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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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한의 귀환에 수도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그가 자리를 비운 지난 몇 달 동안 무수한 뜬소문이 떠돌았다. 후계자 싸움에서 패배하고 도망쳤다느니, 전쟁터가 그리워서 돌아갔다느니……. 다음 에반테온 공작은 블레어드가 될 거라 확신하는 이도 있었다.
수도로 돌아온 카르한은 블로든 저택에서 이틀 정도 휴식을 취한 후, 본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가장 먼저, 수도에 머무르던 원로인 글로시아를 만났다.
-다른 원로들도 마음을 돌린 상태입니다.
열세 명의 원로 중 과반수가 카르한에게 넘어왔다. 그럼에도 블레어드를 지지하는 이들이 아직도 제법 남아있었다.
레베타의 표를 받지 못한다면 원로들이라도 확실하게 포섭해야 승산이 있었다. 그쪽은 시오릭이 직접 수도로 올라와 공략해보겠다고 먼저 말했다.
그리고 오늘, 카르한은 헤인리와 함께 황궁에 입궁하기로 했다. 황태자를 알현하기 위함이었다.
“잘 다녀와요.”
작게 하품하던 일리아가 손을 흔들었다. 블로든 가문을 상대로 본격적인 세무 조사가 들어가고, 일리아는 쉴 틈도 없었다. 카르한은 그런 일리아가 안쓰러워서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금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카르한이 속삭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던 헤인리가 일리아에게 말했다.
“오늘도 저녁은 함께 먹자꾸나.”
“기다리고 있을게요.”
일리아가 웃으며 두 사람을 배웅해주었다. 그 길로 카르한과 헤인리는 황궁으로 향했다. 블로든 저택 정원을 가로지른 마차가 금방 속도를 높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차 밖으로 황궁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최근에 눈이 많이 내렸다더니, 아직도 듬성듬성 녹지 않은 눈이 보였다. 햇빛이 들지 않는 음지를 바라보던 카르한은 마차가 멈추자 고개를 바로 했다. 긴장되어서 그런지 자꾸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평소대로만 하셔도 됩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헤인리가 말했다. 그제야 손에 힘이 풀어졌다.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황태자궁으로 걸어갔다.
걷기만 해도 수많은 시선이 꽂혔다. 카르한을 알아본 이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분명 내일이면 에반테온 소공자가 황태자를 찾아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날 터였다.
황태자궁에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있던 황태자가 직접 카르한과 헤인리를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에반테온 소공자.”
“이슈타르 제국에 광휘가 영원하기를, 카르한 에반테온이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는 일단 앉아서 대화하자며 빈자리를 가리켰다. 카르한과 헤인리가 나란히 앉고, 황태자가 맞은편에 자리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황태자였다.
“비서관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카르한은 헤인리를 통해 황태자를 지지하겠다고 의사를 밝혔고, 다음 대 에반테온 공작을 가리는 총회가 있음을 말해주었다.
“열흘 후에 결판이 나겠군요.”
에반테온 공작의 죽음 이후, 귀족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제국에서 공작 가문은 고작 셋이었다. 그중 정계에서 온전히 힘을 쓰는 자는 에반테온 가문뿐이었다. 다른 두 가문은 명예직에 불과한 신세가 된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에반테온 공자가 작위를 계승하면 무척…… 곤란한 일이 생길 겁니다.”
지금도 황제는 블레어드 에반테온을 대놓고 두둔하고 있었다. 만약 블레어드가 에반테온 공작이 되어버리면, 최악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황태자 쪽으로 넘어온 이들도 대거 탈선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번 일에 가담한 모두가 위험해질 터였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아직 황제는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 블로든을 탄압하느라 혈안이 되어 다른 데 눈 돌릴 틈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끌면 황제도 이상함을 느낄 게 분명했다.
“소공자에게 제국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부담 가득한 말이었지만, 카르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이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뒤는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일리아를, 블로든 가문을……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라도 총회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다.
“지난 몇 달 동안 분쟁 지역에 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이야기를 좀 해주겠습니까?”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황태자가 조금 가벼워진 말투로 물었다. 카르한은 입을 열어 분쟁지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야만족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메르크 왕국에서 직접 화친을 제안해왔습니다.”
“……아메르크 쪽에서?”
황태자는 무척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제국령과 인접한 나라인 아메르크 왕국은 미지의 세계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데다가 오랜 분쟁 때문에 양측 사신이 왕래한 지 백 년도 넘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고작 몇 달 사이에 아메르크 왕까지 만나고 왔다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외교 문제에 관심이 많은 황태자는 새삼 다시 보았다는 눈으로 카르한을 살폈다. 그는 흡족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이 끝나고 나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그쪽에서 먼저 화친을 제안했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메르크의 문물은 오랫동안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던 제국을 새롭게 적셔줄 것이다.
황태자와의 독대가 끝나고, 카르한과 헤인리는 방을 나왔다. 그리고 황태자궁을 빠져나왔을 때, 카르한은 마차에 올라타지 않은 채 말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어디 가십니까?”
“공작저에 들러볼까 싶습니다.”
카르한의 대답에 헤인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석찬을 준비해두고 기다리겠습니다.”
“그 전에는 꼭 돌아가겠습니다.”
따로 마차에 올라탄 카르한은 에반테온 공작저로 향했다. 공작저 정원은 음울함이 감돌았다. 꽃밭은 눈으로 뒤덮인 채였고, 날씨가 좋지 않아서 그런지 저택은 칙칙하고 어두컴컴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어둠 속으로 스며들 것만 같았다.
가만히 정원을 응시하던 카르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카르한은 공작의 죽음이 계속 미심쩍었다. 에반테온 공작에게 지병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거기다 장례를 늦추는 것도 이상했다. 마치 뭔가 자꾸 숨기는 것처럼 말이다.
카르한은 혹시나 하고 생각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블레어드가 의심되었지만, 증거가 없었다. 그리고 공작은 지금까지 계속 블레어드를 지지하지 않았나. 굳이 그런 악수를 둘 필요가 있을까…….
어느덧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카르한은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저택 위로 새까만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다. 고목처럼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카르한은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를 걷는데, 등 뒤로 누군가가 황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레어드인가? 카르한이 그대로 멈춰 서서 뒤돌아보았을 때.
“카르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한 레베타가 그곳에 서 있었다.
카르한은 복도 저편에 서 있는 레베타를 응시했다. 그녀는 카르한의 반경으로 넘어오지 못한 채 한참 입술만 달싹였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
레베타의 조심스러운 말투에 카르한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원수를 보는 듯한 눈빛도, 제 가슴을 할퀴어대던 독설도 없었다. 예상과 다른 태도에 카르한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럼, 일단 방으로…….”
레베타가 먼저 걸음을 돌렸다. 카르한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질 듯 좁혀지지 않았다.
복도 끝, 고용인도 오지 않는 응접실에 도착한 레베타는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카르한을 마주 보았다. 카르한도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었기에 그 자리에서 입을 열었다.
“공작께서는 정말 지병으로 돌아가신 겁니까?”
그 물음에 레베타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그래.”
안 하느니만 못한 대답이었다. 카르한은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정말로 블레어드가 공작을 해친 것이라면……. 카르한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레베타가 다시금 이름을 불러왔다.
“카르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운 시선에 카르한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카르한이 기억하는 레베타는 늘 지긋지긋하다는 듯 매몰찬 시선만을 보내왔었다. 단 한 번도, 카르한을 저런 시선으로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다 잘못했다.”
카르한의 눈이 크게 뜨였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뜻밖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어리석어서…… 지금까지 너를 잘못 알고 있었어. 상처 줘서 미안하다.”
독기 빠진 목소리는 형편없이 하느작거렸다. 카르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평생, 죽어도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말을 지금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네게 용서를 빌고 싶구나.”
레베타의 마지막 말에 흔들리던 눈동자가 단단하게 굳어졌다. 카르한은 가라앉은 눈으로 레베타를 바라보았다.
“용서라뇨.”
“블레어드 말만 믿고, 너를 오해하고…….”
그녀는 자신의 과오를 하나씩 꺼내놓았다. 끝없이 이어지던 목소리가 점점 끊어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레베타는 울고 있었다. 희게 질린 뺨에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감정이 북받쳤는지 레베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그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절절히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나를, 용서해주겠니…….”
한참 대답 없던 카르한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만약에 당신이…… 조금만 더 일찍, 그러니까…… 제가 수도에 돌아왔을 때 사과했다면…… 아마 저는 받아주었을 겁니다.”
작년에 전쟁터에서 막 귀환했을 때 레베타가 잘 돌아왔냐는 말 한 마디만 해주었다면, 카르한은 그녀를 용서했을 것이다. 과거의 아팠던 기억은 전부 묻어버린 채 미련하게도 그녀를 받아들였을 터였다.
그만큼 카르한은 애정이 고팠다. 누구라도 좋으니 저를 사랑해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레베타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고, 그사이 카르한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하지만…… 이제는 제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당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레베타를 바라보는 카르한의 눈동자에도 물기가 차올랐다. 투명하게 비치는 새파란 눈동자가 레베타를 가득 담았다.
“후회하지 마십시오. 평생을 그랬듯이 그냥 저를 미워하십시오.”
“…….”
“더 이상 당신에게 바라는 것이 없으니까.”
카르한의 말에 레베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거친 말 한 마디 없이 담담하기만 한 말투가 더욱 가슴을 아리게 했다. 카르한이 품은 상처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 레베타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래……, 날 용서하지 마라.”
고개를 숙인 레베타가 중얼거렸다. 용서는 상대가 해줄 마음이 들 때 비로소 비는 것이었다. 그녀는 용서 받을 자격조차 없었다. 카르한이 뒤돌아서자, 레베타가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그를 붙잡았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하나만 더 물어보고 싶어.”
레베타가 절박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종종 꽃을 두었던 거…… 혹시 너였니?”
“문 앞에 둔 거라면 제가 맞습니다.”
카르한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레베타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아…….”
레베타가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그러나 카르한은 손을 내밀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때의 다정함은 남아있지 않았다. 전부 레베타가 떠나보내 버렸기에.
레베타의 위로 드리운 그림자가 어느새 사라졌다. 한참을 오열하던 레베타는 고개를 들어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레베타는 하염없이 문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저 문이 열릴 일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카르한은 정말로 저를 놓아버린 것이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엔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끈조차도 말이다.
***
조용히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르한은 한 걸음 옮겼다가 멈춰 섰다. 곧게 펴진 등이 차갑고 딱딱한 벽에 닿았다. 카르한은 벽에 기댄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바닥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
후회는 없었다. 어그러진 관계를 돌이키기엔 너무나 멀리 와버렸다. 이제 그의 가족은 블로든이었다. 가만히 숨만 내뱉던 카르한은 다시 몸을 바로한 채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과거는 돌아보지 않겠다는 듯 그저 앞만 응시했다.
한참 복도를 걸어가던 카르한은 계단 앞에서 멈춰 섰다. 계단 끝에는 거대한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에반테온 공작과 레베타 그리고 블레어드가 그려진 초상화였다. 문득 일리아가 공작저에 방문했을 때가 생각났다.
-……제가 전장에 나가있을 때 그린 거라서.
가족 초상화를 보고 의아해하는 일리아에게 카르한은 무심코 변명을 내뱉고 말았다. 자신이 버림받은 존재라는 걸 일리아가 몰랐으면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카르한은 침실을 빠져나와 초상화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저 자리에 자신만 없다는 것이 속상하면서도 부끄러웠다. 한편으로는 제 존재가 부정당한 것 같아 씁쓸했다.
덤덤한 눈으로 초상화를 바라보던 카르한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카르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택은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고요했다. 고용인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공작의 죽음에 대해 좀 더 알아볼까 싶었지만, 이미 뒷수습이 전부 끝난 것 같았다. 이대로 소득 없이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저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계단 밑에서부터 올라오던 이와 카르한의 눈이 마주쳤다.
“!”
블레어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단숨에 계단을 뛰어올라왔다. 카르한의 앞에 멈춰 선 블레어드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누구 허락을 받고 여길 온 거냐.”
“제가 못 올 곳에 왔습니까?”
카르한이 받아치자 블레어드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주변에 보는 눈이 없는 탓인지 그가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내 집에서 썩 꺼져!”
묵묵히 블레어드를 내려다보던 카르한이 대답했다.
“이곳이 왜 당신 집입니까. 조만간 쫓겨날 텐데.”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카르한은 대답하지 않고 블레어드를 내려다보았다. 하찮은 벌레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에 블레어드가 몸을 떨었다. 카르한의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있을 자리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블레어드가 독기 품은 목소리를 토해냈다.
“전부 다 가졌잖아!!”
지독한 열등감이 토사물처럼 꾸역꾸역 쏟아졌다.
눈빛으로부터 진득한 원망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넌 평생 모를 거다! 네 존재 때문에 내가 얼마나 아등바등 살아왔는지!!”
블레어드가 악에 받쳐서 소리를 지르자, 카르한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쪽도 영영 모를 겁니다.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인 존재로 취급 받는 기분을.”
서로를 이해하는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각자의 존재로 인해 밑바닥을 찍어보았으니 말이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맹렬히 노려보았다. 침묵마저 따끔거릴 때, 카르한이 조용히 질문했다.
“당신입니까?”
“…….”
“당신이 죽였습니까.”
블레어드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애써 표정을 수습하려는 게 보였으나 동요가 그대로 묻어나왔다. 그가 짓씹듯 목소리를 내뱉었다.
“미친 소릴…….”
형편없는 부정에 카르한은 입매를 단단히 다물었다. 블레어드는 끝내 제 손으로 아버지까지 죽인 것이다. 그러고도 탐욕을 부리는 블레어드가 역겨웠다.
“쓰레기 자식.”
나직한 중얼거림이 블레어드를 찌르고 헤집었다. 그는 발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카르한을 노려보았다.
“분쟁지에서 죽어버릴 것이지 기어코 여기까지 와서는……!”
그 말은 카르한에게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카르한을 흔들 수 있을 만한 말을 필사적으로 찾던 블레어드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블로든이 위험해진 건 알고 있겠지?”
내내 차분하던 카르한의 얼굴이 바짝 굳어졌다. 좁혀진 미간을 본 블레어드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과연 세무 조사로 끝날 것 같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단한 손이 블레어드의 멱살을 붙들었다. 그의 발이 허공을 더듬었다. 카르한은 숨통이 막혀서 컥컥거리는 블레어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심상치 않은 기세가 블레어드의 온몸을 조여 왔다.
블레어드의 말에 벌벌 떨던 나약한 아이는 더 이상 없었다. 살의를 품은 시선만이 블레어드를 향했다.
“여기서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어.”
“커흑……!”
카르한은 그대로 블레어드를 내던졌다. 형편없이 바닥을 나뒹구는 그를 내려다보던 카르한이 곧장 뒤돌아섰다.
“어디 가!”
겨우 몸을 일으킨 블레어드가 도망치지 말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카르한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 역겨운 곳에서 어서 빨리 나가고 싶었다.
총회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열흘.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날이 블레어드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
공작의 죽음 이후, 에반테온 공작 가문은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후계자를 가릴 총회가 다음 대 공작을 뽑는 자리로 변한 것이다. 가주 자리를 오랫동안 공석으로 둘 수 없었기에, 레베타와 원로들은 총회를 앞당기기로 결론 내렸다.
그때부터 원로들은 누구를 지지할 것인지를 두고 눈치 싸움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블레어드를 지지했던 원로들은 남몰래 따로 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전부 왔습니까?”
수염을 길게 기른 원로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를 제외하고 다섯 명의 원로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빈자리를 확인한 그가 말했다.
“시오릭 님은 오지 않았군요.”
“그쪽은 이미 돌아선 지 오랩니다. 연락을 보내도 전부 무시하더군요.”
맞은편에 앉아있던 이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아무래도 소공자를 지지할 모양입니다.”
모두가 잠시 침묵했다. 열세 명의 원로 중에서 블레어드를 지지하던 원로는 총 일곱 명이었다. 한 명이라도 빠져나가면 과반수가 무너져, 카르한 쪽이 우세해지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공작부인께서는 공자를 지지할 테니…….”
에반테온 공작이 죽어버렸으니, 결정권은 레베타가 쥐고 있었다. 한 명 정도의 근소한 차이는 레베타의 권한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그리고 레베타는 블레어드를 대놓고 편애했다. 이대로라면 총회에서 블레어드가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컸지만, 다들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공자에게 가문의 운명을 맡겨도 괜찮은 걸까요?”
이들 중 가장 젊은 원로가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껏 공작께서 지병을 앓고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습니다.”
“원로들 모두가 납득하고 넘어간 문제가 아닌가. 거기다 주치의도 지병으로 타계하셨다 진단 내렸으니…….”
“하지만 전해들은 것이 전부이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