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86)
더 이상 황제의 배를 불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까지 금 수출에 매달릴 수는 없으니, 조금 일찍 위기가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마침내 일리아가 결정을 내렸다.
“금맥 채굴, 중단하도록 해요.”
“……뭐?”
가족들이 전부 놀란 얼굴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당장 손해는 보겠지만, 장기적으론 이쪽이 유리해요.”
채굴을 잠시 중단한다 해도 금은 달아나지 않는다. 생산량이 정해져있으니, 시간이 지난 후에도 금의 가치는 여전할 것이다. 거기다 적당한 핑곗거리도 있었다.
금맥을 발견한 후 시간이 흘러 채굴할 금의 양이 대폭 감소했으니, 새 광산을 물색한다는 식으로 둘러대면 될 것이다.
황실은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다. 광산을 수색하고 싶어도 다른 귀족들이 반발할 게 분명하다. 귀족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언제든 공개하라는 말과 같으니까.
“무엇보다 금은 필수품이 아니잖아요?”
일리아의 말에 입만 벌리고 있던 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 같은 필수품이었으면 일리아도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은 있는 자들의 싸움이었다.
“그럼 황실 뜻에 따른다는 공문을 보내마.”
비올레가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블로든이 금 채굴을 중단한 순간부터 제국에서는 넘치던 금이 싹 사라져버렸고……. 귀족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
달그락, 식기 소리가 들려왔다. 단 둘만 앉은 기다란 테이블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차려져 있었다.
“고기가 질기군.”
황제가 거칠게 포크를 내려놓자, 뒤에 서 있던 시종이 움찔했다.
“요리사는 이걸 음식이라고 내놓은 건가?”
황제는 당장 요리사를 불러오라고 할 기세로 호통 쳤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블레어드가 입을 열었다.
“폐하, 아무래도 요리사가 의욕이 넘친 모양입니다.”
황제의 시선을 받은 블레어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께서 드실 음식을 만드는 것이니, 긴장되겠지요.”
“……흠, 공자를 봐서 넘어가도록 하지.”
황제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다시 포크를 들었다. 그런 황제를 가볍게 훑은 블레어드는 속으로 비웃었다. 황제의 사고방식은 무척 단순해서 다루기 쉬웠다.
블레어드는 최근 들어 황제를 자주 만났다. 고위 귀족들과 친분을 쌓아서 황제와 독대할 기회를 만들었는데, 그 후로 황제는 종종 블레어드를 황궁으로 불렀다. 괴팍한 성미를 전부 받아주었더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블레어드는 계획적으로 황제에게 접근한 만큼, 그의 취향에 맞춰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데 능한 블레어드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블레어드는 황제를 구슬려 제 입맛대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목적은 블로든을 제재하는 것이었다. 블로든이 곤경에 처하면 카르한은 가장 큰 패를 잃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황제 또한 블로든 가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어서 일은 쉽게 풀렸다.
-일부 품목의 세금을 올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사치세를 매기는 거지요.
사업을 하는 가문이니, 역시 돈과 연관된 협박이 가장 잘 먹힐 터였다. 황제는 블레어드의 말에 넘어가, 결국 법안까지 통과시켰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게 있다면…….
“요즘 금 때문에 귀족들이 시끄럽더군.”
값비싼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황제가 중얼거렸다.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난리라니.”
블레어드는 눈을 내리깐 채 금으로 만들어진 식기를 내려다보았다. 블로든 측이 금맥 채굴을 완전히 중지할 줄이야……. 매장량이 줄어서 그렇다고 둘러댔지만, 뻔히 보이는 핑계였다.
블레어드는 블로든이 취할 만한 행동을 몇 가지 예상했으나, 이런 경우는 생각도 못 했다 금 채굴이 중단되면 가장 손해 보는 쪽은 블로든이니 말이다.
현재 제국에선 금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수요는 늘 많은데 공급이 대폭 줄어든 탓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해 눈이 많이 온 탓에 산사태가 일어나 광산 몇 군데가 봉쇄되어버렸다. 금이 완전히 씨가 마른 것이다.
귀족들은 이제 와서 우는 소리 하며, 황실이 너무 섣부른 판단을 내린 게 아니냐고 떠들어댔다.
“금이 부족해서 신전 공사도 중단되었으니…….”
황제의 불평이 이어지자, 블레어드는 부드럽게 그를 달랬다.
“어차피 일시적일 겁니다. 블로든 측도 언제까지 버티고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금이 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몇 달만 지나면 알아서 물량을 풀 거라고 블레어드가 말했다. 그제야 안심되는지 황제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역시 공자와 이야기를 나누면 마음이 편해지는군.”
황제는 그때부터 다른 이들을 험담하기 시작했다. 특히 황태자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다가, 지금이라도 후계자를 새로 낳는 것이 좋겠다며 망언을 했다.
황제의 한참 동안 이어지는 불만을 전부 들어준 후에야 오찬이 끝났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걷던 블레어드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귀찮게…….”
무엇 하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었다. 분쟁 지역에 사람을 보내 휴전 협정에 훼방을 놓았지만, 생각보다 잠잠했다. 다시 전쟁이라도 일어날 줄 알았는데 말이다.
복도를 걷던 블레어드는 문득 일리아를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그가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면 안 되지.”
아무래도 자신이 직접 움직여야 할 듯했다. 여론을 움직여 블로든을 매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예를 들어 탈세같이 민감한 주제를 건드려서 말이다. 블레어드는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황궁을 빠져나왔다.
***
분쟁 지역은 일리아가 떠난 후, 거짓말처럼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메마른 땅 위로 눈이 가득 쌓여서 하루아침에 설원이 되었다.
수도에서는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에, 카르한은 일리아에게도 이 풍경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좋았던 건 딱 하루뿐이었다. 생각보다 눈이 너무 많이 온 탓에 온종일 눈을 치울 수밖에 없었다.
카르한은 진영에 머무르던 병사들을 마을에 데려가, 제설 작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면 지붕이 내려앉을 수 있었기에, 마을 사람들은 무척 고마워했다.
그러는 동안 제국군과 야만족 양쪽 진영은 막사를 철수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휴전 협상을 끝내고 마침내 휴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나,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였다. 카르한은 남고 싶어 하는 이들만 추려 진영에 남게 했다.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해 전력을 남겨둘 생각이었다.
야만족과의 문제가 얼추 해결되고, 카르한은 천천히 수도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어떻게 원로들을 제 편으로 회유할지 고민했다.
이미 공작령 전체에 카르한에 대한 소문이 퍼진 상태였고, 평판도 좋아졌으니 어느 정도 승산은 있을 터였다.
“카르한 님! 드디어 잡혔습니다.”
테시온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일리아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하던 카르한이 멈칫했다. 곧장 그의 말을 알아들은 카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에 있지?”
“일단 창고에 가둬두었습니다.”
의자에 걸쳐둔 외투를 걸친 카르한은 테시온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 어느새 발목까지 쌓인 눈을 밟고 저택 뒤편에 위치한 창고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온몸이 밧줄에 묶인 남자가 있었다.
카르한은 지금껏 블레어드가 보냈을 첩자를 수색해왔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가 바로 휴전 협정을 깨뜨리기 위해, 야만족 병사를 습격한 첩자였다.
“상처를 입었는지, 바로 도망치지 못하고 인근 마을에 숨어 있었습니다.”
옆에 서 있던 테시온이 말했다.
“외양도 야만족 병사가 증언했던 것과 일치합니다. 그런데 자꾸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습니다.”
카르한이 앞으로 걸어갔다. 바닥만 바라보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카르한을 응시했다.
“누가 보냈지?”
바닥이 울릴 정도로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남자가 어깨를 떨었다. 꽉 막힌 공간에서 카르한을 정면으로 마주하니 오한이 들었다. 이내 남자는 카르한의 시선을 피한 채 앵무새처럼 대답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럼 직접 보면 알겠지.”
카르한은 남자를 추궁하는 대신, 뒤돌아서며 테시온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 이자를 야만족에게 보내도록.”
“!”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고문까지는 예상했지만, 야만족에게 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남자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야만족에게 가는 것은 맨몸으로 사자 우리에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말이 통하지 않을 테니, 살려달라고 빌어도 소용없었다.
거기다 동료를 위해서는 한없이 잔인해지는 것이 야만족이었다. 차라리 곱게 죽는 편이 나을 터였다. 카르한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남자를 힐끗 본 후 싸늘히 속삭였다.
“어차피 블레어드는 널 꺼내주지 않을 거다.”
카르한이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자, 남자가 그대로 굳어졌다. 이미 카르한이 배후를 알고 있다면 더 이상 입을 다물 필요가 없었다. 충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개죽음을 당할 뿐이었다.
“자, 잠깐!”
창고 밖으로 나가려 하는 카르한을 남자가 다급히 불렀다. 카르한이 뒤돌아서서 바라보자, 그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는 걸 말하면…… 살려줄 겁니까?”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바닥에 넙죽 엎드린 채 아는 것을 전부 불었다.
“저는 블레어드 에반테온 님의 명령을 받고…….”
전부 카르한이 예상한 대로였다. 남자는 블레어드가 보내온 첩자였으며, 평화 협정을 깨뜨리기 위해 일부러 야만족 병사를 공격한 것이었다.
카르한은 서늘한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블레어드라면 이미 꼬리 자르기를 끝낸 후일 것이다. 이 남자를 데리고 가봤자, 누구냐며 발뺌할 게 분명했다. 도리어 모함하지 말라며 교묘하게 상황을 움직일 터였다.
“일단 가둬 놔라.”
카르한은 테시온에게 명령을 내린 후 창고를 완전히 빠져나왔다. 어찌 되었든 아메르크 왕에게 범인을 찾아서 넘기겠노라 약조했다. 처분은 저쪽에서 결정할 일이었다.
저택 현관으로 향한 카르한은 못 보던 마차 한 대를 발견했다.
“소공자님, 영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루벤투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카르한을 안내했다. 카르한은 루벤투스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그곳에 에반테온 원로인 시오릭이 있었다.
“간만입니다.”
두 사람은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일리아가 왔을 때 그를 처음 만났으니, 벌써 보름도 더 지나버렸다. 안 그래도 조만간 시오릭을 찾아갈 생각이었기에, 카르한은 살짝 긴장한 채로 자리에 앉았다.
응접실에 침묵이 맴돌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시오릭이었다.
“……휴전 협정에 대해 들었습니다. 완전히 마무리된 것입니까?”
“예. 양측 진영을 절반 이상 철수했습니다. 좀 더 상황을 지켜보다가 완전히 물릴 예정입니다.”
카르한은 아메르크 왕을 만나, 화친을 제안 받았다는 것까지 말해주었다. 가만히 듣던 시오릭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럼 야만족 언어를 배웠다는 겁니까?”
“아직 미흡합니다.”
무력으로 얻어낸 평화가 아니라는 것에 시오릭은 놀라워했다.
“그래서 생각보다 잠잠했군요.”
혼잣말을 중얼거린 시오릭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을에 공방이 들어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건 제 약혼녀가 진행한 일입니다.”
카르한은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마을이니 휴전 협정을 맺으면 뿔뿔이 흩어지는 게 당연하겠지만, 마을 사람들은 계속 이곳에 머무르길 원했습니다.”
“…….”
“그래서 저번에 원로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떠난 후에도 이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줘야겠다고 약혼녀와 이야기를 매듭지었습니다.”
카르한은 단단한 눈으로 시오릭을 마주 바라보았다.
“비록 제 능력이 한참 부족하나, 끝까지 책임지고 싶습니다.”
새파란 눈동자를 응시하던 시오릭은 눈을 내리깐 채 침묵했다. 카르한은 일리아처럼 타인의 감정을 곧잘 읽어낼 수 없었기에, 속으로 긴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시오릭이 입을 열었다.
“다시는 공작 가문 사람들을 믿지 않겠다고 생각했지요. 더 이상 실망하고 싶지 않으니까.”
명망 높은 에반테온은 이미 내부에서부터 썩어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기대감을 품었다가 실망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하지만…….”
시오릭은 처음으로 카르한을 향해 미소 지어주었다.
“소공자는 믿어보고 싶습니다.”
***
일리아는 그득하게 쌓인 서신을 힐끗 보았다. 서신의 반절 이상이 금을 팔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더 이상 금을 채굴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는 다들 그러려니 했다. 블로든이 채굴하는 금의 양은 전체의 20퍼센트도 채 되지 않았다.
다른 금 광산도 많았고, 그 정도는 외국에서 수입할 수 있었다. 귀족들은 드디어 블로든 천하가 끝나고 델로타가 부상할 때라며 떠들어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거짓말처럼 금이 자취를 감춘 탓이었다. 때마침 산사태로 광산 몇 군데가 매몰된 데다, 세금이 오르자 남아 있던 금마저 외국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제국은 밀수출을 일일이 잡아낼 능력이 없었다. 결국 금 품귀현상이 일어났고 거래량은 뚝 떨어졌다. 귀족들은 얼마든지 지불할 의사가 있으니 제발 팔아달라고 성화였다.
원래라면 돈을 쓸어 담을 기회였지만, 블로든은 입장을 고수했다. 전체 매출이 대폭 줄긴 했으나, 다른 사업이 잘 굴러가고 있어 어떻게든 손해를 메울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블로든을 욕하던 귀족들은 서서히 비난의 화살을 황실로 돌리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금 가격을 올릴 거라 생각했던 황실 측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블로든을 치졸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공직자인 헤인리를 이런저런 핑계로 불러낸다거나, 비올레의 거래 상대에게 은근한 압박을 주는 식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 사교계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블로든이 탈세를 했다거나, 직원에게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고 부려먹는 악덕한 가문이라는 내용이었다.
곧바로 대응했지만 헛소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소문을 추적하던 일리아는 결국 근원지가 어디인지 찾아냈다.
“아가씨, 마차 준비되었습니다.”
일리아는 곧장 현관으로 내려가 마차에 올라탔다. 맞은편에 자리 잡은 말렉이 편지를 내밀었다. 카르한이 보낸 편지였다. 다급한 손놀림으로 편지지를 꺼낸 일리아는 내용을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이곳은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솜이불을 덮은 것처럼 세상이 온통 하얀데, 일리아에게도 이 풍경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공방은 마을 사람들도 함께 일을 해서 금방 완공될 것 같습니다. 다들 작업장이 생긴다며 좋아하고 있습니다.] [저번에 뵌 원로께서 저를 지지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원로님을 소개해주셨습니다.]편지를 읽던 일리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일이 잘 풀리고 있는 듯했다. 잘하면 한 달 내로 정리하고 수도로 귀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해는 일리아와 함께 맞이하고 싶습니다.]마지막 글귀를 확인한 일리아는 편지지를 꼭 쥔 채 나도요, 하고 중얼거렸다. 가슴 안쪽에 꺼지지 않는 불씨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지지 않을까 했으나, 날이 갈수록 점점 덩치를 키워갔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질 거라 했던가. 하지만 일리아의 마음은 오히려 깊어져만 갔다. 만나면 꼭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어주고 싶을 정도로.
‘그쪽도 신경 쓸 게 많을 테니, 말하지 말아야지.’
일리아는 카르한에게 지금 블로든 가문의 상황을 알리지 않았다. 걱정하느라 밤을 지새울 것이 뻔히 보였다.
편지를 봉투에 넣은 일리아는 창가에 고개를 기댔다. 카르한이 물에 빠진 자신을 구해줬다는 말을 가족들에게 아직도 하지 못했다. 상황이 계속 좋지 않았던 탓이었다.
며칠 전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한 날. 헤인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황태자께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놀라서 바라보는 가족들에게 헤인리는 침착히 말했다.
-제게 힘이 되어달라고 하시더군요.
헤인리가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황태자는 친황제파 귀족들을 대적하기 위해, 자신의 사람이 되어줄 이들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헤인리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블로든은 유명세에 비해 정계에 연줄도 없었고, 권력도 미미한 편이었다. 역대 블로든 백작들이 권력에 큰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후계자인 헤인리가 마침 공직에 올라 있으니, 제 편으로 삼아 중앙 귀족계를 개편할 생각인 듯했다.
-조만간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