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79)
용병? 뜻밖의 정체에 카르한이 미간을 찌푸리자, 남자가 말을 이었다.
“일리아 블로든 님께서 저희를 고용하셨습니다.”
***
일리아는 손수건 위에 놓인 돌멩이를 바라보았다. 전문가의 답변서를 통해, 이 돌멩이가 금보다 비싼 광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과를 들은 가족들은 역시 무서운 재물운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이게 널려 있다고?”
카르한의 말로는 이런 돌멩이가 무수히 많다 했다. 광산에서 나오는 희귀한 광물이 길바닥에 굴러다닌다니. 그쯤 되면 다들 알아봐야 정상이겠지만, 일반 사람들은 이게 뭔지 알지도 못했다.
보석으로 가공하는 게 아니라, 고급 안료를 제작하는 데 쓰였기에 전문가들이나 아는 광물이었다. 원래도 수량이 극히 적어서 부르는 것이 값이라 했다.
고민하던 일리아는 카르한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다. 공작령에서 주운 물건이니, 에반테온 공작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분명 사람을 보내 마을을 헤집으려 들 게 분명했다. 일단 어떻게 할지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고 일리아는 결론 내렸다.
“바네사가 좋아하겠네.”
바네사는 가난했던 과거 때문인지, 돈을 많이 벌고 나서도 안료를 무척 아껴서 사용했다. 일리아가 지원해준다고 해도 습관이 고쳐지질 않았다. 나중에 원석이 많이 풀리면 안료 가격도 떨어질 테니, 바네사도 더 이상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일리아는 반질반질한 돌멩이를 손끝으로 건드리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부터 휴식 시간이었다. 버릇처럼 창밖을 내다본 일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라면 카르한이 하던 일도 집어던지고 뛰어왔을 텐데.
“아가씨, 스텔라 델로타 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고용인의 목소리에, 일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스텔라?”
오늘 방문한다는 말이 없었는데. 며칠 전에 새로운 꽃차 상품을 출시한 것 때문에 찾아왔나?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텔라가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스텔라가 벌떡 일어났다.
“대박이야!!”
대뜸 소리치는 스텔라의 모습에 일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스텔라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출시 하루 만에 전부 다 팔렸어!”
적어도 한 달은 걸릴 줄 알았다며 스텔라가 방방 뛰었다. 스텔라의 꽃차는 원래도 잘 팔리는 상품이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출시와 동시에 매진되기는 처음이었기에, 흥분할 만했다.
“얼마 전에 꽃차 효능에 관한 논문이 발표되어서 그런 것 같아.”
“잘됐네.”
좀 전에 광물 대박을 터뜨리고 온 일리아는 덤덤히 말했다. 그러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간 상태였다.
“역시 나한텐 재능이 있나 봐.”
스텔라는 한껏 우쭐해져서 자화자찬했다. 그녀의 모습에 일리아는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야심차게 꽃차를 내놨다가 생각보다 반응이 안 좋으면 어쩌냐고 걱정하더니…….’
역시 스텔라 델로타는 알면 알수록 특이했다.
“아참,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뭔데?”
“황실 측에서 이번에 나온 꽃차 납품해달래.”
일리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황실에서 쓰이는 물건이나 식료품은 모두 까다로운 선별을 거친 후 채택했다. 출시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상품을 납품 받는 경우는 이례적이었다.
‘그건 좀 신기하네.’
일리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스텔라가 양 어깨를 활짝 펴며 말했다.
“그리고 황태자비궁에 초청 받았어. 너도 가야 해.”
***
다음 날, 일리아는 반강제로 황궁에 입궁했다. 연회나 만찬회를 제외하고 따로 초청 받은 것은 처음인지, 스텔라는 들뜬 기색이었다. 일리아 또한 바네사와 함께 황후를 알현한 후로 간만에 황궁에 오는 것이었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두 사람은 황태자비가 기다리는 응접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선 일리아와 스텔라는 예를 갖춰 나란히 인사했다. 인사를 받아준 황태자비가 빈자리를 가리켰다.
“와주어서 고마워요. 다들 자리에 앉으세요.”
일리아와 스텔라가 앉자, 황태자비는 차를 대접해주었다. 이번에 출시한 꽃차였다.
“선물로 받았는데, 향이 무척 좋더군요. 그래서 황실에 납품 받는 걸 적극적으로 추진해 보았어요.”
황태자비가 꽃차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스텔라는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 황태자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교성 좋은 스텔라는 분위기를 띄울 줄 알았다.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가던 중, 일리아는 가만히 황태자비를 살폈다. 사실 꽃차를 납품 받고 싶다는 이유로 굳이 황궁에 초청한 것이 이상했다. 아무래도 꽃차는 핑계인 듯했다.
“다음 상품도 기대하고 있겠어요.”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그리고…….”
황태자비가 일리아에게 시선을 보냈다.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깐 황태자비궁이라도 구경하면서 기다려주겠어요?”
스텔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를 빼놓고 둘이서 할 이야기가 뭐 있나 싶은 얼굴이었다. 이내 스텔라는 황태자비가 리하트 테르시안의 사촌이라는 것을 떠올렸는지,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황태자비는 시녀를 불러, 스텔라를 안내하도록 했다. 응접실을 나가기 전, 스텔라가 일리아를 힐끗 바라보았다. 일리아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스텔라가 퇴장하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침묵이 밀려들었다.
“계속 자리를 마련하려 했는데, 드디어 만나게 되는군요.”
먼저 입을 연 것은 황태자비였다. 일리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미안했어요.”
그녀의 사과에 일리아는 달싹이던 입술을 다물어버렸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황태자비의 표정과 눈빛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기색이었다.
“숙부와 사촌의 말만 믿고, 그대에게 나쁜 짓을 저질렀네요.”
황태자비는 테르시안 후작을 기세등등하게 만들어준 장본인이었다. 헤인리가 후작의 비리를 터뜨린 후에도, 그녀는 후작을 감싸주었다. 그 때문에 후작은 공직에서 퇴출당하지 않고 가벼운 징계만 받았다.
“변명을 하자면…… 부모님을 일찍 잃고 숙부께서 그 자리를 대신해주었기에 차마 외면할 수 없었어요.”
“…….”
“그러다 점점 내가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땐 이미 황후께 밉보인 지 오래였고요.”
황후는 정의롭고 어진 사람이었다. 황태자비가 대놓고 후작을 두둔해주었으니, 두 사람이 부딪칠 만했다.
“리하트 테르시안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어요. 테르시안 가문과 완전히 관계를 청산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자신이 그들을 도와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황태자비가 조곤조곤 말해주었다. 일리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에서 본 황태자비라면 굳이 리하트를 도와줄 것 같진 않았으나, 혹시 몰라 경계하고 있었다. 이제는 안심해도 될 듯싶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대가 주최한 자선 경매에 참석했어요.”
“……전하께서 오셨다고요?”
“바네사의 그림을 산 것이 나예요.”
낙찰 받은 이름이 생소해서 그냥 넘겼는데, 대리인이 대신 낙찰 받은 모양이었다.
“황후께 선물하고 사과하고 싶어서요.”
“좋아하실 거예요.”
황후는 바네사의 그림을 좋아했다. 그림 의뢰를 넣는 대가로 일리아에게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일리아는 카르한이 분쟁 지역에 가기 전에 황후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었다.
-에반테온 소공자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결국 본인의 뜻으로 분쟁 지역에 가게 되었지만, 부탁을 철회하진 않았다. 황후가 황제에게 넌지시 카르한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 무의식중에라도 인지하게 될 터였다. 후계자 싸움을 하는 데 황제가 직접 끼어들 순 없어도 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는 있을 테니 말이다.
황태자비는 망설이듯 한참 머뭇거리다 입술을 열었다.
“황제께서 이번 자선 사업 건으로 심기가 많이 불편하신 모양이에요.”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불편하다니. 일리아가 이번에 자선 사업을 계획한 까닭도 전부 황실 측에서 손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블로든이 제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 달갑지 않으신 듯해요. 그러니…….”
황태자비가 경고하듯 조용히 속삭였다.
“부디 조심하세요.”
***
카르한은 지원 병력이 당도한 후 군을 재정비했다. 지원군에 용병들까지 가세하자, 이제야 싸울 만해졌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 왔다. 상대 쪽 진영에 푸른색 깃발이 걸리고 태양이 머리 위에 떴을 때, 양쪽 진영에서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첫 전투는 카르한 쪽이 우세했다. 그러나 적군에 비해 아군의 피해가 적었을 뿐이지, 대승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 후로 두 번의 전투가 더 있었다. 전투에 참전한 카르한은 공방을 치르다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군도 적군도 치열하지 않았다. 검을 맞대야 하니 맞대고, 싸워야 하니 싸울 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이 전쟁의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지지부진한 전투가 이어지고, 어느덧 네 번째 전투에 나가게 되었다.
“…….”
언제까지 전투를 이어나가야 하는 것일까. 서로 비등비등한 세력이라면 과연 무력으로 꺾을 수는 있는가. 대화로 해결할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기에 제대로 된 협상도 할 수 없었다.
진지를 물리고 퇴각하자니, 야만족이 언제 습격할지 몰라서 대치가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기묘한 규칙이 몇 있었다.
푸른 깃발이 올라가면 그날 정오에 전투가 있었고, 붉은 깃발이 올라가면 일주일간 정비할 시간을 가졌다. 오랜 전투로 인해 자연스럽게 정해진 규칙이었다.
카르한은 영토 분쟁을 빠르게 정리하고 싶었다. 여기서 더 끌어봤자, 양쪽의 피해만 커질 뿐이었다. 최대한 살생을 피하고 승리를 거둘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카르한은 야만족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끌어 모았고, 전투 때마다 그들의 행동과 말에 집중했다. 눈치껏 습득한 덕분에 이제 단어 몇 개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
야만족 대장이 소리를 질렀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저 단어는 퇴각하라는 말일 터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군이 소리쳤다.
“적들이 퇴각한다!”
카르한은 옆에 있던 테시온에게 의견을 전달했다.
“쫓지 마라.”
경계를 넘어가면 적들의 막사와 너무 가까워진다. 쫓다가 도리어 물릴지도 몰랐다. 테시온이 나팔을 들고 쫓지 말라고 소리치자, 모두가 멈춰 섰다.
적들이 퇴각하는 것을 지켜보던 카르한은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를 발견했다. 야만족 병사들이 그를 이끌어주었지만, 다리를 다쳤는지 말에 올라타지도 못했다. 그러다 카르한 쪽 병사들이 점차 가까워지자, 남자를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죽이지 마라!”
카르한은 남자를 칼로 찌르려던 병사를 제지했다. 병사가 물러나자 카르한은 남자의 앞으로 다가섰다. 죽음을 각오한 남자가 눈을 질끈 감으며 뭐라 소리쳤다.
“—! –!”
나를 죽여라, 뭐 그런 말이 아닐까 싶었다. 카르한은 무릎을 굽혀, 남자를 직접 둘러멨다. 얼떨떨해하는 남자와 기겁한 테시온의 표정이 대조를 이루었다.
“카르한 님, 이자는 적입니다.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일단 치료해주고…….”
카르한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야만족의 언어를 배워야겠다.”
카르한은 다친 야만족 병사를 진영에 데리고 왔다. 누구보다 카르한의 성품을 잘 아는 테시온은 만류하진 않았으나, 우려를 표했다. 군사 기밀이 누출될까 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카르한은 자신이 직접 야만족 병사를 감시하겠다고 말했다. 함께 지내며 야만족의 언어를 배워볼 생각이었다.
카르한은 일단 그를 자신의 막사로 데려와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반항이 심해서 카르한은 어쩔 수 없이 힘으로 눌러 제압했다. 맨손에 옴짝달싹 못 하게 된 그는 눈만 끔뻑였다.
“……미안합니다.”
왠지 겁을 준 것 같아서 사과하자, 야만족은 도리어 두 눈을 빛내왔다. 그때부터 얌전해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카르한을 따르기 시작했다. 나중에 이유를 물어보니 야만족은 힘을 숭배한다고 했다. 카르한의 압도적인 힘에 굴복한 것이었다.
그 후로 열흘이 지났다. 카르한은 온종일 그를 데리고 다니며, 의사소통을 시도했다. 의외로 야만족은 제국어를 조금 알고 있었다. 제국 사람들은 야만족을 멸시했기에 언어를 배울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저쪽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간단한 제국어와 몸짓으로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갔고,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카르한과 야만족 병사는 서로에 대한 정보부터 교환했다. 그의 이름은 엄청나게 길었는데, 줄여서 우르시오라고 부르기로 했다.
우르시오는 적군 지휘관의 차남이자 왕족 출신이었다. 우르시오가 잡혀온 다음 날, 적군 진지에는 처음으로 검은 깃발과 붉은 깃발이 나란히 걸렸다.
검은 깃발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전사했을 때 추모하기 위해 쓰였다. 아무래도 저쪽은 우르시오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카르한은 우르시오에게 다음 전투 때 돌려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살아서 돌아갈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 우르시오는 무척 놀라워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카르한 님, 푸른 깃발이 걸렸습니다.”
이른 새벽, 테시온이 카르한을 찾아와 상황을 말해주었다. 푸른 깃발이 걸리면 그날 정오에 전투를 치르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드디어 놈이 돌아가는군요.”
테시온은 묵은 체증이 내려간 얼굴이었다. 우르시오는 힘에 따라 사람을 차별했는데, 유독 테시온을 업신여겼다. 화가 난 테시온은 그날부터 근력 운동을 시작했지만, 비웃음만 당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마주치기만 하면 싸우는 앙숙이 되었다.
속 시원해 하는 테시온에게서 시선을 거둔 카르한은 저 먼 곳에 위치한 상대 진영을 응시했다. 바람을 따라 두 개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카르한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드디어 이날이 오고 말았다. 우르시오가 머무르는 동안, 카르한은 열심히 제 의견을 피력했다. 평화적으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지휘관끼리 협상 자리를 만들고 싶다고 말이다. 뜻이 전해지긴 했는지, 우르시오 또한 노력해보겠다고 말해왔다.
그리고 태양이 머리 위로 떴을 때. 양쪽 진영에서 대열을 갖춘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말에 올라탄 카르한은 우르시오와 나란히 선두에 섰다.
야만족 병사들이 거센 파도처럼 맹렬하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앞선 전투와 달리,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파도가 육지에 도달하기 직전처럼 양쪽 진영이 바짝 가까워졌을 때였다. 우르시오를 발견한 야만족이 소리쳤다.
“멈춰라!!”
순식간에 야만족 병사들이 멈추었다. 팽팽한 기류 속에서 두 진영이 약간의 거리만 두고 대치를 이루었다. 카르한은 대열을 뒤로 물리고 우르시오에게 고갯짓했다.
우르시오는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자신이 속한 진영 쪽으로 걸어갔다. 모두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특히 지휘관으로 보이는 나이 든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우르시오를 바라보았다.
우르시오가 그에게 다가가자, 남자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와락 안아주었다. 그건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
카르한은 말없이 부자를 바라보았다. 에반테온 공작은 이들을 야만족이라 불렀지만, 카르한이 보기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누구보다 인간적이었다.
잠시 얼싸안고 있던 두 사람은 뭐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야만족 지휘관은 무척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우르시오는 또다시 카르한 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손짓과 간단한 단어를 내뱉으며 지휘관의 뜻을 전달해주었다.
“일주일, 쉰다, 그리고, 우두머리, 만난다.”
일주일간 휴전한 후에, 협상 자리를 마련하자는 말이었다.
***
일주일간의 공백이 생기자, 카르한은 잠시 자리를 비우기로 결정 내렸다.
카르한은 곧장 마을로 향했다. 이전 지휘관이 보급품을 많이 빼돌려, 약과 식량이 부족했다. 보급품을 지원 받기 위해 에반테온 공작에게 서신을 보낼 계획이었다.
순순히 보내주진 않을 것 같으나, 그래도 뭐라도 해봐야 했다. 그런 다음 지금 상황을 보고할 생각이었다. 오랫동안 마을을 비웠으니 한번 둘러보고 싶기도 했다.
마을 어귀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카르한은 말의 속도를 줄였다. 사람들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카르한을 향해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그들의 환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저택에 도착하자, 루벤투스가 곧장 현관으로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루벤투스는 무척 반가운 얼굴로 카르한을 맞이해주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지요?”
“예. 그때 그 병사들은 잘 지냅니까?”
“뭐라도 하고 싶다며, 마을 일을 돕고 있습니다.”
루벤투스의 대답에 카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에서 내린 카르한은 저택으로 들어가지 않고, 몸을 틀었다.
“일단 마을을 좀 둘러봐야겠습니다.”
“쉬시질 않고…….”
루벤투스가 감동 어린 눈으로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곧장 저택을 빠져나와 마을을 돌기 시작했다. 한 달이 못 되는 사이에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카르한이 식량을 배급했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다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 왔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의 안부를 물으며 걷고 있는데, 쿵쿵쿵 천지가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놀라서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무리는 다름 아닌 짐마차의 행렬이었다. 상단 마차라는 것을 알아본 루벤투스가 중얼거렸다.
“아니, 여기에 상단이 어떻게…….”
외진 마을이라, 상단의 방문은 극히 드물었다. 심지어 이렇게나 많은 짐마차들이 한 번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상단 마차가 멈추고, 한 남자가 내렸다.
“여기 영주님을 뵙고 싶습니다!”
남자의 말에 카르한과 루벤투스가 앞으로 나섰다.
“영주는 없고, 제가 관리인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에반테온 소공자님입니다.”
“오! 반갑습니다.”
카르한의 이름을 들은 남자가 반색했다. 남자는 곧장 자신을 소개한 후에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저희는 블로든 상단입니다.”
그 이름에 카르한과 루벤투스의 눈이 커졌다.
“앞으로 마을에 저희 상품을 납품하고 싶습니다.”
“예?!”
루벤투스가 너무 놀라서 새된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이런 변방에도 블로든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대형 상단이 직접 물건을 납품하고 싶다고 제안하다니.
“그리고 지불하실 금액은…….”
남자는 시선을 빗겨 카르한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마차 한 대당, 소공자님의 그림 한 장입니다.”
***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일리아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었다. 문득 황태자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제께서 이번 자선 사업 건으로 심기가 많이 불편하신 모양이에요.
국고를 아끼고 싶지만, 블로든이 나서는 것은 싫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블로든은 너무 커버렸고, 제국 경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황제라 한들, 블로든을 쉽게 내칠 수는 없을 터였다. 일리아는 황태자비를 통해 황실 상황을 대략적으로 파악했다. 황제와 황태자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 올해 들어 황제의 건강이 나빠지며 더욱 탐욕을 부리게 되었다는 것.
일리아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창밖을 바라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