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90)
말 몇 마디를 더 나눈 후, 다들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일단 오늘은 푹 쉬어요.”
비올레와 클리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카르한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카르한이 무척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비올레와 클리프가 가버리고, 일리아는 카르한을 침실까지 데려다주었다.
“한숨 자고 나중에 봐요.”
그때 카르한이 일리아의 옷자락을 살짝 쥐었다.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습니다.”
카르한의 조심스러운 부탁에 일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방에 들어왔다. 침실에 들어선 카르한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떠나기 전과 바뀐 것이 없었다. 매일 청소를 해두었는지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 카르한을 지켜보던 일리아가 물었다.
“여기로 곧장 온 거예요?”
“예, 아직 공작저는 들르지 않았습니다.”
공작저가 언급되자 잠깐 침묵이 돌았다. 카르한이 예상보다 일찍 귀환한 이유는 공작의 죽음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입술만 달싹였다.
한 번도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카르한이 어떤 심정일지 헤아릴 수 없었다. 카르한과 공작의 관계가 나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였다.
침묵하던 일리아는 두 팔을 뻗어 카르한의 등을 꽉 끌어안아주었다. 태산같이 솟은 몸이 서서히 무너졌다. 카르한은 일리아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채 조용히 숨만 내쉬었다.
“기분이 이상합니다.”
카르한은 무척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슬프지는 않은데……, 그냥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어떤 감정인지.”
“…….”
“제가 정상이 아닌 걸까요.”
일리아는 카르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굳이 당신의 감정을 정의 내릴 필요 없어요.”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 스스로를 비난할 이유도 없었다. 혼란스러운 것이 당연했다.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어깨를 짧게 떨었다.
“그 사람은 한 번도 이렇게 안아준 적이 없었습니다.”
카르한은 공작과 연관된 기억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에반테온 공작은 카르한에게 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래전부터 이어진 냉대에 미움이라는 감정조차 들지 않을 정도였다. 공작저를 나온 순간부터 그를 가족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허망함이 밀려왔다.
한참 기억을 쏟아내고 나서야 더러운 찌꺼기처럼 남아있던 감정이 점차 씻겨나갔다. 부친이었던 남자를 떠나보내는 과정일지도 몰랐다.
마음이 진정된 카르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일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눈으로 전해지는 것이 있었다. 카르한은 그제야 굳어진 표정을 풀었다.
“다리 아프지 않아요? 앉아서 이야기 좀 해요.”
잘 때까지 지켜보겠다고 일리아가 속삭였다. 두 사람이 침대에 앉으려고 할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르한 님.”
테시온의 목소리에 일리아와 카르한이 동시에 문 쪽을 바라보았다. 카르한이 대답하자 굳어진 얼굴을 한 테시온이 들어왔다.
“총회가 앞당겨졌습니다.”
총회가 앞당겨졌다는 말에 일리아와 카르한은 그대로 굳어졌다. 테시온은 공작부인과 원로들이 긴급회의를 열어 결정 내렸다고 설명해주었다.
“총회는 언제 열리지?”
“2주 후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조만간 글로시아를 만나야 할 듯싶었다. 수도는 글로시아에게 맡겨두었는데, 그를 포함한 중립파 원로들은 전부 카르한 쪽으로 돌아섰다.
블레어드를 지지했던 시오릭 또한 분쟁지에서 카르한의 활약을 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공작령에 머무르고 있던 또 다른 원로마저 카르한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확실하게 제 편이 된 사람은 총 다섯 명이었다. 아직 부족하지만 블레어드가 불법 모임에 가담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뒤돌아설 원로들이 많을 터였다. 카르한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고했다.”
“푹 쉬십시오.”
테시온이 방을 나가버리고, 일리아가 물었다.
“괜찮은 거예요?”
“일단 원로님을 만나봐야겠습니다.”
최종 결정권을 가진 공작이 죽어버렸으니, 그 권한은 레베타에게 넘어올 터였다. 레베타가 이번 총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블레어드만을 끔찍이 위했다. 카르한 편을 들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걱정 마십시오. 예정보다 조금 앞당겨질 뿐이니.”
카르한은 일리아를 안심시켜주었다. 그제야 일리아가 표정을 풀었다.
“일단 짐부터 풀까 싶습니다.”
“도와줄게요.”
이윽고 고용인들이 상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보여주고 싶은 게 많습니다.”
카르한은 들뜬 아이처럼 상자를 풀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이 선물로 준 겁니다.”
카르한은 마을 사람들을 전부 기억하는지,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그런 후 다음 상자를 열었다.
“이건 제가 연습한 그림입니다.”
엄청난 양의 그림을 확인한 일리아는 속으로 감탄했다.
‘저만큼이나 그렸는데, 실력이 늘지 않다니.’
그림은 엉망진창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사랑스러워서 일리아는 작게 웃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도란도란 물건을 정돈해나갔다. 카르한은 순무 화분을 창가에 올려둔 후에 헤인리에게 받은 초상화를 꺼냈다. 나중에 헤인리가 오면 돌려줄 생각이었다.
얼추 짐정리가 끝나자 방이 북적북적해졌다. 일리아가 준 오르골까지 전부 가지고 왔더니 짐이 많았다.
“침실에 두기엔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럼 옆방을 쓰면 되죠.”
뭐가 문제냐는 듯 일리아가 물었다. 카르한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공간이 부족하면 다른 방을 쓰면 된다는 사실을, 블로든 저택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당장 쓰지 않을 짐은 고용인들에게 맡겼다. 정돈하는 과정이 즐거워 둘이서 전부 하다 보니, 일리아와 카르한은 정말로 지쳐버렸다.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에 누워서 한참을 노닥거렸다.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밤을 새워도 모자랄 듯했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카르한의 눈꺼풀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자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졸음을 떨쳐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냥 자요. 어차피 내일 아침에 가장 먼저 볼 텐데요.”
반쯤 잠든 카르한이 뭐라고 웅얼거렸다.
“내일…….”
빨리 내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 같았다. 일리아는 속으로 웃다가 작게 속삭였다.
“잘 자요.”
훅, 램프의 불빛이 꺼지며 방 안에 스며들어온 어둠이 카르한을 꿈으로 인도했다.
***
다음 날 저녁 무렵, 블로든 저택 만찬장에는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다. 기쁜 날이라며, 클리프는 직접 키운 채소를 기꺼이 내놓았다. 비올레는 카르한을 환영하기 위해 아끼던 술을 땄다.
마지막으로 헤인리는 황궁 수석 요리사에게 부탁해서 받은 쿠키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카르한을 환영하고 있었다.
“소공자, 그사이 야윈 것 같습니다.”
클리프가 호들갑 떨며 음식을 권하고, 비올레는 몸에 좋은 음식을 전부 카르한 쪽으로 내밀었다. 헤인리는 조용히 카르한이 잘 먹는 음식을 봐두었다가 고용인에게 더 가져오라고 말했다.
즐거운 식사가 이어지고, 일리아는 드디어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일리아가 스푼을 내려놓자,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할 말이 있어요.”
일리아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제가 물에 빠져서 죽을 뻔했던 일, 기억하시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구해준 사람이 카르한이었어요.”
“……뭐라고?”
헤인리가 되묻자, 일리아는 지금껏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해주었다. 일리아의 말이 끝났을 때, 클리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공자가 은인이었다니!!”
비올레는 흥분한 클리프를 진정시키며 중얼거렸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구나.”
웬만한 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 비올레조차 무척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소공자라면 그럴 법하군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실컷 떠들어 댔을 텐데, 원체 자기 자랑을 하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던 거 아니냐고 헤인리는 혀를 내둘렀다.
“소공자, 정말 고맙습니다.”
헤인리가 진심을 담아 인사했다.
“우리가 큰 은혜를 입었어요.”
비올레와 클리프도 덩달아 감사를 표했다. 만약 카르한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일리아는 이 자리에 없었을 터였다. 카르한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을 본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잠시 리하트를 떠올렸다. 일리아를 구해줬다는 것으로 거들먹거리며 돈을 뜯어내던 리하트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어느새 식사는 뒷전이 되고, 다들 카르한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카르한은 조심스레 분쟁지에서 있었던 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마침내 길고 길었던 식사 시간이 끝났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헤인리가 카르한을 불렀다.
“소공자, 잠깐 시간을 내어주겠습니까.”
카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헤인리에게 줄 것이 있었다. 두 사람은 복도를 걸어, 카르한의 방으로 향했다. 카르한이 초상화가 들어 있는 원통을 내밀며 말했다.
“귀중한 것을 선뜻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헤인리는 원통을 가볍게 쓸었다. 옅은 미소를 띠던 그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헤인리는 간만이었기에 카르한은 긴장하고 말았다.
“소공자,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가볍게 숨을 삼킨 헤인리가 말을 이었다.
“황태자 전하를 지지해주십시오.”
뜻밖의 부탁에 카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헤인리는 침착하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맡아 줄 사람은 소공자뿐입니다.”
황태자의 세력이 점점 커져가고 있지만, 막 정계에 입문한 젊은 귀족이 대부분이었다. 다른 고위 귀족들까지 휘어잡기 위해서는 황태자 측에서도 대표할 만한 인물이 필요했다.
마침 카르한은 공작의 후계자였고, 제국 내에서 평판이 많이 좋아졌다. 공작이 사망한 지금, 카르한이 작위를 계승한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저도 정치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블로든 가문의 상황이 좋지 않아서…….”
카르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헤인리는 카르한이 아직도 블로든 가문이 처한 형편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쟁지까지 거리가 제법 있기도 했고, 일리아가 일부러 알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민하던 헤인리는 짤막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하여 지금 세무 조사가 들어온 상태입니다.”
헤인리의 말이 끝났을 때, 카르한은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일리아가 괜찮다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지금껏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한참 바닥만 내려다보던 카르한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카르한의 새파란 눈동자를 본 헤인리가 숨을 삼켰다. 자책 위로 분노와 다짐이 서려 있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드디어 일리아에게 도움이 될 차례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총회에서 반드시 승리를 거두어야 했다. 카르한은 조금 더 힘을 주어 말했다.
“제가 에반테온 공작이 되겠습니다.”
***
에반테온 공작저는 짙은 음울함이 맴돌았다.
공작이 죽고 난 후, 블레어드는 며칠 내내 방에 처박혀 있다가 발작하듯 난동을 피웠다. 불법 모임이 들통 난 뒤에도, 블레어드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모임 회원의 부모들이 권력과 돈으로 입막음 한 탓이었다.
하지만 블레어드가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은 암암리에 퍼진 상태였다. 블레어드의 평판은 한없이 추락했다.
그사이 레베타는 공작과 외양이 비슷한 시체를 구하고 고용인들을 단단히 입막음 했다. 자신 또한 공작과 같은 꼴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선 블레어드를 돕긴 했으나,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할 일을 마친 레베타는 자신이 묻어버렸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집사와 고용인들을 파헤쳐보았다. 그러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고된 고용인이 제법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용인을 해고하려면 공작가 안주인인 레베타의 승인이 필요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승인도 없이 무단으로 쫓아낸 것이다.
수소문 끝에, 레베타는 해고된 고용인들을 찾아냈다. 만나자는 연락을 보냈으나, 다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돈을 두둑이 주겠다는 말에 단 두 명만이 겨우 요청에 응했다.
레베타는 제 앞에 앉은 여자들을 보았다.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뭔가가 나올까 봐 겁먹은 것 같았다. 레베타는 그녀들을 보며 물었다.
“누가 당신들을 자른 거지?”
“큰 도련님께서 해고하셨어요.”
두 사람이 입을 모아 대답하자, 레베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설마 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눈치를 보던 여자들이 입을 열었다.
“해고되면서 협박도 받았어요.”
“저도요. 우연히 그걸 봤는데, 전부 잊으라고……. 말하고 다니면 죽여 버리겠다고…….”
아직도 두려운지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그거라니……?”
레베타가 묻자, 한 명이 대답했다.
“큰 도련님께서 새를 죽여서 공작부인의 화장대에 올려둔 것이요.”
레베타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반박할 말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사실 저도 몇 번 수상쩍은 장면을 목격했어요.”
다른 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자는 지금까지 자신이 목격했던 일을 상세히 말해주었다.
레베타의 반지가 없어졌던 날, 블레어드가 레베타의 침실에 몰래 들어갔다 나온 모습을 본 것. 짐승을 난도질해서 전시한 것. 레베타가 아끼던 물건을 부수고 카르한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 말하자면 끝도 없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작은 도련님을 종종 괴롭히는 걸 봤어요.”
안 그래도 파리하던 레베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한때 에반테온 공작저의 고용인이었던 여자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돈보다는…… 작은 도련님 때문에 나온 거예요.”
“저희는 지금껏 모른 척해왔으니까요.”
그녀들은 진실을 알면서도 침묵해왔다. 혹시 불똥이 튈까 싶어서 애써 카르한을 외면했다. 그러나 그때의 기억이 오랫동안 죄책감으로 남아 있었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야 양심 고백을 할 용기가 생긴 것이다. 침울한 얼굴을 한 여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는 작은 도련님이 너무 불쌍해서…….”
그 말이 비수가 되어, 레베타의 가슴에 꽂혔다. 그리고는 가슴 안쪽을 저미다가 거세게 난도질해왔다.
“아니야……, 그럴 리가…….”
레베타는 힘껏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그럴 듯한 거짓 속에 감춰져 있던 진실이 너무나 끔찍해서 눈앞이 깜깜했다. 그럼 지금까지 자신이 믿어왔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유일하게 저를 위해준다 생각했던 블레어드는……. 그리고 카르한은…….
순식간에 따스한 환상 속에서 차가운 현실로 내던져진 것 같았다. 그녀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몸이 힘없이 한쪽으로 기울어, 레베타는 겨우 의자 팔걸이를 붙들었다. 묻어버린 과거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 기억 속에,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 제발 믿어달라고 우는 아이를 매몰차게 몰아붙이던 자신이 있었다. 얼굴조차 보기 싫다며 그 어린 아이를 전쟁터로 떠나보냈던 것이 떠올랐다.
-구제불능이구나.
-왜 내 자식으로 태어나서…….
-거짓말하지 마!
그때 내뱉은 말이 지금에서야 레베타에게 돌아왔다. 어차피 카르한은 저를 싫어하니, 자신이 카르한을 싫어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놓아버리면 편할 거라며 스스로 합리화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레베타는 팔걸이에 얼굴을 기댄 채 숨을 헐떡였다.
“모두가 알고 있는데, 나만, 나만…….”
끝까지 믿어줄걸. 좀 더 알아볼걸. 지금까지 카르한에게 얼마나 많이 상처 줬는데…….
레베타는 자기 연민에 빠져서 외롭다고 생각해 왔지만, 정작 정말로 외로웠을 사람은 카르한이었다. 이 저택에서 카르한의 편이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금 카르한이 분쟁지로 떠나기 전에 내뱉었던 말이 어지럽게 쏟아졌다.
-항상 생각했습니다. 제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는지.
-아니라고 부정해도 당신은 믿어주지 않았지요.
-지금 와서 진실을 말해봤자 믿지 않을 테니……, 공작부인께서는 계속 보고 싶은 것만 보십시오.
레베타는 가슴을 움켜쥔 채 울부짖었다. 밀려오는 격통이 그녀를 찢어놓았다.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는 레베타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여자들은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아아아……!!”
제 손으로 무너뜨린 관계였다. 돌이키기엔 너무나 멀리 와버려서 쫓아갈 수도 없었다. 어리석었던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눈보라처럼 몰아쳤다.
레베타는 제 가슴을 몇 번이나 내리쳤다. 결국 그녀는 혼절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