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93)
24장
***
총회가 끝나고, 곧바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논의 주제는 블레어드의 처벌과 카르한의 작위 계승이었다.
공작을 살해한 블레어드는 만인의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될 터였다. 제국법대로라면 그는 사형을 피할 수 없었다. 존속 살해는 황족 시해와 더불어 가장 큰 죄였으니 말이다.
“공작위를 계속 공석으로 둘 수 없으니, 사흘 후에 작위를 계승하도록 하지요.”
레베타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공작의 장례식도 남아 있으니, 계승식은 따로 치르지 않을 예정이었다. 간소하게 위임 절차를 치른 후 황실에 보고하기로 매듭지었다.
논의가 얼추 끝났을 때, 블레어드를 지지했던 원로들이 카르한의 눈치를 보았다.
“소공자, 저희는 협박 받았습니다.”
“맞습니다. 소공자를 지지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총회에서 블레어드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던 원로들이 변명을 쏟아냈다. 글로시아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원로들의 변명을 들어주던 카르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한은 그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불이익을 줄 생각이 없습니다.”
블레어드를 지지했던 원로들은 대번에 안색이 밝아졌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단숨에 태도를 달리한 그들이 축하 인사를 해왔다. 하나하나 대답해준 카르한은 고개를 돌려 저를 지지해준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저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로시아와 시오릭을 포함한 원로들이 헛기침을 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과묵한 글로시아가 뿌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가장 먼저 카르한을 찾았던 만큼 이번 결과가 무척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리고 글로시아의 옆에 서 있던 시오릭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하겠습니다. 에반테온 공작 각하.”
“……감사합니다.”
벌써 그렇게 불리니 기분이 이상했다. 카르한이 뒷목을 쓸어내리자, 글로시아가 웃으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그럼 사흘 후에 뵙지요.”
원로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회의장에 남은 사람은 카르한과 레베타뿐이었다. 카르한은 희미한 미소를 갈무리한 후에 레베타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사랑했던 자식을 직접 기사들에게 넘기던 공작부인은 온데간데없고, 가여운 여인만 남아있었다. 레베타는 차마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저를 도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카르한이 먼저 말문을 트자, 그제야 레베타가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저 늦게나마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레베타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서서히 고개를 숙인 그녀는 한참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
그 한 마디에 진심이 담겨 있었으나, 카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저번 대화에서 전부 했다. 이제 와서 결정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과거의 상처를 잊어버리는 날이 온다고 해도 그녀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네가 작위를 계승하면…… 나는 공작저를 떠날 거란다.”
레베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러나 이미 생각을 마쳤는지, 그녀의 말에는 망설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죄는 내가 가지고 갈 거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벌을 받겠다고, 레베타가 말했다.
“그런 후에…….”
레베타는 숨을 한 번 삼킨 후에 말을 이었다.
“이제 네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마.”
카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순간에 남편과 아들을 잃게 된 그녀는 평생 고통 속에 살게 될 것이다. 두고두고 후회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칠 터였다. 그것이 레베타가 속죄하는 길이었으며, 업보였다.
불쌍한 사람. 과거의 자신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감정이었다. 일리아를 만난 후로 카르한은 수많은 감정을 알게 되었고, 지금 레베타를 동정하고 있었다. 그녀가 제게 준 상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테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
“…….”
카르한은 레베타가 내린 결정을 만류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을 고수했을 뿐이었다. 대답은 바라지도 않았는지 레베타가 고개를 숙인 채 뒤돌아섰다.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카르한이 겨우 입을 열었다.
“잘 지내십시오.”
망설이던 카르한이 희미한 말을 덧붙였다.
“……어머니.”
카르한의 마지막 인사에 레베타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어깨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어머니라 불린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이기도 했다.
못 박힌 듯 서 있던 레베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랬다간 무릎을 꿇고서라도 제발 용서해달라고 빌 것이 분명했으니까.
회의장을 빠져나오자 그제야 꽉 막혔던 울음이 새어나왔다. 레베타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흐느꼈다. 혹시 문 너머에 있는 카르한에게 들릴까 싶어서, 소리 내어 울 수는 없었다.
어깨를 떨며 흐느끼던 레베타는 겨우 눈물을 추슬렀다. 고개를 들고 허리를 곧게 편 채 길게 뻗어진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드리운 먹구름은 어느새 물러나고, 한 줄기의 햇빛이 창문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그늘진 복도를 지나, 빛 속을 걸어가던 레베타는 잠시 멈춰 섰다.
총회 내내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레베타 혼자 잊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에반테온 공작이자 그녀의 남편이었던 남자. 첫눈에 반한 후로 쭉 외사랑 해왔던 사람.
오랜 시간이 흘러 실망하고 원망하며, 결국 증오만 남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마음 한구석엔 그가 남아 있었다. 증오마저 사랑이었던 것이다.
레베타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그날의 풍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레베타는 공작의 시신을 자신이 잘 수습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최후의 속죄였다.
다시 발을 떼어낸 레베타는 그늘진 복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
황궁에서는 간만에 국무회의가 열렸다. 황제가 블로든 가문을 대상으로 세무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선언한 후로 처음이었다. 회의장으로 향하던 귀족들은 복도를 걸으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저도 소공자보다는 공자 쪽이 좀 더 승산이 있지 않을까 추측했는데…….”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잠시 침묵했다. 얼마 전, 에반테온 가문 측에서는 다음 대 에반테온 공작을 공표했다.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총회였기에, 결과가 나왔을 때 희비가 교차했다. 황제 쪽에 서 있던 이들은 당혹했고, 황태자 측은 세력 불리기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며칠 전, 에반테온 가문에서는 간소한 계승식이 있었다. 정말로 카르한 에반테온이 공작이 된 것이다. 복도를 걷던 남자들은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도 소공자 정도면 후계자로서 손색이 없지요.”
“작년 황궁 검술 대회에서 우승했다고 들었습니다. 전쟁터에서 공로도 많이 세웠다지요?”
“예전에는 무시무시한 소문이 돌아서 기피했는데……, 요즘은 평판도 좋더군요. 교제하는 사람이 없으면 제 딸이라도…….”
한 남자가 은근슬쩍 욕심내자, 다른 남자가 바로 말을 잘랐다.
“소공자께는 이미 연인이 있으니, 포기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게 누굽니까?”
그의 물음에 대답해준 남자가 혀를 찼다. 어찌 그것도 모르냐는 얼굴로 남자가 대답해주었다.
“블로든 영애입니다.”
카르한에게 딸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던 이가 침묵했다. 이름만 들어도 벌써 승산이 없어 보였다.
블로든은 백작 가문이었지만, 후계자인 헤인리 블로든이 황태자의 비서관이 되면서 실세라는 말이 돌았다. 만약 황태자가 실권을 잡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블로든 쪽에도 크게 힘이 실릴 터였다.
“그런데 에반테온 공자는 요즘 뭐 합니까? 소식이 통 들려오지 않는군요.”
“작위를 계승하지 못했으니 떠난 거 아닙니까? 불법 모임에 연루된 것이 들켜서 평판도 바닥을 쳤으니…… 차라리 수도를 떠나는 쪽이 낫겠지요.”
잡담을 나누던 그들은 어느새 회의장 앞에 도착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들 입을 다문 채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대부분의 자리가 차 있었다.
회의 시간이 다가오자, 귀족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이전 회의 때 황제와 황태자가 싸우는 걸 전부 눈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황제와 황태자가 힘겨루기 하고 있다는 건 공공연하게 드러난 사실이었다.
황태자가 조금씩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황제의 권한이 더 강했다. 그런 이유로 황태자는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그 와중에 중립에 서 있던 에반테온 공작이 사망했고, 황태자와 접선이 있던 카르한 에반테온이 작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눈치 싸움이 시작되었다. 현재 상황을 모르는 아둔한 귀족들을 제외하고, 황제를 따르던 이들이 빠르게 황태자 쪽으로 돌아섰다.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며, 황태자와 헤인리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황태자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귀족들을 스쳐지나,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가볍게 주위를 둘러본 황태자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직 오지 않았나.”
그때, 또다시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등장했다. 순간 회의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가 회의장으로 한 발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목이 쏠렸다.
짙은 어둠이 흐르는 머리카락과 푸른색 눈동자, 그리고 누구라도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체구. 새로운 에반테온 공작의 첫 출사였다.
***
에반테온 가문의 총회가 있는 당일. 출근한 헤인리를 제외하고,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직접 카르한을 배웅해주었다.
그가 탄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일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클리프가 말했다.
“잘 될 거다.”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클리프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일리아와 마찬가지로 불안한 얼굴이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비올레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에 도착한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잠깐 침묵이 돌자, 일리아는 다른 화젯거리를 꺼냈다.
“……그래도 세무 조사가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에요.”
황실에서 보내온 조사원들은 블로든을 끈질기게 괴롭혔지만, 원하는 걸 얻지 못했다. 오히려 블로든이 세금을 더 냈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결국 조사원들은 이전에 떠돌던 헛소문을 바탕 삼아, 블로든 가문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을 취조했다. 혹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았는지 캐물었으나, 전부 고개를 내저었다.
봉급이나 복지는 제국 내에서 최고라 손꼽히는 블로든이었다. 고용인들은 도리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거나, 이상한 걸 묻는다며 화를 냈다. 그렇게 황제가 보낸 조사원들은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황제는 분명 또 다른 방식으로 블로든을 억압하려 들 터였다. 그러기 전에 황태자가 실권을 잡아야 했다.
시간이 지나고, 일찍 퇴근한 헤인리가 집으로 돌아왔다. 총회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이 한 명 더 늘게 된 것이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각자 할 일을 하면서 카르한을 기다렸다.
석양이 세상을 뒤덮어올 즈음, 버릇처럼 창밖을 살피던 일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단숨에 현관까지 뛰어내려온 일리아는 마차에서 내리는 카르한을 불렀다.
“카르한!”
카르한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묻지 않아도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일리아가 달려가자, 카르한이 그녀를 끌어안고 번쩍 들어올렸다.
“수고했어요.”
카르한을 마주 안은 일리아가 속삭였다. 그러자 카르한이 눈꼬리를 휘며 대답했다.
“전부 일리아 덕분입니다.”
카르한은 항상 일리아 덕분이라고 말해왔다. 그때마다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당신 손으로 이룬 거예요.”
카르한은 흙 속에 묻힌 진주였다. 언젠가는 이렇게 빛나게 될 사람이었다. 일리아는 그저 그 시기를 조금 더 앞당겨주었을 뿐이었다.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카르한이 잠시 멈칫했다. 이내 가장 바라던 말을 들은 사람처럼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일리아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카르한은 늘 일리아와 나란히 서게 될 순간만을 바랐다.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관계가 아닌,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으면 했다. 그리고 오늘, 오랫동안 품어온 꿈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간 셈이다.
“소공……,”
뒤늦게 뛰쳐나온 블로든 가문 사람들이 잠시 멈칫했다. 그들의 시선을 느낀 카르한이 품에 안은 일리아를 조심스레 내려주었다. 잔뜩 들떠 있는 일리아와 카르한의 얼굴을 본 비올레가 입을 열었다.
“축하는 다 함께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 즉시 블로든 저택 사람들은 분주해졌다. 급조된 파티였지만, 웬만한 귀족들의 파티보다 호화로웠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카르한은 총회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결국 원로 한 분께서 오시지 못했습니다.”
블레어드 짓인 것 같다고 카르한이 말하자, 일리아의 가족들은 제각기 다른 반응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미친 자식 아니에요!”
일리아는 욕을 하며 화냈고, 비올레는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구부러뜨렸다. 그리고 헤인리는 알고 있는 법 조항을 줄줄 읊으며 처벌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클리프는 주먹을 불끈 쥔 채 발을 굴렀다.
그 모습을 보던 카르한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이럴 때마다 든든한 제 편이 생겼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야기를 이어가던 카르한은 잠시 망설이다가 레베타를 입에 올렸다. 그녀가 먼저 사과해왔지만, 받아주지 않았다는 것. 자신이 작위를 계승하면 수도를 떠나기로 했다는 것까지.
“아마 앞으로 만날 일은 없을 겁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블로든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어떤 심경이었을지 차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클리프가 눈물을 글썽이자, 비올레가 빠르게 냅킨을 건넸다. 잠시 지켜보던 카르한이 쑥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제 가족은…… 여러분이니까요.”
냅킨으로 자연스럽게 눈물을 닦은 클리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소공자. 아니, 이제 각하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냥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주십시오.”
“이미 소공자가 입에 붙었는데, 적응하려면 좀 걸리겠어요.”
비올레가 웃으며 말을 거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늦은 밤까지 부어라 마셔라 하며 축하 파티를 즐겼다. 평소보다 과음한 일리아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테이블에 엎드린 채 잠들어버렸다.
카르한은 잠든 일리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무척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한결같은 시선에 일리아의 가족들은 내심 흐뭇하게 웃었다.
“일리아, 방에서 자야지.”
헤인리가 일리아를 깨우려 하자, 카르한이 말했다.
“제가 침실까지 데려다주겠습니다.”
몸을 일으킨 카르한이 일리아를 안아들었다. 곤히 잠들어버린 일리아는 깨어날 기색이 전혀 없었다. 카르한은 만찬장을 나가기 전에, 자리에 앉아 있는 블로든 가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아까 하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뭔데요?”
비올레가 묻자, 카르한은 제 품에 안긴 일리아를 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조만간 일리아에게 청혼할 생각입니다.”
***
총회가 끝나고 사흘 후, 카르한은 공작위를 승계했다. 따로 식은 치르지 않고 간단한 절차를 밟은 후 전대 공작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다. 더 이상 소공자가 아닌, 에반테온 공작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카르한은 공작령 전체에 공문을 돌리고, 전대 공작이 죽고 나서 밀린 서류를 처리했다. 원로들과 가문의 대소사까지 의논하고 나니, 몸이 열 개여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아직 블레어드의 처분을 확실히 결정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블레어드를 정식으로 기소하려면 그의 죄를 낱낱이 알려야 했다.
분명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터였다. 원로들은 공작가의 위신이 떨어질 것을 염려해, 가문 내에서 처벌하자고 부탁했다. 그들의 말을 따라 카르한은 블레어드의 처분을 잠시 보류해두었다. 겉보기엔 원로들의 부탁을 들어준 것으로 보였지만, 속내는 달랐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블레어드 에반테온의 신변을 넘겨주십시오.
이제야 엘리오드 백작과의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그리고 오늘, 카르한은 첫 출사를 하게 되었다. 황궁에 도착한 카르한은 조용한 복도를 걸어 회의장으로 향했다. 버릇처럼 일찍 도착하려 했으나, 헤인리는 최대한 정각에 맞춰서 오라고 조언해주었다.
회의장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멈춰 선 카르한은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 긴장해서 그런지 손이 차가웠다. 첫 출사 때문에 긴장한 탓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대한 이유 때문이었다.
-황태자 전하를 지지해주십시오.
시작은 헤인리의 부탁이었다. 그리고 황태자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소공자에게 제국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과거였다면 그럴 수 없다고 회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카르한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오늘이야 말로 제국의 운명을 바꿀 때가 온 것일지도 몰랐다.
회의장 앞에 서 있던 시종이 굳게 닫힌 문을 열어주었다. 카르한이 안으로 들어가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빈자리에 앉고 나니 시선이 따가웠다. 관심과 호의, 호기심 등이 섞인 눈빛이었다.
카르한이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제가 등장했다. 신경질 가득한 얼굴은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황제가 카르한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결국 그렇게 됐나.”
혼잣말에 가까웠지만, 모두에게 들렸다. 여기서 황제가 대놓고 블레어드를 밀어주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황제는 마지못해 인사를 건넸다.
“에반테온 공작. 진심으로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지.”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오늘의 의제가 하나씩 올라왔다.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은 그것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고 해결책을 내놓았다. 백작 이하의 귀족들이 의견을 말하면 발언권 강한 귀족들이 결론을 내거나 채택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최종 결정권은 황제에게 있었다.
카르한은 처음 국무 회의에 참석했지만, 중요한 발언을 이어가며 영향력을 키워갔다.
“올해 눈이 많이 내렸으니, 마을마다 구조금을 재측정해야 할 듯싶습니다. 제가 예상하기에 비용은…….”
“말씀하신 병력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차라리 봄이 오면 물자를 보내는 식으로 왕국 측에 서신을 보내는 것은 어떻습니까. 병력이 부족하다면 물자도 넉넉하지 않을 테니, 충분히 고마워할 겁니다.”
군사와 세율, 외교문제까지 섭렵하자 귀족들은 입을 벌렸다. 카르한이 공작이 되었다지만, 아직도 속으로 그를 무시하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풋내기 공작에, 검술 말고는 특출한 점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모습만 보면 전대 공작보다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이런저런 핑계로 퇴짜를 놓던 황제도 결국엔 카르한의 제안이 제국에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깨닫고,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가 반쯤 진행되었을 때, 황제가 새 안건을 꺼냈다.
“다들 최근 들어 금 가격이 폭등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요.”
귀족들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한꺼번에 여러 광산에서 금맥이 바닥나다니, 수상쩍지 않소.”
“…….”
“폭리를 취하는 것은 아닌지 철저하게 조사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광산을 수색하겠다는 황제의 말에 황태자가 바로 치고 들어왔다.
“지나친 간섭입니다. 이미 블로든을 상대로 세무 조사까지 하지 않으셨습니까.”
“블로든만 조사하겠다는 게 아니다.”
공평하게 모든 광산을 수색하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블로든을 겨냥한 것이었다.
“안 됩니다. 그건…….”
“에반테온 공작의 생각은 어떤가.”
황제는 황태자의 말을 잘라내고, 카르한에게 질문했다. 덤덤히 황제를 응시하던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과욕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제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황제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카르한을 노려보았다.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이어졌다. 덤덤하던 카르한의 표정이 점점 가라앉았다. 서늘한 시선에 황제는 움찔하며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카르한에게 말려든 것이 못내 분한지, 황제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평소에 제 비위를 잘 맞춰주던 백작에게 물었다.
“광산을 수색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백작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평소 같았으면 황제의 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백작은 평소와 달리 대답을 망설였다. 그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저도……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백작마저 부정적인 답을 내놓자, 황제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졌다. 황제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 채 시선을 피했다. 결국 원하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황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잠깐 쉬었다 하도록 하지.”
황제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자, 순식간에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누구도 황제를 따라 나가지 않았다. 황제의 최측근들마저도 자리에 붙어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은 황제가 아닌, 카르한과 황태자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황태자의 뒤편에 서 있던 헤인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다들 선택하십시오.”
귀족들은 선뜻 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오늘 카르한의 출사를 통해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귀족들마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이라는 것을.