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85)
22장
***
마을 중앙에는 공방이 들어설 준비가 한창이었다. 일리아는 자신이 떠나고 나서도 무사히 공사를 끝낼 수 있도록 꼼꼼히 검토했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무엇을 만들지 의논하며 즐거워했다. 원래라면 겨울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있을 예정이었으나, 이번 해부터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었다.
간만에 마을이 북적북적해지자, 루벤투스는 감동에 가득 차 일리아에게 고맙다고 연신 인사했다.
일리아는 며칠 더 있다가 수도로 돌아가기로 결정 내렸다. 이왕 자신이 시작한 일이니 확실하게 해두고 가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오르골을 잔뜩 실은 마차가 저택에 줄줄이 들어온 탓이었다. 당황한 카르한은 잘못 배송된 거라 생각하고 돌려보내려 했다. 그러자 뒤따라 나온 일리아가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일리아가 주문한 겁니까?”
“주문한 건 전데, 받을 사람은 당신이에요.”
“제 겁니까?!”
깜짝 놀란 카르한이 고개를 홱 돌려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부족하면 말해요.”
절대 부족할 일은 없을 터였다. 이걸로 오르골 가게를 차려도 될 정도였다. 카르한은 일리아가 오르골을 선물한 까닭을 알고 있었기에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오르골이 담긴 상자를 침실로 들고 와 손수 장식하기 시작했다.
선반과 책상 위에 오르골이 그득해졌다. 방이 좀 더 좁아지긴 했으나 어쩐지 카르한은 행복해 보였다.
“또 꿈에서 그놈이 나오면 이걸로 후려 패요.”
일리아가 단단한 오르골 상자를 집어 들며 말했다. 나직하게 웃던 카르한이 쑥스러운 듯 슬쩍 제안했다.
“선물을 많이 받았으니, 저는…… 그림을 그려드리겠습니다.”
일리아는 이전에 마차 한 대당 카르한이 그린 그림 한 장을 요구했었다. 요즘 열심히 그리는 것 같던데, 그사이 실력이 많이 늘었을지도 몰랐다. 카르한은 어떤 분야든 배우는 것마다 곧잘 했으니 말이다.
“뭐 그려줄 건데요?”
“최근에 초상화를 연습했습니다. 당신이 괜찮으시다면 지금 그리고 싶습니다.”
일리아는 내심 기대심을 품고 의자에 앉았다. 화구를 가져온 카르한은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침없는 손놀림에 일리아는 속으로 감탄했다.
‘생각보다 더 잘 그리면 어쩌지?’
알고 보면 바네사 같은 신동인 거 아니냐며 일리아는 혼자서 흐뭇해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슬슬 허리가 아플 즈음 카르한이 펜을 내려놓았다.
“다 됐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아는 곧장 그림을 확인했다. 카르한이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
“어떻습니까?”
일리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가요?”
“카르한, 천재 아니에요?”
곧바로 표정을 수습한 일리아가 활짝 웃으며 칭찬했다. 그제야 카르한이 안도한 듯 뒷목을 쓸어내렸다.
“사실 저는 실력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테시온과 루벤투스가 괜찮다고 해줘서…….”
“그 두 사람, 보는 눈이 있네요. 저도 마음에 들어요.”
이목구비 위치가 한곳에 몰리긴 했지만, 흔해 빠진 초상화와 달리 개성 있고 좋은 듯했다. 언젠가 카르한의 그림을 보고 잘 그렸다고 인정해주는 시대가 올지도 몰랐다. 이번 생은 힘들지 몰라도……, 하여튼. 살면서 하나쯤은 못하는 게 있어도 괜찮다.
일리아는 초상화를 돌돌 말아서 소중히 챙겼다. 그렇게 일리아와 카르한은 무척 즐거운 며칠을 보냈다. 평생 두고두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 추억이 쌓여갔다.
유예해둔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오늘. 일리아가 수도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무리하지 말아요. 알겠죠?”
마차에 올라타기 전, 일리아는 아까 몇 번이고 했던 당부를 꺼냈다. 카르한이 힘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가슴이 시큰해진 일리아는 일부러 밝은 얼굴로 말했다.
“금방 다시 만날 거잖아요.”
카르한이 수도로 돌아올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에반테온 공작이 카르한에게 처리하라고 했던 야만족과의 분쟁은 무사히 마무리 지었다.
이제 야만족 병사를 공격한 범인을 찾아내고, 공작령에 머무르는 원로들을 만나 지지를 얻어내기만 하면 됐다. 일리아는 실로 엮은 끈 팔찌를 내밀었다.
“직접 만들었어요.”
마을 사람에게 배워서 만든 팔찌였다. 팔찌 끄트머리에는 익숙한 단추가 달려있었다. 카르한은 끈 팔찌를 몇 번이고 쥐었다가 놓았다.
“아직 가족들에겐 말 못 했어요. 당신이 날 구해줬다는 거.”
거의 확신하고 온 거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말을 아꼈다. 이번에 집으로 돌아가면 전부 말해줄 생각이었다.
“다들 당신 오면 파티 해줄 거라고 벼르고 있어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지금까지 목적지 없이 떠돌아왔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있는 곳이야말로, 그가 머무를 곳이자 끝없는 여행의 종착지였다.
오늘부터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될 것이다. 모두에게 잘 다녀왔노라 말하는 그날을.
“…….”
끝없이 이어지던 대화가 끊어졌다. 정말로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내려앉은 침묵과 동시에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입으로는 담지 못한 감정이 눈동자에 차올랐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황야 끝에서부터 달려온 바람이 가슴을 파고드는 듯했다. 이별의 순간은 늘 가슴이 시렸다.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위로도 통하지 않았다.
시선을 마주하던 카르한이 서서히 허리를 숙였다. 시야가 엇비슷해지고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입술이 겹치는 순간, 일리아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살을 에는 겨울바람과 달리 입술은 따스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했는데, 몇 번 해봤다고 입맞춤이 제법 자연스러웠다. 입술 선을 따라가듯 카르한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입술이 입술을 삼켰다. 동시에 손끝이 저릿저릿해졌다. 열기가 얼굴까지 전해지고, 조금씩 숨이 차올랐다. 마지막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길고 진했다.
숨이 모자라다 싶을 즈음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카르한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카르한이 마지막으로 제 뺨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제법 능청스러워진 태도에, 일리아는 활짝 웃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뒤이어 카르한이 일리아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가 떼어냈다. 둘만의 인사법이었다.
일리아가 마차에 올라타자, 바퀴가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창문에 바짝 기댄 일리아는 우두커니 서 있는 카르한을 응시했다. 못 박힌 듯 저만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일리아는 팔이 아플 정도로,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침내 카르한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일리아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제 막 헤어졌을 뿐인데 벌써 보고 싶었다. 일리아는 아쉬움을 삼킨 후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익숙해진 마을의 정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없는 변경 마을이었지만, 다음에 오게 되면 지금보다 더 발전해 있을 것이다.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보던 일리아는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다. 일단 아메르크 왕국과 제국의 화친은 천천히 해결하기로 했다.
카르한이 작위를 물려받고, 황실 회의에서 발언권이 생기면 그때 제안해도 늦지 않았다. 황제는 어떨지 몰라도, 국가 간의 교류에 관심이 많은 황태자라면 분명 화친 제안을 달갑게 여길 터였다.
‘그 전에 블레어드부터 처리해야겠지만.’
카르한이 과거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을 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창고에 갇혀서 두려움에 떨었을 어린 날의 카르한을 떠올리면 블레어드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았다.
‘블레어드가 살해한 남자의 아버지가 카르한을 찾아왔다고 했지.’
일리아는 카르한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블레어드가 사람을 죽여서 외국으로 도망갔다는 것과 피해자의 부친인 엘리오드 백작이 은밀하게 카르한을 찾아왔다는 것까지 말이다.
일리아는 엘리오드 백작을 한번 만나볼까 싶었다. 목적이 같다면, 손을 잡아도 될 테니까.
일리아가 탄 마차는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달려, 수도로 향했다. 마침내 수도에 도착한 마차는 블로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가 고요했다.
왠지 평소와 다른 느낌에 일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서 낯선 기분이 드는 걸지도 몰랐다.
“일리아, 어서 오렴.”
“오는 데 힘들진 않았고?”
“많이 피곤하겠구나.”
현관 앞에 서 있던 가족들이 한마디씩 하며 일리아에게 다가왔다. 언제 도착할 것 같다고 미리 연락을 해두었더니, 다 함께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그들을 향해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계속 잤더니 괜찮아요.”
“피곤하지 않다면 응접실에 가서 이야기라도 나누자꾸나.”
다들 일리아가 카르한을 잘 만나고 왔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응접실에 들어간 그들은 각자 의자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가족들의 얼굴을 살폈다.
한 달 정도 얼굴을 못 봤을 뿐인데, 다들 그사이 해쓱해져 있었다. 장기간 여행을 하고 돌아온 저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도 그렇고 말이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뭔가 있었음을 눈치챈 일리아가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잠깐 침묵이 맴돌았다. 비올레와 클리프, 헤인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헤인리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황실에서 공문이 내려왔단다.”
“무슨 공문이요?”
“일부 물품에 한해 세금을 추가로 받겠다는 내용인데…….”
헤인리는 굳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완벽하게 우리 가문을 겨냥한 공문이야.”
***
황태자비궁에는 작은 유리온실이 딸려 있었다. 덕분에 한겨울에도 화초를 구경하며 차를 마실 수 있었다. 둥근 테이블 앞에 홀로 앉아있던 황태자비, 라나엘은 찻잔을 들었다.
찻잔에 담긴 꽃차의 향기가 무척 좋았다. 델로타 가문에서 만든 것으로, 향과 맛이 일품이었다. 라나엘은 이전에 꽃차 납품을 핑계로 일리아와 스텔라를 궁에 초대했던 일을 떠올렸다.
-황제께서 이번 자선 사업 건으로 심기가 많이 불편하신 모양이에요. 부디 조심하세요.
라나엘이 일리아에게 전한 경고였다. 블로든 가문 측에서 대대적인 자선 사업을 맡은 이후, 황제는 대놓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황실이 무능해 보인다는 이유였다. 그래도 황후와 황태자가 열심히 블로든을 옹호한 덕분에 그냥 넘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황제는 블로든을 제재해야 한다며 날뛰었다. 결국엔 국무회의에서 블로든을 겨냥한 법안을 통과시키고 말았다.
라나엘은 기척을 느끼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누군가 유리온실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오는 남자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전하.”
그는 라나엘의 남편이자, 제국의 황태자였다. 얼굴을 구긴 채 들어온 황태자는 늘 반듯하게 매고 있던 크라바트를 풀어 헤치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졌습니다.”
라나엘은 괜찮다고 미소 지으며, 빈 찻잔에 직접 차를 따라주었다. 자리에 앉은 황태자는 말없이 라나엘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남처럼 지내는 황제 부부와 달리, 두 사람은 사이가 제법 좋았다. 정략혼이긴 하나, 어릴 적부터 약혼자로 내정되어 함께해왔기 때문에 거부감이 없었다. 무엇보다 의견도 잘 맞았고 추구하는 목적도 비슷했다. 찻잔이 가득 차자, 황태자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는 여전히 제 말은 듣지 않으십니다.”
속이 답답한지 그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자기들은 피해가 없다고 생각하니 입 다물고만 있을 뿐입니다.”
다시 생각하니 화가 나는지 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라나엘은 황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래도 사이가 좋지 않던 부자였다. 성향부터 추구하는 목적까지 완벽하게 달라, 평소에도 자주 부딪치곤 했다. 황태자는 입버릇처럼 아버지 같은 황제가 되지 않겠다고 말해왔을 정도였다.
황제는 탐욕이 강한 편이었지만, 최근 들어 그 정도가 심해졌다. 한 번 크게 아프더니, 황금으로 지은 신전에 자신의 관을 안치하겠노라 성화였다. 죽어서까지 권력과 재력을 쥐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후로 재물을 긁어모으기 시작한 황제는 유독 블로든 가문을 거슬려 했다. 다른 귀족들은 아부하지 못해서 난리인데, 블로든은 늘 뻣뻣하게 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황실 측에 납품하는 제품 모두 정가를 받았다.
“누가 봐도 이번 법안은 블로든을 겨냥한 것이 아닙니까.”
황제는 이번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일부 품목에 한해 세금을 더 올리겠다고 공표했다. 문제는 품목이 전부 블로든 가문 측에서 주력으로 판매하는 상품이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금도 현재의 두 배로 과세를 하겠다고 못을 박았다. 블로든이 저렴한 가격에 금을 넘기지 않으니, 세금을 더 거둬서 금고를 아끼겠다는 심산이었다.
속이 시꺼먼 황제와 달리, 황태자는 블로든 가문을 좋게 보고 있었다. 블로든은 지금의 황실이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 해주고 있었다.
빈민들을 돕는 것은 황실이 해야 할 일이었으나 황제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경비대도 귀족들에게 기부금을 받아 운영할 정도였다.
제국이 빠르게 부패하고 있음에도 빈부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블로든의 영향이 컸다. 블로든은 벌어들인 만큼 사회에 환원하는 데다가, 권력을 욕심 내지 않았다.
물론 후계자인 헤인리 블로든이 공직에 오르긴 했으나, 사적인 움직임은 일절 없었다. 오히려 뒤를 봐주겠다는 고위 귀족의 제안도 전부 쳐냈을 정도였다.
“분명 폐하께서는 블로든을 완전히 치워버리려 하실 겁니다. 만약 블로든이 무너진다면…… 제국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겁니다.”
한때 경쟁자였던 델로타는 블로든의 자리를 이을 능력이 되지 않았다. 그만큼 격차가 크다는 말이었다. 잠시 말을 멈춘 황태자는 차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 폐하께서 에반테온 공자를 자주 궁으로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라나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후로 폐하께서 바뀌셨습니다.”
블레어드 에반테온이 황궁을 드나들기 시작한 지 몇 주가 지났다. 황제는 말로만 불평을 쏟아내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블로든을 제재하는 것이었다.
“에반테온 공자를 너무 가까이하는 게 아니냐고 말씀드렸더니…… 역정을 내시더군요.”
황제는 이상할 정도로 블레어드를 두둔했다. 눈과 귀를 막은 채 황족들의 간언도 듣지 않았다.
사교계에서 블레어드의 평가는 무척 좋은 편이었다. 친절하고 겸손한 데다가 기부 행사에도 자주 얼굴을 내비쳤다.
근래에는 블레어드가 다시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그만큼 블레어드의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흠 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라나엘은 이전에 블레어드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는 사람을 움직이는 데 능했다. 주변인들을 이용해서 상황을 자기 뜻대로 흘러가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걸 눈치챈 사람은 몇 없을 테지만 말이다.
“블레어드 에반테온을 경계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황태자의 말에 라나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황태자는 빈 찻잔을 들여다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만약 폐하께서 사욕을 위해 이대로 제국을 외면한다면…….”
황태자가 고개를 들어 라나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굴만 보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저는 언제나 전하의 편이에요.”
라나엘의 속삭임에, 황태자가 그녀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제 뒤를 받쳐줄 귀족들을 물색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황태자는 온실정원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이 공간 안에도 블로든 가문이 납품한 것들이 몇 보였다.
“블로든부터 도와야겠습니다.”
***
일리아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수도를 떠나 있던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들었다.
황실 측은 일부 상품에 세금을 추가로 부가하겠다고 공문을 보냈다. 귀족들의 사치가 날로 늘어나니, 그것을 제재하기 위해 사치품에 세금을 더 붙이겠다는 이유였다. 그중 하나가 금이었는데, 블로든 가문은 매년 어마어마한 양의 금을 수출하고 있었다.
금으로 제국 제일의 부자가 된 만큼 타격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거기다 국무회의에 참석한 고위 귀족들까지 전부 승인한 일이었다. 블로든 가문이 잘나가는 것이 배가 아팠는지, 입 모아 찬성했다고 들었다.
그에 비해 블로든 측은 황실에 적극적으로 항의할 만한 힘조차 없었다. 도리어 황실은 자꾸만 비올레를 불러들여 귀찮게 굴었다. 마치 공문을 거부했다간 더 귀찮은 일이 있을 거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일리아가 수도에 도착한 그날 저녁. 블로든 저택에서는 오랜만에 가족회의가 열렸다.
“다른 상품은 그렇다고 치고, 금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비올레의 말에 클리프가 말을 받았다.
“세금이 오른 만큼 마땅히 가격을 올려야겠지만…… 비난을 피할 수가 없겠지요.”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믿을 것이다. 금 가격이 상승하면 블로든 책임으로 돌릴 게 뻔했다. 황실은 이것을 노렸을지도 몰랐다. 세금을 거둬들이는 동시에 블로든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금은 사치품으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외국에 나가면 화폐로 통용하기 가장 좋은 물건이었다. 자연스럽게 시장 가격이 형성되어 있으니, 멋대로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금맥을 발견하고 채굴한 지 얼마나 되었죠?”
“10년은 넘었지?”
헤인리가 그건 왜 묻느냐는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금으로 거둬들이는 수익 비율은요?”
“요즘 다른 사업이 번창한 덕에 20퍼센트 정도로 내려갔단다.”
비중이 제법 되나, 상당히 큰 것은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 손해를 메꿀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일리아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