아졌다고, 일리아는 알려주고 싶었다.
입찰 금액이 가파르게 치솟았다. 감당할 수 없는 금액에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몇몇 사람들만 남아서 경쟁을 이어나갔다. 벌써 건물 한 채는 살 수 있을 만큼 올라버린 후였다.
“400만 크로엘! 더 이상 안 계십니까?”
400만을 부른 사람은 어느 노귀족이었다. 그는 자신이 낙찰 받을 것이 분명하다는 듯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때 일리아가 팻말을 들고 말했다.
“700만 크로엘.”
헉, 하고 숨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최종 금액의 두 배 가까이 되는 금액에 사람들이 기함했다. 사회자마저 놀라서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700만 크로엘 나왔습니다!”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전부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얼굴을 알아본 이들이 수군거렸다.
“블로든 영애가 왜?”
“이거 블로든 가문에서 주최하는 자선 경매 아냐?”
일리아는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저도 가지고 싶어서요.”
일리아는 반드시 낙찰가대로 돈을 기부할 것이며, 내역까지 공개하겠다고 못 박아두었다. 그제야 사람들이 전부 조용해졌다.
“더 없으십니까? 그럼 700만 크로엘에 낙찰되었습니다!”
역대 최고 금액에 사람들은 놀라서 눈만 깜빡였다. 정원 딸린 성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카르한의 물건을 손에 넣게 된 일리아는 미소 지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기회를 줄까 고민했지만, 역시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다.
“후원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따로 남아주시면 됩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설명회를 한 후에 후원자들을 모집할 생각이었다. 이 부분은 클리프가 담당하기로 했다. 오랫동안 꾸준히 기부해온 클리프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앉아 있던 사람 중에 반절 정도가 빠져나갔다. 이 정도면 출발이 아주 순조로웠다. 그때 누군가 일리아를 불렀다.
“블로든 영애.”
일리아는 제 앞으로 걸어온 블레어드를 보았다. 블레어드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말했다.
“후원 건으로 면담을 요청합니다.”
일리아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카르한이 떠나면 분명 저를 찾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자선 경매에 왔을 줄이야.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한번 들어볼 생각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일리아는 극장의 뒤편으로 그를 안내했다. 배우 대기실로 쓰이는 공간에 일리아와 블레어드가 들어섰다. 혹시 몰라, 문 밖에 프란체와 말렉을 대기시켰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목적이신가요?”
후원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일리아는 알고 있었다. 블레어드는 말이 잘 통해서 좋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첫 만남 후로 계속 지켜봐왔습니다. 탁월한 사업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시더군요.”
블레어드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신분에 비해 재능이 아깝다는 말을 은근슬쩍 집어넣었다.
“저는 영애에게 없는 것을 줄 수 있습니다.”
드디어 본론을 꺼낸 블레어드가 뱀처럼 속삭였다.
“저를 택하신다면, 당신을 에반테온 공작부인으로 만들어주겠습니다.”
***
얼마 전, 레베타는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리아를 찾아갔다. 카르한과 약혼을 추진시키고 부족한 합의금을 충당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레베타는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왔다. 일리아 블로든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온종일 방에 틀어박힌 채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레베타는 기어코 돈을 마련해 백작에게 합의금을 전달했다.
그 많은 돈을 구해왔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블레어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레베타가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 싶었다. 블레어드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내년 봄, 모든 원로들이 모이는 총회의를 열어 후계자를 가리는 것으로.
내년 봄에 있을 총회의를 위해, 원로들을 확실하게 제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블레어드는 저를 지지하는 원로들을 찾아갔다. 취향에 맞는 선물을 주고, 자신이 작위를 계승하면 확실히 챙겨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중 한 명은 공작령에 있었는데, 거리가 멀었기에 서신과 선물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 정도 성의면 충분할 터였다. 이미 과반수의 원로들이 블레어드를 지지했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 시간이 남은 김에 중립 측 원로들까지 끌어들여야 했다.
레베타는 끝까지 저를 지지해줄 테지만, 공작은…… 언제든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꿀 수 있어서 불안했다.
블레어드는 버릇처럼 선반 위를 더듬거리다가 멈칫했다. 약을 끊은 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조금만 초조해지면 자연스럽게 약을 찾게 되었다.
“젠장.”
블레어드는 아직도 금단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어떠한 흠집도 만들어선 안 됐기에 꾸역꾸역 참았다.
원로들에게는 불의의 사고로 백작 아들을 죽인 거라 둘러댔다. 그런데 약에 손댔다는 것을 들키면 문제가 달라진다. 보수적인 원로들은 이것을 흠으로 잡을 터였다.
“그냥 죽여 버릴까.”
총회의 전까지 카르한을 제거해버리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마침 분쟁 지역으로 보내버렸으니, 핑계 댈 것도 충분했다. 블레어드는 손가락으로 탁자만 톡톡 두드렸다. 거기까지 생각했음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카르한의 뒤에는 블로든 가문이 있었다. 카르한이 수도에서 입지를 다지고, 검술 대회에서 우승을 거둔 것도 블로든 가문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앞으로도 블로든이 가장 큰 변수가 될 터였다.
탁자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멎었다. 가장 쉬운 해결 방법이 떠올랐다. 카르한이 믿고 있는 구석을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어차피 공작부인이 되고 싶어서 카르한을 선택한 거겠지.”
일리아 블로든이 카르한을 진심으로 사랑할 리 없었다. 두 사람은 올해 처음 만났다고 했고, 그때의 카르한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카르한이 공작가의 후계자이니 신분 상승을 노리고 교제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일리아는 블레어드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터였다.
“신분이 아쉽긴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일리아는 백작 가문 영애였다. 거기다 공직과 거리가 먼 가문이라, 황실에 줄이 없었다. 뒤를 받쳐줄 세력이 없으니 혼사로 정치적인 이득은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도 고위 귀족도 무시할 수 없는 재력을 생각하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때마침 블레어드는 일리아가 자선 경매를 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곧장 경매에 참석했다.
그리고 지금. 블레어드는 눈앞에 앉은 일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를 택하신다면, 당신을 에반테온 공작부인으로 만들어주겠습니다.”
블레어드의 제안에 일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비록 카르한이 지금 후계자라 하나, 원래는 제 자리였습니다.”
금방 되찾아올 거라며 블레어드가 자신했다.
“영애께서 하시는 사업도 제가 뒤를 봐줄 수 있습니다.”
에반테온 가문은 대대로 국무회의에서 발언권이 강했다. 공신 가문에 공작이라는 지위가 상당한 힘을 실어주어, 법안을 심의할 때도 유리한 쪽으로 이끌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보단 훨씬 낫지요.”
블레어드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으며 자신 있게 미소 지어 보였다. 가라앉은 보라색 눈동자가 블레어드에게 향했다. 내내 침묵하던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는 공작부인이 될 거예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블레어드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블레어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당신의 부인은 되고 싶진 않아요.”
거절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카르한이 공작이 될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블레어드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했으나 눈동자엔 불쾌함이 서렸다.
“그 애의 무엇을 믿는 겁니까?”
“진실성이요. 적어도 당신처럼 거짓말은 하지 않죠.”
“…….”
“그리고 이렇게 멋없는 약혼 제안은 질색이라서요.”
블레어드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신분 상승 시켜준다는 약조를 하면 조금이라도 흔들릴 줄 알았건만. 회유해도 넘어가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이 있었다.
“오라버니께서 공직자라 들었는데.”
블레어드가 다른 화제를 꺼내자, 일리아의 속눈썹이 떨렸다.
“앞으로 공직 생활이 힘들어질지도 모르겠군요.”
네 어리석은 선택 때문에 가족이 힘들어질 거라는 협박은 언제나 잘 먹혀들었다. 블레어드는 느긋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드레스 자락을 쥔 채 일리아가 고개를 뻣뻣하게 들었다.
“이런 더러운 수법밖에 못 쓰는 사람이라니. 저열하기 짝이 없네요.”
일리아는 경멸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소공자가 반드시 공작이 되어야겠어요.”
일리아가 흔들리지 않고 받아쳐오자, 그가 우스운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블레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일리아의 앞을 지나치며 속삭였다.
“그리고 후원하고 싶다는 말은 진짜입니다. 조만간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일리아 블로든부터 치워야 했다.
***
레베타는 버릇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일리아를 만난 후로 생긴 버릇이었다.
-소공자가 잘못을 저지르는 걸 직접 목격하신 적이 있나요?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 한 번쯤은 현장에서 잡힐 만하잖아요.
-소공자가 스스로 집을 떠날 때까지 누군가가 죄를 뒤집어씌웠을 수도 있죠.
일리아의 목소리가 떠오를 때마다 레베타는 발작하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 없어.”
한 번쯤 의심은 했지만, 내내 묻어두었던 문제였다. 레베타는 자신이 믿고 있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지금까지 전부 카르한 탓으로 돌리고 있었는데, 만약 믿었던 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후회하지 않아.”
스스로를 세뇌하듯 중얼거려 보지만, 자꾸 카르한이 생각나서 괴로웠다. 여태 카르한은 단 한 번도 저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분쟁 지역으로 떠나기 전, 공작저를 찾아온 카르한은 마치 타인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레베타를 마주해왔다.
-지금 와서 진실을 말해봤자 믿지 않을 테니……, 공작부인께서는 계속 보고 싶은 것만 보십시오.
선을 긋듯, 카르한은 레베타를 공작부인이라 불렀다. 제법 충격이었다. 생각해보면 카르한에게서 어머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레베타는 이미 블레어드를 선택했고, 카르한과의 관계는 회복될 수 없었다.
-난 그 애를 위해 뭐든 할 수 있어요.
결국 레베타는 일리아에게 했던 말을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후계 문제로 다투는 두 아들을 남 일처럼 방관하는 공작을 대신하여, 그녀가 뭐라도 해야 했다.
레베타는 백작에게 줄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갔다. 은행에서 그렇게 큰 돈을 빌리려면 공작저라도 담보로 걸어야 했고, 그럼 소문이 나기 십상이었다. 블레어드가 이제 본격적으로 활동해야 하는데, 공작가 평판이 나빠지면 곤란해진다.
레베타는 일단 사채를 끌어 쓴 후에 스텔라를 찾아가 약혼을 미끼로 지참금을 요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아무런 문제도 없을 터였다.
그리고 이틀 전, 레베타는 빌린 돈으로 백작에게 합의금을 건넸다. 드디어 자신이 해야 할 소임을 끝낸 기분이었다.
“아…….”
비릿한 쇠 맛이 느껴졌을 때, 레베타는 입술을 씹는 것을 멈추었다. 입술에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때 복도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심상치 않은 걸음소리에 레베타가 문 쪽을 응시했다.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며, 에반테온 공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에 언성을 높이는 일 없던 공작이 소리를 질렀다.
“당신 미쳤소? 사채를 쓰다니!!”
레베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수행원도 데리고 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은행도 아니고,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가?”
공작은 화를 내며 레베타를 몰아붙였다. 잘게 어깨를 떨던 레베타는 순간 버럭 소리 질렀다.
“지금까지 손 놓고 방관해온 사람이 누군데!!”
레베타가 마주 소리 지르자, 공작이 멈칫했다. 그녀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공작을 노려보며 물었다.
“낳기만 하면 다인 줄 알아요? 여태 방관한 주제에!”
지금까지 응어리져있던 마음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남편으로서는 소임을 다하라 하지 않을 테니, 아버지로서 책임을 지세요.”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그는 누구보다 최악인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그 때문에 지금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게 된 것이다. 만약 그가 확실하게 블레어드를 후계자로 밀어줄 생각이었다면 적극적으로 백작과 합의했어야 했다.
그러나 쓸데없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그는 한 걸음 물러서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런 주제에 원로들에게 휘둘려서 카르한을 수도로 불러들이는 악수를 두었다. 상황은 최악으로 달려가는데, 정작 공작은 아직도 확실하게 정하지 않고 관망 중이었다.
공작이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레베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누구를 후계자로 밀어줄 건지, 확실하게 정하세요.”
그녀는 독기 어린 눈으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못 정하겠다면, 제가 무엇을 하든 건드리지 말아요.”
***
카르한은 두 시간 만에 서류 분류 작업을 끝냈다. 문서에 따로 주석까지 달아주자, 루벤투스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모시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진심으로 존경하는 얼굴이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카르한은 뒷목을 쓸었다. 딱히 칭찬 받을 만한 일도 아니었는데……. 쑥스러워진 카르한은 고개만 가만히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