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8)
“일단 계획부터 말씀해드릴까요?”
“예.”
일리아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우리는 앞으로 연인 행세를 할 거예요.”
카르한은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뭐, 처음에는 소문이 좀 더럽게 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사그라들 거예요.”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보다 간단한 방법은 없으니까요.”
일리아는 가방을 뒤져 종이 몇 장을 더 건넸다. 리하트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제 약혼자는 저보다 신분이 높아요. 그리고 황실에도 연줄이 있죠. 아무런 보험 없이 무턱대고 파혼했다간 분명 보복하려 들 거예요.”
리하트의 성격으로는 파혼을 해주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일리아는 편리하고 돈이 끊이지 않는 물주였으니까.
하지만 일리아가 끝끝내 파혼하려고 하면, 집안에 압박을 가할 것이다. 권력을 이용해, 없는 죄까지 지어내며 꼬투리 잡을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오라버니인 헤인리가 테르시안 후작 밑에서 일하기 때문에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그는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약해요. 제 새로운 연인이 에반테온 소공자라면 당연히 눈치를 보겠죠. 그쪽 집안에서도 쉬이 나설 수 없고요.”
“…….”
“저는 당신의 신분을 방패 삼으려는 거예요.”
솔직하다 못해, 당돌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카르한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공작 가문에서는 당신이 약혼하기를 바라고 있잖아요? 그러니 새로운 연인이 필요하겠죠.”
일리아는 선서하듯 우아하게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같은 신분이라면 스텔라 델로타보다는 제가 나을 거예요. 그건 자신 있어요.”
카르한의 가족들도 처음에는 반발하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스텔라보다 뒤떨어지는 점은 없을 테니까.
“……평생을 속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이죠. 딱 일 년, 그때까지만 연인 행세를 해줘요.”
일리아는 계약서의 빈칸을 손으로 짚었다. 기간은 조율하기 위해서 일부러 적지 않았다.
“그동안 대비책을 세워둘 거예요.”
카르한은 천천히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계약서는 체계적이었고, 세세했다. 일리아에게만 유리하게 적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해진 기간 동안 가짜 연인으로서 서로에게 충실할 것.
-계약 기간 동안 다른 연인은 만들지 않을 것.
-각자 약혼자와 파혼하기 위해 성심껏 도울 것.
-계약 내용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
조항을 읽고 있는데, 일리아가 슬쩍 말했다.
“조율할 수 있으니까 이상한 점이 있으면 읽고 말해줘요.”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카르한이 계약서를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일리아는 재빠르게 깃펜을 내밀었다.
“아래에 서명하세요.”
“만약 계약을 파기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건 파기해보면 알겠죠?”
일리아가 웃었다. 상냥한 미소 아래 칼날이 번뜩이는 듯했다. 카르한은 잠시 멈칫했으나, 발을 빼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계약서 하단에 유려한 서명이 새겨졌다. 마지막으로 서명을 마친 일리아가 계약서 두 장 중에서 한 장을 내밀었다.
“갑자기 연인이 되었다고 하면 다들 의심할 테니, 서로 첫눈에 반한 것으로 하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남들 앞에서는 다정한 연인인 척 연기하는 거예요.”
“……어렵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
계약서를 집어넣은 일리아는 홍차를 전부 마셨다. 카르한은 그제야 홍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찻잔을 들었다.
“……!”
한 모금 마신 카르한이 찻잔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맛있죠?”
카르한은 묘한 얼굴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제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처음이라는 듯이.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일리아는 뿌듯한 미소를 띤 채 가게를 둘러보았다.
“앞으로 여기가 우리의 거점이에요. 그러려고 매입했으니까.”
“그럼 저도 돈을…….”
“돈은 됐어요.”
칼 같은 거절에 카르한이 멈칫했다. 일리아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테이블에 얹었다.
“당신은 신분을 담당해요. 나는 재력을 맡을 테니.”
두 사람은 황족을 제외하고, 제국에서 가장 신분 높은 남자와 가장 돈이 많은 여자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만남이었다. 일 년짜리 가짜 연애라는 것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가볍게 훑었다. 계약까지 끝냈지만, 걱정되는 구석이 많았다. 카르한이 아직 사교계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은 그의 성격을 몰랐다. 이렇게 호구라는 사실을 알면 다들 물고 뜯고 씹고 즐길 것이다.
다들 카르한을 만만히 보게 되면 그의 권력을 방패로 쓰려 했던 자신 또한 타격을 받을 테니…….
‘그냥 이대로 계속 오해 받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래도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사람들이 불순한 목적으로 다가오면 자신이 쳐내주면 될 것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지금까지 진짜 성격을 들키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한 번쯤은 ‘사실 에반테온 소공자는 호구였다!’는 소문이 돌 법도 한데.
“일단,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무서워하지 않도록 만드는 게 우선이겠네요.”
여기까지 오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저번 연회에서 일리아는 그의 고민을 해결해주기로 했다. 사람들이 그를 무서워하지 않게 해주겠다는 것. 그 조건으로 파혼이라는 거래를 내민 것이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가볍게 훑었다.
“오늘 바쁘세요?”
“괜찮습니다.”
“잘됐네요. 저번부터 생각했는데, 옷장에 검은색 계열 옷만 있죠?”
“……어떻게 아셨습니까?”
진심으로 놀란 듯 카르한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안 봐도 뻔했다.
‘세 번 만났는데 연속으로 검은색 옷이라니, 무슨 상복도 아니고…….’
아무리 얼굴이 잘나도 온통 어두운 빛깔로 무장하면 다가가고 싶다가도 꺼려진다. 일리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부터 사러 가요.”
두 사람은 가게를 빠져나왔다. 왔던 길을 그대로 걸어가니, 번화가에 도착했다. 일리아는 유명한 의상실이 즐비한 골목으로 먼저 들어섰다. 한때 리하트와 뻔질나게 다녀서 남성 의상실은 전부 꿰고 있었다.
“지금부터 우린 연인이니까, 나란히 걸어요.”
일리아의 뒤를 따르던 그가 옆에 섰다. 골목을 쭉 걸어가던 일리아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남녀를 발견했다.
어딘가 익숙한 것 같아서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일리아……?”
원수는 의상실 골목에서 만난다고 하던가. 골목길에서 마주친 남자는 리하트였다.
***
테르시안 후작 가문은 공신 가문 중 하나로서 대대로 황실의 녹봉을 받아왔다. 그것을 바탕으로 입지를 다져, 수도 사교계에서 제법 영향력을 떨치는 가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리하트는 테르시안 후작 가문의 후계자였다.
리하트는 어릴 적부터 후계자 수업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후작이 될 터였다.
그는 공부보다는 타인과 어울리기를 좋아했으며,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황궁을 자유로이 드나들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황궁에 입궁한 날. 그날은 리하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리하트는 얼마 전에 발견한 정원으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눈치 볼 필요 없이 놀 수 있었다. 그리고 정원에 도착했을 때, 그는 연못가에 쓰러져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리하트는 놀라서 소녀에게 달려갔다. 물에 빠졌던 것인지 소녀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저기요!
재수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싼 물건을 두르고 있으니, 분명 위세 높은 가문 출신일 터였다. 만약 이 소녀가 잘못되면 괜히 누명을 쓸지도 몰랐다.
이대로 도망갈까 고민하는데, 속눈썹이 날갯짓하듯 파르르 떨렸다. 곧이어 굳게 닫혀있던 눈꺼풀이 열리고, 보랏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
소녀가 기침하자 리하트는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영애?
소녀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입술만 벙긋거렸다. 리하트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선심 쓰듯 함께 있어 주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들이 찾아와서 소녀를 데리고 갔다.
며칠이 지나고, 그 사건이 기억 속에서 흩어질 무렵이었다. 소녀가 황금 마차를 줄줄이 이끌고 저택에 찾아왔다. 그녀는 부자로 유명한 블로든 가문의 막내딸, 일리아 블로든이었던 것이다.
-저를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그녀는 착각하고 있었다. 물에 빠진 그녀를 구해준 사람은 리하트가 아니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리하트는 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내뱉고 말았다. 다행히 일리아는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일리아는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엄청난 사례금을 주었다. 몇 번 사양하던 리하트는 마지못해 받는 척했다.
사례금으로 매일 사치를 일삼던 리하트는 문득 욕심이 났다. 일리아를 얻으면 지금과 같은 생활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그 후로 리하트는 일리아에 관한 정보를 열심히 모았다. 블로든 가문의 고용인을 포섭하여 일리아의 일정도 알아냈다. 그리고 우연을 가장하여, 일리아와 만남을 가졌다.
-영애도 이걸 좋아하십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미리 알아두었기에 감동을 사기 쉬웠다. 배려하고, 친절을 베풀며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돈 때문에 접근했다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재물에 욕심이 없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날이 갈수록 일리아는 그에게 마음을 열었고, 결국 리하트를 좋아하게 되었다.
리하트는 황제가 된 기분이었다. 일리아 블로든은 최고의 금줄이었다. 게다가 착하고 얌전한 성격이라, 제 말이라면 껌뻑 죽었다.
리하트는 돈 잘 쓰는 연인을 이용해 허영심을 채웠다. 연인에서 약혼자가 되고, 결국 두 사람은 결혼까지 앞두게 되었다.
리하트는 지금 일상이 만족스러웠지만, 단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자신의 연애가 여기서 끝이 난다는 것이었다.
‘아직 젊고 창창한데, 한 사람만 바라보라니.’
그래서 그는 밤놀이를 시작했고, 윤락가에서 만난 여자와 놀아났다. 일리아가 준 돈으로 여자들의 환심을 사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었다.
불장난은 점점 커져가, 나중에는 한 귀족 영애와 정기적으로 밀회를 가졌다. 그녀는 무척이나 도도한 여자였다. 시킨 대로 얌전하게 구는 일리아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찾게 된 리하트는 대낮에 그녀를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 한창 즐기려는데, 일리아가 쳐들어왔다.
일리아는 가만히 서 있었다. 충격 받은 듯이 그저 허공을 바라보았다. 리하트는 당장 눈앞에 닥친 난관을 모면하기 위해 일리아를 비난했다.
-노크 없이 남의 방에 들어오다니. 예의부터 갖추는 건 어때?
명백히 제 잘못이어도, 조금 강하게 나가면 일리아는 먼저 사과해 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일리아는 바들바들 떨더니 저택을 뛰쳐나갔다. 조금 심했나 생각했지만, 쫓아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로 일리아에게서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리하트는 굳이 일리아를 찾지 않았다. 시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터였다.
어차피 일리아는 저를 좋아했고, 결혼식은 무사히 치러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에 불과했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한 달 후 연회장에서 만난 일리아는 무척 달라져 있었다. 수채화처럼 흐릿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화려한 색감으로 채운 유화처럼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바뀐 것은 분위기뿐만이 아니었다. 저를 대하는 태도마저 완전히 달라졌다. 리하트는 늘 그렇듯이 일리아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늘어놓았다.
-자, 다 들었지?
-제가 왜요?
모두의 앞에서 망신당한 리하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일리아는 단 한 번도 제게 이런 식으로 냉담하게 군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 일 때문에 아직까지 화가 난 듯했다.
리하트는 그대로 테라스로 나가버리는 일리아를 내버려두었다. 나중에 화가 풀리면, 이번 일에 대해 따끔하게 경고하는 게 좋을 듯했다.
리하트는 다른 이들에게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은 후, 일리아를 잊고 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연회가 열린 날로부터 며칠 지난, 오늘.
리하트는 기분 전환이나 할 겸 번화가로 나왔다. 얼마 전에 우연히 알게 된 여자가 저를 알아보고 달라붙기에 내버려두었다.
리하트는 그녀와 함께 남성 의상실이 즐비한 골목을 걸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걸어오고 있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긴가민가하던 것은 확신이 되었다.
“일리아……!”
리하트는 당황한 나머지 제게 매미처럼 매달려 있던 여자를 밀어냈다. 일리아가 표정 없이 리하트와 여자를 번갈아보았다.
‘하필이면 지금 만나다니, 재수 없기는.’
리하트는 속으로 혀를 차며 일리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일단 내 말 좀 들어 봐.”
일리아는 한번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우리 저번에 안 좋게 헤어졌잖아. 네게 선물을 주면서 화해하려고 했어. 하지만 여자들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니 도움을 받으려고 했을 뿐이야.”
변명이 튀어나오는 속도가 번개보다 빨랐다.
일리아는 리하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미소 지었다. 상냥한 미소에 리하트는 안도했다. 이제 화가 다 풀린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때였다.
“남성 의상실이 널린 골목에서 내 선물을 산다고요?”
“……그건.”
“그렇게 열심히 설명할 필요 없어요. 무슨 말을 해도 변명처럼 들리니까.”
리하트의 살짝 벌어졌던 입술이 그대로 다물렸다.
“몇 년씩이나 연애했는데 연인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면, 우리 관계가 그거뿐이라는 거죠.”
말대꾸하는 일리아가 무척 낯설어, 리하트는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뒤늦게 일리아의 옆에 서 있던 남자를 발견했다.
“너야말로 웬 놈이랑…….”
하지만 리하트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말을 멈추었다. 순식간에 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에반테온 소공자……?”
무시무시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그는, 전장의 살인귀라 불리는 카르한 에반테온이었다.
리하트는 당황한 나머지 딱 소리 나게 입을 닫아버렸다. 두 사람이 왜 같이 있는 거지? 절대 접점이 없을 그들이었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당신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마침 잘됐어요.”
일리아의 말에 리하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일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개할게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뭐?”
리하트는 순간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방금 일리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일리아가 카르한의 팔을 붙들고 팔짱을 끼자 리하트는 눈을 부릅떴다.
“늦었지만, 진정한 사랑을 찾았지 뭐예요.”
일리아가 수줍게 속삭였다. 곧이어 꼿꼿하게 서 있던 카르한의 몸이 허물어지더니, 두 사람은 순식간에 밀착되었다.
리하트는 카르한의 손이 일리아의 허리에 닿은 것을 보고 숨을 멈추었다. 그제야 일리아가 한 말이 제대로 이해되었다.
“어차피 당신도 내가 지겨웠잖아요. 서로 잘된 일이죠?”
“……네가 지겹다니 무슨 말이야? 그럴 리 없잖아!”
리하트가 소리쳤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일리아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다니. 제 얼굴만 보면 배시시 웃고, 원하는 걸 말하면 당장 갖다 줄 정도로 좋아하면서.
그러나 언제나 저를 향하던 일리아의 눈은 다른 남자를 보고 있었다.
“정말 운명이란 게 있나 봐요. 이번 연회에서 서로 첫눈에 반해버렸거든요.”
일리아는 카르한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렇죠, 카르한?”
그러자 카르한이 어깨를 조금 떨더니, 입을 열었다.
“예, 일리아.”
리하트는 황망한 얼굴로 입술만 떨었다.
벌써 둘이 이름을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그것도 이번 연회에서 처음 만났는데……?
“거짓말하는 거지……?”
분명 거짓말이었다. 그 성격 나쁘기로 유명한 에반테온 소공자와 일리아가 사랑에 빠졌다니.
심지어 좋은 소문은 하나도 없는 남자였다.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다는 전장의 악귀를 사랑한다고? 리하트는 진정하려 애썼다.
“아뇨, 난 진심이에요.”
일리아의 눈동자는 한 치의 떨림도 없었다.
“아, 그리고 저번 연회에서 못 했던 말이 있는데.”
일리아는 그에게 생긋 웃으며 말했다.
“파혼해요, 리하트.”
일방적인 통보를 내뱉은 일리아가 완전히 발을 돌렸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리하트가 소리쳤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리하트는 일리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깨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턱 하고 손목이 붙잡혔다. 꼼짝달싹할 수 없는 엄청난 힘에 리하트가 인상을 썼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리하트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시선이 그에게 꽂혀 있었다. 순간 리하트의 머릿속에는 카르한을 둘러싼 소문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원한을 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한다던데요?
-3초 이상 쳐다보면 목 닦을 준비 하라는 뜻이래요.
-왜 별명이 전장의 살인귀겠어요? 내키는 대로 다 죽이고 다니니 그렇겠죠.
그 말처럼 사람 하나 베어낼 수 있을 법한 기세였다. 거대한 위압감이 거친 풍랑처럼 리하트를 집어삼킬 듯했다.
리하트는 결국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자 손목을 잡고 있던 카르한의 손이 거둬졌다. 모든 것을 지켜본 일리아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천천히 리하트를 지나쳐갔다.
리하트는 더 이상 일리아를 붙잡지 않았다. 아니, 붙잡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