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89)
23장
***
“아쉽습니다.”
카르한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서 있던 루벤투스가 무척 서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엊그제 오신 것 같은데, 벌써 떠나실 때가 되었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카르한은 얼마 전부터 수도로 돌아갈 준비를 차근차근 하고 있었다. 돌아가겠다고 통보한 후 공작의 답신은 받지 못했으나, 늦어도 겨울이 끝나기 전에는 떠날 예정이었다.
“시간이 나면 가끔 들르겠습니다.”
만약에 카르한이 공작이 된다면 이런 변두리 영지까지 신경 쓸 틈 없이 바빠질 것이다. 그럼에도 루벤투스는 카르한이 빈말하는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카르한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소공자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마을 사람들이 작별 인사를 하고 싶다더군요.”
카르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모두들 저를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먼저 인사를 건네 왔고 존경과 호의를 담아 대했다. 카르한도 마을 사람들과 정이 많이 든지라, 아쉽기만 했다.
“아참. 서신이 왔습니다.”
본래의 목적을 상기한 루벤투스가 편지를 전해주었다.
“그럼 저는 식사를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루벤투스가 먼저 방을 나가버리고, 카르한은 편지를 책상에 올려두었다. 일단 짐을 마저 꾸린 후에 확인할 생각이었다. 당장 쓸 일이 없는 물건을 상자에 집어넣었다. 한참 짐을 꾸리던 카르한은 자꾸만 늘어나는 상자를 보고 당혹스러워졌다.
“왜 올 때보다 짐이 늘어난 거지?”
카르한은 짐을 줄이기 위해서 다시 상자를 확인했다. 하지만 뺄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온통 일리아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다시 짐을 꾸리려고 소매를 걷어붙이자, 옷에 감춰진 팔찌가 드러났다. 팔찌를 본 카르한은 잠시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작별할 때 일리아가 준 팔찌로, 끄트머리에 단추가 달려 있었다. 팔찌를 만지작거리던 카르한은 짐을 다시 꾸렸다.
정리가 끝난 후 책상 위에 올려둔 편지를 집어 들었다. 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았다. 편지지를 꺼내든 카르한은 몇 줄만 읽고서 누가 보냈는지 알아차렸다. 엘리오드 백작이었다.
[드디어 때가 되었습니다. 저는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엘리오드 백작은 아들의 목숨 값으로 에반테온 공작가에서 거액의 합의금을 받았다. 그리고 그 돈을 이용해 블레어드를 무너뜨릴 기회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냥 죽이진 않을 겁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으니, 진창까지 끌어내린 후에 직접 복수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던 백작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카르한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점점 짙어지는 눈송이가 거침없이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서로를 껴안듯 창문에 겹겹이 들러붙었다. 진눈깨비는 금방 부피를 키워 함박눈이 되었다.
카르한은 편지지를 내려놓고 외투를 걸쳤다. 눈이 얼마나 오는지 확인하고 미리 대비할 생각이었다. 이제 눈이 오지 않을 거라 안심했더니, 분쟁지는 겨울이 한창인 모양이었다.
현관을 나선 카르한은 저택 밖으로 빠져나왔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세상이 희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땅바닥, 지붕, 메마른 나뭇가지에도……. 심지어 카르한의 검은 머리카락마저도 눈송이가 소복하게 쌓여갔다.
“밤까지 오겠는데…….”
아무래도 병사들을 동원하여 눈을 치워야 할 듯싶었다. 특히 마을에는 노후한 건물이 많으니, 눈 때문에 지붕이 내려앉을 가능성이 컸다. 카르한은 뒤돌아서서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그의 시야에 쏟아지는 눈발을 헤치고 달려오는 이가 보였다. 말발굽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세상 속을 정면으로 가로질러 왔다.
“급보입니다!!”
사내의 목소리가 눈발 사이로 퍼져나갔다. 산산이 부서지는 입김이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를 보여주었다. 이윽고 사내가 카르한의 앞에서 멈춰 섰다. 말에서 내린 그는 다급히 외쳤다.
“소공자님! 당장 수도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카르한이 넋을 놓은 채 서 있자, 사내가 말을 이었다.
“에반테온 공작이 사망하였습니다.”
***
블레어드는 버릇처럼 입술을 짓씹었다. 너덜너덜해진 입술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젠장.”
욕설을 내뱉은 블레어드는 손등으로 핏방울을 닦았다. 최근 일이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아,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이제 총회까지 세 달도 남지 않았다. 황제까지 제 편으로 끌어들였으나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스스로 이룩해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공작령에 머무르는 원로와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저를 지지해주는 원로 중 한 명이라도 변심하면 승패를 확신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최근엔 술과 약 없이는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혹시 카르한 쪽으로 돌아선 것은 아니겠지.”
알아보려고 이리저리 애써봤으나, 소득이 없었다. 분쟁지에 보내둔 첩자와 연락이 전부 끊겨버린 탓이었다. 아무래도 카르한의 손에 잘려나간 듯했다.
블레어드는 잠자리처럼 방 안을 뱅뱅 맴돌다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협탁에 올려둔 약통에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약통을 대고 툭툭 쳤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벌써 다 떨어졌잖아.”
블레어드가 약통을 바닥에 내던졌다. 금단증상이 나날이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약을 하지 않으면 두통이 밀려들었다.
의자에 걸쳐둔 외투를 걸친 후 방을 나왔다. 현관 앞에 세워진 마차에 올라탄 블레어드는 익숙한 장소로 향했다.
비밀 모임에 얼굴만 잠깐 비쳐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이제는 꼬박꼬박 방문하게 되었다.
마차에서 내린 블레어드는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입구에서 암호를 대고 입장하자, 안개처럼 자욱한 연기가 그를 맞이해주었다. 장의자에 늘어져 있는 귀족들이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물론 평범한 잎담배는 아니었다.
블레어드는 아무 자리나 차지한 후 옆에 앉은 이에게서 약을 받았다. 머리에 못을 박아대는 것 같던 두통이 서서히 사라지고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이곳에 있으면 모든 근심이 사라졌다. 아버지의 한심하다는 눈초리도, 어머니의 가식 섞인 걱정도 생각나지 않았다.
블레어드는 뿌연 연기 속에서 도박을 하고 있는 영식들을 바라보았다. 허공을 떠돌던 연기는 어느새 구름이 되었다. 몸이 두둥실 떠올라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블레어드는 다른 이들과 늘어진 채 욕설 섞인 잡담을 나누었다. 이곳에서 교양 있는 언사 따위는 필요 없었다.
한창 꿈속을 걷고 있을 때였다. 입구 쪽이 왠지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다들 약과 술에 취해서 모르는 눈치였다. 눈치 빠른 블레어드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을 주시했다.
“경비대다!!”
누군가의 소리침과 함께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어지럽게 쏟아졌다. 블레어드는 본능적으로 자욱한 연기를 뚫고 후문을 향해 달려갔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잡아라!”
“뭐, 뭐야!!”
“이거 놔라!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아?”
당황한 귀족 영식들이 허우적거리며 반항했다. 그러나 작정하고 쳐들어온 것인지 경비대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블레어드는 그들을 뒤로한 채 후문으로 빠져나왔다. 다행히 후문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깊숙이 찔러왔다. 정신을 차린 블레어드는 곧장 골목을 걸어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온몸이 벌벌 떨렸다. 겨우 진정한 블레어드는 창문을 통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빨리 출발해!!”
블레어드가 소리치자, 마차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방금까지 자신과 시시덕거리던 이들이 경비대원의 손에 붙잡혀 줄줄이 나오고 있었다.
블레어드는 눈이 마주칠까 싶어서 재빨리 커튼을 치고 구석에 웅크렸다. 혹시 전부 꿈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점점 돌아오는 이성이, 현실임을 알려주었다.
블레어드는 이미 과오를 저지른 적이 있었다. 그것도 똑같은 비밀 모임에서 말이다. 다행히 묻어버릴 수 있었으나, 두 번은 용서 받을 수 없을 터였다.
“……내가 왜 그랬지?”
조금만 더 참으면 됐는데, 왜 그걸 못 기다려서. 블레어드는 끝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이다가 손톱을 깨물기 시작했다.
수사가 시작되면 분명히 제 이름이 나올 것이다. 비밀 모임의 회원들은 자기 살 길을 찾기 위해 친구를 밀고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만약 원로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자신은 끝이었다.
원로들은 블레어드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불법 모임에 가담했다는 건 몰랐다. 보수적인 원로들은 저를 등질 것이 분명했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블레어드는 레베타를 찾아갔다.
“어머니.”
금방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블레어드의 얼굴을 본 레베타가 깜짝 놀라서 다가왔다.
“무슨 일이니.”
“제가, 실수를 저지른 것 같은데…….”
블레어드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입술을 달싹였다. 레베타가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해준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는 제게 유리한 쪽으로 이야기를 새로 꾸몄다.
친구의 강요를 못 이겨, 잠깐 질 나쁜 모임에 들렀다가 운 나쁘게 휘말린 것 같다고 말이다. 블레어드의 이야기가 끝나자, 레베타는 한참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방도를 찾아보자꾸나.”
블레어드는 속으로 안도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베타만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 편이 되어줄 터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해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레베타는 힘이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공작뿐이었다. 레베타를 앞세운다면, 공작도 마지못해서 블레어드를 도와줄 것이다. 고심 끝에 블레어드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 말씀드려봐야겠습니다.”
레베타의 얼굴이 굳어졌다. 고개를 든 블레어드가 절박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혼자는 버거울 것 같으니, 같이 가주셨으면 합니다.”
떨떠름해하던 레베타가 결국 알겠다고 대답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경비대의 숫자도 상당했으니, 내일이면 소문이 파다할 것이다. 그 전에 처리해야 했다.
블레어드는 레베타와 함께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떨어져, 사방이 어둑했다. 끝없는 복도를 걸어가던 블레어드는 잠시 창문을 응시했다. 창밖으로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올해 수도에서 처음 보는 눈이었다.
“후우…….”
집무실 앞에 도착한 블레어드는 심호흡을 내뱉었다. 오랜만에 공작을 만나는데, 부탁해야 하는 처지라 떨렸다.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레어드가 먼저 들어가고 레베타가 뒤따랐다.
집무실에 들어가자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보는 에반테온 공작이 보였다. 책상 위에는 와인 병과 잔이 놓여 있었다. 공작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의 차가운 시선을 받자, 솜털이 곤두섰다. 손끝이 떨려왔으나 애써 괜찮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약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덜 떨렸다. 문 쪽에 서 있는 레베타를 뒤로한 채, 블레어드는 공작을 향해 걸어갔다.
“아버지.”
블레어드의 부름에 공작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목울대를 움직인 블레어드가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블레어드는 레베타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자신의 과실은 최대한 줄이고 모든 잘못을 타인에게 돌렸다. 뒤에 서 있던 레베타도 한마디 거들었다.
“실수했다고 하니, 용서해주세요. 총회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레베타가 총회를 언급하자 공작이 미미한 반응을 보였다. 희망을 가진 블레어드가 부탁했다.
“적어도 총회가 끝날 때까지는 이 일이 새어나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블레어드의 말이 끝나자 집무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블레어드는 초조하게 공작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 후 공작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목소리를 내뱉었다.
“처신 똑바로 하라고 하지 않았나?”
쿵,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졌다. 한심하다는 눈으로 블레어드를 응시하던 공작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눈깨비는 어느새 함박눈이 되어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공작이 중얼거렸다.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사고만 치고 다니는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며, 에반테온 공작은 블레어드를 비난했다. 그의 목소리가 잘 벼린 칼날처럼 블레어드를 난도질 해왔다. 애써 진정시켰던 손끝이 다시 덜덜 떨려왔다.
“카르한은 분쟁 지역에 가자마자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었는데, 너는 뭐지?”
“…….”
“후계자 자리를 쉽게 생각한 모양이야.”
공작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블레어드의 곪아있던 상처를 건드렸다. 후계자 자리를 쉽게 생각했다고? 그랬다면 이렇게 살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카르한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면, 남들의 환심을 사려고 스스로를 감추지도 않았을 터였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따지고 보면 약을 하게 된 계기도 전부 공작 탓이었다. 계속 몰아붙이니 숨 쉴 구멍은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블레어드는 공작을 노려보았다. 공작이야말로 위선자였다. 자식에게 관심도 없다가 이제 와서 경쟁을 시키는 주제에, 자신은 고고하고 옳다고 생각했다. 본인은 무능력의 극치면서 말이다. 따지고 보면 원로들이 권력을 잡게 된 것도 전부 공작 때문이 아닌가.
점점 숨이 차올랐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블레어드를 휘어 감쌌다.
“애초에 후계자 자리가 네게 버거웠는지도 모르지.”
공작의 마지막 말에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훅 끼쳐온 약기운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성이 따라가기도 전, 블레어드의 손에 뭔가가 잡혔다.
퍽! 조용한 공간을 깨부수는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뒤이어 비명이 들려왔으나, 블레어드는 망설이지 않고 손에 쥔 술병으로 공작을 내리쳤다. 그동안 쌓인 울분을 토해내듯 날뛰었다.
한참 후, 블레어드는 치켜들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숨을 몰아쉬던 그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의자에 앉아 있던 공작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책상 뒤편에 난 창문 밖으로는 눈발이 장대비처럼 휘몰아쳤다.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고요한 공간 속에서 블레어드는 한참 우두커니 서 있다가 서서히 시선을 내렸다. 제 손에 들린 와인병은 절반도 남지 않은 채였다.
뾰족한 끄트머리를 타고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파편을 눈에 담던 블레어드는 고개를 돌려 문 쪽에 서 있던 레베타를 응시했다. 얼어붙어 있던 레베타가 숨도 쉬지 못한 채 블레어드를 마주 보았다.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챙그랑, 부서진 와인 잔이 바닥을 굴렀다. 레베타를 바라보던 블레어드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레베타는 움찔했지만, 문을 등지고 있는지라 꼼짝할 수 없었다.
“어머니…….”
블레어드의 목소리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레베타 앞에 멈춰 선 그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블레어드는 레베타의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채 울기 시작했다.
“저는…… 이제 어머니밖에 없습니다.”
얼어붙은 레베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블레어드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정신이 잠깐 나간 것 같습니다.”
이 상황에도 블레어드는 사고였다며 변명을 내뱉었다. 울먹이던 블레어드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레베타는 그의 눈에서 광기를 읽었다.
“진, 진정하렴. 나는 네 편이니까.”
레베타가 더듬거리며 말하자, 블레어드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레베타는 창백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펫 위에 끔찍하게 난도질 된 시체가 놓여 있었다. 굳이 생사를 확인해보지 않아도 공작이 죽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일은 우리 둘만 알고 있으니,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하자꾸나.”
겨우 블레어드를 진정시킨 레베타는 가장 신뢰하는 고용인을 불렀다. 그 후로는 무슨 정신이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질 않았다. 시체를 수습하고 집무실 정돈까지 끝낸 후, 레베타가 말했다.
“이만 들어가 보마.”
블레어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불안해 보였으나 죄책감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계셔서 다행이에요.”
블레어드의 조용한 속삭임을 들은 레베타는 말없이 돌아섰다. 레베타는 어두워진 복도를 걸어갔다. 그녀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나중에는 품위 없이 달리고 있었다.
다급히 자신의 침실로 뛰어 들어온 레베타는 문을 잠그고 등을 기댔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레베타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방금 있었던 일이 전부 사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내 착한 아들이…….
레베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오한이 들었다. 레베타는 두 팔로 몸을 감싼 채 덜덜 떨다가 고개를 들었다.
창문 밖으로는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세상을 전부 희게 물들일 듯 유례없는 폭설이었다. 멍하니 허공을 더듬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창백한 뺨 위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레베타는 입술을 깨문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야…….”
어째서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벌어졌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이전에 블레어드가 사람을 죽였을 때, 억울하게 휘말려 실수를 저질렀다고 했기에 믿었다. 그러나 아까 본 블레어드의 모습은 악귀 그 자체였다. 공작이 숨을 거둘 때까지 술병을 내리치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레베타는 몸을 한껏 웅크렸다. 어째서인지 또다시 카르한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금 와서 진실을 말해봤자 믿지 않을 테니……, 공작부인께서는 계속 보고 싶은 것만 보십시오.
카르한은 뭔가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자신이 믿던 것이 정말 신기루에 불과한지 진실을 알고 싶었다. 만약에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가 전부 잘못되었다면…….
“안 돼.”
레베타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외면해왔던 과거를 마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과연 블레어드가 저를 끔찍이 위하던 착한 아들이 맞는지. 카르한이 했던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저를 지탱해오던 것이 무너지더라도, 더 이상 블레어드의 행동을 감싸 줄 수가 없었다. 마침내 환상 속에서 빠져나갈 때일지도 몰랐다.
***
수도는 한창 시끄러웠다. 귀족 자제들이 모임을 가져, 온갖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금지된 약물 복용, 도박, 매춘, 상해……. 온갖 범죄가 그곳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들통 났다.
평판이 좋던 귀족들의 더러운 민낯이 밝혀지자, 제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중 가장 주목받은 사람은 블레어드 에반테온이었다.
체포된 귀족 자제 중 하나가 비밀 모임에 대해 진술하다가, 블레어드 에반테온이 사람을 죽인 적이 있음을 밝혔다. 그때부터 모든 관심은 블레어드에게 쏠렸다.
증인 몇을 제외하고는 증거가 없었으나, 일리아가 사교 모임에서 했던 발언이 재조명되면서 사교계에서는 진실처럼 퍼져나갔다. 덕분에 블로든 가문을 둘러싼 추문은 쏙 들어가고 말았다.
비밀 모임 회원들은 거물 아버지를 두고 있는 자들이었기에, 별다른 처벌 없이 풀려나왔다. 그러나 소문은 사그라질 만하면 재점화되었다. 신문은 연일 그것에 대해 떠들었고, 조직적으로 이야기를 퍼뜨리는 이들이 있었다. 논란이 식지 않게 장작을 넣는 것처럼 말이다.
고위 귀족을 상대로 이토록 꾸준히 의혹을 제기하는 건 뒤에서 엄청난 돈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논란 속에서 또 하나의 비보가 들려왔다. 에반테온 공작이 타계했다는 소식이었다. 오랜 지병을 앓다가 수면 중 사망한 것으로 공식 발표가 났다.
또 한 번 수도가 크게 뒤집히고, 황실까지 어수선해졌다. 황제와 황태자의 세력 싸움에서 중립을 유지하던 에반테온 공작이 죽으며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다들 다음 대 에반테온 공작이 누가 될지를 두고 왈가왈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에반테온 가문 측은 다음 대 에반테온 공작이 작위를 계승하고 나서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이제 곧 올 때가 되었는데.”
현관 앞을 서성거리던 클리프가 중얼거렸다. 정원을 응시하던 비올레도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 일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애가 탔다. 잠시 후, 저편에서 마차 한 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왔어요!”
일리아의 외침에 다들 시선을 고정했다.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오던 마차가 마침내 현관 앞에서 멈추었다. 세 사람은 다급히 마차로 다가갔다. 마차 문이 열리더니, 그토록 기다렸던 이가 내렸다.
“카르한!!”
“어서 와요. 소공자.”
“소공자, 참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의 환영에 카르한은 쑥스러워하다가 이내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다는 말 한 마디가 왠지 뭉클했다. 클리프가 먼저 카르한을 안아주었다. 뒤이어 비올레가 가볍게 카르한의 등을 토닥이며 잘 다녀왔다고 말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일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카르한은 곧장 다가와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폭 감싸인 일리아는 카르한을 마주 안아주었다.
“보고 싶었어요.”
작은 속삭임에 카르한의 두 팔에 힘이 좀 더 들어갔다. 부모님의 시선을 느낀 일리아가 먼저 팔을 내렸다. 천천히 떨어져 나간 카르한이 누군가를 찾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리아가 눈치채고 말했다.
“오라버니는 황궁에 출근하셨어요. 아마 내일 돌아오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