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84)
“믿고 거래해주셔서 감사해요. 첫 거래니까 일단…….”
일리아는 의자 하나 없이,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여기에 공방을 차려드리면 어떨까요?”
***
저녁 무렵, 카르한은 마을로 돌아왔다. 일리아는 지쳐 보이는 카르한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먼저 해주었다. 카르한은 일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두 팔을 벌려 가볍게 안았다. 그의 몸이 무너지듯 일리아를 감싸왔다.
“블레어드가 이번 일을 꾸민 것 같습니다.”
“……!”
일리아가 놀라서 굳어지자, 카르한이 말을 이었다.
“아직은 심증뿐이라, 범인을 찾고 있습니다.”
“그쪽에서는 뭐래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해주니 대강 납득한 눈치였습니다.”
카르한은 오랜 시간 동안 야만족 지휘관에게 해명했다. 오해는 풀렸지만, 병사들의 불안함을 단번에 잠재울 수는 없었다.
“휴전 협정은 유지되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긴 한데……. 내일 저쪽 왕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일리아가 퍼뜩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신뢰를 깨버린 건 우리 쪽이니, 직접 얼굴을 봐야 믿을 수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괜찮은 거예요?”
카르한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었다. 야만족 변경에 막사를 하나 지어, 그곳에서 왕과 만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막사 앞에 양측 병사들을 대기시킬 예정이며, 주변이 탁 트여 있어 습격당할 위험은 없다는 것까지 덧붙였다.
심각한 얼굴로 듣던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도 가고 싶어요.”
“그건…….”
“만약 그쪽에서 안 된다고 하면 포기할 테니, 물어는 봐줘요.”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카르한을 보내고 홀로 불안에 떨고 싶지 않았다. 일리아의 고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카르한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카르한은 곧장 야만족 진영에 서신을 보냈다. 듣고 말하는 건 곧잘 하지만, 글자는 많이 알지 못했다. 겨우 뜻만 전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늦은 밤 무렵 답신이 왔다. 알겠다는 말이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서신을 확인한 일리아와 카르한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했다.
다음 날 점심때쯤, 일리아와 카르한은 함께 분쟁지로 향했다. 신뢰할 수 있는 병사들을 추려, 야만족 땅을 밟았다. 막사 앞에 도착하자, 대기해 있던 시종이 안으로 안내해주었다.
안쪽에 화려한 털옷을 입은 이가 상석에 앉아 있었고, 오른편에는 야만족 지휘관이 서 있었다. 그 아래로는 신료들이 도열한 상태였다. 왕의 왼편에 서 있던 우르시오가 카르한에게로 다가왔다.
「어서 오시게나.」
야만족 언어를 알아들은 카르한이 곧장 예를 갖추어 인사를 건넸다.
「카르한 에반테온이 아메르크의 왕을 뵙습니다.」
왕은 카르한이 아메르크어로 인사해오자,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민은 미개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를 보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오.」
제국은 아메르크인들을 야만족이라 불렀지만, 아메르크 쪽은 도리어 제국민을 미개인으로 보는 모양이었다.
「일전에 휴전 협상에 대해서 보고를 들었소.」
카르한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쪽에서 협정을 제안하고 깨뜨렸는데,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왕이 턱을 치켜든 채 카르한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미소 지었냐는 듯 그의 표정은 엄숙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그 문제는 지휘관과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부터 대답을 잘 해야 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목숨을 다해 일리아를 지키겠지만, 마찰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카르한은 제 옆에 있는 일리아를 한 번 보았다. 보라색 눈동자와 눈을 맞춘 카르한이 다시 왕을 돌아보고 입을 열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하겠습니다.」
부족한 단어는 우르시오의 도움을 받아,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서로를 끝없이 의심하며 의미 없는 전쟁을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누구도 죽지 않고 이 전쟁을 끝낼 방법을 찾았습니다.」
카르한의 새파란 눈동자가 왕을 응시했다.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과거를 되풀이하게 될 겁니다.」
카르한은 대화가 무력보다 강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더 이상 누군가를 짓밟고 꺾으면서 평화를 차지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습니다.」
카르한이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야만족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일리아는 느릿하게 눈만 깜빡였다. 잠시 침묵하던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미 왕은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리고 온 듯했다. 그는 카르한에게 앉으라는 의미로 손짓했다. 카르한은 어색하게 바닥에 앉았다. 야만족은 바닥에 앉는 문화가 정착된 것 같았다.
「사실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 그대를 불렀소.」
카르한이 고개를 들어 왕을 쳐다보았다.
「이번 기회에 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 우리가 모르는 것들도 많더군.」
카르한은 우르시오를 돌보는 동안, 제국의 문물을 가르쳐주었다. 왕족인 우르시오가 왕에게 그것을 전해준 모양이었다.
「우리는 제국에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으니, 서로 교환하면 어떨까 싶소.」
카르한이 대답하지 않자, 왕은 아예 직설적으로 말했다.
「제국과 화친을 맺고 싶다는 거요.」
카르한의 눈이 커졌다. 화친은 국가 간의 문제였다. 카르한은 그저 공작령의 변경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었기에, 이쪽 소관은 아니었다.
「그대의 왕에게 잘 말해주시오.」
황실은 아메르크 왕의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나, 일종의 기회였다. 지금껏 닫혀 있던 세계가 열릴지도 몰랐다. 카르한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나저나 그대가 아주 강하다던데.」
카르한은 우르시오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떠들고 다닌 건지 알 수 없었다.
「한번 보여줄 수 있겠는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시종이 굵은 쇠막대기를 가져왔다. 그러자 우르시오가 먼저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가 흡! 하고 기합을 주자, 팔뚝만 한 쇠막대기가 휘어졌다. 왕과 신료들이 박수를 보내왔다.
우르시오는 새 막대기를 카르한에게 내밀었다. 막대기 양쪽을 잡은 카르한이 힘을 주었다. 그러자 종이 접듯 쇠막대기가 반듯하게 접혔다.
「오오!!」
「대단해.」
왕과 신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을 숭상하는 이들답게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군. 내 딸을 주고 싶을 정도로.」
왕의 말에 카르한이 그대로 굳어졌다. 그걸 본 일리아가 슬쩍 물었다.
“뭐라고 하신 거예요?”
“그게…….”
카르한이 어물거리자, 눈치 없는 우르시오가 대신 말해주었다.
“카르한, 공주님 남편 삼는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일리아는 고개를 홱 돌려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일리아보다 더 당혹스러워하던 카르한이 우르시오에게 말했다.
“저는 연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내, 남편 둘 가진다. 가질 수 있다?”
우르시오가 제국어로 말해주자, 일리아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협상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난 괜찮아요.”
일리아는 애써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입술을 달싹이던 카르한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일리아의 손가락 사이에 그의 손가락이 비집고 들어왔다. 잠깐 일리아의 눈을 마주한 카르한이 고개를 돌려, 왕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의 소중한 사람입니다.」
카르한은 조금 더 힘을 주어, 일리아의 손을 맞잡았다.
「제가 평생을 함께할 사람은 이 사람뿐이니, 상처 주고 싶지 않습니다.」
막사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일리아에게 향했다. 일리아는 카르한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어서 눈만 깜빡였다. 카르한을 바라보던 왕이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별생각 없이 말한 것 같군. 사과하겠소.」
「아닙니다.」
우르시오는 묘한 표정으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일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우르시오가 입을 열었다.
“카르한, 고백했다.”
“우르시오.”
카르한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제발 입을 다물어달라는 의미였지만, 일리아는 이미 들어버린 후였다.
“무슨 고백이요?”
“당신, 카르한의 소중한 사람!”
카르한의 귓불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부끄러운지 묵묵히 있던 카르한이 눈만 내리깔았다. 왠지 가슴이 간질간질해진 일리아는 맞잡은 손에 좀 더 힘을 주는 것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잠시 후 바깥에 대기해 있던 시종들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중요한 손님에게는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풍습이 있다며, 식사를 권했다. 자리에 앉은 일리아는 줄줄이 늘어진 술독을 보았다.
‘설마 저걸 다 마시려고……?’
왕이 잔을 들자, 모두가 잔을 치켜들었다. 꽃으로 담근 술인지 향이 좋았다. 카르한은 술을 홀짝였다가 생각보다 독해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 얼굴을 본 몇몇 신료가 눈에 띄게 어깨를 움찔했다.
잔이 다시 채워지고 모두가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강요하진 않았지만, 마시지 않으면 안 될 듯한 분위기였다. 그때 일리아가 카르한의 잔을 들고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잔을 내려놓은 일리아가 우르시오에게 말했다.
“앞으로 술은 저한테 주세요. 전부 마실 테니까.”
***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침실로 들어가자, 카르한이 물이 담긴 컵을 내밀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일리아는 컵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두 시간 정도 대작하다 보니 평소보다 과음하긴 했다.
야만족들은 일리아를 보며 화끈하다며 무척 좋아했다. 술을 잘 마시면 존경하는 문화라도 있는지, 나중엔 다들 일리아만 바라봐서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일리아, 팔 들어주십시오.”
일리아는 카르한의 말대로 두 팔을 들었다. 취기가 올라서 그런지 하늘을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얇은 옷 한 장만 남기고 잠옷으로 갈아입혀주었다. 그가 마지막 단추를 채워주었을 때, 고개를 꾸벅꾸벅하던 일리아가 뒤늦게 정신 차렸다.
“있잖아요, 카르한. 전에 우리 술 마셨던 거…… 생각나요?”
일리아가 슬쩍 말을 꺼내자, 옷을 정리하던 카르한이 멈추었다.
“기억납니다.”
함께 술을 마셨던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일리아가 어느 날을 이야기하는지 카르한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클리프의 전시회를 구경하러 갔던 날, 강이 보이는 음식점에서 술을 마셨다. 일절 술을 입에 대지 않았던 카르한도 그때는 제법 취했다.
“그때 당신 귀여웠는데.”
일리아가 중얼거리자, 카르한의 목덜미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 어떤 칭찬보다 낯간지러웠다.
“……귀엽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그래요? 왜 그렇지?”
일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카르한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저는…… 인상도 사납고…… 덩치도 크고…….”
당황한 카르한이 더듬더듬 말하자, 일리아가 씩 웃었다.
“난 좋은데요.”
곰인형을 안듯 일리아가 카르한을 끌어안았다. 평소보다 적극적인 일리아의 모습에 카르한은 숨만 들이마셨다.
일리아에게 안겨 있던 카르한은 팔을 들어 밝은 금빛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쓸어주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평소보다 따뜻했다.
한참 그렇게 있던 카르한은 겨우 일리아의 품에서 벗어났다. 이러다가 앉아서 잠들 판이었다. 자신은 괜찮았지만, 일리아는 제대로 재우고 싶었다.
카르한은 일리아를 의자에 앉혀놓고 이불을 꺼내왔다. 잘 준비를 모두 마친 후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일리아는 의자에 앉혀둔 곰인형을 안고 있었다.
“…….”
카르한은 그쪽으로 다가가, 일리아가 안고 있던 곰인형을 조심스레 빼냈다.
“내 인형인데.”
일리아가 웅얼거리자, 카르한은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곰인형을 대신하여 일리아의 품에 안겼다. 카르한이 용기를 내서 말했다.
“인형 말고…… 저로 하십시오.”
“뭔가 크기가 다른 것 같은데. 이것도 좋네요.”
등과 어깨를 더듬더듬하던 일리아는 이내 납득했다. 좁은 침대에 나란히 눕게 되자, 코가 닿을 듯 가까웠다. 일리아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눈에 담던 카르한이 속삭였다.
“이만 자는 게 좋겠습니다.”
“아, 맞다.”
침대에 누운 일리아가 몸을 반쯤 일으켜, 카르한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잘 자요. 카르한.”
헤실헤실 웃는 일리아를 바라보던 카르한이 숨을 삼켰다. 카르한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일리아는 눈을 감아버렸다.
이내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카르한은 제 뺨을 만지작거리다가 일리아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끌어올려주었다. 일리아의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춘 카르한이 속삭였다.
“좋은 꿈 꾸십시오.”
훅, 방 안을 밝히던 램프가 꺼졌다. 그리고 희미한 달빛이 밤손님처럼 창가를 넘어오는 새벽쯤. 일리아는 갈증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술을 얼마나 많이 마신 거야.”
취기로 그렇게 들뜨기는 오랜만이었다. 일리아는 자기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일리아는 머리맡에 떠 놓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창밖을 바라보았다.
반달이 하늘에 떠 있었다. 그리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빛이 방 안을 채웠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어느새 사물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때 고요한 공간에 나직한 신음이 들려왔다.
멍하니 앉아 있던 일리아는 깜짝 놀라서 카르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듯하게 누워있던 카르한은 이불을 그러쥔 채 앓는 것처럼 흐느끼는 소리만 내뱉었다. 악몽이라도 꾸는 걸지도 몰랐다.
“카르한.”
조용히 불러보았으나,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리아는 그의 어깨를 흔들며 좀 더 크게 소리쳤다.
“카르한!”
카르한이 번쩍 눈을 떴다. 천장을 응시한 채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던 카르한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그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형님……, 제발…….”
마치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카르한이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소리쳤다.
“날 봐요, 카르한!”
고장 난 것처럼 그의 몸이 멈추었다. 일리아는 어깨를 붙잡았던 손을 내려, 카르한을 끌어안았다.
단단한 몸이 두 팔에 가득 들어왔다. 일리아는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고요한 공간에 토닥이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잔뜩 굳어져 있던 카르한의 몸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그의 젖은 이마가 일리아의 어깨에 닿았다. 참았던 숨이 터져 나오고, 일리아는 한 팔을 거두어 카르한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었다.
“괜찮아요.”
일리아의 몸에 기대어 있던 카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희미하게 젖은 눈동자가 보였다. 눈을 마주하자 숨이 턱 막혀왔다. 한참 정적이 이어지다가 몸의 긴장이 완전히 풀렸는지,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악몽으로 꾸었습니다. 형님, 아니 블레어드와 연관된…….”
카르한은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릴 적, 카르한은 블레어드 때문에 인적이 드문 창고에 갇힌 적이 있었다. 얌전히 기다리면 놀아주겠다는 블레어드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블레어드는 돌아오지 않았고, 창고에서 밤을 꼬박 새우게 되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고용인이 열어주었지만, 카르한은 그날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어둡고 조용한 공간은 거부감이 듭니다.”
카르한은 눈을 내리깐 채 말을 이어갔다.
“계속 막사에서 공동생활을 하다가 수도로 돌아오니 적막감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오르골을 사러 간 거였는데…….”
잠시 머뭇거리던 카르한이 속삭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오르골을 사러 간 게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인 것 같습니다.”
작은 오르골 가게에서 일리아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카르한은 그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아무 대가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저를 도와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연회에서 다시 일리아와 얽히게 되고, 많은 일이 있었다.
그동안 카르한을 이루고 있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저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고, 바뀌고 싶다고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지금처럼 악몽을 꾸어도 금방 털어낼 수 있게 된 것은 전부 일리아 덕분이었다. 늦든 빠르든…… 결국 일리아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다.
카르한은 잠시 말을 멈추고 일리아를 응시했다. 어두컴컴한 방에는 달빛이 전부였으나, 분노로 가라앉은 눈동자는 선명히 보였다. 저를 대신해서 화내주는 일리아를 보며 카르한은 미소 지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카르한은 정말 괜찮았다. 더 이상 누구도 카르한을 상처 입힐 수 없었다. 이제 그를 고통에 밀어 넣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일리아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