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9)
3장
***
못 박힌 듯 서 있는 리하트를 뒤로하고, 카르한이 일리아의 뒤를 따랐다.
“옆에서 걸어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머뭇거리다가 옆으로 다가섰다. 나란히 걷게 된 일리아는 시선을 내려 카르한의 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카르한이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게 움직였습니다.”
리하트가 일리아를 향해 손을 뻗기에 반사적으로 붙잡긴 했는데,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했다고 그가 말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일리아가 감사를 표하자, 카르한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이윽고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무뚝뚝한 얼굴로 쑥스러워하는 모습은 무척 기묘했지만, 본판이 좋아서 그런지 나쁘진 않았다.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리하트가 서 있던 골목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리하트는 자리를 뜨고 없었다. 제 앞에서는 늘 당당하더니, 카르한의 눈빛 한 번에 꼬리를 말고 사라지니 우스웠다.
일리아는 텅 빈 골목에서 카르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친 순간 카르한이 움찔했다.
“그런데 소공자, 연기 연습 좀 하셔야겠어요.”
“많이 형편없었습니까……?”
일리아는 느낀 대로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추었다. 안 그래도 심약한 사람한테 처음부터 상처를 줄 필요는 없지. 지금은 당근과 채찍이 적절해야 할 시기였다.
“아주 나쁜 건 아니고……, 처음치곤 잘했어요.”
그의 경직된 어깨가 조금 풀렸다. 솔직히 너무 갑작스럽긴 했다. 연인 연습을 해볼 기회도 없이 리하트와 마주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리하트가 등장한 후로 카르한은 고장 난 것 같았다. 만약 리하트가 꼬리를 말고 도망치지만 않았더라면 들통 났을 것이다.
다행히 사나운 인상이 도움이 되었지만……. 이대로라면 호구인 걸 들키기는 시간 문제였다.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안 들킨 거지? 그것이 의문이었다.
***
일리아는 옷가게에 들어와, 카르한에게 화사한 색감 위주로 옷을 골라주었다. 카르한은 일단 입으라고 하니 입긴 했지만, 어색한 눈치였다.
재력 담당을 맡은 일리아는 그에게 옷을 사준 후에 다음 만남 때 꼭 입고 오라고 엄포를 놓았다.
언제 만날지 약속까지 잡은 후 그와 헤어졌다. 너무 피곤했기에 볼일은 보지 않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해가 지기 전, 마차는 저택 현관에 도착했다.
“수고했어.”
일리아는 마차에서 내리며 프란체와 말렉에게 말했다. 말렉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대답했고, 프란체는 우물쭈물했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아가씨께서는 정말 괜찮으십니까?”
일리아가 프란체를 빤히 바라보았다. 머뭇거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 계약을…….”
“프란체.”
말렉이 바로 프란체의 말을 끊어냈다. 주제 넘는 발언은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프란체가 곧바로 입을 다물자, 일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 두 사람은 일리아를 따라다니며 모두 지켜보았다. 카르한과 파혼 동맹 계약을 맺은 것도 말이다. 프란체가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리아는 시무룩해 보이는 프란체를 향해 미소 지었다.
“내가 결정한 일이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때는 몰랐지만 알고 보니 무척 위험한 분이지 않습니까.”
오르골 가게에서 만났을 때는 그저 지나가는 호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실은 에반테온 소공자였고, 프란체는 그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었다.
“네가 보기엔 위험해 보였어?”
프란체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지켜본 카르한은 소문과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차반에 성격 나쁜 쓰레기일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다.
“그리고 리하트 퇴치하는 데 괜찮더라고.”
농담 삼아 말했지만, 만약 카르한이 아니었다면 무슨 짓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프란체와 말렉에게 리하트랑 엮인 일에는 절대 나서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끝끝내 프란체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오늘 있었던 일은 전부 비밀이야. 알지?”
“예.”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는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평상시처럼 고용인들의 인사가 들려오고, 일리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중앙 홀 계단 위에 중년 남녀가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부모님이었다.
“일리아!”
대화를 나누던 블로든 백작이 일리아를 발견하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왔다. 코앞까지 달려온 그가 일리아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많이 걱정했다. 이번에 얼굴도 못 보고 지방에 다녀오느라…….”
블로든 백작이 일리아를 보고 울먹였다. 덩치도 크고 산적같이 험상궂은 얼굴이었지만, 누구보다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얼굴이 많이 해쓱해졌구나.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고?”
“저는 괜찮아요.”
일리아의 대답에도 그는 이러다가 쓰러지는 거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저를 걱정하는 아버지를 겨우 안심시킨 후, 일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계단 위에 서 있는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표정 없이 일리아를 내려다보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 방으로 들어가자꾸나.”
쌀쌀맞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깨닫고 말았다.
‘화가 많이 나셨구나.’
백작부인이 먼저 계단을 올라가버리고, 백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 어머니가 걱정 많이 했단다.”
한 달 동안 방에 틀어박혔으니 그럴 만했다.
일리아는 백작과 함께 계단을 올라갔다. 명화로 가득 채워진 복도를 쭉 걸어, 응접실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자리에 앉아 있는 백작부인이 보였다.
“앉으렴.”
일리아는 천천히 맞은편에 앉았다. 백작은 마치 청문회에 불려온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다가 일리아 옆에 슬그머니 앉으려 했다.
“당신은 내 옆에 앉아야죠.”
따끔한 한마디에 백작이 냉큼 부인 옆에 앉았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어볼까?”
백작부인, 비올레가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일리아는 긴장해서 주먹을 살짝 움켜쥐었다.
어머니는 철혈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무서운 사람이었다. 가족들에게는 무척 다정다감했지만, 헤인리와 마찬가지로 리하트 때문에 사이가 조금 멀어졌다.
그래도 그녀는 헤인리처럼 리하트를 아주 반대하지는 않았다. 못마땅하게 여기는 눈치였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번 일로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제멋대로 구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이번엔 무슨 일인지 말해 보거라.”
일리아가 잠시 머뭇거렸다.
비올레는 사사로운 감정을 내려놓고, 냉정하게 판단 내렸다.
“이제 넌 결혼할 텐데, 조금 다툰 것으로 한 달 동안 방에 박혀 있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겠어.”
아무래도 비올레는 일리아가 리하트와 다퉈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리하트가 바람을 피웠다고 지금 말할지 고민되었다. 하지만 역시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는 헤인리까지 있을 때 해주는 것이 좋을 듯했다. 분명 바람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다들 격분해서 당장 리하트를 찾아가겠다고 난동을 피울 터였다.
이제야 막 에반테온과 거래를 맺었다. 아직 준비된 것이 거의 없는데 테르시안 가문 전체와 척을 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역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비올레가 다시 훈계하려고 할 때, 일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는 오라버니까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말하고 싶어요.”
일리아의 말에 백작부부는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했다.
“……어머니, 아버지.”
조용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백작부부는 입을 다문 채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속 썩여서 죄송해요. 전부 잘못했어요.”
일리아가 고개를 숙이자, 당황한 그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 일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저 파혼하고 싶어요.”
“……뭐?”
예상치 못한 말에 백작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비올레 또한 놀라서 그대로 굳어졌다.
“변덕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안 될까요?”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일리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백작 부부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비올레가 고개를 흔들었다가 일리아를 찬찬히 살폈다.
“아니, 오랜만에 무척 마음에 드는 소리긴 한데……. 너 어디 아프니?”
헤인리랑 똑같은 반응이었다. 그만큼 일리아가 리하트에게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거래 내용은 비밀로 하기로 했으니 자세히 말할 수 없었지만, 카르한에 대해서 부모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았다.
“아뇨, 멀쩡해요. 다만…….”
“다만?”
“새 연인이 생겼어요.”
“뭐라고?!”
백작이 소리를 질렀다. 비올레 또한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일리아는 잠자코 있었다.
한참 넋이 나가 있던 백작 부부는 이성을 되찾고, 저들끼리 숙덕였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래도 리하트보단 낫겠죠.”
“일단 들어는 봅시다.”
목소리는 낮추었지만 다 들렸다. 백작이 겨우 진정하고 자리에 앉았다. 비올레 또한 표정을 수습한 채 일리아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그래, 상대는 누구지?”
“에반테온 소공자예요.”
“……에반테온?”
별생각 없이 따라서 되묻던 백작이 멈칫했다. 이윽고 백작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성격 더럽고, 마주치는 놈마다 죽여서 살인귀로 유명한 그 에반테온?!”
일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랑 다르긴 하지만, 그 에반테온이 맞긴 했다. 백작은 기어코 뒷목을 잡고 말았다.
귀한 딸이 쓰레기를 버리나 했더니, 이번엔 감당할 수 없는 폭탄을 데려온 것이었다.
***
늦은 오후의 빛이 들어오는 복도는 엄숙함을 품고 있었다. 가문의 역사를 품은 벽화는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했다. 감탄을 자아내는 훌륭한 복도였지만, 카르한에게는 깊은 굴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일정한 박자를 맞춘 발소리가 복도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이윽고 두 명의 고용인들이 그와 마주쳤으나,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자리를 떴다. 마치 보면 안 될 것을 마주한 듯한 태도였다.
복도 끝, 창문이 없어서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그곳에 문이 하나 있었다. 그 앞에 멈춰 선 카르한이 문을 열었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곧게 세운 몸이 조금 허물어졌다. 드넓은 에반테온 대저택에서 이곳만이 그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침실로 들어온 카르한은 침대에 앉아, 맞은편에 놓아둔 작은 거울을 응시했다. 타원형 거울에 저 자신이 비쳤다. 화사한 색감의 옷을 입은 스스로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시선을 조금 올리니 무뚝뚝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 가서 표정 연습 많이 해두세요.
헤어지기 전, 일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카르한은 천천히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눈매는 여전히 사나웠고, 입꼬리만 낚시 바늘로 걸어놓은 듯했다. 석고상이 미소 지어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내 배로 낳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역겨우니 웃지 마라.
잠시 잊고 있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가벼운 떨림과 함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갔다. 역시 자연스럽게 웃는 법을 알 수 없었다.
카르한은 외투를 벗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추를 풀던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항상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어왔는데, 그녀는 처음부터 저를 꿰뚫어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먼저 다가와서 도움을 주고, 사례를 했더니 화를 내고. 그러더니 갑자기 거래를 하자며, 저를 끌어들였다.
“…….”
카르한은 옷을 벗다 말고, 계약서를 꺼내들었다.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씨로 계약 연애의 조항들이 주르륵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일리아의 제안을 거절하기 위해 그 자리에 나갔다. 의사를 밝혔을 때, 일리아는 뜻밖의 물음을 던졌다.
-소공자의 의견은요?
-……제 의견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공자의 약혼이잖아요. 결정은 당신이 하는 거예요.
카르한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제 의사를 묻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는 지금껏 순응하는 삶에 익숙했다. 자신의 의사보다는 남들의 의견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카르한의 인생에 선택지는 늘 하나뿐이었다. 타인에게 맡기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렇게 하면 모두가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리아는 자신의 의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해주었다.
카르한은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대로 계속 휩쓸리기만 할 것인가.’
질문이 던져지자마자 마음 한구석에 파문이 번졌다. 오랫동안 고여 있었던 만큼 파문은 점점 커져, 물결이 일었다. 물결은 곧 파도가 되어 카르한의 발치까지 밀려왔다. 잡념이 쓸려나간 자리에 남은 생각은 하나였다.
‘바뀌어보고 싶다.’
그래서 일리아의 손을 잡기로 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적어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노력해야 할 것이 수두룩했다.
똑똑, 문을 두드려오는 소리에 카르한이 정신을 차렸다. 문을 열어주자, 한 남자가 복도에 서 있었다.
“돌아왔습니다. 카르한 님.”
암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그의 이름은 테시온 헤르벤. 카르한의 보좌관이자, 카르한이 유일하게 곁에 두는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서 죄송합…….”
천천히 고개를 들던 테시온이 카르한을 보고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 옷은 뭡니까?”
한 소리 들을 거라 각오는 했기에, 카르한은 일단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문이 닫히고, 테시온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제가 어두운 옷만 입으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상한가?”
“아니, 무척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테시온은 지금껏 카르한에게 어두운 옷만 입으라고 강요했다. 만만하게 보이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제가 카르한 님의 성격을 감추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테시온이 한탄했다. 지금까지 카르한이 남들에게 진짜 성격을 들키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테시온 덕분이었다.
테시온은 카르한이 이용당하기 딱 좋은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전장에서 목숨이 위험해질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래서 카르한이 후계자가 되었을 때, 다른 이들에게 휘둘리기 전에 미리 차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테시온은 카르한을 따라다니며 불순한 목적으로 다가오는 이들을 모두 잘라냈다. 거기다가 딱 맞춰 카르한을 둘러싸고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효과는 너무 좋았고 그 결과, 카르한은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설마 이번 연회에 그러고 가셨습니까?”
카르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테시온은 그나마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으로 나가야 합니다. 아니면 금세 카르한 님의 성격이 들켜버릴 겁니다.”
“…….”
“급한 일만 없었더라면 저도 따라갔을 텐데……. 그나저나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셨습니까?”
테시온은 자리를 비우기 전, 카르한에게 신신당부했다. 연회에서 누가 말을 걸어오면 무시할 것. 얼굴만 비치고 최대한 빨리 돌아올 것. 타인과 엮이지 말 것. 당부를 전부 어기게 된 카르한은 잠시 침묵했다.
“설마…….”
그때 침대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이 테시온의 눈에 들어왔다. 테시온은 성큼성큼 걸어가, 곧바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건 무엇입니까.”
당황한 카르한이 눈동자만 굴렸다. 계약서를 빠르게 읽어 내린 테시온이 소리쳤다.
“카르한 님! 설마 제가 없는 사이, 사기 당하셨습니까?!”
“사기는 아니지만…….”
이미 숨기기엔 글러먹은 듯했다. 카르한은 한참 고민하다가 테시온에게는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카르한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자, 테시온의 얼굴이 점점 기괴해졌다. 설명이 끝났을 때, 테시온은 바르르 떨었다.
“계약 연애라니, 어찌 제가 없을 때 그런 큰일을…….”
그의 눈치를 보던 카르한이 조용히 말했다.
“내 스스로 내린 결정이니까.”
카르한의 대답에 테시온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휘말린 것도 실수도 아닌, 스스로의 결정이었다고 한다. 언제나 남들이 하라는 대로 고개만 끄덕이던 카르한이었기에 무척 낯설었다.
테시온은 심각한 얼굴로 잠시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블로든 영애와 만나기로 약속하신 날은 언제입니까?”
“……나흘 후.”
“그때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테시온이 결의를 담아 중얼거렸다.
“제가 직접 확인해봐야겠습니다.”
***
카르한과의 두 번째 약속 당일이 왔다. 외출 준비를 하던 일리아는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카르한과 계약서를 주고받은 날, 일리아는 부모님에게 그와 연애한다고 밝혔다. 두 분은 뒤집어졌고, 백작은 다시 생각해보라며 만류했다. 하지만 반대했다가 리하트와 재결합할까 싶어서 적극적으로 말리진 못했다.
일리아는 그동안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계획을 세웠다. 당장은 카르한과 연인 행세를 하면서 리하트와 파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파혼 선언은 했지만, 아직 리하트가 동의해주지 않은 상태였다.
제국법상, 파혼은 서로의 동의가 필요했다. 대부분은 합의를 통해 파혼했지만, 한쪽이 일방적으로 파혼을 원하는 경우에는 진흙탕 싸움이 될 수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재판까지 가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떻게 결판을 볼 것인지가 고민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누군가 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조금 거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어와.”
일리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며 말렉이 들어왔다. 급히 뛰어왔는지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아가씨, 큰일 났습니다. 오늘 약속 장소에 못 가실 것 같습니다.”
“왜? 무슨 일인데?”
약속 장소라면 저번에 사들인 찻집이었다. 카르한과 비밀 거점으로 삼은 곳이기도 했다. 일리아의 물음에 말렉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좋은데 좋지 않은 그런 표정이었다.
“황실에서 오늘 공문이 내려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